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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지혜서의 말씀 3,1-9>
1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2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3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4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5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6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7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
8 그들은 민족들을 통치하고 백성들을 지배할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9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 제2독서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 5,17-21>
형제 여러분,
17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
18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20 율법이 들어와 범죄가 많아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21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 복음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1,25-30>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위령의 날>
한 해도 기울어 가고,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오늘 우리는 먼저 세상을 떠난 부모, 형제, 친지들과 은인들, 지인들의 영혼들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어둡고 시린 길 위에 떠밀려 넘어진 이태원 거리의 어린 영혼들을 기억합니다.
거부할 수 없는 시간의 손길이 계절의 등을 떠밀어, 이제는 가을도 끝자락에 떠밀려 왔습니다.
기울어져 가는 가을의 어깨 너머로 흩날리는 낙엽들이 이리저리 달을 따라 흐르는 밀물과 썰물처럼 바람을 따라 밀려다니고, 넘어지고 부서진 날들의 잎사귀들이 바닥에 온몸을 부벼대고 바스러지면서 침묵의 강물로 흘러듭니다.
스위스의 작가 막스 피카르트는 “침묵 속에서 일년 사계절은 변해간다. 봄은 겨울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부터 온다. 겨울도 그리고 여름도 가을도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가을은 결실의 풍요로움과 단풍의 아름다움을 뒤로하고 침묵의 신비 안으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침묵은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침묵은 죽음임과 동시에 잉태요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죽음은 생명의 탄생처럼 신비롭습니다.
아니, 죽음이 있기에 인생은 신비롭습니다.
이토록 죽음은 인생의 신비를 알려줍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죽음이 신비한 것은 죽음이 한 생을 사라지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생명의 신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곧 죽음을 통해 생명이, 생명을 통해서 죽음이 밝혀지듯, 이 세상의 제한된 생명은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밝혀줍니다.
사실 우리는 ‘영원’을 배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본래 영원불멸한 존재인 우리의 영혼이 영원하면서도 영원한 줄을 모르기에 이 세상의 한계와 제한을 통하여 영원한 존재임을 배우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악을 보면서야 선이 무엇인지를 배우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죽을 몸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의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2코린 4,10)
오늘도 우리는 죽음을 몸에 달고 다닙니다.
하루하루 죽으면서 삶을 살아갑니다.
새싹처럼, 내 몸 안에서 단풍을, 곧 죽음을 성숙시켜갑니다.
아니, 영원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마지막 교부 철학자인 보에티우스(470~524)는 말합니다.
"흘러가버리는 지금이 시간을 만들고, 머물러 있는 지금이 영원을 만든다."
주님!
자비롭게 하소서.
당신의 자비를 입었으니.
제 마음이 깨끗해지게 하소서.
당신 손길로 매만지셨으니.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당신 영으로 이끄셨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당신이 동행하시니.
저를 다스리소서.
저는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오니.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내리사랑을 넘어 치사랑을>
아시다시피 위령의 날에는 세 차례 미사를 드립니다.
오늘 저는 두 번째 미사를 가지고 나눔을 하고자 합니다.
핼로윈 참사의 희생자와 유가족 모두에게 주님께서 안식을 주십사는, 영원한 안식을 주십사는 마음이기에 두 번째 미사의 복음을 택한 겁니다.
지난 월요일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들에게 줘야 할 위로는 우리 인간의 위로가 아니라 주님의 위로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주님께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 진 이들은 당신께 오라고 초대하신 대로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이것이 위령의 날과 위령의 달에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직접 건네는 위로도 있어야겠지만, 우리의 위로는 한계가 있기에, 특히 이 세상을 떠난 분들에게는 우리의 위로가 직접 전달되지 않고, 그들의 영혼은 오직 하느님 손에 있기에 그들의 영혼을 하느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 저는 요즘 추세를 걱정스러워합니다.
위령미사를 드리는 것이 점점 줄어드는 추세 말입니다.
제가 사제로 서품된 30여 년 전만 해도 생미사보다 연미사가 많았는데, 요즘은 생미사가 훨씬 더 많고, 생미사도 자녀들을 위한 미사가 대부분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대가족이 핵가족이 되었기 때문이고, 그런 가운데서 효도는 구닥다리로 치부되고, 치사랑은 실종되고 내리사랑만 남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그 결과로 부모의 사랑을 받고는 입 싹 닦고 되돌릴 줄 모르고, 손주는 봐주면서도 부모는 노인 요양원에 보내기도 합니다.
똑같은 현상이 우리 신앙에서도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자녀를 위한 생미사는 자주 바치면서 부모를 위한 연미사를 자주 봉헌하지 않는 것은, 부모를 요양원에 맡기고 자주 찾아가지 않는 것처럼, 부모를 하느님께 맡기고 돌아가신 날 한 번만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치사랑은 없고 내리사랑만 있는 것의 문제는 하느님 사랑에도 해당됩니다.
부모를 향하지 않는 사랑은 하느님께도 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위를 향하지 않고 아래로만 향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받기만 하고 하느님을 사랑할 줄은 모릅니다.
이것은 기우제를 드려 하늘이 비를 내려줬는데 감사제를 올리지 않는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고는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는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치사랑은 없고 내리사랑만 있는 것은 사랑의 영원한 미성숙입니다.
나의 사랑이 성숙해지면 이제 받기만 하지 않고 사랑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어린애처럼 그저 받기만 하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위령의 날과 위령의 달에 우리의 성숙한 사랑과 성숙한 신앙은 무거운 짐 지고 고생하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는 주님의 사랑에 산이와 죽은 이의 영혼을 맡기면서도, 우리가 해야 할 마땅한 사랑, 곧 영혼들을 위해서는 기도와 미사를 봉헌하는 사랑을, 하느님께는 감사와 찬미의 제사를 봉헌하는 사랑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죽음을 두려워 마십시오>
위령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이들이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언젠가 맞이할 죽음에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이며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믿고 오늘을 이미 영원으로 알고 최선에 최선을 다해 살면 마침내 주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의 ‘사주’를 믿었습니다.
청년시절에 한 번 위험한 고비를 넘길 것이라는 것과 얼굴이 곱상한 여인과 결혼할 것이라는 것도 용케 들어맞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주에 의하면 그한테는 삼십 대에 재물의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믿고 어디 가서든 큰 소리를 쳤습니다.
‘두고 봐라. 내 나이 마흔을 넘기 전에 너희와 앉은 자리가 달라질 것이다.’
서른 고개를 막 넘었을 때 일자리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어떤 사주를 지닌 사람인데 남의 밑에 가서 일을 한단 말이냐’하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몇 년 후에는 친구가 동업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는 웃으며 거절했습니다.
‘이 사람아, 내가 그런 시시한 장사를 할 사람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또 몇 년이 흘렀습니다.
해외로 갈 기회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에게는 돈복이 터지게 되어 있다구.’ 하면서 밑이 터지게 가난하게 살다가 그만 일찍 죽게 되었답니다.
그는 저승사자에게 항의했답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나한테는 재복이 예정돼 있었잖습니까?’
그러자 저승사자가 한심스럽다는 얼굴로 대꾸했습니다.
‘우리는 기회만을 제공할 뿐이다.
직장 운 한번, 장사 운 한번, 무역 운 한번, 이 세 번의 기회를 다 주었었네.’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주님의 뜻대로 살면서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할 기회가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욕심을 부리거나 요행을 바란다면 그 기회는 그저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태 11,28)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편한 쉼이 아니라 자기 힘에 알맞으면서도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쉼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힘들고 어려운 모든 이에게 그 쉼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 하시는 예수님의 위로를 받는 것은 하루의 생활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멍에는 틀림없이 우리에게 위로와 기쁨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성 엘리지오는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오히려 주님이 정하신 때에 죽기를 원한다. 이는 죽음으로써만이 하늘에 계신 그리운 아버지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당당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순간순간의 기회들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편히 쉬게 하신다’고 약속하심이 우리에게는 큰 위로요, 희망입니다.
“죽음은 고통스러운 길이지만 보이지 않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길입니다.”
(성 안눈시아따)
우리는 부활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죽음이 없이 부활은 있을 수 없으니 죽음은 부활의 문을 여는 출발점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결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의 뜻대로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찾아 최선을 다할 수 있음을 기뻐하십시오.
오늘은 죽은 이를 기억하는 날이면서도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사람들은 언짢은 죽음을 두려워하나 언짢은 삶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는 성 아우구스띠노의 말씀이 새롭습니다.
오늘 여기서부터 하늘의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Hodie mihi, cras tibi)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오늘의 주어진 시간에 충실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어느 인디언의 기도를 옮겨 봅니다.
<해 지는 곳과 해 뜨는 곳>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고, 잠들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리저리 부는 바람이며
금강석처럼 반짝이는 눈이며
무르익은 곡식을 비추는 햇빛이며
촉촉이 내리는 가을비입니다.
당신이 숨죽인 듯
고요한 아침에 깨면
나는 원을 그리며 포르르
날아오르는 말 없는 새이며
밤에 부드럽게 빛나는 별입니다.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습니다.
죽지 않았으니까요.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안식을 얻게 하소서.
아멘.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연옥의 존재 이유: 우리 안에 다 자라지 못한 십자가가 있다>
영화 <사일런스>(2017)는 주인공 로드리게스 신부가 일본에 선교하러 갔던 스승 페레이라 신부의 배교 소식을 듣고 그럴 리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자신도 일본으로 들어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마카오에서 그들을 안내해 줄 기치치로라는 일본인을 만납니다.
그도 천주교 신자였지만, 가족이 다 화형당하는 것을 보고는 배교하고 마카오로 피신해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죄책감 때문이었는지 로드리게스 신부 일행을 안내합니다.
그런데 배로 일본에 도착하자 그는 도망쳐버립니다.
다시 자신이 없어진 것입니다.
다행히도 로드리게스 신부 일행은 천주교 신자들을 만나 보호를 받게 되고 그들에게 미사와 고해성사를 해 줍니다.
다른 마을에 갔을 때 기치치로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는 천주교를 믿는 마을에서 종교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천국에 가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믿음이 육체를 이기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순사들이 와서 로드리게스 신부는 가까스로 피했지만 기치치로는 순교의 고통을 피하고자 예수님 십자가상에 침을 뱉고 후미에(예수님 모습이 새겨진 동판)를 발로 밟습니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피신을 하다가 산에서 굴러 떨어집니다.
이때 기치치로가 그를 도와줍니다.
그리고 배교를 한 것에 대해 고해성사를 달라고 합니다.
그의 마음은 진심이 묻어납니다.
하루에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하는 사제는 정말 꼴도 보기 싫은 기치치로에게 또 고해성사를 줍니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모릅니다.
기치치로가 바로 자기 모습이라는 것을.
다만 자신은 절대 배교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은 가지고 있습니다.
기치치로는 다시 약해집니다.
로드리게스 신부에게 많은 현상금이 걸렸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는 돈 때문에 마치 유다 이스가리옷처럼 로드리게스 신부를 팔아넘깁니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감옥에 갇힙니다.
그리고 배교를 강요받습니다.
한 사제의 배교가 많은 신자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치치로는 감옥까지 와서 또 고해성사를 달라고 합니다.
만약 믿음이 없었다면 이렇게 꾸준히 고해성사를 달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이 있기는 한데 작은 것입니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자신 때문에 무참히 순교의 고통을 겪는 신자들을 더는 지켜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도 결국엔 예수님의 얼굴을 발로 밟습니다.
그리고 결혼도 하고 공직자로 선교사 색출을 도와주며 평생을 삽니다.
그가 죽어 화장할 때 그의 손에는 아주 작은 십자가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믿음을 버리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마치 기치치로처럼.
오늘은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위령성월의 본격적인 시작인 위령의 날입니다.
오직 가톨릭 교회만 연옥이란 교리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연옥이 있어야만 하고 그 고통이 상상을 초월하며 우리가 기도하면 그 고통이 감해진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들을 위해 기도와 희생을 해 주는 것이 사랑임을 알게 됩니다.
저는 연옥에 가지 않기 위해 비르짓다 성녀를 통해 주시는 기도문 ‘일곱 번의 주님의 기도’를 오랜 시간 바쳐오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내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셔야만 했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내용입니다.
결국 신앙의 완성은 내 안에 떨어진 믿음의 씨앗을 얼마만큼 키우느냐에 있습니다.
그 믿음의 씨앗은 마치 겨자씨처럼 작은 십자가로 시작하지만, 결국엔 나를 완전히 매달아 죽일 정도로 성장합니다.
그렇게 커졌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로드리게스 신부나 기치치로처럼 작은 믿음으로 작은 십자가만 지닌 채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손에 들어올 작은 십자가의 크기로는 나를 완전히 십자가에 매달 수 없습니다.
그러면 지옥에 가야 할까요?
하지만 가리옷 유다처럼 완전히 믿음을 저버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십자가를 키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에게는 그 시간이 필요합니다.
만약 작은 십자가만 가지고 있는 신자를 하느님 나라에 들여보내면 어떨까요?
그는 죄를 지을 것이고 다른 이는 피해를 당할 것입니다.
다시 지옥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송봉모 신부님의 강의에 이런 예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 자신을 성추행한 아버지를 신앙을 가지고 용서하였다고 합니다.
딸 아이를 낳고 큰맘 먹고 아버지를 집에 초대하였는데 그 아버지가 자신의 딸도 추행했다는 것입니다.
딸의 상처를 아는 아버지는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결심도 육체의 욕망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딸은 아버지가 뉘우친 것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아버지 안에는 자신을 완전히 십자가에 매달 커다란 십자가가 만들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작은 믿음만을 지닌 사람을 천국에 보내면 이러한 일이 벌어집니다.
딸은 아버지가 아버지 자신을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은 모습이 보일 때까지 조금 더 고통을 주어야만 했습니다.
구약의 요셉을 생각해봅시다.
그는 형들에 의해 팔려 이집트로 내려갑니다.
이집트에서 갖은 고생을 하고 재상이 됩니다.
이제 형들이 요셉에게 무릎 꿇고 용서를 청해야 살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형들을 계속 괴롭힙니다.
몇 번이나 그렇게 합니다.
결국 유다가 요셉이 잡아놓겠다던 베냐민을 위해 자신이 대신 갇히겠다고 말했을 때 그들을 용서해 줍니다.
남을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질 수 있는 모습을 보일 때까지 용서를 보류하는 것입니다.
이 고통을 통해 그들에게 자신들 안에 자라나는 십자가를 완전하게 성장시킬 시간을 준 것입니다.
이것은 못된 장난이 아니라 자비입니다.
연옥은 이런 자비의 고통을 당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알고 기도하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굳이 그러한 고통으로 나아가지 않고 수련의 시간을 충실히 받게 됩니다.
연옥이 우리를 더 빠르게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지옥의 존재는 우리에게 믿음만을 요구하지만, 연옥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우리에게 그 믿음의 성장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삶이 쳇바퀴 도는 것이 아닌 성장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연옥의 고통을 당하는 이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이 지상에서의 상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내 죽음을 통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여줍시다>
위령의 날을 맞아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개인적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죽음에 대해서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지만, 솔직히 아직 저도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죽음이 시시각각으로 제게 다가온다고 생각하니, 떨리기도 하고 두렵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게 최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지평을 열어주신 분이 계시는데, 헨리 나웬 신부님이십니다.
신부님께서는 자신이 꿈꾸고 희망했던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친밀함의 대상으로서의 죽음
마음을 활짝 열고 받아들이는 죽음
세심하게 준비하는 죽음
반가운 친구 같은 죽음
상실이 아니라 성취로서의 죽음
가장 인간다운 행위로서의 죽음"
헨리 나웬 신부님께서 가르침을 이어갑니다.
"죽는다는 것은 나를 붙잡아주실 존재, 아버지에게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온전히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 일생 전체를 아버지께 송두리째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결국 내 손을 아버지 손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죽음이 다가올 때,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을 향해서 걸어갈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곧 당신이 죽음을 향해서 점프할 때, 저 건너편에는 하느님께서 이미 당신이 도착할 그 자리에 딱 지키고 서 계실 것입니다.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손과 팔을 펼치기만 하십시오.
반드시 그분께서 당신을 꼭 붙들어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믿으십시오."
헨리 나웬 신부님의 또 다른 한 말씀이 너무나 은혜롭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죽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입니다.
내 죽음을 통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은 가장 큰 증거요 사랑의 행위가 될 것입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섬광처럼 우리에게 다가올 죽음을 보다 잘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가장 좋은 준비는?
꾸준한 기도와 함께 죽음에 대한 부단한 연구, 죽음에 대한 지속적인 의미 부여 그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연옥>
누군가는 분명히 죽은 다음에 천국으로 직행할 것입니다.
반대로, 죽은 다음에 곧바로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천국으로 직행하기에는 자격이 좀 부족하고, 그렇다고 지옥으로 직행할 정도로 악한 것도 아니어서,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곳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연옥입니다.
우리는 연옥이 있다고 믿지만, 사실 우리에게는 꼭 있어야만 하는 곳입니다.
회개가 부족하거나 보속이 부족한 사람들은 연옥에 가서 회개와 보속을 완전히 마친 다음에 천국으로 옮겨갈 것입니다.
따라서 연옥은 ‘하느님의 자비의 장소’이고, ‘은총의 장소’입니다.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들이 많은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버리지 않으시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기회를 주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연옥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에 있는 장소가 아니라 천국의 바로 옆에 있는 부속실, 또는 대기실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옥은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천국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부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스스로 지옥을 선택해서 그쪽으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지옥에 간 다음에 후회하고 절망하겠지만, 스스로 선택한 일이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습니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고집을 자책할 뿐입니다.
연옥이 존재한다는 믿음의 근거는 마카베오기 하권에 있습니다.
“그가 전사자들이 부활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면,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쓸모없고 어리석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건하게 잠든 이들에게는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고 내다보았으니, 참으로 거룩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속죄를 한 것은 그들이 죄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었다.”
(2마카 12,44-45)
예수님의 다음 말씀도 연옥 존재의 근거로 삼을 수 있습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마태 5,25-26; 루카 12,58-59)
여기서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은 “보속을 완전히 마치기 전에는”입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마지막 한 닢까지 갚으면, 즉 보속을 완전히 마치면 그 감옥에서(연옥에서) 나오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 감옥에서 나오면 천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요한 사도의 편지에도 연옥을 암시하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이는 죽을죄가 아닌 죄를 짓는 이들에게 해당됩니다.
죽을죄가 있는데, 그러한 죄 때문에 간구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불의는 죄입니다.
그러나 죽을죄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
(1요한 5,16-17)
이 말은 살아 있는 사람들과 이미 죽은 사람들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죽을죄’는 예수님께서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고 선언하신 ‘성령을 모독하는 죄’로서(마르 3,29)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용서와 구원을 받기를 거부하는 죄로 해석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스스로 거부해서 자기 발로 지옥으로 간 사람들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 속에서 죽었더라도 조금이라도 회개했거나 회개하려고 했다면, 연옥이라는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연옥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곳이라고 합니다.
벌을 받는 곳이 아니라 보속을 하는 곳인데도, 그 보속이 그렇게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들, 실수들, 부족했던 일들에 관한 기억들이 모두 세세하게 되살아나고, 그런 기억에서 비롯된 부끄러움과 뉘우침으로 몸부림치게 되고, 자신이 해를 끼친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과 용서를 구하는 마음, 그리고 빤히 보이는 천국의 행복 속으로 얼른 들어가고 싶은 갈망 등 때문에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즉 “지금 빨리 회개하여라.” 라고 강조하신 것은 연옥의 고통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모두 ‘연옥 영혼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그 영혼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서, 또 보속과 보속 기간을 줄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연옥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고, 나 자신의 공덕을 쌓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옥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연옥은 신앙생활의 목적지가 아닙니다.
천국만이 우리의 목적지입니다.
그렇지만 누구라도, 어쩌다가 발을 헛디뎌서 연옥으로 미끄러져 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회개하고 지금 보속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어떻게 살아야 하나? - “슬기롭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며,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
(요한 11,25-26)
오늘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어제 모든 성인 대축일에 이어 11월 위령성월 둘째 날 위령의 날 배치가 참 고맙습니다.
올해는 며칠 전 이태원 참사로 세상을 떠난 156명의 희생자들로 인해 더욱 슬프고 안타까운 위령의 날이 되었습니다.
8년 전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로 312명이 희생됐던 날이 사순시가 성주간 수요일이었는데, 마침 가톨릭의 성주간의 전례시기 중이라 잊혀지지 않는데, 이번 이태원 참사는 위령성월을 앞둔 참사라 또 길이 잊지 못할 아픈 추억이 되겠습니다.
새삼 마음 아파하는 희생자들의 모든 어머니들과 함께 아파하는 어머니인 가톨릭 교회는 종파와 인종, 국적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의 보편적 어머니 교회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물음은 ‘어떻게 죽어야 하나?’ 물음과 직결됩니다.
한마디로 하루하루 깨어 ‘슬기롭게’ 사는 것이며, 슬기로운 삶의 위한 네 원리를 소개합니다.
첫째, 삶은 끝이 있습니다.
엄연한 삶의 진리입니다.
삶의 끝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끝은 시작입니다.
겨울후 부활의 봄이듯 죽음 이후에는 부활의 새로운 삶입니다.
아니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들은 이미 살아서 영원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 그대로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삶과 죽음을 넘어 이미 영원한 파스카의 부활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부활신앙이 참 영원한 희망입니다.
위령감사송도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둘째, 삶의 중심은 주님이십니다.
삶의 중심을 잃어, 삶의 중심이 없어 혼란이요 방황이요 뿌리없이 표류입니다.
주님은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삶의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삶의 중심인 주님께 깊이 믿음의 뿌리내릴수록 내적평화와 안정이요, 믿음의 뿌리가 얕고 빈약할수록 점증하는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이래서 삶의 중심인 주님이 고마워 저절로 나오는 화답송 시편의 고백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이어지는 제 행복기도 고백도 주님이 우리의 모두임을 고백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답고 놀라운 하루이옵니다.”
셋째, 삶은 양이 아니라 질입니다.
‘많이’ 햇수의 양量이 아니라 ‘참으로’ 사는 햇수의 질質입니다.
장수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찬미하며 사랑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며 사는 삶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지혜서 말씀이 적절한 도움이 됩니다.
“영예로운 나이는 장수로 결정되지 않고, 살아온 햇수로 셈해지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예지가 곧 백발이고, 티없는 삶이 곧 원숙한 노년이다.
짧은 생애 동안 완성에 다다른 그는 오랜 세월을 채운 셈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께 선택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들을 돌보신다.”
넷째, 깨어 준비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오늘이 내일입니다.
하루하루 깨어 준비하며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이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복음의 슬기로운 처녀들은 이렇게 깨어 준비하며 살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리하여 영혼의 기름등잔에는 신망애信望愛의 기름이 늘 채워져 있었지만, 어리석은 처녀들의 영혼 등잔들에는 기름이 얼마 남아있지 않았었고, 게으르고 무책임한 어리석은 처녀들은 확인도 안했습니다.
이건 이태원 참사처럼, 천재天災가 아니라 순전히 인재人災입니다.
영혼등잔의 신망애의 기름은 각자 평생 하루하루 마련해야 하는 것이지, 일순간에 마련되는 것도 아니고, 빌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깨어 준비하며 등불은 환히 켜들고 있다가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입장했지만 어리석은 처녀들은 입장이 좌절되었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나중에 기름을 채워 왔지만 문은 닫혔고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닫힌 문을 두드립니다만 주인님의 대답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요지부동 단호합니다.
이어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경고 말씀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회개하라, 보속하라, 대속하라, 찬미하라, 사랑하라, 섬기라, 기뻐하라, 감사하라’고 연장되는 날들입니다.
죽어서는 회개도 보속도 대속도 찬미도 사랑도 기쁨도 감사도 없습니다.
죽음의 문이 닫히면 아무리 후회해도 늦습니다.
평상시 삶 전체가 죽음 준비입니다.
이래야 영혼의 등불 환히 켜들고 있다가 주님과 함께 천국잔치에 입장합니다.
날마다의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깨어 준비하며 주님 오실 날을 대비하며 살게 합니다.
끝으로 제 좌우명 애송 고백기도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주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한평생 주님을 찬양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
(시편145,1)
+ 주님, 세상 떠난 이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들에게 비추소서.”
+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위령의 날입니다.
오늘은 세상을 떠난 이들을 특별히 기억하고 기도하는 날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죽음과 죽은 이를 생각하는 자체는 실상 산 이들에게 더욱 큰 유익이 됩니다.
살아온 날을 돌이켜 보고 살 날을 의탁하며 겸손되이 자기의 죽음을 준비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지요.
교회에는 오늘 세 대의 위령 미사를 봉헌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올해는 둘째 미사의 묵상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 중 누군들 죽은 뒤의 일을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과 성전이 전하고 교회가 가르치는 바를 믿고 따르며 희망할 뿐이지요.
예수님께서 둘째 미사의 말씀을 통해 그런 우리에게 힘을 북돋워 주고 계십니다.
"철부지들"
(마태 11,25).
우리는 모두 철부지들입니다.
아무리 세상사에 밝고 능하다 해도, 유유하게 흘러가는 거대하고 신비로운 하느님 섭리 앞에서 한 치 앞도 모르는 미물에 불과하지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자기 생애를 제 뜻대로 끌어왔노라고 으스댄 사람이 있었던가요...
어떤 종교를 가졌건 우리는 그저 선사받은 생명을 힘껏 살아내며 인간에게 허락된 만큼 계획하고 실천해 소명을 채워갈 뿐입니다.
우리가 "철부지"라는 인식이 자신을 평안하게 만듭니까, 아니면 불만스럽게 만듭니까?
아직도 모든 걸 제 힘으로, 제 뜻대로 하고야 말겠다는 투지가 넘친다면 무능하고 무지해 보이는 철부지 신세는 외면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철부지는 게으르고 무책임하게 제멋대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철부지"야말로 예수님께서 특별히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마태 11,27)입니다.
널찍하고 든든한 아버지의 품에 폭 감싸여 안긴 아기의 모습에서 "철부지"를 봅니다.
아기는 여기 말고 다른 안식처를 알지 못합니다.
절대 신뢰, 절대 믿음이 철부지의 특징입니다.
아버지는 그런 아기의 기대를 결코 외면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철부지"의 절대 신뢰 관계를 제1독서에서 지혜서 저자가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살 것이다."
(지혜 3,9)
주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의 대가가 진리와 그분 현존이라니 우리는 앞다투어 "철부지"가 되기를 바라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마태 11,29)
"철부지"는 주님의 멍에를 메기 위해 자기 것을 벗어버립니다.
예수님이 소위 끝발이 좋고 투자 가치가 있어 멍에를 바꿔 타는 게 아니라 그분이 온유하고 겸손해서 그렇게 합니다.
"철부지"는 더 이상 예수님에게서 현세 복을 바라지 않습니다.
이 거칠고 약삭빠른 세상에서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건 득보다 실이 더 많을 수 있을 텐데 개의치 않습니다.
그는 제 존재 속에서 작동하는 세상 계산기를 꺼버리고, 오직 영혼의 온도계만 켜 놓았습니다.
사랑의 열 센서가 울리는 대로 마음이 뜨겁게 향하는 분만 감지하면 그만이니까요.
"주님은 작은 이들을 지키시는 분, 가엾은 나를 구해 주셨네."
(화답송)
"철부지"는 자신의 작음을 부끄러워하거나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피조물의 작음은 하느님의 큰 자비를 부릅니다.
세상에서는 열등하고 미천하게 취급되는 작음이 하느님께는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해 지켜주고픈 사랑입니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지혜 3,9).
삶이라는 광야를 통과하면서 인간적 노력을 멈추어서는 안되지만, 결국 우리를 끌어가는 건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입니다.
이 은총과 자비에 기대어 충실하고 겸손히 삶을 꾸려간 "철부지"들은, 우리가 죽음이라 부르는, 새 생명으로 건너가는 순간이 오히려 선물이 될 것입니다.
그는 세상에서 누린 단순하고 순수한 사랑의 삶을 하느님 나라에서 계속 이어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보다 더 기쁘고 행복하게 하느님의 신비 속을 거닐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 힘껏 "철부지"가 되어봅시다.
"철부지"의 대명사인 예수님처럼, 모든 걸 맡기고 주님만 바라며 사는 길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하느님 나라에 맞갖도록 더 "철부지"가 되기 위해 연옥에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는 형제자매들을 기억하며 기도합시다.
하느님 곁에 머무르며 사랑을 누리는, 우리가 성인성녀라 부르는 모든 "철부지"들께도 전구를 청하며, 이 우주적이고 신비적인 사랑의 협력을 함께 완성해 갑시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1997년 폴란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강물이 범람하면서 도시가 물에 잠기는 ‘홍수’가 예측되었습니다.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녹으면서 일어난 일입니다.
전문가들은 피해를 줄이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강에 쌓아 놓은 둑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범람하는 물의 피해를 줄이고 도시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둑 근처에 살던 주민들이 이 사실을 방송을 통해서 미리 알았습니다.
책임을 모면하려는 장관이 언론에 사실을 흘렸기 때문입니다.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어버릴 수 없다며 둑으로 오는 공무원들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혼신을 다해서 둑 위에 모래주머니를 높이 쌓았습니다.
결국 둑을 여는 일은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도시는 물에 잠기는 커다란 피해를 입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둑에 쌓았던 모래주머니로는 범람하는 물을 막을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둑을 열지 않았지만 둑은 범람하는 물에 의해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만약에 전문가의 말을 듣고 둑을 열었다면 주민들의 삶의 터전은 물에 잠겼겠지만 도시의 피해는 줄일 수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정부의 약속대로 피해보상을 받고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결정이 최선인 것 같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먼저 성찰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성서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명한 ‘바벨탑’이야기입니다.
바벨탑은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욕망의 탑이었습니다.
바벨탑은 남보다 높아지려는 교만의 탑이었습니다.
바벨탑은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하려는 우상의 탑이었습니다.
바벨탑은 이웃의 희생으로 쌓아올리는 욕심의 탑이었습니다.
바벨탑은 자연과 생태계를 파괴하는 어리석음의 탑이었습니다.
줄을 세워야 하는 바벨탑은 앞에 있는 사람은 끌어내리고, 뒤에 있는 사람은 밀쳐버리는 경쟁의 탑이었습니다.
그런 바벨탑으로는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바벨탑을 무너트리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탑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고 가셨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순명의 탑입니다.
십자가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기꺼이 섬기는 겸손의 탑입니다.
십자가는 강도당한 사람을 기꺼이 치료해주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탑입니다.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연대와 화합의 탑입니다.
십자가는 모세가 구리뱀을 세워서 뱀에 물린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듯이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부활의 탑입니다.
서산대사는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답설야중거 불수호난행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이라는 시를 남겨주었습니다.
“눈 덮인 길을 걸어갈 때면 발걸음을 신중히 하여라. 오늘 내가 가는 길은 뒷사람에게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오늘 위령의 날을 지내면서 세상을 떠난 모든 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어떤 분들은 욕망의 바벨탑을 쌓으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부활의 십자가를 지고서 살았을 것입니다.
욕망의 바벨탑에 묻혀서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하느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한 영혼들의 전구를 구하며 우리들 또한 부활의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2022년 위령의 달입니다.
지나온 나의 발걸음이 욕망의 바벨탑을 쌓으려는 것이었다면 내려와서 부활의 십자가를 지고 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나온 나의 발걸음이 뒷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향한 희망의 발걸음이 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위령의 날을 지내면서 ‘위령 감사송’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백곰 효과’라고 있습니다.
사고 억제의 역설적 효과라고도 불리는 이 심리학 현상은 하버드대학교의 사회심리학자 대니얼 웨그너가 진행한 실험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는 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눠 첫 번째 그룹에는 백곰을 생각하라고 하고, 두 번째 그룹에는 백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다음 백곰이 떠오를 때마다 종을 치라고 했습니다.
어느 그룹에서 종을 더 많이 쳤을까요?
백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지시했던 두 번째 그룹이었습니다.
이처럼 불편한 느낌이나 생각은 더 많이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뇌는 느낌이나 생각을 잘 지우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늘 불안해하고 걱정 속에서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이런 모습에서 벗어날 방법은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불편한 느낌이나 생각의 강도가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어렵고 힘들다고 생각되는 분이 “이런 생각하지 말아야 해.”라면서 계속해서 부정한다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요?
그 어렵고 힘든 상황을 피하기보다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그 강도가 약해지며 현명하게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죽음도 그렇습니다.
죽음도 ‘생각하지 말아야 해.’라면 곧바로 생각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이 죽음을 오히려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로 죽은 모든 이, 그들 가운데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입니다.
이렇게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나신 분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죽음’을 떠올리고 또 두려워합니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피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죽음을 경험하고 싶지 않은 생각입니다.
주님께서는 편안한 안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특히 십자가 죽음을 직접 몸으로 받아들이셨지요.
그러나 부활을 통해 죽음을 이긴 유일한 분이 되셨습니다.
이는 세상에서 가장 힘센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 힘센 분이 하늘 나라의 주인으로 계십니다.
얼마나 큰 힘이 될 수 있습니까?
사랑 자체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커다란 힘을 주시는 말씀을 이렇게 해주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태 11,28)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큰 힘과 위로를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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