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아래층으로 내려 갔을 때는 그가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치고 다시 카달록을 보고 있었
다.
“일찍 일어 나셨네요.”
“예. 커피 드세요?”
하더니 내 잔에 커피를 부어 준다.
“살 것 다 골랐어요?”
“좋은 기계가 너무 많으네요. 이것도 사고 싶고 저것도 사고 싶고.”
“그러다 작업실 두 배로 늘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게요.”
그가 물건을 더 보고 싶어했기 때문에 우리는 아침 일찍 다시 길을 나섰다. 그는 어제 미리
봐 두었던 것이 있었는지 가게 안에 들어서자 마자 특정한 선반으로 다가갔다.
“10분만 여기 계세요.”
“어디 가게요?”
“내일 만날 사람 오늘로 시간을 바꿀 수 있는지 한번 물어 보게요.”
입구 옆 조금 한적한 곳에서 전화를 하려고 보니 어제 흡입기를 설명해 주던 젊은 직원이 나
에게 아는 척을 했다.
“일찍 오셨네요.”
“더 구경 하려구요.”
“혹시 제 도움이 필요 하시면 어제 흡입기 있던 곳으로 오세요. 거기가 제 담당이라.”
선하고 연약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스물이나 갓 넘겼을까.
“그럴게요. 고마워요.”
내가 다시 가게 안에서 그를 만났을 때 조금 전에 만난 그 직원이 그와 함께 있었다. 그 직
원은 그에게 독어로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해 주고 있었는데 그 는 그 설명을 듣고 있었다.
옆에 서서 그냥 구경을 했다. 나로서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이었다.
“뭐래요?”
“낮에는 일이 있어서 좀 그렇고 저녁에 집으로 바로 오라네요. 프로그래머도 다른 일 때문
에 저녁에 만나기로 했다고 같이 이야기 하자고. 여기 일 끝나고 천천히 가죠. 시간은 넉넉
하니까.”
“그래요 그럼.”
11시가 되지 않아서 프랑크 푸르트에서 이삿짐 센터 사람들이 왔다. 우리는 물건의 개수를
점검하고 매장에서 일을 하고 있던 여러 사람이 함께 짐을 소형 버스에 나누어 날랐다. 간단
한 서류 몇 가지를 작성하고 도착 날짜를 받았다. 다음 주 월요일에 배가 출발하면 6주 후
에 인천에 도착 한다고 했다. 그들의 차가 떠나고 나서 우리도 그 창고 같은 가게를 나왔
다. 12시 전이였다. 거기서 뮌셴 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면 가능했다.
“뮌셴 구경 가실래요?”
“괜찮죠.”
“언제 가보셨어요?”
“예. 뮌셴을 보러 간 건 아니고 지나는 길에 들린 적은 있어요.”
“잘됐네요.”
“저녁은 그분이 식사 초대를 하셨구요. 점심은 유명한 식당에 가서 합시다.”
“오늘 만날 사람하고는 잘 아시나 봐요. 식사 초대까지 한걸 보면.”
“그분이 사람 만나는걸 너무도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말도 못하게 바쁜 사람인데도. 사람
을 즐겨요. 한 번 보세요. 인상적인 사람이에요. 그 분 집은 독일에서 유명한 건축사가 지었
어요. 집 구경 시키는 것도 그 사람 취미구요.”
“어떻게 인상적인 사람?”
“열이 넘쳐 나는 사람이에요. 서른도 안돼서 부동산 업자로 크게 성공한 사람이구요.”
“지금 몇살인데요?”
“마흔 다섯쯤 됐나? 그 사람 옆에 있으면 에너지 자체를 느껴요. 자신이 벌어들인 돈으로
비싼 취미 생활 하는 게 낙이고. 아무튼 한번 보세요. 괴물에 가까우니까.”
울름 에서 뮌셴 까지 그의 원대로 아우토반을 탔다. 나는 정말 즐기지 않는 일 중에 하나
다.
“무서웠어요?”
아우토반을 막 벗어나 뮌셴 시내로 들어오는 길을 탓을 때 그가 물었다.
“별로 안 좋아해요.”
“그래도 아우토반이 사고가 적다고 하던데. 일반 도로 보다.”
“위험 하니까 다들 조심해서. 아까 봤죠. 우리도 200으로 가고 있는데 옆에 포르셰 총알 같
이 사라지는 거. 도대체 얼마로 달렸단 말이에요?”
“에이 포르셰 빌리는 건데 아깝다. 그래도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인데 나는.”
우리는 뮌셴 역 주변을 기웃거리며 파킹 할 곳을 찾아 다니다 역에서 가까운 어느 호텔 주차
장에 차를 세웠다. 거리로 나서려고 그가 모자를 푹 눌러 쓰다 말고 나를 바라보았다.
“선글라스 안 가지고 왔다.”
“…나가서 하나 사죠.”
“예”
보덴제나 울름은 관광지가 아니어서 상관이 없지만 뮌셴은 거리 이 끝에서 저 끝 사이만도
관광하는 사람들 무리를 서넛을 만날 만큼 번잡한 도시니까. 일단 마리엔 광장에 가야 뭔가
를 하나 고를 수 있을 듯했다.
“뭐 쇼핑하고 싶은 건 없어요? 자주 나가니까 특별히 쇼핑 할 일은 없죠?”
손님이 오면 언제나 쇼핑까지 거들었던 기억이 있어 막스 밀리안 거리에 화려한 쇼윈도를 천
천히 지나다 그에게 물었다.
“다 쓰레기처럼 보여요.”
“…?”
“아니 나한테는 다 소용 없는 걸로 보인다구요.”
자신의 표현이 너무 과했다고 생각 했는지 금새 해명을 달았다.
“나 좋으려고 옷을 골라 입는 거면 즐거운 일일 수 있지만 대부분은 내가 입어야 되는 옷
이 날이면 날마다 정해져 있으니 오늘은 이런 저런 이유로 이 옷을 꼭 입어야 하고 아니면
입어 줘야 하고…”
그는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어 보인다.
“그러고 나니까 평상시는 늘 이렇게 만 입고 다니게 되요. 일이 아니면. 여름이면 걷어 입
고 겨울이면 껴 입고.”
그는 무표정하게 말을 하며 거리를 걸었다.
“뭐 사시고 싶은 거 있음 보세요. 저 신경 쓰지 마시고.”
“이 거리에서 내가 살 수 있는 건 없죠.”
그 명품거리에 가게들은 그래도 손님으로 가득했다.
우리는 보석 가게 앞을 지나다 몇 종류의 선그라스를 쇼윈도에서 보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
다. 그는 이런 저런 몇 종류의 선그라스를 껴보고 있었다. 페라가모에서 나온 최신형 모델
은 정말 멋있어 보였다. 그것만큼은 280유로나 하지만 그 만한 값을 한다고 수긍이 갈 만큼.
“아 그거 너무 멋지네요. 그걸로 하세요. 선그라스가 아니고 예술이네요.”
그러나 그는 평범하고 좀 투박해 보이는 스타일의 욥 선그라스를 골랐다.
“나보다 멋있음 용서가 안되죠.”
우리는 선그라스를 고르고도 매장 안을 이리저리 둘러 보았다.
“저 귀고리 이쁘네요.”
그가 갑자기 보석이 진열된 곳을 지나다 말했다.
“세련되게 디자인 했네요. 심플하기도 하고.”
그러다 그는 나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귀 안 뚫으셨네요?.”
나는 내 양손도 보여 주었다.
“난 아무것도 안 해요.”
“어 시계도 없네. 시계는 장신구가 아니잖아요.”
“안차 버릇하니까…없어서 불편할 일도 없고. 시계 없는 사람이 시간 더 잘 지키는 것 알
아요?”
선그라스를 사고 거리를 나왔다. 욥 선그라스를 낀 그는 평범해 보였다. 그는 일부러 그런
스타일을 고른 듯했다. 우리는 시내를 이리저리 걸어 다니다 아우구스 티나로 점심을 먹으
러 갔다.
메뉴판을 보다 하품을 했다.
“피곤 하세요?”
“아뇨.”
“나는 다시 하품을 했다.
“뮌셴에 오면 꼭 먹어봐야 되는 거 있어요. 나는 오늘 저녁을 먹어야 하니까 점심은 생략
하겠어요. 돼지 고기 먹죠?”
“나는 그에게 뮌셴 특별 식을 시켜주고 작은 샐러드와 맥주를 시켰다. 그 넓은 홀은 언제
나 만원 이였고 전형적인 독일 맥주 집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저녁에 오면 분위기 더 좋은데.”
나는 홀을 둘러 보며 말했다.
“일정이 어떻게 되세요?”
맥주를 마시고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그가 그렇게 입을 열었다.
“오늘일이 어떻게 되는지 일단 보구요. 주말쯤에는 엘에이에 잠시 들려야 해요. 아버지가
수술을 하셔서 작은 오빠 집에 계시거든요.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월요일에는 사무실에 나가
봐야 하는데 다른 일거리 때문에 사실 잘 모르겠어요. 예전에 일하던 회사가 한국에서 수주
를 받았대요. 그래서 같이 일 하자고 연락이 와서 거기를 들려야 되니까 일정이 좀 미뤄 지
겠죠.”
그도 홀 안을 무심히 둘러 보고 있었다.
“기재 씨는요?”
“저도 들어가면 일 준비 해야 되요. 가을에 드라마 시작 하거든요. 그거 준비 하려면 바쁘
겠죠. 그 전에 잡혀 있는 일들도 있고. 사실 이번 주가 올해 마지막 즐길 수 있는 여가 시간
이에요.”
“좋겠어요.”
“뭐가요?”
“해야 할 일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으니.”
“일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는 게 뭐가 좋아요.”
“그럼 오라는 데도 없고 찾는 사람도 없고 할 일도 없는 그런게 더 나은가? 너무 오랜 시
간 무능력 하게 지내서 그런지 일이 나 찾아오면 정말 좋은데.”
“하긴 일을 찾아 다녀야 하는 것 보다는 나을지도 모르죠.”
식사가 나와서 우리는 천천히 점심을 먹었다.
“그냥 그런데 이게 여기 특별식이에요?”
“응, 여기 오면 한번쯤은 먹어 줘야 하는 것.”
우리가 아우구스 티나를 나왔을 때는 4시가 아직 안된 시간이었다. 우리는 뮌셴 거리를 이
러 저리 거닐다 어느 아이스 카페에 앉아 둘 다 아이스크림을 시켰다.
“일정이 그렇게 빠듯하세요?”
“계획이 그렇다는 거죠. 아직 새로 맡을 일이 어떤 건지도 모르고 일 이야기가 얼마나 걸릴
지도 모르는 거니까 다 열려 있는 상태인 거죠. 일찍 끝날 수도 있고 아님 다음 주에도 서울
에 못 들어 갈지도 모르고.”
“그럼 원래는 제 일 하시는데 내일까지 계산 하셨던 거죠?”
“더 걸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 했는데. 특별히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지는 않네요.”
“그럼 오늘일 끝나면 내일은 저 관광 시켜 주세요.”
“…어디 가보고 싶은데 있어요?”
나는 다소 의외의 청이라 그를 쳐다 보았다.
“프라하에 가고 싶어요. 뭐 꼭 거기가 아니라도 상관없지만. 부다페스트나 뭐 그런데.”
“동구 쪽으로?”
“다 가보셨어요?”
“얼마나요?”
“월요일부터는 일이 있거든요. 늦어도 금요일 이나 토요일에는 들어 가야 하루 쉬고 시작하
겠죠.”
“길어야 하루네요?”
“그렇겠죠.”
나는 거절을 잘 하는 사람이다. 내가 꼭 해야 하는 일이 아니면. 몸이 썩 좋지 않은 상태에
서 온데다 이리저리 신경을 쓰고 다녔기 때문에, 또 시차 적응을 잘 못하는 나로서는 미국
에 들렸다 들어 가는 일이 참으로 큰 부담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을 보니 선뜻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나를 처음 찾아 왔던 날처럼 무표정하고 텅 빈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아마 내가 거절을 하더라도 ‘그러냐’고 ‘할 수 없죠’ 라고 십 중 팔 구 대
답 할 것이다. 그런데 그의 모습이 어쩐지 거절의 말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음 … 그럼 비행기 표를 알아 봐야 하나?”
그가 잠시 나의 안중을 살피는 것이 느껴 졌다.
“그래요 그럼. 나도 아플 때 빼고는 사실 2 년 동안 제대로 속 편하게 쉬어본 일이 없는데
기재 씨 핑계 대고 하루 쉬어보죠.”
“에게, 겨우 하루 쉬는데 그렇게 거창하게 생색을 내요?”
그가 대뜸 말을 받았다.
“아뇨. 적어도 내일 하루는 아무 생각 않고 여행만 즐겨 보겠다 구요.”
우리는 아이스 크림 가게를 나와 여행사를 찾아 갔다. 프라하로 가는 비행기 스케쥴을 두고
어느 것을 선택할까 망설이고 있었다. 두 시 사십 분에 취리히에서 떠나는 비행기 표를 샀
다. 내일 그 비행기를 타려면 오늘 되도록이면 일찍 숙소로 돌아가 내일 일찍 일어 나야 한
다. 그런 일정은 사실 나를 힘들게 했다. 내 일이 아니라면 특히. 그러던 사이에 어느덧 약
속 시간이 되어 우리는 역으로 돌아 왔다.
카페 게시글
로맨스 소설 2.
[ 중편 ]
어느 스타의 죽음 11
푸른 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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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0.05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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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0편하고 11편이라 위치가 바껴서 거꾸로 읽엇어요.ㅋㅋㅋ 어쩐지..;
원래 밑에서 올라 오는 거 아니예요? 잘 지내시죠?
네 잘읽고 있어요~!!오늘도 올라왔네요~ 잘 읽을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