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28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7-9
그때에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7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8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9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듣지 않으려 하는 자
내가 존경하는 신부님의 강론 말씀은 항상 많은 것을 묵상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주 시원스럽게 말씀하시는 그 시간에 무척 당황스러울 때가 많은데 특히 가슴을 콕콕 찌르는 말씀으로 당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아주 잘 걸려 넘어지는 그런 유혹과 그런 자만심과, 오만과 편견에 대한 모든 것을 아주 기묘하게 비유를 들어가시면서 괴롭히시는 것입니다. 신부님의 강론 말씀은 바로 나를 두고, 내가 그렇게 사는 것을 다 알고 계시듯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나의 느낌, 내 감정을 어쩌면 그리도 잘도 알고 계실까 생각하면 진땀이 날 때도 있답니다. 그리고 그날 복음말씀과 독서의 말씀은 어째서 그렇게 내가 잘못한 것과, 내가 죄를 지은 것을 시시콜콜하게 빼먹지도 않고 들추어내시는지 하느님이 참으로 밉게 보이기도 하고, 도망가고 싶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부님이 약간은 무식한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노골적으로 맞대놓고 자신을 비판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나와 같이 느끼는 사람이 아마도 하나 둘이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매일 강론 말씀을 들을 때마다 느낌과 곤혹스러움은 새로운 것으로 내 여죄를 계속 추궁하고 계신 듯합니다. 어쩌면 나를 쫓아다니시며, 내 잘못만 전부 적고 다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모든 것을 꼬집어 말씀하시는 것도 더러는 관심도 없는 듯하고, 어떤 사람은 졸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웃느라고 정신이 없는 듯이 보이고, 더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맞장구치는 사람도 있고, 나를 쳐다보고 “그래 지금 너를 보고 하시는 말씀이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강론 시간은 별로 재미가 없고 빨리 지나가야 좋은 시간이 되기도 한답니다. 그런데 본당 신부님은 “그냥 흘려듣지 마십시오. 2천 년 전 얘기가 아니라 지금, 바로 우리들의 얘기입니다.”라는 말씀으로 못을 박으십니다. 그래서 더 가슴이 조마조마 하는 것입니다.
‘도둑이 제 발이 저리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내 양심에 꺼리고 부끄러운 것이 있기 때문에 신부님의 강론 말씀이 찔리는 것입니다. 아무도 모를 것 같은 내 얘기를 신부님이 독서와 복음을 통해서 나의 양심에 살아계시는 하느님께 나를 고발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음과 독서의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진실을 듣는 것입니다. 사제의 입을 통해서 하느님의 진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제는 강론대에 서 있을 때에는 아주 성령의 은총을 많이 받아서 하느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전해야 합니다. 신자들의 생명이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묵상을 할 때 매일 그런 마음으로 묵상을 쓰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도둑이 제 발이 저린 것’처럼 몹시 두렵고 당황해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가 요한을 죽인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으니 감출 수도 없답니다. 자기의 헛된 맹세로 억울하게 목을 베어 쟁반에 담아 죽인 세례자 요한의 원혼이 다시 살아나서 자신에게 복수할까봐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된 처사를 반성하고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잡고 있는 권력을 놓칠까봐 전전긍긍(戰戰兢兢)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소문처럼 억울하게 죽은 요한이 살아난 사람이 아니길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그의 부정한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알까봐 두렵고, 새로운 예언자가 나타나 다시 그의 잘못을 폭로할까봐 두렵고, 자신의 지지자가 줄어들 것을 두려워하고, 자신의 권세가 허약해지기를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은 자신과 사람들과 예수님이 두려운 것입니다.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The voice of the people is the voice of God'라는 영문은 "vox populi vox Dei"라는 라틴어 속담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백성들의 말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헤로데 왕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이 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고, 대통령도 이 말을 가슴에 항상 새겨 두고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헤로데는 영주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역사에 길이길이 무능하고 하느님을 거스르는 영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해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자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정말 그는 아주 잘못된 영주이지만 주님을 드러내는 도구의 역할을 잘 하고 있습니다. "None are so blind as those who will not see"라는 영어 속담이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보지 않으려 하는 자만큼 지독한 장님은 없다.”라는 말이지요. 이 말을 다시 고쳐 말하면 "None are so deaf as those who will not hear" 라는 말이 됩니다. 바로 “듣지 않으려 하는 자만큼 지독한 귀머거리는 없다.”라는 말입니다.
헤로데는 백성들의 말이나 요한의 말을 듣지도 않았고, 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눈은 헤로디아에게 빠져 있었고, 그의 귀는 아첨꾼들과 부귀영화에 가려져 아무도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혀 다른 뜻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백성들의 소문을 들었고, 주님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헤로데를 탓할 수 없는 자신을 바라봅니다. 교만과 아집에 사로잡혀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거나 보려고 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강론 시간에 신부님의 말씀에 가슴이 뜨끔거리고, 다른 사람들의 충고에 부끄러워하면서도 주님께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게 내 솔직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충고나 신부님의 강론말씀에서도 부끄러움을 느끼고 가슴이 뜨끔거린다면 그래도 희망이 있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들이 곧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며, 그 사람들의 말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얄팍한 유혹에 빠져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버리고 말았습니다.
<집을 지어라. 그러면 나는 그 집을 기꺼이 여기리라.>
▥ 하까이 예언서의 시작입니다. 1,1-8
1 다리우스 임금 제이년 여섯째 달 초하룻날, 주님의 말씀이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스알티엘의 아들 즈루빠벨 유다 총독과 여호차닥의 아들 예수아 대사제에게 내렸다.
2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백성은 ‘주님의 집을 지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3 주님의 말씀이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내렸다.
4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데 너희가 지금 판벽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
5 ─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6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으며 품팔이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넣는 꼴이다.
7 ─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집을 지어라.
그러면 나는 그 집을 기꺼이 여기고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리라.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축일 9월 28일 성 라우렌시오 루이스 (Lawrence Ruiz)
신분 : 순교자
활동 지역 : 마닐라(Manila)
활동 연도 : 1600?-1637년
같은 이름 : 라우렌시우스, 라우렌티오, 라우렌티우스, 로렌스, 로렌조, 루이즈
성 라우렌티우스 루이스(Laurentius Ruiz, 또는 라우렌시오 루이스)는 첫 번째 필리핀인 성인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해 순교한 첫 필리핀 순교자이다. 그는 1600년경 마닐라의 비논도(Binondo)에서 신자였던 중국인 아버지와 필리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중국어와 타갈로그어를 배웠다. 그리고 도미니코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스페인어를 배웠다. 그는 비논도 성당의 복사로 활동하였고 성사 보조자와 성사 기록자로 봉사하였다. 그는 아마도 서예로 생계를 유지했으리라 짐작되는데, 사적 혹은 공적인 용도의 서류를 아름다운 필기체로 만들어주는 일을 하였다. 그 직업은 안정되고 교육받은 사람임을 암시하는데, 당대에 많은 사람들이 그 기술을 배우고자 했다는 사실에서 그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1636년 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불운한 사건에 연루되어 살인 혐의로 고발되었다. 그릇된 재판으로 사형을 받을까 두려운 나머지 성 라우렌티우스는 필리핀을 떠나기 위해 배를 탔다. 그런데 그 배에는 세 명의 도미니코회 신부인 성 안토니우스 곤살레스(Antonius Gonzalez), 성 귈레르무스 쿠르테(Guillermus Courtet), 성 미카엘 데 아오자라자(Michael de Aozaraza)와 일본인 사제인 성 빈첸시오 시오즈카 드 라 크루스(Vincentius Shiwozuka de la Cruz)와 평신도이며 나환자인 교토(Kyoto)의 성 라자루스(Lazarus)가 타고 있었다. 그는 바다에 나오고 나서야 그 배가 대대적인 그리스도교 박해가 일어나고 있는 일본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다.
일본의 오키나와(Okinawa)에 도착한 성 라우렌티우스와 동료들은 곧 그리스도인임이 발각되어 체포되어 나가사키(Nagasaki)로 압송되었다. 그들은 며칠 동안 갖은 비인간적인 고문을 당했으나 용감하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였다. 성 라우렌티우스는 신앙을 철회하지 않았고 그의 사형집행인에게 자신은 하느님을 위해 죽으며, 자신이 죽는 대신 수천 명을 살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1637년 9월 27일 그는 교수대에 거꾸로 달려 구덩이로 떨어졌다. 이틀 동안의 고통 후에 그는 출혈과 질식으로 인해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바다에 뿌려졌다.
성 라우렌티우스 루이스와 같이 이 시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순교한 15명의 동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1981년 2월 18일에 마닐라에서 시복되었고, 1987년 10월 18일 같은 교황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시성되었다.
오늘 축일을 맞은 라우렌시오 루이스 (Lawrence Ruiz)와 동료 순교자들의 축일을 맞이하여 세례명으로 수호성인을 모시고 있는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