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태왕과 장수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태왕릉과 장군총등 석총고분의 연대가 궁금함니다...
제가 다른 카페에서 얼핏 글을 읽다가 석총고분은 고구려시대 이전에 만들어졌다는 기사를 읽어서요..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구요
비슷한시기의 고분인 덕흥리 유주자사 고분이나 다른 벽화고분에 비해서 너무 허술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사진으로 봐도 벽화가 전부 산화되거나 파손된거라고 보기도 어려운거 같구요
질문의 요지는 고구려고분의 종류와 연대에 따른 특징등이 궁금함니다... 태왕릉은 시기상 장수왕의 평양천도후 석실고분이 쇠퇴하였다고 치더라도 그럼 장수왕릉의 릉으로 알려진 장군총은 문자명왕때로 이시기에는 봉토무덤이 유행하던 시기인데.. 왜 장군총은 태왕릉과 같은 석실고분으로 만들어 졌는지.. 두서없는 질문이라서 죄송하구요 도움부탁드림니다
답변입니다.
장군총이 고구려 보다 앞선 시기에 만들어졌고, 그런 주장에 공감하여 질문을 하니,
어디서 부터 설명을 해야 할 지 난감해지는 군요.
돌로 만든 무덤은 물론 그 기원을 홍산문화 우하량유적은 물론, 그 보다 더 오랜 무덤도 찾을 수 있지요.
그러나 환인, 집안 지역에 있는 고구려 무덤의 연대는 그렇게 올라가지 않습니다.
장수왕릉으로 알려진 장군총이 봉토무덤이 유행하던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해서 하등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고구려가 적석총에서 봉토석실분으로 무덤 양식을 바꾸는 것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바뀐 것이지, 하루아침에 새 무덤 방식을
택하는 것은 아니지요. 적석총에도 벽화가 그려집니다.(우산하41호, 절천정총 등)
고분벽화가 그려진 적석총을 고구려 건국 이전으로 볼 수는 없겠지요.
장군총 묘실 안에 들어가보면 벽화무덤의 석실이상으로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장군총의 축조 연대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논란이 있습니다만, 문자명왕 연대에 만들어졌다기 보다는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에 만들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생전에 무덤을 만들기도 합니다.
워낙 장수왕이 오래 재위하다보니, 그 연대차이는 매우 크지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덕흥리고분이나, 안학3호분에 비해서는 늦게 만들어진 무덤이 맞습니다.
장군총 축조 기법은 적석총의 발달과정에서 가장 발전된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연구자들이 이 무덤을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적석총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아래 글은 고구려 고분에 관해 누군가가 현재 학계의 통설을 정리한 글로 보입니다. 참고바랍니다.
고구려 고분
고분은 일반적으로 성토(盛土)한 묘, 또는 성토하여 분구(墳丘)를 만든 묘를 의미한다.삼국이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3~4세기경 삼국은 각기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면서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권위와 위력을 과시하기 위해 높고 큰 고분을 축조하게 되었으며, 불교의 화장묘제가 새로 등장하는 6~7세기경까지 고분의 조영이 이루어 졌다. 삼국형성초기인 3~4세기경부터 화장묘로 변화하는 7~8세기경까지 조성된 유력자(有力者)들의 무덤을 고분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 고분
몇 차례 도읍의 변천에 따라 집안현 통구(輯安縣 通溝)를 중심으로한 압록강 중․상류 유역과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유역에 집중 분포되어 있는데, 분구의 축조형식에 따라 돌무지무덤(石塚, 積石塚)과 봉토무덤(封土墳)으로 구분된다.
돌무지무덤
고구려 건국 초부터 조성되어 온 무덤으로 훈강(압록강지류)유역의 환인지방과 독로강유역, 평양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초기에는 땅위 냇돌(川石)을 네모지게 깔고 널(棺)을 놓은 후 다시 냇돌로 덮는 형식의 간단한 구조였으나 점차 냇돌 대신에 모난 깬돌(割石)을 써서 벽이 무너지지 않게 계단식으로 쌓아 올렸는데, 외형은 대체로 피라밋모양의 방대형(方臺形)을 이루고 있다. 3세기말~4세기초경 중국계 돌방무덤(石室墓)의 영향을 받아 돌무지무덤의 중심부에 널길(羨道)이 달린 돌방(石室)을 갖춘 형식이 된다. 대표적인 예는 장군총(將軍塚)․태왕릉․천추총(千秋塚)등이 있다.
돌무지무덤은 5세기 전반 평양천도 이후 차츰 쇠퇴하여 소멸했다.
봉토무덤
널길을 구비한 굴식돌방(橫穴式石室)을 반지하 또는 지면 가까이에 축조하고 그 위에 흙과 돌무지․진흙․숯․재 등을 깐 뒤 흙으로 봉토를 만든 무덤이다. 돌방은 방의 수에 따라 널방(主室) 하나만으로 형성된 외방무덤(單室墓)과 앞방(前室)․뒷방(後室)․옆방(側室)등 두방 이상으로 형성된 여러방무덤(多室墓)으로 구분한다. 돌방벽은 초기에는 깬돌(割石)을, 후기에는 잘 다듬은 큰 판석을 사용 축조했는데, 깬돌의 경우는 표면에 회를 바르고, 판석은 직접 그 위에 벽화를 그리기도 한 무덤이 약 50여개 조사되었다.
천장은 납작천장(平天井)․활천정(穹 式天井)․모줄임(抹角藻井式)천장으로 했다.
봉토무덤은 3세기 후반~ 4세기 전반에 요동지방에 있던 중국계 봉토무덤의 영향을 받아 발생한 것으로 평양천도 후 고구려 무덤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봉토무덤 가운데 돌방벽면과 천장에 그림을 그린 벽화무덤도 있는데, 축조방법과 변화내용에 따라 3기(전․중․후기)로 구분하고 있다.
시기별 특징
1. 전기 : 350~450 년경
외방무덤 또는 여러방무덤이 있으며 널길이 남벽 동쪽에 치우친 구조이다. 옆방에 부부의 초상화가 있는 것이 통례이고, 그림의 주제는 부부초상화․사냥․무용․행렬을 비롯한 생전의 생활모습 등을 담은 인물풍속도이다. 장군총․태왕릉․천추총 등이 있다.
2. 중기 : 450~550 년경
돌방의 축조가 고구려식으로 정착되면서 앞방이 작아져 딸린 방처럼되고 주인공의 초상화도 널방(主室, 玄室)으로 옮겨진다. 그림의 주제도 전기의 인물중심에서 사신도(四神圖)와 인동당초문(忍冬唐草文)을 비롯해서 불교적인 화풍으로 전개되며, 각저총(角抵塚)․무용총(舞踊塚)․개마총(鎧馬塚)등이 있다.
3.후기 :550~650 년경
무덤은 구조적으로 단순화되어 앞방이 없는 외방무덤이 대부분이다. 그림의 주제는 사신도가 주류를 이루는데, 사신도의 배경에는 나무와 구름 등의 사실적인 것 이외에도 해와 달․북두칠성 등의 별자리(日月星辰)․신선․동물 등의 도교적인 요소가 많아졌다. 집안 사신총․진파리(眞坡里)1․2호분 등이 있다.
첫댓글 아하.. 그렇군요... 궁금했던게 풀렸습니다... *^^ 감사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