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자유를 존중하라 “존엄한 품위의 삶; 인내의 믿음과 회개”
2025.2.17.연중 제6주간 월요일 창세4,1-15.25 마르8,11-13
광기(狂氣)의 시대입니다. 역사의식, 시대정신, 상식의 회복과 공부가 절실합니다.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몫을 다하며 제대로 사는 회개의 삶 또한 절실합니다. 지금 지옥은 텅 비어 있다는 언젠가 읽은 컬럼이 생각납니다. 악마들이 다 뛰쳐 나와 세상 곳곳에서 유혹하며 활개를 치고 있다 합니다. 정말 깨어 있어 악마들편에 서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국내외 세상 돌아가는 뉴스를 봐도 실감하는 사실입니다. 극단의 이념이나 편견은 언제나 눈먼 맹목의 광기에 흐를 위험이 다분하기에 중용의 균형잡힌 상식적 삶이 참으로 절박한 시절입니다.
요즘 수도원 게시판을 보면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에 속한 외국 수도형제들의 부고 소식이 계속 줄을 잇고 있습니다. 생몰연대를 헤아려 보니 대부분 90세 전후입니다. 90을 넘는 분들이 극히 드뭅니다. 모두가 한생애 충실히 수도승답게 순종과 섬김의 삶을 살았던 분들입니다. 새삼 기껏 살아야 15년 정도겠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사부 성 베네딕도의 충고와 더불어 ‘자비롭고 지혜롭게 살아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깨어 삶의 제자리에서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옛 현자 다산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학문의 끝에 도달한 사람은 늘 일상에서 자신을 정비한다. ‘나는 매일 새벽마다 마당을 쓸며 나를 찾았다.’”
다산이 매일 새벽마다 마당을 쓸 듯 저 역시 매일 새벽마다 강론을 쓰며 저를 찾습니다.
“깊기만 하고 고립되고, 넓기만 하면 산만해지니, 어른이라면 겸험의 폭과 높이를 두루 갖춰야 한다.”
깊이와 넓이를 갖춘 전방위적 공부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얼마전 써놨던 소망을 밝히는 “당신은” 이란 시 한 대목도 생각납니다.
“바다가
바다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깊고 넓은 바다예요.”<2025.2.12>
참으로 늘 거기 그 자리에서 바다처럼 깊고 넓은, 지혜롭고 자비로운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창세기 독서와 마르코 복음에서 우리는 죄에 손상된 무지에 눈먼 사람들을 만납니다. 오늘 창세기 카인과 아벨은 참 풍부한 묵상자료를 제공합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신비스런 하느님의 자유를 존중해야함을 배웁니다. 악마의 유혹에 떨어져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 죄가 만연되기 시작하는 시점입니다. 첫째 번 카인에게 주어진 시험 상황이 엄중합니다.
‘세월이 흐르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삶의 신비, 하느님 섭리의 신비입니다. 누구나 카인의 질투와 분노에 공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감정을 최대한 인내하고 자제하며, “왜?”라는 의문을 접어둔채 하느님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지극한 인내의 믿음으로 참고 견뎌내며 자신의 존엄한 품위를 지켰어야 했습니다. 사실 이와 유사한 이해할 수 없는 불공정하다 싶은 ‘하느님의 신비(?)’스런 사건도 참 많이 일어나는 우리 일상의 현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 한없는 인내와 순종의 믿음이 절실한 시점입니다. 다음 주님의 충고가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마지막 회개의 기회였는데, 비교하지 말고 하느님의 처분을 묵묵히 믿음으로 받아들였어야 했는데, 충분히 미풍으로 끝낼 수 있었을 상황인데, 카인은 악의 유혹에 빠져 동생 아벨을 죽임으로 급기야 미풍은 태풍이 되었고 수습이 불가능해졌습니다. 질투, 분열, 폭력, 죽임이 뒤따르는 지옥도가 펼쳐집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카인의 후예도 됩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는 물음은 “너 어디 있느냐?” 아담에 대한 물음을 연상케 합니다. 바로 이때가 회개의 마지막 기회였는데, 부전자전 아담처럼 카인의 반응도, 비겁하게 솔직하지 못하고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거짓말에 적반하장입니다.
이어 카인에게 주 하느님의 심판이 뒤따르자 정주의 삶은 끝났고 땅에서 축출되어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정처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는 계속되어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무지의 질투에 눈멀어 저지른 악행의 결과가 참혹합니다. 새롭게 부각되는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입니다.
무지에 눈멀기는 마르코 복음의 표징을 요구하는 바리사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다 보는 데 바리사이들만 보지 못합니다. 역설적으로 눈뜬 맹인으로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무지의 악'인 확증 편향, 편견에 눈멀어 있기 때문입니다. 눈만 열리면 예수님의 삶 전체가 하늘의 표징들이요 얼마전의 4천명을 먹이신 기적 역시 빛나는 하늘의 표징인데 이를 까맣게 잊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가 빛나는 단호한 반응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말씀하신후 지체없이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집착없이 홀가분하게 자유로이 떠나는 뒷모습이 참 멋집니다. 오늘날도 무지의 인간 현실은 변함없이 반복됩니다. 카인과 바리사이들, 우리의 부정적 모습일 수 있습니다.
참으로 한결같이, 끝까지 어떤 처지에서든 신비스런 하느님의 자유를 존중하고, 지극한 인내의 믿음으로 회개와 더불어 자신의 자리와 몫에 충실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자신의 존엄한 품위를 지키는 삶이 절실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무지의 치유에 결정적 도움이 되어 우리 모두 자비롭고 지혜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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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깊이새겨 묵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