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를 봤다.
요즘 할머니랑 같이 있는데 할머니는 드라마를 좋아하신다. 평소 티브이를 전혀 보지 않지만 이 날 저녁 할머니랑 놀아드린다고 같이 드라마를 보게 된 것이다.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까 그게 마지막 회란다. 나 참! 그 전에 이 드라마를 보지는 않았던가? 보긴 봤다. 찔끔. 그것도 낮에 일하면서. 응~ 저거 고나 하면서 보긴 봤는데 장면 중에 생각나는 것이 딱 하나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김희애와 김상중이 막 하는 순간을 하유미에게 들키는 장면이었다. 진짜 어색하더라. 이것이 한국드라마인줄을 인정하면서 봐도 닭살 돋았던 것이다. 아휴 김희애의 연기라니! (김희애에게 섹시를 구하는 것은 마치......) 야한 것처럼 꾸미지만 하나도 야하지 않는....... 그 떫은맛을 꿀맛으로 여기며 가는 김상중의 연기는 어떻고! 김희애가 하유미에게 머리채 잡히는 신은 보지 못했다.
어쨌거나 대충 스토리는 신문을 통해서 알고 있기에(웬만한 연예인 소식이나 드라마 스토리 등등은 신문을 통해서 대충 알고 있다) 무리 없이 감상했는데 나로선 진짜 참을 수 없는 정도였다. 구역질이 나기까지 했다. 남성의 대사는 전혀 없었다. 사랑에 관한 권력을 죄다 여성들이 장악했다. 의아한 것이 그 정도라면 그런 못난 남성들에게 왜 여성들은 사랑을 느끼는가? 욕망을 위해서, 김희애의 말대로 애를 키우고 살림을 사는 단출한 가정을 위해서? 진짜 웃긴다. 그렇게 전투적인 사랑의 결과로 단출한 가정을 그려낸다고! 남성우월주의가 아니고 이건 완전히 여성우월주의의 극이었다. 남근숭배의 관점에서의 프로이드가 통탄할 만한 노릇이었다.
그리고 유명한 김수현 작가에게 딴지를 걸고 싶은데 진짜 한물간 사랑노름을 그리고 있다는 얘기다. 뭔 불륜이라고 그린 것이 이딴 정도인지. 불륜이 요즘 얼마나 진화되고 있는지, 사랑의 개념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작가는 전혀 감을 잡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일부일처제의 명암이 어떻게 조영되고 있는지 도대체 벗어나 있는 것이다. 나이 탓인가. 아님 그저 그렇고 한 세상에서 살아서 그런 것인지. 또는 유전자의 활발한 움직임을 전혀 고려치 않는 것인지.
최근의 움직임은 뉴욕 타임즈에 실린 "일부일처제의 진화-외도도 투명하게-"의 제목하의 기사에 축약돼 있다. "죽음이 둘을 갈라놓기까지 정절(貞節)을 지키겠는가? 넷! 금요일만 빼고." 전통적인 가정에서 제3자는 침입자였다. 부부관계의 열린 관계를 말한다. 상당수의 커플들이 "지금 변화에서 새로운 것은 부부들이 일부일처제를 버리는 게 아니라, 그 관계의 조건에 대해 협상을 한다는 사실"을 고려하고 있다.
또 동종요법(同種療法)이 적용되기도 한다. 예방접종 비슷하게 약간의 병균을 넣어 미리 큰 병을 예방하자는 것으로 50마일 룰, 동지역에서의 사람들과는 안 되고, 뱀파이어 룰로서 동트기 전까지만 곁으로 돌아오라는 식이다. 우리나라의 어떤 아나운서는 "배우자 몰래 한 명 정도의 애인을 가지는 것이 좋다"라고 말했다. 마음을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친구(soul mate)를 가지는 것은 건강한 생활에 도움이 된다. 결과적으로 가정을 오히려 윤기 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일부일처제가 가지는 극단적인 형벌적인 모순에 대한 운영의 묘이며 이것이 오히려 늘어나는 이혼율과 그럼으로 파괴되는 가정을 구하기 위한 대안이라고 까지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배종옥이 끝까지 젠틀하게 등장하는 것은 뭐냐? 도대체가 말이 아니다. 그 외국의 이혼 후도 서로 사이좋게 교류하는 모습을 그리려고 그랬는데 가당치도 않다. 둘을 위해 줄려면 아예 발길을 끊는 것이 좋다. 배종옥이가 계속 연락하고 하는 것은 일종의 위선이고 교만이다. 물론 피치 않게 연결될 수는 있겠지. 그래도 비정상적인 예를 들었다.
김수현 얘기는 집어치울 수 없다. 중딩, 고딩도, 대딩도 아닌 웬만한 세상 물정을 아는 교수입네 전문직 종사자, 평범한 가정주부 등등이 그냥 '사랑' 때문에 휘이적거리고 있는 것이 정말 웃기는 일 아닌가. 사랑이 그만큼 위력을 발휘하는가? 아직도 우리 시대는 사랑 때문에 너무나 많은 대가를 치르는 시대여야 하는가? 사랑에 관한 주위의 재화를 몽땅 모은다면, 그 열정을 돈으로 계산한다면 이건 엄청나다. 1976년 리처드 도킨스가 만들어낸 용어대로 이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밈(Meme)이 사랑인 것 같다. 물론 도킨스는 그의 《이기적 유전자》에서 종교를 가장 강력한 밈이라고 말했다. 그러고 베토벤의 교향곡 5번에 대해서도 한참 설명했었다.
이런 드라마가 40%이상의 시청률을 얻는 것으로 봐서 이 드라마를 우습게 보는 내 생각은 역시 대중적인 것과는 한참 동떨어졌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꽥꽥 떠들고 빡빡 우기고 살아가야하는지....... 안되겠지? 그냥 엎드리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린다. "넌 엎드려라! 알았지? 넌 엎드리고 살아야 한다!"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꼴리는 데로 살 거예요."
물론 납작 엎드리면서도, 본 백홍거사가 심심하면 떠드는 일련의 '사랑'에 관한 소고들이 아직도 대중과는 한참 유리돼 있는 현실이 너무 슬프다.
수차 얘기했지만 인류가 문명화를 걸어오면서 인류의 짐승 같은 면들도 인류화(가축화)되 오고 있었다. 개나 소나 양들이 짐승에서 가축이 되어 우리에게 유용했듯이 우리 사람들도 스스로들에게 이타적이 되기 위해 인간화의 길을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동굴에서 나와 들에서 장막을 지을 때부터 짝짓기 행위와 어린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의 중요성을 터득해 왔다. 나름대로 '선별'하고 '사육'했다. 이것을 동물로서의 인간의 '인간화'이고 이런 일이 벌어지는 장소가 '인간농장'일 수 있는 것이다.
인간농장에 진입하기 전 인간들의 사랑은 '우리들의 사랑'이었다. '나만의 사랑', '너를 위한 유일한 사랑'은 아직 그 개념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모계사회와 함께 무리들이 함께 해서 적을 방어하고 인류라는 종족이 살아남기 위한 공동체적인 사랑이 주였다. 여기엔 우리들의 아이가 있었고 우리들의 가족이 있었다.
이것이 농경사회가 정착이 되고 초기 국가의 틀이 만들어지면서 동시에 남성권력(세금과 징병이 필요하고 질서가 아쉬워진다. 노동력의 근간인 남성에게 가장 강력한 떡이 주어진다. 그것이 일부일처제고 가족주의다)에 의한 일부일처제가 강화되면서 '나만의 사랑', '이기적인 사랑'으로 변하게 된다. 남녀 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소유권이 인정되는데 그럼으로 '우리들의 새끼'에서 '내 새끼'로 '우리들의 엄마들'에서 '내 엄마'로 점차 소유권이 강화되었던 것이다. 사실 근대화전에 이르기까지는 개인적인 사랑이 그렇게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더 많은 집단적인 또는 권력구조에 의한 집안과 집안의 계층에 따르는 숙명 등으로 가정이 유지되고 있었다.
인간농장에서의 일을 인간사육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이것의 고전을 우리는 플라톤의 <국가>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저서는 가장 오래된, 가장 완벽한 '인간 농장에 관한 규칙'으로서 통치계급과 생산계급에 대한 구분들과 그들이 각자 지켜야할 덕목들이 열거돼 있다. 그리고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의 과정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인간사육에서의 핵심 사항으로 만들어진 것이 우리들 문명의 여러 요소였다. 종교, 사회윤리, 철학 등등이 짐승 같은 인간을 인간다운 인간으로 '인간화'시키고 있었다.
사랑이 중요했다. 문자와 더불어 이 사랑은 짝짓기의 인간화와 인간화의 교육적 측면의 양다리에 최고로 유용한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신화는 종교와 사회적 윤리와 서로 호응하면서 때로는, 또는 -아주 자주 일어나고 있다- 서로 상충하면서 인간의 내면에 깊숙이 젖어들었다. 심지어는 가장 큰 가치로 짐승의 인간들은 인간다운 인간으로 변모시켜갔다.
이윽고 사랑의 전지전능이고 무소부재의 인류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사랑의 신화는 지금도 마음껏 그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복잡하고 다양한 시대에 이르러 오히려 더욱 강화되고 있는지 모르고 모든 것의 피난처로도 인식되고 있는 지경이다. '사랑의 이름으로'는 강력한 주술이다. 이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이기주의적인 실체들이 세상을 정복했으며 이 이름으로 관용보다는 더 수많은 폭력이 넘실거렸으며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마음과 몸으로 지쳐갔으며 그렇게 바라던 화목한 가정에 서슬 시퍼런 비수를 꽂았으며 마약보다 더한 습관성으로 인간을 지치게 했으며 다량의 사이비 종교들이 깃대를 꽂을 수 있게 하지 않았는가.
나이와 섹스, 종족과 문화 관습을 넘어서 그 모든 시대 개념을 통틀어 사랑은 거침없는 항해를 했고 우리 앞에서 모든 바벨탑을 쌓았고 변신의 변신을 거듭했음에도 그 본질은 에덴동산의 선악과였던 것이다.
인류가 진정으로 인간화를 완성시키려면 이 사랑의 미몽에서 깨어날 때가 됐다.
인간화가 성공해서가 아니고 인간화의 완전성을 획득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사랑이 어느 정도 수준에까지 인간화를 이룩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시대는 재빠르게 디지털화되고 있다. 아나로그적인 사랑에 대한 감각을 물리쳐야한다.
설을 풀다보면 지 마음대로 가는데 어쩔꺼나!
결론을 얘기하자면 유치한 사랑놀이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그건 어렸을 때 하는 놀이다. 좀 크면 넓은 마음으로 사랑하자. 죽고 살고 하는 사랑이 아닌 소유의 개념이 아닌 진정성을 가진 널따란 사랑. 그리고 개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에게서 사람의 향기를 주고받는 그런 사랑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보면 사랑을 할 사람이 너무 많은 세상이지 않는가. 구태여 미치는 이유는 뭘까?
윽! 앤에게 전화할 시간이 지났다. 혼나겠다.
첫댓글 점심으로 해물 볶음밥을 먹고 졸리는 시간, 비몽사몽간에 한편의 소설을 읽은 기분입니다.
오빠 부대 동원 할까요 ? 전적으로 지지합니다.
헉~억~ 너무 길어서 숨이 넘어갈라하지만, 자꾸 듣다보니 왠지 맞는 말 같기도 해서 저도 동화될라꼬 합니다. 뜨문뜨문. 일 끝낸 후 목욕제개하고 맑은 정신으로 꼼꼼히 살펴보겠습니다.
'내 남자의 여자' 는 한번도 본적이 없습니다마는 신문을 통하여 인기드라마라는것은 익히알고있습니다.작가가 금수현이던가요? ㅎㅎ. 저질이지요.아직도 그런 글발이 통하다는것은....음....더 이야기 하면 욕먹겠지요.펜들한테`.동방불패`는 책으로 읽었습니다만, 글솜씨가 금씨 할머니 못지않습니다.님의 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유치한 놀이로 하는 것도 사랑이고, 죽고 살고 하는 것도 사랑이고, 널판지 같이 넙뜩한 것도 사랑이고,미치는 것도 사랑이죠. 무튼, 동방불패의 사랑은 여전히 찐하게 ing라고 이해하면 맞죠? 좋컷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