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히 ‘동북공정’을 짚고 넘어가자면, 이는 중국이 고구려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이를 국가적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행하는 것들을 총 망라한 것입니다. 이러한 동북공정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쟁점은 한사군의 존재 여부와, 존재했다면 어디에 위치 하였느냐 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나라의 역사 교과서가 우리에게 불리하게 한사군의 존재를 인정하는 부분이 많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한사군의 존재 여부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중국측의 주장은 고구려가 중국 땅에 세워졌기 때문에 중국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중국 문헌도 두 가지 입장으로 동북공정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고구려가 있었을 당시에 전해져 내려오는 고서에는 한사군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 중 하나가 사마천이 쓴 ‘사기 조선열전’이라는 책입니다.
사마천은 대략 B.C.145년에 출생하여 대략 B.C.85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천이 사망한 같은 해에 한나라의 무제도 죽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한무제와 사마천은 같은 시대에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기 조선열전’에는 한사군의 명칭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후에 사마정이라는 사람이 쓴 ‘사기’에는 한사군의 명칭이 정확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와 다른 내용은 모두 같고, 한사군의 내용만 다릅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사마정이라는 사람은 당나라의 사람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이 때부터 역사 왜곡이 일어났음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습니다.
더하여, 중국에서 한사군이 실재했을 것이라는 증거가 납득 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300년 이상 지속 된 중국의 역사가 없다는 점입니다. 과연 나라의 왕조가 바뀔 만큼 어지러운 시국에, 속국은 아무 저항 없이 계속 속국임을 자처했을까요?
만약 중국의 주장대로 고구려가 한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면, 중국과 고구려와의 공통점이 존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의 주장과는 다르게 고구려의 문화는 독자적이면서도 찬란합니다. 일례로 고구려는 돌무덤의 양식을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한나라는 흙무덤의 양식을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아무리 영토가 넓었다 하더라도, 지방색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나라의 토대가 되는 문화까지 다르기는 어렵다고 판단됩니다. 아예 다른 양상을 보이는 문화 양식을 보아 고구려는 한나라의 지방 정권이 아니었다고 판단됩니다.
그리고 한사군과 더불어 문제시 되고 있는 낙랑군에 대해서도 중국의 역사왜곡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낙랑군의 위치 또한 두 가지 주장이 존재합니다. 평양에 있었다는 설과 만리장성 부근에 있었다는 설입니다.
실제, 평양부근에서 낙랑의 유물이 많이 발굴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낙랑군의 것인지, 낙랑국의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낙랑군과 낙랑국 모두 실재했기 때문입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13년조’ 기사를 보면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략’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을 보면 낙랑국은 신라 북쪽, 고구려 남쪽으로 현 한반도 중북부 지방에 위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차차웅 원년조’ 기사를 보면 낙랑군이 서라벌을 여러 겹으로 에워싸자 왕은 “지금 이웃나라가 침범하니 이는 내가 덕이 없어 외롭기 때문이다, 어쩌면 좋은가”라 탄식한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신라를 침범한 낙랑을 군이 아닌 이웃 국으로 본 것으로 보아 신라 북쪽에 있던 낙랑은 군이 아닌 국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더하여, ‘전한서 지리지’를 보면’ 낙랑군은 각각 수성현, 조선현, 열구현 등등 25개의 현을 가지고 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러한 증거들을 바탕으로 유추해볼 때, 낙랑국은 평양에 있었고, 낙랑군은 만리장성 부근에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낙랑군이 만리장성에 있었다면, 고구려는 한나라의 통치하에 있는 지방정권이 될 수 없습니다. 만리장성 부근은 한나라의 영토였기 때문입니다. 이 지역은 한나라의 지방정권이었을 뿐, 고구려를 포함하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중국측은 고구려가 한나라에게 조공을 바친 것에 대해 지방관하에서 조공을 받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고구려가 외교활동을 위해 조공을 받친 것이라고 해석해야 마땅합니다. 고구려는 한나라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와 지역에 조공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논리대로라면 고구려가 많은 나라의 속국이었다는 말인데 하나의 나라가 여러 나라의 통치는 받는 것이 가능할까요?
이러한 정황들로 미루어 볼 때 저는 중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역사 왜곡을 종용하고 있다고 밖에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동북공정의 가장 큰 문제점은 우리 역사교과서에서 동북공정의 핵심쟁점이 되고있는 한사군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 정확한 증거가 없는 현시점에서 교과서에서 먼저 인정하고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우리도 그 교과서로 배우고 공부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잘못된 정보와 무관심 속에서 동북공정이 생겨난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고구려는 우리나라의 역사입니다. 중국에게 빼앗기면 억울할것입니다. 우리의 많은 관심과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첫댓글요점을 잘못 알고 계시네요. 동북공정의 주된 주장은 '고구려는 지방정권이다', 간도를 비롯한 만주는 시종일관 중국 중앙정부의 지배하에 있었다(그러니 한국은 껴들지 말라는 뜻)이지 '한사군은 평양에 있었다'가 아닙니다. 한사군또한 그들의 연구 목표지만 그게 동북공정의 핵심은 아닙니다. 한 사군의 위치는 평양인지 요동인지 이견이 많지만, 최소한 광무제가 군사를 보냈다는 44년 이후의 낙랑군은 확실히 평양에 있던건 확실합니다. 그지역 유물이 중국계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이라 주장하는 그들 주장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중국의
1. 삼국지에 나왔다는 낙랑정벌기록이 어디에 나온건지 말씀해 주십시오. 삼국지에 고구려가 낙랑을 쳤다는 기록은 본 적이 없습니다.-혹시 후한서에 부여가 낙랑을 공격했다는 기사를 혼동한건 아닌가요? 2.광무제 본기에 있는 낙랑인 왕조의 반란에 달린 주석 말씀이군요. '낙랑은 군이며..' 이 기록은 6세기에 주석으로 달린 것입니다. 3. 역시 6세기 주석이군요. 3세기 말 서적인 태강지리지를 인용한 ... 5. 이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어디서 들으셨는지 출처를 밝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 4의 문제는 6세기에서 7세기 초의 중국 상황과 관련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시기 기록에 묘사하는 낙랑군은 삼국지 동이전의 낙랑군과 위치가 달랐던 것으로 나옵니다. 후대 낙랑*대방이 멸망하면서 요서지역으로 군현을 옮겨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 4는 낙랑이 요서에 있었다는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또한 삼국지 동이전의 낙랑군은 삼한, 고구려, 옥저와의 위치를 고려하면 평양지역에 있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말대로 한사군때문에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고 만주가 중국땅이라면, 한때 로마의 속주였던 프랑스, 스페인, 영국, 남서독일 모두 이탈리아에게 무조건 항복, 합병되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프랑스, 스페인등 옛 로마제국의 속주들이 그럽니까? 안그러죠. 결국 중국의 주장은 한마디로 '돌았다',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것밖에 안됩니다. 그러니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다해도 그것이 한민족이 약했다거나 중국의 신하였다는 식으로 해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중국인들이 해외에서는 무시받더라도 자국민들의 단결을 이끌어 내려고 국내에서 일부로 '미친척'을 할경우 막기가 힘들다는 점이 남습니다만,
우리 자신이 중국인보다 더 합리적이고 더 이성적이고 더 솔직하며 더 '문명적임'을 보여주려면은 최소한 낙랑군이 44년 이후에는 한반도에 있음을 부정해선 안될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중국처럼(비록 주장은 다르지만) 자국중심주의라고 욕을 먹게 되어, 결과적으로는 국내에서는 물론 해외에서도 우리를 도와줄 이들을 모을 수 없게 됩니다.
듣기로 중국내에서 연변대학교와 쑹청유를 비롯한 북경대학교는 동북공정에 부정적인 입장인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이들을 보건대, 동북공정은 중국학계 "전체"에서 주장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참여하는 사람의 숫자가 많고 국가에서 후원을 해준다는 점이 문제로 남지요. 다만, 이게 어디까지 지지를 받고 어디까지 부정당하는지...
문제는 그 공정에 동원된 학자들이 중국 학계에서 굉장한 실력을 갖고 있는 연구자들(사학자 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동원됨)이라는 것입니다. 북한처럼 개인 숭배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중국 학자들 간에 국가 프로젝트에 부정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도 있지만(예전에 악비 논쟁이나 정성공 논쟁 등이 대표적 사례), 아무래도 국가적 차원에서 시행된 프로젝트라는 점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첫댓글 요점을 잘못 알고 계시네요. 동북공정의 주된 주장은 '고구려는 지방정권이다', 간도를 비롯한 만주는 시종일관 중국 중앙정부의 지배하에 있었다(그러니 한국은 껴들지 말라는 뜻)이지 '한사군은 평양에 있었다'가 아닙니다. 한사군또한 그들의 연구 목표지만 그게 동북공정의 핵심은 아닙니다. 한 사군의 위치는 평양인지 요동인지 이견이 많지만, 최소한 광무제가 군사를 보냈다는 44년 이후의 낙랑군은 확실히 평양에 있던건 확실합니다. 그지역 유물이 중국계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이라 주장하는 그들 주장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중국의
1)삼국지에 있는 낙랑정벌기록을 보면 낙랑이 요서지역에 있었음을 짐작케 합니다.2)후한서 광무제 본기에는 "낙랑은 군이며,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3)사마천의 사기에는 "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고 기록돼 있습니다.4)수나라군의 진격로에도 한사군이 나옵니다.
수양제는 좌군 7군은 요동도, 8군은 현도도, 9군은 부여도, 10군은 조선도, 12군은 낙랑도,우군 4군은 임둔도, 11군은 대방도를 거쳐 평양으로 집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5)그런데 문제는 평양의 대동강유역에서는 5세기초에 제작된 낙랑군의 벽돌들도 발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313년에 멸망했는데 100 여년후에 제작된 낙랑군의 벽돌들이 발굴됐다??? 평양의 대동강 유역에서 중국계 세력들이 존재했던건 분명합니다. 위내용은 네이버에서 퍼온건데 궁금해서 올려봅니다
1. 삼국지에 나왔다는 낙랑정벌기록이 어디에 나온건지 말씀해 주십시오. 삼국지에 고구려가 낙랑을 쳤다는 기록은 본 적이 없습니다.-혹시 후한서에 부여가 낙랑을 공격했다는 기사를 혼동한건 아닌가요? 2.광무제 본기에 있는 낙랑인 왕조의 반란에 달린 주석 말씀이군요. '낙랑은 군이며..' 이 기록은 6세기에 주석으로 달린 것입니다. 3. 역시 6세기 주석이군요. 3세기 말 서적인 태강지리지를 인용한 ... 5. 이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어디서 들으셨는지 출처를 밝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 4의 문제는 6세기에서 7세기 초의 중국 상황과 관련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시기 기록에 묘사하는 낙랑군은 삼국지 동이전의 낙랑군과 위치가 달랐던 것으로 나옵니다. 후대 낙랑*대방이 멸망하면서 요서지역으로 군현을 옮겨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 4는 낙랑이 요서에 있었다는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또한 삼국지 동이전의 낙랑군은 삼한, 고구려, 옥저와의 위치를 고려하면 평양지역에 있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말대로 한사군때문에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고 만주가 중국땅이라면, 한때 로마의 속주였던 프랑스, 스페인, 영국, 남서독일 모두 이탈리아에게 무조건 항복, 합병되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프랑스, 스페인등 옛 로마제국의 속주들이 그럽니까? 안그러죠. 결국 중국의 주장은 한마디로 '돌았다',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것밖에 안됩니다. 그러니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다해도 그것이 한민족이 약했다거나 중국의 신하였다는 식으로 해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중국인들이 해외에서는 무시받더라도 자국민들의 단결을 이끌어 내려고 국내에서 일부로 '미친척'을 할경우 막기가 힘들다는 점이 남습니다만,
우리 자신이 중국인보다 더 합리적이고 더 이성적이고 더 솔직하며 더 '문명적임'을 보여주려면은 최소한 낙랑군이 44년 이후에는 한반도에 있음을 부정해선 안될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중국처럼(비록 주장은 다르지만) 자국중심주의라고 욕을 먹게 되어, 결과적으로는 국내에서는 물론 해외에서도 우리를 도와줄 이들을 모을 수 없게 됩니다.
동북공정의 경우 앞서 말했듯이 님의 주장과는 다른 측면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자료를 찾아본 후에 다시 동북공정에 대해 의문나는 사항을 물으셨으면 합니다.
듣기로 중국내에서 연변대학교와 쑹청유를 비롯한 북경대학교는 동북공정에 부정적인 입장인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이들을 보건대, 동북공정은 중국학계 "전체"에서 주장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참여하는 사람의 숫자가 많고 국가에서 후원을 해준다는 점이 문제로 남지요. 다만, 이게 어디까지 지지를 받고 어디까지 부정당하는지...
문제는 그 공정에 동원된 학자들이 중국 학계에서 굉장한 실력을 갖고 있는 연구자들(사학자 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동원됨)이라는 것입니다. 북한처럼 개인 숭배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중국 학자들 간에 국가 프로젝트에 부정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도 있지만(예전에 악비 논쟁이나 정성공 논쟁 등이 대표적 사례), 아무래도 국가적 차원에서 시행된 프로젝트라는 점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중국 동북공정 사업은 2007년 2월달에 끝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