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만난 어린 왕자’
어제 오후 대학병원 방사선 치료실 앞에 앉아 있어야 할 일이 있었다. 치료를 받으러 온 암 환자들이 차례를 기다리면서 서로 각자가 겪는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때 치료를 받기 위해 병실에서 내려온 입원환자인 듯, 환자복을 입은 예닐곱 살 된 남자아이가 엄마와 함께 내 쪽으로 왔다.
아이 엄마와 다른 환자들이 나누는 대화들을 들어보니 아이는 소뇌암이고, 함암치료를 무척 고통스러워하는 모양이었다. 유난히 흰 얼굴에 파리하게 깎은 머리가 안쓰러워 보이는 아이는 내 옆 빈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한동안 내 목발을 번갈아 보더니 물었다.
“아줌마 이 목발들을 짚어야 걸을 수 있어요?”
‘그렇다’고 끄덕이자 아이는 ‘그럼 어깨가 너무 아프겠네요.’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몇 년 전 프랑스에 다녀온 학생이 선물로 준 작은 어린왕자 플라스틱 인형이 달린 내 열쇠고리를 한참이나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아줌마, 이 어린 왕자는 눈이 없어요.’ 너무 낡아서 눈이 지워졌기 때문이다. ‘아줌마가 눈을 다시 그려줬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어린 왕자가 다시 볼 수 있잖아요.’
1943년에 출간된 생 땍쥐베리(1900-1944)의 어린 왕자는 장르로 다지면 동화의 범주에 속하지만 내용을 보면 아이보다 어른에 더 걸맞은 책이다.
어느 날 사하라 사막 한 가운데에 불시착한 비행사 ‘나’는 이상한 복장의 어린 아이를 만난다. 그 소년은 아주 작은 소혹성의 왕자였다. 투정만 부리는 장미꽃을 별에 남겨 두고 여행길에 오른 왕자는 여섯 개의 별-각기 명령할 줄박에 모르는 왕(남에게 군림하려고만 한 어른), 남들이 박수쳐주기만을 바라는 허영꾼(허영 속에 사는 어른), 술을 마시는 게 부끄러워 그걸 잊기 위해 술을 마시는 술꾼(허무주의에 빠진 어른), 우주의 5억 개 별이 모두 자기 것이라고 되풀이 세고 있는 상인(물질 만능주의 어른), 1분마다 한 번씩 불을 켜고 끄는 점등인(기계 문명에 인간성을 상실한 어른), 아직 저기 별을 탐사해보지 못한 지리학자(이론만 알고 행동이 결여된 어른)가 사는-을 순례하고 지구에 왔다.
어린 왕자는 우연히 아름다운 장미가 가득 피어있는 정원을 보고 지금까지 단 하나의 장미를 갖고도 부자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초라해져서 그만 풀밭에 엎드려 울고 만다. 너무 쓸쓸한 나머지 여우에게 친구가 되자고 제안하자 여우는 ‘아직 길들여지 않아서’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내게 넌 아직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한 아이에 불과해, 하지만 네가 날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 필요로 하게 되지. 내겐 내가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거야. 만일 네가 날 길들인다면, 마치 태양이 떠오르듯 내 세상은 환해질 거야. 나는 다른 발자국 소리와 구별되는 네 발자국 소리를 알게 될거구. 저걸 봐? 밀밭이 보이지? 난 빵을 먹지 않으니까 밀밭은 아무 의미도 없어. 그건 슬픈 일이지. 그러나 넌 금빛 머리칼을 가졌어. 그러니까 네가 날 길들인다면 밀은 금빛이니까 너를 생각나게 할 거야. 그러면 난 밀밭을 지나가는 바람소리도 사랑하게 될거야. 그러면 난 밀밭을 지나가는 바람소리도 사랑하게 되겠지. 만약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거야. 그리고 시간이 자날수록 더욱더 행복해질거야.
작별 인사를 할 때, 여우는 선물로 비밀 하나를 가르져 준다 ‘내 미밀이란 이런 거야. 제대로 보려면 마음으로 봐야 해,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거든.’ 어린 왕자는 마음을 쏟아 ‘길들인’ 장미의 소중함을 기억하고 다시 자기의 별로 돌아간다.
무조건 ‘보임’이 중요한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관심과 이기주의로 단단히 무장하고 살아가는 내게 자신의 고통보다는 남의 고통을 먼저 알아보던, 병원에서 만난 어린 왕자(이름은 ‘호재’라고 했다.)는 이 비밀을 다시 일깨워 주었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호재의 부탁을 잊지 않고 내 열쇠고리의 색 바랜 어린 왕자의 얼굴에 사인펜으로 눈을 그려 넣었다.
내 마음 속 어딘가에서 잠자고 있을 어린 왕자가 깨어나 다시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끔------.
첫댓글 10여 년 전에 장영희 교수의 수필집이 우리 독서계를 강타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소아마비이고, 암 투병을 하면서 쓴 글이 너무 해맑아서ㅡ , 이것이 수필을 쓰는 분들의 눈에는 오히려 눈에 들지 않았는지 --
나부터, 우리 수필가들이 어린애같은 맑은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았나 싶어서 올려 봅니다.
앞으로도 계속하여 올릴까합니다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