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안거 해제 법어모음
[출처 - 불교정보센터]
덕숭총림 원담스님
지난 4일은 하안거 해제일이었습니다. 전국 선원에서 용맹정진에 들어갔던 스님들이
수행정진에 몰두하다 다시 3개월간의 운수납자의 수행길에 올랐습니다. 해제일날 수덕
사,송광사,해인사에서 있었던 방장스님들의 해제법어를 옮깁니다.
一物이 長在天地前인데 無量佛祖 自個出이로다. 東西南北 無處土한데 忽然突出杖子로
다.
나무아미타불 ---덕숭총림 방장 원담스님
오늘 대중이 신사년 하안거 해제법문을 들으려고 이렇게 한자리에 앉아 있는데 법문
을 어떻게 들어야 바로 듣는 법문이냐? 법문을 바로 들으려면 마음 비우는 법을 알아
야 법문을 바로 듣는 것입니다. 나와 네가 다 비어야 하고, 부처와 중생이 비어야 되
고, 옳고 그른 것이 이 자리에 비어야 하고, 알고 모르는 것이 비어야 하고, 깨닫고 미
(迷)한 것이 비어야 하고, 비었다고 하는 그 생각까지도 비워야 가히 법문을 들을 수 있
는 것입니다.
우리 대중이 그렇게 철저하게 마음이 비었다고 할 것 같으면 오늘 내가 입을 열기 전
에 해제법문을 이미 들어 마쳤을 것이고, 그렇게 철저하게 마음을 비우지 못했다고 할
것 같으면 이 중이 법상(法床)에 올라앉아서 아무리 ‘횡야설, 수야설’(橫也說,竪也說)
한다고 하더라도 마침내 한 마디도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피차(彼此)에 큰 죄를 짓
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이 “명상(冥想)도 시(是) 마업이며 언설(言說)도 시(是)마업이며 문
자(文字)도 시 마업이며 기억불허(記憶不許)라고 하더라도 역시 마업이니라.” 하셨어.
이 중의 형상(形狀)은 그만두고 3천년 전 석가 부처님이 여기에 나타나셔서 법문을 하
신다고 하는 그 형상도 또 마업이라.
만약 대중이 이 중이 이 주장자를 들고 이렇게 앉아서 설명하는 이것만을 본다고 할
것 같으면 여기 앉은 이 중이 바로 마업을 설(說)하는 것이 되는 것이고, 이 형상만 본
다고 할 것 같으면 대중도 마구니의 말을 듣는 것에 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상과 모든 사량(思量)과 일체 집착과 같은 것이 텅 빈 가운데라야 비로소 불조(佛祖)
의 법문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읊은 하안거 해제 게송은 “일물(一物)이 장재천지전(長在天地前)이요” 한 물
건(物件)이 길이 있으되 언제부터 있었느냐. 하늘 땅 생기기 이전(以前)에 있었던 물건
이요, 옛 부처 나기 전에 있었던 물건이요, 이 육신 생기기 이전에 있었던 물건이요.
이 생각 일어나기 이전에 있었던 물건이라.
“無量 佛祖가 自個出이요”
한량(限量)이 없는 부처님과 조사(祖師)가 자못 이 낱 가운데에서 출현을 했더라 이말
이야.
“東西南北이 無處土한데”
이 물건을 동서남북 사방, 천지, 하늘 땅 인간 지옥을 다 뒤진다고 하더라도 마침내 이
한 물건은 찾아볼 수가 없어. 아무리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어. 찾았다고 하면 이
물건이 아니야. 봤다고 하면 이 물건이 아니야. 들을 수 있다고 하면 이 물건이 아니
야. 대체 그러면 그 물건이 어떤 물건이냐.
“忽然突出杖子라.”
홀연(忽然)히 주장자 머리 위에 돌출(突出)해 있더라.
아무리 속일래야 속일 수가 없어. 이렇게 분명한 사실을 분명하게 닦아 가는 것이 우
리 선객의 공부입니다. 이렇게 분명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닦아 간다고 하는 것은 “평지
상(平地上)에 기파도(起波濤)요, 허공(虛空)에 발염(發炎)이로다.” 평지 가운데 공연스
레 파도가 일어나는 것과 같고, 허공 가운데 불꽃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이말이야. 이
렇게 분명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닦아야 하고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 대체 거짓말이냐,
참말이냐? 중대한 얘기입니다, 이것이. 이렇기 때문에 법문을 비우지 않고는 들을 수
가 없는 겁니다.
“開口也差요, 開口也差로다”
입을 열면 그르치고 또한 그르치더라.
溪楊住 絲絲綠하고 後園桃花 片片紅한데 三春嘉節 鳥啼歸하고 絶壁須危 花笑立이로
다. 나무아미타불
시냇가의 푸른 버들은 실실이 푸르고 뒷동산에 도화꽃은 점점이 붉더라 아름다운 봄이
지만 그 새들은 울고 돌아가고 절벽이 아무리 위험하지만 그 절명한 꽃은 웃고 섰더라.
대체 이것이 거짓말이냐 참 말이냐!
할(喝)!
조계총림 보성스님
橫看成嶺側成峰이라 遠近高低各不同이로다. 不識廬山眞面目은 只緣身在此山中이로
다.--- 조계총림 방장 보성스님
선종에서 선택한 세 가지 소의경전이 있으니 금강(金剛), 원각(圓覺), 능엄(楞嚴)이다.
이 경전에서 공부하는 납자가 제1구(第一句)를 천득(薦得)하면 견성할 수 있기 때문이
다.
금강경 제1구는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
相) 즉견여래(卽見如來)다.
제방강사(諸方講師)들은 모두 “무릇 상(相)이 있는 바는 다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상이 상 아님을 보면 곧 여래(如來)를 본다”고 하였다.
그러나 덕숭산 선지식 만공스님은 “곧 보는 것이 모두 여래”라고 했다고 한다.
금일삼하안거(今日三夏安居) 해제대중은 부처님이 설하신 금강경 말고 각자가 발견한
자기 금강경 이 있을 것이니 이 자리에서 당당하게 제시하기 바란다. 만일 제시하지 못
한다면 석달 동안 먹은 밥 값을 내놔야 할 것이다. 영양(英陽)에는 고추요 한산(韓山)
에는 모시가 좋다고 평한다. 발우(鉢盂)에는 자루가 있으면 안되고 조리는 새지 않으
면 못쓴다고 했다.
橫看成嶺側成峰이라 遠近高低各不同이로다. 不識廬山眞面目은 只緣身在此山中이로
다.
가로 보면 고개요 모로 보면 봉우리라. 멀고 가깝고 높고 낮은 것 하나도 같은 것이 없
다. 여산의 참 모습을 모르는 것은 이 몸이 저 산 속에 갇혀 있기 때문일세.
수연여시(雖然如是)라 여어음수(如魚飮水)에 냉난(冷暖)을 자지(自知)로다.
비록 그러하기는 하나 고기가 물을 마셔봐야 차고 더운 것을 안다.
遂下座
해인총림 법전스님
父子夏裏不虛過하니
刺得一雙沒底靴로다.
直至于今無着處하니
大家赤脚唱田歌로다.---해인총림 방장 법전 스님
부자가 한여름을 헛보내지 않고서
바닥없는 신 한 켤레 삼아 놓았네.
오늘에 이르도록 쓸모가 없어서
온 식구 맨발로 밭노래를 부른다.
위산선사가 여름안거 해젯날 앙산스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올 여름에 무엇을 했는가?”
“한 뙈기의 밭을 일구어 한 광주리의 조를 심었습니다.”
“그러면 그대는 올 여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구나.”
이에 앙산이 도리어 물었습니다.
“화상께서는 올 여름에 무엇을 하셨습니까?”
“낮에는 밥 한 그릇 먹고 새벽에는 죽 한 그릇 먹었도다”
“화상께서도 올 여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물러서면서 혀를 날름내는 것이였습니다.
이에 위산선사가 물었습니다.
“그대는 어째서 손수 칼날을 들고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가?”
이에 앙산스님은 소매를 흔들면서 나가버렸습니다.
해제입니다.
서촉(西蜀)땅 보복사(保福寺) 회암휘(晦岩暉) 선사는 하안거 해제 때 이런 소참법문을
하였습니다.
“큰 지혜는 밝아서 시방세계를 녹인다. 소리와 모양을 초월하고 옛날과 지금을 뛰어넘
으니 침묵으로도 알 수 없고 말로서도 이 경지에 나아갈 수 없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
께서 마갈타국에서 21일간 입을 열지 않았고 네 곳에서는 있는 힘을 다해 ‘이 법은 사
량분별로서 알 수 없는 것이다’라고 설법하셨다. 사실 이 법(法)은 말이나 글로서 보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상(相)이 적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들어 보여줌은 비유하자면 절벽에서 돌이 떨어지는 것과 같다. 즉 보
는 사람은 다른 곳에서 눈을 팔 수가 없는 것이다. 반드시 한 생각에 잘못을 알아서 앞
뒤가 딱 끊겨서 전체를 짊어지고 가는 것이 참다운 정진이며 참된 법으로 여래께 공양
하는 것이다.
한 차례 영산회상 모임이 엄연히 흩어지지 않으니 이와같이 언제나 움직이지 않고 한
생각 한 생각을 살펴보아야 한다. 또 어찌하여 90일 동안 오랏줄 없이 스스로 묶어두
려 하는가? 그렇지만 누더기를 머리에 뒤집어 쓰면 모든 것이 그만이니 이럴 때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개석지붕(介石智朋)선사는 여름결제가 끝나는 날 이런 야참법문을 하였습니다.
“90일 동안 꼼짝 않으니 그물 속 둥지에 잠든 새요, 석달동안의 안거는 무덤을 지키는
여우로다.
삶과 죽음이 이르지 않는 곳에서 머리가 셋에 팔이 여섯 개인 귀신이 원각(圓覺)의 가
람을 뒤덮는 일을 본다 해도 그것은 말뚝을 안고 헤엄을 치는 격이라 하겠다.
운황산 앞 두 그루 나무 아래 90일 동안 알맞게 바람불고 알맞게 비내려, 하루 스물네
시간 적어도 더할 수 없고 많아도 뺄 수 없는 일년 365일을 날마다 안거하고 때때로 자
자(自恣)하여, 둥근 건 둥글고 네모난 건 네모나며 긴 것은 길고 짧은 것은 짧다. 그렇
다고 해도 깨끗한 땅에 머리를 일으킴을 면치 못하리니 결국 어찌해야 하겠는가?
붕새가 나래를 펴니 하늘이 아득하고 큰 자라가 몸을 돌리니 바다가 비좁도다.”
항주(杭州) 보은사(報恩寺) 혜명(慧明)선사가 해제날 두 선객에게 물었습니다.
“수좌여! 요즈음 어디서 떠나왔는가?”
“산에서 떠나 왔습니다.”
“수좌가 이 산을 떠나 서울에 가면 이 산엔 수좌가 모자라고, 서울에는 수좌가 남는다.
남으면 마음 밖에 법이 있고, 모자라면 마음 법이 두루하지 못한다. 도리를 말하면 살
아도 좋거니와 말하지 못하면 떠나라.”
그러자 두 선객은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에 대하여 대혜종고(大慧宗)스님은 대신 말했습니다.
“화상은 저를 속일 수 없고 저도 화상을 속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말했습니다.
“지금 서로 속일 구절을 말할 이가 있는가? 만일 이른다면 금강덩이를 차버리고 밤가
시를 삼켰다고 허락하리라.”
해제 대중들이여!
위산선사가 여름안거 해제날 앙산스님에게 ‘그대는 올 여름에 무엇을 했느냐’고 물으
니 ‘한 뙈기의 밭을 일구어 한 광주리의 조를 심었다’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제자인 앙
산이 스승 위산에게 ‘화상께서는 올 여름에 무엇을 했느냐’고 물으니 ‘낮에는 밥 한 그
릇 먹고 새벽에는 죽 한 그릇 먹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물러서면서 혀를 날름내니 위산선사가 ‘그대는 어째서 손수 칼날을 들고 스스
로의 목숨을 끊는가?’하고 물으니 앙산스님은 소매를 흔들면서 나가버립니다.
위산의 부자가 보통 때 만나서 신통을 부리는 것이 예전과 달랐습니다. 이에 대하여 산
승이 한마디 하겠습니다.
“開一片田하니 密密綿綿이요 兩頓粥飯하니 其道自辨이로다.
한뙈기의 밭을 일구니 비밀리에 후손들에게 이어지고 두 때의 죽과 밥을 먹으니 도가
저절로 이루어진다.“
산승이 한 여름동안 여러분을 만났으나 여러분이 스스로 몰랐을 뿐입니다. 만약 알아
서 공부를 한 조각이라도 이루었다면 어떤 것이 이 한 조각입니까? 해제하고서 만행을
다니면서 잘 참구해보시기 바랍니다.
仰山眼照四天下거늘
大圓面前倒平地로다.
山可謂養子緣이나
不免後人脣齒로다.
앙산은 눈길이 사천하를 비추건만
위산의 앞에서는 평지에서 넘어졌네.
위산은 아들 기를 인연은 있으나
뒷사람들의 시비를 면치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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