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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토론방 연개소문아들들간 권력다툼문제에 대해서 당나라의 간계일 가능성
선구자 추천 0 조회 419 08.05.30 19:51 댓글 1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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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05.30 23:36

    첫댓글 당나라가 3차 전쟁에 대해서 머뭇거렸던 것을 떠올리면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합니다.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08.05.31 11:49

    연개소문이 독점권력기반을 목적으로 어떤 정치적 행위를 했다는 근거는 현재 전해지는 사료만 본다면 없습니다. 많은 대신들을 죽이기는 하였으나 고식의 아들인 고량 집안과 고현의 부친의 가문은 국내성에 기반을 둔 연개소문과 대립되는 전통귀족이나 연개소문의 정변 후에도 권력 유지를 하였으며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다양한 성씨를 가진 귀족들이 활약하는 기록도 있으며 동생인 연정토 같은 경우는 오히려 권력에서 제대로 소외된 케이스며 아들들의 경우 관등을 높여주기는 하였으나 이는 역대 고구려의 명림답부, 음루, 고밀, 연자유 등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로 정치적 특징일 뿐입니다.

  • 08.05.31 12:09

    연개소문이 단지 독재를 하기 위해 권력을 잡았는가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연개소문이 독재권력을 유지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들들의 관등을 높여주는데 굉장히 파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다른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숙청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독재권력인가 아닌가를 가릴 기준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예컨대 고려 무신정권의 경우에도 집권자의 반대 세력들(문신, 무신 모두 포함)이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무신정권이 독재권력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요. 연개소문이 후계를 명확히 세워놓지 못한 것이 고구려 동요의 한 원인이 된 것은 분명합니다.

  • 08.05.31 21:01

    연씨 형제에게 높은 관등을 주긴 하였으나, 구체적인 관직을 봤을 때 연개소문의 대부분을 물려 받은 이는 연남생 하나로 초점이 모아질 뿐더러 고구려의 전통 관습상 그리되는 것이 당연했을 것입니다. 제가 위에서 거론한 연개소문과 다른 정치적 성향을 가진 인물들은 하급귀족이 아니라 1급 전통 귀족들입니다. 독재권력을 위해서라면 숙청할 때 제일 먼저 이들을 쳐야 하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 합니다. 연개소문의 장남 연남생이 온건적인 구귀족 국내성 세력과 어떤 식으로든지 연계되어 있다는 것은 연남생의 외가 내지 처가가 국내성 세력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연개소문은 정변을 일으킴으로 권력이 전 보다야 강화되기는

  • 08.05.31 21:01

    하였지만 원활한 대당대전 수행을 위해 독재는 커녕 되려 국내성 세력은 물론 왕실과도 타협을 할 수 밖에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국내성 귀족들은 자신들에게 정세(대내외적으로 반전 분위기)가 유리해지면 이전의 국책(대외강경책)을 일거에 뒤집을 정도로 강한 세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영양태왕은 수의 침략의도와 이를 명분 삼아 선제공격을 함으로 전쟁할 수 밖에 없는 정세를 만들어 국내성 귀족들이 전쟁에 협조하게끔 하였을 것이고 연개소문도 이와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가 멸망에 직전에 이르러 고구려 정확히 말해 국내성 귀족들은 더 이상 전쟁을 할 이유가 없어지자 반전을 주장하게 되고 결국 영양태왕 말년 부터

  • 08.05.31 21:02

    영류태왕 집권기의 국책은 반전쪽으로 기울고 정권은 국내성 귀족들인 온건파가 득세한 것입니다. 연개소문 죽음 전후에도 2차 고당전쟁 이후 사실상 당과의 전쟁은 종전된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국내성 귀족들이 반전을 주장함에 따라 결국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는 대당온건책을 펼치게 됩니다. 영양태왕이나 연개소문은 권력이 강화되기는 하였으나 국내성 귀족들을 비롯한 온건파들이 한 독재는 할 수 없을 뿐더러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그들의 협조를 이끌어내야 할 판이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영영태왕과 연개소문은 국내성 귀족들과 타협 중 강수를 놓을 때 전쟁은 기정사실화 되었고 협조를 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고 그에 따라 지금

  • 08.05.31 21:03

    당신들이 누리고 있는 부귀영화도 말짱꽝이될 것이다라는 식으로 설득 했을 것입니다. 때문에 대수당대전 때는 국내성 귀족들도 타협을 하고 이왕에 벌어진 전쟁이니 전쟁 기간 만큼은 최선을 다해 참전했으리라 여겨집니다. 주절주절 말이 길어졌는데, 제 결론은 연개소문은 권력 독점은 커녕 타협을 이끌어내야만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 08.05.31 22:47

    개인적으로는 연개소문의 후계자 선택도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연개소문이 후계자에 관한 본인 사후 최상의 전개는 장자인 연남생에게 막리지 자리를 주고 남건, 남산이 남생을 보좌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우선 명분상으로도 연남건 보다는 연남생이 장자이기 때문에 유리한 위치에 있고 만일 남생 보다 약간 자질이 뛰어난 것으려 여겨지는 남건을 택하였다면 필연적으로 피바람이 불었을 것입니다. 특히 연남생의 배후 세력으로 추정되는 강력한 구귀족인 국내성 세력과 싸움도 피하지는 못했을 것이고 고구려에는 극심한 내분이 일어났을 것입니다.(결과적으로 내분이 일어나긴 했습니다.)

  • 08.06.02 21:48

    남생과 남건,남산형제를 오가며 이간질을 한 "어떤사람"이란 존재가 당나라의 첩자일 수도 있겠네요..남생이 확인차 평양으로 심복을 보냇을때 그토록 쉽게 발각되었다면 또한 앞의 어떤사람과 동일인이나 동일세력의 완벽한 농간일수도...남생과 남건,남산 형제를 이간질 시킴으로써 가장 이득을 볼 수 있는 세력의 간계라고 본다면 당나라의 첩자문제를 배제시킬 수도 없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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