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5,1-12)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는
말씀은 아주 깊은 뜻을 갖고 있습니다.
랍비들은 제자들과 어떤 일을 상의할 때에는 아무렇게나 해도 됐지만
율법을 가르칠 때에는 반드시 앉아서
가르쳤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앉아서 말씀하신 것은
사소한 이야기를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시려는 것이라는 것을 시사한 것입니다.
진복팔단(眞福八端, Beatitudes)은
그리스도의 ‘산상수훈’(山上垂訓, 마태 5,1-12)과
들에서 한 설교(루카 6,20-22)에
나오는
다가올 복(福)에
대한 그리스도의 약속입니다.
루카 복음에는 제자들에게 외적인 상황과 관련하여
이야기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마태오 복음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될 수 있는
8개(혹은 9개)의 정신적인 축복을 전하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서에는 불행한 사람에 대한
4개의 징벌 예고가 뒤따르고 있습니다.
진복팔단은 그리스도교의 완전한 덕을 그리고 있는데
구약성경(이사 32,20;
시편 1,1)와(루카 12,37; 마태
13,16)에
비슷한 내용이 전해지고 있으며
모든 복음서 말씀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복되어라, 영이 가난한 사람들!(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또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How happy are the poor in spirit)”로 번역하고 있는데 “복되다”는 것과 “행복하다”는 것은 다릅니다.
물론 이를 몰라도 복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젊은 부부가 감사하는 마음이 없어도
자고 있는 아이를 서로 안으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좋은 건강을 타고 난 것은 복이다.”고 말할 때
전혀 복이라고 느끼지 못하고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길 때가 많습니다.
건강을 잃어봐야 그제서야 건강에 대하여 감사하게 됩니다.
틱낫한(Thich Nhat Hanh) 스님이 말했습니다.
“이가 아파야 아프지 않았을 때가 얼마나 좋았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행복은 스쳐가는
일시적인 감정에 불과합니다.
‘행복(happiness)’이란 단어는 ‘happen’과 ‘perhaps’라는
‘우연성(randomness)’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행복은 만날 수도 있고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날씨와 같이 감정은 지나가며 항상 변합니다.
따라서 행복을 절대로 붙들어 둘 수는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행복하여라’하고 말씀하시지 않고
‘복되어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알든 모르든 또는 감사하든 하지 않든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복은 변화무쌍한 감정이나 생각과 관계없이 찾아옵니다.
중세의 신학자들은 이를
‘beattitudo’라고 했습니다.
축복은 행복한 감정을 말하는 것도 아니며 당연히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진복팔단을 읽을 때 사랑의 하느님께서 부모처럼
우리를 돌보고 계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들이 약해질 때나 어려울 때 이 축복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들이 하느님의 선하심을
조금이라도 본 받게 될 때에야 비로소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진복팔단은 예수님을 본받아야만 얻을 수 있으며
아울러 영광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회개하지 않고
선한 일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복을 주실 리가 없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의 B-29 조종사였던
클라우드 이덜리(Claude Eatherly)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리고 귀환한 후
사람이 너무나 바뀌어 친구들조차도 그를 알아 보지 못했습니다.
‘전쟁 영웅’이라는
칭호를 너무나 싫어했고 연금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투하한 원자 폭탄 때문에 고아가 된 아이들을 위하여
히로시마에 돈을 송금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그가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것은 엄청난 비극을 불러왔기에 항상 마음이 편하지 않아
자살하려고까지 했다고 고백하는 편지를 히로시마 시의회에 보냈습니다.
이덜리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축복을 받았지만
결코 행복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전쟁영웅’이라는
칭호에 만족했더라면 일시적으로나마 행복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또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나
성령을 받기 위해서 종교를 갖습니다만,
먼저 자기 성찰을
통하여 ‘참 나’를 찾아 말씀을 실천하고 살지 않으면
바라는 목적을 이룰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이란 큰 그림을 그려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맹신(盲信)하거나
매일을 죽이면서 사는 것이 보통입니다.
아무 목적도 없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많은 사람들이 기복신앙을 믿음으로써
수행(修行)은
하지 않고 복만 받으려고 합니다.
‘안다’는 의미의 히브리어 ‘야다(yada)’는
인식 대상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뿐 아니라
대상에 대한 책임이나
대상과의 관계성까지
알아차리는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아는 많은 원로 형제 자매들은
깨달음은 지식을 버려나가는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맹신하면서 교회 활동 열심히 하고 교리나 의식(儀式)에만 충실함으로써
지혜는 가질 생각을 하지 않고
바오로 사도가 말한 쓰레기 같은 지식만 채우려고 하면서도
자신이 믿음이 깊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경전을 왜곡한 가르침을
받게 되면 맹신(盲信)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최근에 노리치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Revelations of Divine Love)』에서
“믿음은 진심으로 믿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김으로써 얻게 되는 깨달음이며
믿음을 통하여 덕(德)을 얻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자주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게 되면
곧 이기적이 되어버리고 전혀 의롭지 못하게 되어
자신 안에 있는 반감(反感)만 발견하게 됩니다.”
하고 말한 것을 보고 제대로 믿게 되면 덕을 쌓게 되지만
자주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게 되면
곧 이기적이 되어버리고 전혀 의롭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 모습으로서의 사람(capax dei)’으로 창조되면서
겉모습뿐만 아니라 본성까지도 하느님의 본성을 닮게 만들어졌으므로
우리의 ‘참 나’는 ‘하느님의 본성’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첫댓글 행복은 즐거음(프레져), 몰두 (인그로스트), 의미(미닝) 로 구성된다 하지요,... 작금은 이 '의미'를 좁게 좁게,... 공동체 선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크게는 지구공동체)을 추구ㅑ 야야 합니다. 이 의미를 상실한 인간들이 바로 이 좋은 여휴에 콩밥먹고 있는 법조비리 3인방 등신들인거죠, 병신들 그 세지도 못할 많은 돈을 공동체 선을 가난하고 통곡하는 이들에게 의미를 두었으면, 쯔쯔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