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恩惠)에 감사하라
롬11:1-10절, 307.308.304장.3927 Bible 말씀연구소 박봉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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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인간의 죄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설명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 얻는 진리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흩어진 백성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동족의 죄와 결점들을 지적하는 것은 자기 동족이 미워서 그리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로부터 비애국적 또 반국가적이란 욕도 먹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가슴 속에는 이방인이 구원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시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좌우를 돌아보아도 그들은 회개하고 돌아올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밖에 있다는 것이 9장과 10장의 큰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오늘 읽은 11장은 사도 바울의 질문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묻고는 스스로 대답하기를 "그럴 수 없느니라."(11:1)고 강한 어조로 이스라엘에게 소망이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사실 당장에 이스라엘 백성의 태도를 보면 영원히 소망이 없는 것같이 보일 것입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은 백성이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배신한 것입니다. 그토록 수많은 세월동안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메시야가 오시리라고 하는 예언을 들었건만 정작 메시야가 왔으나 메시야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악역을 담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 후의 족장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고 역사의 순간순간 마다 간섭해 주시고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순간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기적을 보여 주셔서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된 하나님이신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해서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 얻는 줄 알았고, 하나님의 약속이 그저 육적인 것인 줄만 알았지 영적인 것임을 미쳐 못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정작 내어준 사람들이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같은 종교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면서 설교하던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의 잔을 마시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는 정말 택한 백성의 말로가 고작 이것이었을까 하고 낙심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절대로 버리시지 않는다는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사실 오늘 본문의 줄거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장차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주 앞에 돌아올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전체는 물론 아니지만 부분적으로 예수를 영접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좋은 예로서 사도 바울 자신을 들고 있습니다.
1절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절대로 버리지 않았다고 외치면서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고 간증을 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자기 같은 순수한 정통파 유대인도 예수의 은총의 포로가 되어서, 이렇게 복음을 위해서 일할 수 있게 된 것을 보면, 다른 유대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이스라엘인, 아브라함의 씨, 베냐민 지파라고 3중적으로 보장된 골수분자도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은 것을 보면, 예수를 박해하고 있는 유대인들도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베냐민 지파는 독특한 지파입니다.
베냐민은 야곱이 사랑하는 처 라헬이 낳은 막내로서 약속의 땅에서 출생했습니다. 더구나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베냐민 지파였고(삼상9:1-2절) 솔로몬이 죽은 후 나라가 남과 북으로 갈라질 때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만이 남쪽 유다에 남아서 다윗 왕조에 충성을 다한 지파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포로 후 귀환해서, 성전을 건축하고 새 나라를 세우는 핵심 지파가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모로 보나 베냐민 지파야말로 정통을 고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일 때 가편 투표에 앞장섰고, 스데반을 죽일 때 진두지휘했던 자였습니다.
정통파 유대주의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쏟고, 드디어는 다메섹에 사는 어린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러 가다가 꺼꾸러져 그 자신이 예수에게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의 말씀은 생각하면서 깨닫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내 가족이나 친척 중에서는 철저하게 유교적이고, 불교적이고 또는 재래종교에 붙들려서 전혀 예수 믿지 않을 듯이 보이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옹고집에다가 바위에 대침 격으로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도 만나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감히 말도 못 붙혀 보고 또 대화를 나눈다고 해도 결국은 아무 소용없이 끝나는 경우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택한 백성은 결국은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장중에 있느니만큼 주께서 그들은 부르실 줄 믿습니다. 우리는 희망을 버리지 말고 계속해서 남편을 위해서 또는 부모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권면하고 사랑하면서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교회사를 보면 우리나라의 무디로 불려졌던 김익두 목사는 대부흥사였습니다. 그의 부흥운동이 오늘의 한국교회 신앙의 가닥을 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본래 건달이며 깡패였습니다. 하나님은 쓸모없는 것을 들어서 쓸 수 있는 그릇으로 만드시며 악을 고쳐서 선하게 만드시는 창조주 하나님이며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본문 중에 두드러진 진리(眞理)는 사도 바울같이 극소수의 사람만 주의 일을 하는 듯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상상외로 많은 사람을 부르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준비(準備)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실례(實例)로서 바울은 열왕기상 19장의 말씀을 회상(回想)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살던 시대나 엘리야가 살던 시대는 아주 비슷했습니다. 국가적으로 종교적으로 타락해서 참으로 암담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살던 시대는 그래도 동역자도 많았고 처처에 교회도 세워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렇지만 엘리야 때는 보다 처참한 시대(時代)였습니다. 악한 이사벨이 하나님의 선지자(先知者)들을 한 사람씩 처형해 갔기 때문에 엘리야도 도망을 갔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상에 있었던 하나님의 불의 역사를 다 잊어버리고 완전히 특심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차라리 하나님께 죽고 싶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인간적으로 너무나 나약하게 되어 이제 이스라엘은 그것으로 끝나는 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왕상 19:10절에는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그 당시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스라엘 종교(宗敎)를 계승(繼承)할 자는 자기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 천인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고 했습니다.(왕상19:18절),
하나님은 그의 나라와 그의 교회와 그의 영광을 위해서 진실한 성도들을 남겨 두신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자기 혼자뿐이라고 했으나 하나님은 그 보다 7천배나 많은 사람들을 남겨 두셨습니다. 바울이 엘리야의 사건을 여기서 인용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를 붙들고 계신다는 것을 증명(證明)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그래도 엘리야가 느끼던 그 처참한 고독보다는 덜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입증(立證)해 보이고 싶었고, 소망이 아주 없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남은 자가 있음을 말했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모두다 불신앙으로 나가는 듯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소수이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을 여기저기 숨겨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 가서는 많은 무리들이 회개하고 주 앞에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아침 이 본문을 살피면서 오늘 우리 자신들과 오늘의 세상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우리도 혹시 엘리야처럼 생각하기를 "나만 홀로 남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나만이 바른 진리를 지키고, 나만이 충성하고, 나만이 바른 신앙을 지키고,
다른 사람은 다 실패하고, 다른 사람은 모두 죄악에 빠져 버렸다는 생각 말입니다. 자기 신앙만이 참되고 다른 사람의 신앙은 그릇됐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리고 자기(自己)만 의롭고 다른 사람은 다 거짓되고 불의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럴 때는 고독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신앙의 교만에 빠지게도 됩니다. 교만 중에도 신앙의 교만은 위험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신앙만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신앙은 도무지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도 참 위험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엘리야는 자기 혼자 신앙의 절개를 지킨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처처에 칠 천명의 진실한 성도들이 있음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고 따르는 것이지 내 신앙이 마치 무엇을 할 수있는 것처럼 과신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의 고독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처럼 아파하는 사람도 참으로 많고, 우리처럼 바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세상이 온통 죄악의 물결이 뒤덮여 있지만, 그래도 그 가운데 기도(祈禱)하며 울며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들의 기도와 헌신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역사를 붙들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역사는 우연히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택한 백성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관리하시며 섭리하시기 위해서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소망이 없어 보이는데 그래도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를 붙들고 계십니다.
가령 뉴욕, 암스텔담, L.A 등 세계의 대도시들은 마약과 환락의 도시로서 소돔과 고모라를 방불케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도 군데군데 기도하는 사람들이 모여 울부짖으며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는 그룹들이 여기 저기 널려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세계를 버텨주는 버팀목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메시지에는 이스라엘은 희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왕국을 위해서 남은 자를 관리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가장 타락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합시다. 일할 수 있는 대한민국에 태어나게 하시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데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은혜 베푸심을 감사드리며 하루하루 삶 속에서 작은 촛불이 되어 세상을 밝힐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3927Bible 말씀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박봉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