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배를 담은 질그릇 (고후4:7~11)
본문은 자신의 무능함으로 인하여 절망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소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모신 자신을 질그릇으로, 그리고 예수님을 그 질그릇에 담긴 보배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질그릇은 흙으로 만든 그릇으로 잘 부서집니다. 그래서 질그릇은 값이 싸고, 가치도 없고, 쓸모도 없습니다. 그런 질그릇 같은 바울의 마음에 예수님은생 명으로 담긴 보배가 되셨습니다.“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여기 본문은 인간은 질그릇처럼 연약하지만 보배이신 주님을 모시므로 보배로운 새 인생을 살게 된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 우리 인생은 질그릇 같이 약한 존재입니다.
질그릇은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을 비유로, 질그릇은 진흙으로 빚어 유약을 바르지 않은 채로 구운 그릇을 말합니다. 질그릇의 특색은 모양이 소박하고 작은 충격에도 잘 부서집니다. 사도바울이 인간을 질그릇에 비유한 이유는 타락한 인간은 질그릇처럼 그 만큼 연약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맨슨(Manson)이라는 분은 질그릇을 두고 ‘고린도의 잡화점들에서 살 수 있는 값싸고 부서지기 쉬운 도기 등잔’ 이라고 언급하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이러한 부서지기 쉬운 도기 등잔과 같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몸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빛의 중심 원천으로부터 유래된 빛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해 본 절의 의미를 확연하게 밝혀줍니다. 즉 바울은 질그릇이란 표현을 통해 인간의 육체가 지닌 한계성과 연약성을 설득력 있게 표현한 것이지요. 성경에 질그릇 비유는 롬9:20이하에서 바울이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피조물의 연약함을 효과적으로 대조하기 위해 사용한 적이 있는데,롬9:21-22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여러분, 신앙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 때 능력의 주님을 찾게 됩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비루함을 깊이 아는 자일수록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인정하게 됩니다.그래서 신앙생활은 사도 바울과 같이 자신이 질그릇 같이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처럼 약한 존재임을 인정합시다.
2. 질그릇 같이 약한 인생에게 주님은 보배가 되어 주십니다.
바울은 7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말합니다.“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복음으로 받은 모든 성도들입니다.
‘이 보배’ 란 6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을 의미하는데 바울은 이 값진 보배를 값싼 질그릇에 담겨있는 것으로 묘사하여 양자 사이에 극명한 대조를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7절에 보니 질그릇 안에 보배를 담았습니다. 그 보배는 주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으로 가득차 있습니다.주님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주고라도 사야할 보배이십니다.(마13:44-46)하나님께서는 믿는 우리 속에 보배이신 주님을 보내주셔서 우리는 보배를 가진 질그릇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배가 되시는 이유는 그분이 우리를 복되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보배이십니다.
예수님은 죄인 된 우리들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공로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때문에 주님은 우리에게 보배이십니다.
3. 질그릇처럼 약한 존재인 우리가 주님 때문에 보배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질그릇이 아니라 그 속에 무엇을 담느냐에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질그릇과 질그릇 안에 담긴 것이 하나가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박해자요 비방자요 폭행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주님을 만나 주님에게 쓰임 받으니 보배를 담은 그릇이 되어 사도 중에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주님 때문에 보배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역시 우리 안에 와 계시는 보배로우신 주님 때문에 보배로운 존재인 것입니다.
4. 질그릇 안에 보배를 담은 인생은 보배이신 주님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할 수는 있지만 영원히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옛 믿고 나서 주님 안에 거하면 만사가 형통하고 복이 눈에 보이게 팍팍 오면 좋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믿는데 더 어려워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환경이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낙심할 필요가 없는 것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고, 우리가 당하는 모든 어려움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보배를 담은 질그릇으로 살아가는 자가 당하는 어려움은 어떤 것일까요?
1) 우겨쌈입니다. (고후4;8절)
보배를 담은 질그릇으로 살아가는 자는 세상에서 사방으로 포위됩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보배이신 주님을 모신 사람은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사방이 막힐 때 하늘의 문을 열어주시는 분입니다.
왕하6:14-19을 보면 아람 군대가 엘리사 선지자를 잡으려고 사마리아성을 포위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람 군대는 밤중에 은밀하게 사마리아 성을 사방으로 둘러 포위했습니다. 아침에 그것을 본 엘리사의 사환이 매우 두려워하며 엘리사에게 고하자 엘리사는 왕하6:16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왕하6:17“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대적들이 아무리 많고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하여도 하나님은 더 많은 천사들을 보내어 성도들을 보호해 주십니다. 사방으로 우겨쌍을 당하는 바로 그때가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는 때입니다. (출애굽기 14장을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만났을 때)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14:14). 그리고 바로 홍해를 가르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물론 이는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신 것이었습니다
2) 답답함 입니다. (고후4:8절)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보배를 담은 질그릇으로 살아가는 자는 ‘답답한 일’(18절)을 만납니다. 여기서 ‘답답한 일’ 이라는 말은 적군을 포위하여 한 곳에 몰아넣는다는 의미로서 일체 의 수단이나 빠져나갈 능력이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우리가 왜 답답한지 압니까? 안 깨달아지면 답답합니다. 풀리지 않으니 답답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상황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절망하지 마시고 위를 보십시오. 위에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내가 풀 수 없는 문제가 있어도 우리는 낙심하지 맙시다. 왜냐하면 모든 문제의 해답이 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3)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고후4:9)
보배를 그 속에 담은 질그릇으로 사는자는 박해의 어려움을 만납니다. 9절에 보니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즉, 우리는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습니다. 여기 ‘박해을 받아도’ 로 번역된 ‘디오코메노이’ 는 본래 ‘사냥하다’라는 뜻을 지닌 ‘디오코’의 현재 분사 수동태인데. 이는 마치 사냥감을 추적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듯한 바울의 대적자들의 모습을 연상시킴과 아울러 바울 자신이 이러한 사냥감으로 쫓김 당하고 있는 절박한 상황을 연상시겨 줍니다. 그러나 이러한 급박한 상황 가운데서도 바울은 자신이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버린바 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성도나 교회가 핍박당하면 할수록 성도의 신앙이나 교회는 시들기는 커녕 더욱 번창합니다. 사도행전 8:1을 보면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흩어진 그 성도들이 이방 세계의 안디옥까지 복음을 전하여 안디옥 교회가 설립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행11:19-26).
4) 거꾸러뜨림의 어려움입니다 (고후4:9)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즉, ‘갑자기 습격을 당한 상태’를 말하는데, 사도행전 7장에서부터 기록된 스데반은 산헤드린 공희에서 설교한 결과 그들의 진노를 사서 돌에 맞아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돌에 맞아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순간에도 주님께 영혼을 부탁하고 자신을 돌로치는 자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행 7:58-60). 성경은 그렇게 죽은 스데반을 두고 ‘자니라’ 고 했습니다. ‘망했다’ 고 하지 않고 ‘자니라’ 고 한 것입니다. 성도가 대적들에게 핍박을 받아 거꾸러뜨림을 당하여 죽을지라도 그것은 사망이 아니라 주님안에서 편히 쉬고 자는 것이라고 성경은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불신자들은 질병이나 사업의 실패나 또 다른 충격적인 일을 당해 한번 거꾸러지면 재기하기가 힘듭니다. 그것은 그들이 혼자의 힘으로 일어서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37:24)라고 다윗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로 실족하거나 사업에 실패하거나 대적자들로 인하여 넘어지거나 성도는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그 신실하신 손길을 의지한 다면 어떤 경우를 당할지라도 재기할 수 있습니다.(잠24:16)
5)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10절)
10절은 성도의 존재 양식을 독특하게 나타냅니다. 바울은 10절“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산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 뿐 아니라 그때 수반된 죽음의 고통까지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성도만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타낼 수 있다는 성도의 존재 양식을 말한 것입니다. 또한 ‘짊어지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페리페른테스’는 ‘지니고 돌아다니다’ 라는 의미를 지닌 ‘페리폐로(irepugpa)’의 현재 분사 능동태로서 이는 ‘항상’ 으로 번역된 ‘판토테’ 란 표현과 더불어 바울이 어디를 가든지,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항상 죽음의 고통을 지니고 다녔음을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 몸에 예수의 혼적을 가졌노라”(갈 6:17)고 말한 것처럼 그의 경험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가 당했던 죽음의 고통에 날마다 참예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위대성은 이처럼 예수의 삶을 철저하게 자신의 삶에 적용하여 실천한 데 있었습니다. 우리도 바로 그처럼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사는 존재 인 것입니다.
결론
질그릇 안에 보배를 담은 우리도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우리의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 이 말은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공로를 의지하고 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질그릇과 같이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 지음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 보배 중에 보배인 예수님이 담겨져 있습니다. 비록,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는 일을 겪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넘어지지 않고, 망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생명의 보배 되신 예수님을 질그릇 같은 내 속에 모시고, 일평생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날마다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