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가장 핫(Hot)한 - 이 표현이 맞는지 모르지만 - 영화가 있다. <남한산성> 이야기다. 추석날 개봉돼 남녀불문 연령을 초월해 관람객들이 몰리고 있다 한다. 필자가 추석 날 이른 아침 찾은 극장에도 객석의 3분의2 이상은 차 보였다. 또 잘 아는 지인에 의하면 추석 이틀 후 부부가 함께 영화관을 찾았는데 빈자리가 없을 정도에 연인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함께 해 주변마저 밝아지더라는 얘기를 덧붙였다.
지금까지의 추석개봉 영화로는 가장 앞선 관객을 모으고 있다하니, 사극을 좋아하는 본인의 입장에서야 반가운 현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고개가 갸웃거려 진다.
한마디로 오감(五感)을 짜릿하게 자극하는 그런 영화도, 달달한 멜로나 청춘남녀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도, 중년인들에게 어필(?)하는 막장 급 영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젊은 관객들로 하여금 온몸을 비틀리게 하는 치고받고 싸우는 영화도 아닌, 어쩌면 분위기 자체가 무겁고 썰렁할 뿐만 아니라 나라가 거듭된 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의 삶은 말로써 필할 정도가 아니요, 조선 개국 이래 임금이 적에게 항복한 가장 치욕스런 역사를 다룬 사극영화인데도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는 데에 의아함이 더 했기 때문이다.
그런 한편으로 380년 전 1636년 12월 청나라 20만 군대의 침입으로 생사의 갈림길에서 힘들고 참담하던 그 시대를 살았던 지배계층 양반들이나 천대받고 멸시 당한 천민이나를 막론하고 신분의 귀천을 떠나 무너져가는 나라의 운명을 <남한산성>을 통해 겪어야 했던 그들의 삶을 영화를 통해 짚으면서 어쩌면 그 때와도 비슷하게만 느껴지는 이 시대를 조망해 보게 하는 것은 나름대로의 큰 의미가 있다고 보여졌다.
영화를 통해서일까, 필자가 거의 매 주말마다 지나치는 잠실 롯데월드타워의 석촌호수 옆에 위치해 흔히 ‘삼전도비(三田渡碑 ․ 문화재지정 당시 지명을 따 지음, 사적 제101호)’라 불리는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에도 일반인의 관심이 더해진 것 같다.
추석 연휴인 지난 8일 저녁 무렵 삼전도 비 앞에는 젊은이 서너 명이 비석을 설명한 표지문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잠시 후에는 중학생 정도의 딸과 부모로 보이는 세 명이 비석을 한 바퀴 돌아보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잠실역에서 석촌역으로 이어지는 대로변에 있기에 지나갈 때마다 비석을 보며 지나가기에 누군가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금방 확인된다. 하지만 비석 앞에서 관심을 갖는 이들을 대하는 경우가 드물기에 그 날은 나도 멈춰 서서 지켜봤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녀 젊은이들은 “아, 이 비석이 남한산성 그 영화와 관련 있는 삼전도 비구나” 하자 “맞네 마져. 그런데 참 크다. 무척 잘 만들었는데” 하면서 또 다른 얘기가 이어지기도 했다.
아마 그 친구들도 영화 <남한산성>을 본 듯 했다. 이 비(碑)에 관한 얘기를 하자는 건 아니지만 잠시 확인해보면, 1639년 청의 강요에 의해 건립된 삼전도비는 치욕적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여러 차례 수난을 당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지고 조공관계가 단절된 후 비석은 강물에 수장됐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인 1913년 일본에 의해 다시 세워졌고, 1945년 광복 직후 주민들이 ‘치욕의 비’라며 다시 땅속에 묻었다. 하지만 1963년 이 지역에 집중된 홍수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후 1983년 전두환 정부 당시 송파구 석촌동 289-3번지 주택가 공원으로 이전됐으나 2007년 2월 한 시민에 의해 붉은색 페인트칠로 낙서되어 표면이 훼손되는 등 홍역을 치루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과거의 역사도, 치욕의 역사도 잊어선 안 될 우리 역사라는 의식과 고증을 거쳐 2010년 비석이 서 있던 원래 위치인 석촌호수 4거리 송파구 잠실동 47번지에 자리 잡아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번엔 영화 관객의 입장에서 도입부를 보며 강렬하게 다가오던 부분에 대한 느낌을 얘기하고자 한다.
영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척화(斥和)의 대표 주자로 청나라와 일전을 불사해서라도 대의(大義)를 지켜야 한다며 화친(和親)을 주청하는 주화(主和)파 대표 최명길(이조판서 ․ 이병헌 분)과 척을 진 예조판서 김상헌(배우 김윤식 분)이 남한산성으로 가기 위해 송파강(한강의 남쪽 지류)을 건넌 후 자신을 안내해 준 나룻배 사공이 “임금님 일행을 건너 주었는데도 좁쌀 한 대박 얻지 못했다. 다음에 청나라 군사를 건너 주면 좁쌀 말 좀 주지 않겠느냐?”는 말에 결국 김상헌은 사공을 베고 만다.
그러나 사공이 나루터에서 죽은지를 모르고 할아버지(사공)를 기다리는 어린 손녀 ‘나루’를 보고 발걸음을 옮기려던 김상헌은 무거운 마음으로 나루를 남한산성 자신의 거처로 데려와서 함께 생활한다.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교차되는 속에서도 나루의 마음씀씀이를 통해 적군으로 에워 쌓여 포위된 남한산성 안에서도 다소의 위안을 찾던 김상헌은 인조의 항복과 남한산성을 떠나야 하는 순간에 자신을 보며 “언제 돌아오실 거냐”는 나루의 눈망울을 바라보며 “송파강가에 민들레꽃이 피면 꼭 돌아오겠다”고 한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옴을 이름이다. 그 봄은 또한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나라가 안정돼 평안해 지는 때를 칭함이기도 할 것이다.
이 말에 나루도 눈물 글썽한 눈망울로 “그때면 우리 할아버지도 돌아올까요? 그러면 소녀 송파강 얼음이 녹으면 꺾지를 잡아놓고 대감님 돌아오시면 반찬 해 드리겠습니다”며 눈물로 이별을 고한다. 70이 가까운 노(老) 정객과 8, 9세 어린 소녀의 애틋한 이별의 한 장면이다.
어쩌면 이 장면은 힘이 약한 나라는 힘센 나라에 먹히고 만다는 불변의 사실과 함께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나라, 약한 민족이 겪을 수밖에 없는 참담함을 담아낸 것일 수도 있다. 나아가 감독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관객에게는 그렇게 어필돼 왔다.
더불어 이 두 사람의 이별 장면은 전쟁 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김상헌과 삼학사, 화친을 주장했던 최명길 까지 당시 조선 인구의 5, 6%인 50〜60만 명이 고국 조선을 등지고 가족들과 뿔뿔이 헤어져 포로가 돼 청으로 끌려가야 했으니, 나루와 김상헌의 헤어짐은 곧 영화의 복선(伏線)을 깔아준 것은 아니었을까?
<남한산성>을 두고 왈가왈부 하고 싶은 얘기들이 많은 것 같다. 정치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작금에 직면한 대한민국의 처지와 시대상황이 엇비슷하기 때문일 것이고, 그에 빗대 자신들의 주장이 맞다는 다분히 의도된 주장이기도 할 것이다. 당리당략(黨利黨略)차원에 아전인수(我田引水)식 해석의 난무다. 소설은 소설이고, 영화는 영화일 뿐인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 국민에게 이 영화가 영화로서 만으로 비쳐지지 않고, 화면의 한 장면으로 치부될 수 없는 이유는 분명한 이유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는 상황이 한 치 앞도 예측을 불허하기 때문이다.
1636년 12월9일(압록강 도강)에서 1637년 1월30(송파구 삼전도 항복)일을 전후한 그 시대 역사를 통해 그 날의 통곡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전 국민이 올곧은 눈으로 주변국과 북한 김정은 집단, 오늘의 정세를 바로 바라봐야 할 것이다.(konas)
이현오 / 코나스 편집장. 수필가(holeekv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