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느 순간부터 울고 있었다. 극장 안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영화가 끝나고 엔드 크래딧이 올라가는 동안 고맙게도 극장 측에서는 불을 환하게 밝히지 않는다. 눈물을 닦고 주변을 정리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마크 포스터 감독의 [네버랜드를 찾아서]는 억지로 쥐어짜는 삼류 신파의 눈물이 아니라, 영혼의 깊은 곳을 건드리며 탁한 세상의 침전층을 통과한 뒤 맑게 떨어지는 증류수 같은 눈물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제임스 베리의 [피터팬]은,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고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동심 세계 속에서 영원히 머물기를 원한다. 지금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이 성장 우화가 처음 나타난 것은 1904년 12월 27일, 런던의 한 극장에서였다. 수많은 영화, 연극, 뮤지컬 등으로 전세계 각지에서 수없이 공연된 [피터팬]은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을까? [피터팬]의 탄생과정을 극화한 영화가 [네버랜드를 찾아서]이다.
왜 아이는 꼭 어른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속해 있는 이 세계 속에서 책임져야 할 부분이 많아진다는 것이며, 아이의 눈으로는 볼 수 있었던 많은 것들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저절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저절로 아이가 어른이 된다면 그것은 물리적인 현상일 뿐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어른들 세계 속으로 편입되지 못하고 여전히 어린아이로 남고 싶은 성인 남성들의 심리적 현상을 [피터팬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카알리 박사가 이런 정신적 상태를 명명하는데 제임스 베리의 희곡 [피터팬]의 주인공을 동원한 것은 매우 유효적절했다. 왜냐하면 피터팬이야말로 아이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세계가 왜 중요한 것인지, 그것이 어른들의 타락한 세계를 어떻게 정화시키는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제임스 베리(조니 뎁 분)는 슬럼프에 빠진다. 공연할 때마다 대중들의 갈채를 받던 그의 작품은 언제부터인가 광채를 잃기 시작하고 연극배우 출신인 그의 아내 메리(레다 미첼 분)와의 관계도 좋지 않아진다. 켄싱턴 공원을 산책하던 그는 네 아들 틈에서 정신없는 실비아 데이비스(케이트 윈슬렛 분)를 만난다. 그녀는 미망인이었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제임스는 실비아의 네 아이들과 함께 해적놀이를 하고 마술을 보여주고 피에로 분장으로 그들을 즐겁게 한다. 그러나 런던 사교계에 이상한 소문이 돌자 실비아의 어머니는 딸이 제임스와 만나는 것을 막는다. 실비아는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고 제임스는 실비아의 아이들 중 유난히 감성이 예민한 피터의 이름을 따서 [피터팬]이라는 작품을 완성한다.
[피터팬]이 초연되는 날, 그러나 실비아는 극장에 오지 못한다. 너무나 병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대신 피터는 객석에 앉아 눈을 반짝이며 제임스의 연극을 바라본다. 공연은 대성공으로 끝나고 관객들은 감격해서 기립박수를 친다. 그러나 제임스는 자기가 사랑하는 실비아에게 이 연극을 보여주기를 원한다.
실화에 바탕을 둔 이 영화가 우리들의 가슴을 건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삶의 순수가 아름답게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크 포스터의 연출은 감정을 뜨겁게 분출할 수 있는 곳에서 오히려 차갑게 절제함으로써 더 큰 감동을 이끌어낸다.
조니 댑의 연기는 설명이 필요 없다. 오직 조니 뎁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연기가 그에게는 있다. 어느 순간, 우리는 제임스가 진짜 조니 뎁이라고 믿어버린다.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표현하며 관객들의 세포 속으로 슬며시 삼투해 들어가 어느덧 감성을 통째로 점령해버리는 그의 연기는 너무나 탁월하다. 또 [타이타닉]에서 사랑의 열병을 앓던 케이트 윈슬렛은 점점 생기를 잃어가는 미망인 실비아를 맡아서 안타까운 비극적 사랑의 후반부를 훌륭하게 표현해낸다.
[네버랜드를 찾아서]의 백미는 마지막 20분이다. 극장에서 공연되는 [피터팬]의 장면들도 너무나 훌륭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훌륭한 것은, 사랑하는 실비아에게 자신의 연극을 보여주고 싶은 제임스가 꾸민 이벤트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종결부분이 전개될 때 우리는 모두 눈물을 닦지 않으면 안된다. 특별한 사건없이 다소 더디게 전개되던 이야기들은 후반부의 빛나는 순간에 도달해서 비로소 눈부신 광채를 빛내기 시작한다. 이 영화가 우리 모두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유는,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피터팬]이 처음 상연된 것은 크리스마스가 지난 1904년 12월 27일 런던의 한 극장에서였다. 그 이후 백 년 동안 [피터팬]은 동화, 뮤지컬, 영화, 애니메이션, TV 드라마 등 장르를 바꿔가면서 수많은 아이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꿈의 대변자로서,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완충작용으로서, 피터팬이 자신의 가슴 속에서 자라는 것을 허용했다.
마크 포스터 감독의 [네버랜드를 찾아서]는 제임스 베리가 어떻게 [피터팬]이라는 희곡을 만들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하지만 그것은 드라마의 진행을 거칠게 요약한 외피에 불과하다. 이 영화의 핵심은 피터팬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탄생되었는가를 보여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피터팬의 그 무엇이 오랫동안 아이들 마음속에 남아있게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데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극중 주인공인 제임스 베리와, 그가 켄싱턴 공원을 산책하다가 우연히 만난 미망인 실비아, 그녀의 네 아이들을 통해 보여 진다.
제임스 베리는 재능 있는 극작가지만 몇 번의 성공 뒤에 이제는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 그는 새로운 에너지와 상상력으로 가득 찬 작품을 쓰기 위해 노력한다. 그의 뮤즈는 실비아의 아이들, 그중에서도 가장 어린 피터였다. [네버랜드를 찾아서]의 상당 부분은 제임스 베리가 아이들과 노는 장면으로 채워져 있다. 성인인 제임스가 인디언이나 해적 혹은 삐에로로 분장해서 아이들과 함께 천진하게 노는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는, 어쩌면 피터팬이라는 존재가 제임스 베리 그 자체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실비아의 막내아들 피터는 제임스의 내면에 잠복해 있던 피터팬을 외부로 끌어낸 하나의 동기였다.
[네버랜드를 찾아서]의 깊은 감동은 후반 20분에 모여 있다. [피터팬]이 처음 극장 무대에 오를 때부터 영화는 돌연 생기를 띄기 시작한다. 제임스와 그의 아내, 그리고 실비아와 그녀의 어머니 등 성인들 간의 갈등에 치중하며 특별한 사건 없이 전개되던 영화는, 현실과 환상이 교차되면서 광휘로운 빛을 뿜어낸다. 그리고 담담하게 진행되는 엔딩씬은 우리들로 하여금 오히려 폭풍 같은 정서적 반응을 이끌어낸다.
현재 이 영화는 작품상, 남우주연상 등 아카데미 7개 부문 후보에 올라가 있다. 특히 조니 뎁은, 배역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과 감정을 절제하면서도 그것을 창조적으로 드러내는 생기 있는 에너지로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결국 [네버랜드를 찾아서]는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순수에 관한 영화다. 피터팬은 순수의 세계를 다시 복원시켜 주는 길 안내자이며, 영화는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잠들어 있는 저마다의 피터팬을 흔들어 깨우고 것으로 충분히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