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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 있게 전하고 뜨겁게 사랑하라!
부흥회를 인도하시는 목사님들이 자주 인용하는 예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에 만주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교회를 순회하시던 채필근 목사님께서는 가끔 각 교회에 선교비를 나누어 주는 일을 했습니다.
한번은 목사님께서 돈을 아주 많이 가지고 순회하던 도중에, 어느 외딴 곳에 있는 객주 집에 들어가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손님들이 너무 많아서, 채 목사님은 낯모르는 다른 한 사람과 함께 한 방에서 잠을 자야만 했습니다. 두 사람은 잠을 자려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서로가 상대방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혹시 저놈이 내가 잠든 사이에 내 돈을 훔쳐가지 않을까?'하고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뜬 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두 사람은 객주집 주인이 차려다 준 상에서 겸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채 목사님은 식사를 하고자 막 식사기도를 하려는 순간, 마주 앉아 식사하려던 사람도 동시에 식사기도를 하려고 눈을 감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두 사람 모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서로 상대방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잠시 후, 마주 앉았던 사람이 “손님께서도 예수 믿는 분이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채 목사님은 “네, 저는 채필근 목사라고 합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상대방은 깜짝 놀라면서 “아, 그렇습니까? 저는 아무개교
회 장로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목사와 장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의심한 나머지 하룻밤을 꼬박 지새워야만 했던 것입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서로 통성명이라도 했더라면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는 모든 것을 다하나님께 맡기고 편히 잤더라면, 그처럼 슬픈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이미 들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유대인 지도자들이 무서워서 방안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동안 다들 잘 있었는가?”하고 제자들의 안부를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에게 ‘너희는 내가 부활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왜 그토록 두려워하고 있느냐?’ 말씀하시고 싶으셨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의심과 불안을 없애주시려고, 그처럼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나는 너희에게 아무 일 없이 평안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고 말씀하신 후, 그들에게 숨을 내뿜으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만일 너희가 누구 죄든지 용서하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만일 용서해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하리라(요20:23)”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자리에 도마는 없었습니다. 나중에 제자들이 도마를 만났을 때에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하고 말하자, 도마는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서 못자국을 보고, 거기에 손가
락을 넣어 보며,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보기 전에는 결코 믿을 수 없소!”하고 말했습니다.
그로부터 8일이 지났을 때, 도마도 함께 있는 자리에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다들 잘 있었는가?”하고 제자들에게 안부를 물으신 다음,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내 손에 넣어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더 이상 의심하지 말고 믿음을 가져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꼭 나를 보아야만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도요한은 이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복음서를 마무리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것을 기록해 두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게 하고, 또 그분을 믿음으로써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20:31)’라고.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의 생각과 한계를 훨씬 뛰어넘는, 참으로 위대하고도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인간들은 그 한계 내에서 맴
돌다가 속절없이 죽어가야만 했을 것입니다. 죽음의 한계를 넘어 영생이 있다는 것도, 그리고 이 땅의 한계를 넘어 천국이라는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도 까맣게 모른 채, 그저 고통과
한숨뿐인 이 세상을 하직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오랫동안 따라다니면서, 주님이 행하신 여러 기적들을 직접 목도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의심했습니다. 그만큼, 주님의 부활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루케이도’라는 사람이 쓴 ‘나의 사랑하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어느 공산주의 국가에 있던 수용소 벽에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갇혀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핍박을 감수하면서 지내던 한 포로가 벽에다가 이런 말을 새겨 놓았습니다.
‘이 교도소 안에서는 태양이 빛나지 않아도,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는다. 이 안에는 사랑이 보이지 않아도, 나는 사랑이 있음을 믿는다. 하나님께서 아무 말씀이 없으셔도, 나는 그분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다.’
‘루케이도’는 그런 글자를 새긴 사람을 한 번 상상해보았다고 합니다. 깨진 유리조각이나 돌멩이를 쥐고서 벽에다가 글씨를 쓰던 그 앙상한 손, 그리고 한 글자를 새길 때마다 어둠 속을 흘긋 살피던 그 눈빛을 생각해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확신이 있는 글을 새길 수 있는 그 손과 그 눈을 가진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로 결심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우리가 부활을 믿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 인간의 일반적인 상식만 가지고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될 경우, 그때부터 그 사람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 있게 됩니다. 그 사고방식과 생활태도가 완전히 바뀌게 되어, 모든 면에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유대인 지도자들로부터 죽임을 당하게 될까봐 두려워서 문고리를 꼭꼭 걸어 잠그고 지내던 그 주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뵌 다음부터는 그 태도가 180도로 바뀌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떨쳐버리고 함께 모여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들은 아주 담대히 주님의 부활과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만일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들은 그냥 영원히 옛날 생활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과는 아무 상관없이 살다가 슬프고 괴로운 인생을 마치고 말았으리라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게 됨으로써, 그들은 그야말로 인류 역사에 그 이름이 영원히 빛나는 주님의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뿐이겠습니까? 오늘 우리도 주님의 부활에 대하여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된다면,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인생을 살 수 있게 되리라 믿습니다. 최소한 우리 자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다가 갈 수 있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부활의 예수를 확실히 믿게 되고, 또한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부활의 예수를 믿는 사람답게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1.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께서는 고난을 받으시기 전에 여러 번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듣고 마음에 깊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관심이 세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수없이 많은 비유를 들어 하늘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
지만, 제자들의 관심은 온통 세상에만 있었기 때문에 주께서 말씀하시는 하늘나라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난 다음부터,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욕심을 버렸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관심이 이 땅으로부터 하늘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4장 32절 말씀을 보면, 그 당시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누구하나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공동으로 사용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미워하고 다투며 원망하는 것이나, 이 세상 일로 인하여 근심하며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것은, 모두 다 이 세상에 대한 욕심과 집착 때문에 생기는 병입니다. 그래서 그런 병에 걸린 사람들은, 이 세상 것들을 잃어버리면 자신의 모든 인생이 다 끝나게 되는 줄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육신적으로 그 생명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그 인간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욕심에 빠지면, 부모 형제도 몰라보고, 이웃에 대한 관심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영적으로 죽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면, 그와 같은 세상 집착과 이기심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머지않아 참으로 아름답고 좋은 천국에 가게 될 사람이 무슨 까닭으로 이 세상 그 어떤 것에 대하여 미련을 갖겠습니까? 그런고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진실하고도 아름답게 살 수가 있습니다.
2.그런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 때에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쓸데없는 욕심을 갖지 않습니다. 한 번 죽었다가 다시 살게 된 사람들은, 이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을지라도, 죽으면 그 모든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부활을 경험한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성도가 함께 나눔의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신의 소유를 자기 것이라 생각하면서 베풀었던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의 것으로 여기고 함께 나누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사도들은 성도들이 바친 재물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 중에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그 소유재산 정도에 따라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으로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다 여유로웠기 때문에, 그들은 진정으로 모두가 다 부자였습니다.
요한일서1장 3절 말씀을 보면, ‘주님의 사도인 우리가 실제로 보고 들은 것을 너희에게 열심히 전하는 것은, 너희도 우리와 같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가까이 함으로써 기쁨이 충만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요한은 말하기를 ‘내가 말하는 대로 너희가 실천에 옮긴다면, 너희는 기
쁨이 충만한 사람이 될 것이다(4)’라고 했습니다.
요컨대, 세상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살면, 그 마음에서 항상 불안과 근심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욕심과 집착을 버린 후에 주님의 부활을 확실히 믿고 살면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요한일서 1장 7절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하기를 ‘우리가 빛 가운데 산다면, 우리는 서로 아름다
운 사귐과 기쁨을 맛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믿고 그 진리 안에서 살 경우,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에 빠지지 않고 언제나 기쁨이 넘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 그처럼 용기 있게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 내가 죽더라도 천국에 들어가서 부활한 몸으로 주님과 함께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역사학자인 ‘토마스 아놀드’박사는 말하기를 “나는 여러 해 동안 역사를 연구하고, 그 사실들을 조사해왔다. 그리고 여러 문헌과 유물을 고증하여 그 사실여부를 조사하는 중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표징, 곧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을, 나는 인류 역사에서 보지 못하였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혹시, 그동안 도마처럼 주님의 부활을 의심하고 있었더라도, 이 순간부터는 주님의 부활을 확실히 믿으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합시다. 즉, 이 세상 것에 대한 집착과 욕심을 버린 후에,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내 것을 내 것이라 하지 않고, 주님의 뜻에 따라 즐거운 마음으로 나눔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그러면, 참된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해인 수녀가 ‘부활절의 기쁨으로’라는 시를 썼는데, 그 시
(詩)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안 계신 빈 무덤 앞에서 죽음과 같은 절망과 슬픔으
로 가슴이 미어지던 저에게 다시 살아오신 주님,
이제 저도 당신과 함께 다시 살게 된 기쁨을 감사드립니다.
시들지 않는 이 기쁨을 날마다 새롭게 가꾸겠습니다. 혼자서만
지니지 않고 더 많은 이들과 나누겠습니다.
빈 무덤에 갇혀 있던 오래된 그리움을 꺼내서 꽃다발로 엮어
들고 당신을 뵈오러 뛰어 가겠습니다.
이토록 설레는 반가움으로 당신을 향해 달려가는 저에게서
지난날의 불안과 두려움의 돌덩이는 멀리 치워주십시오.
죽음의 어둠을 넘어서 빛으로 살아오신 주님, 산도 언덕도 나무도 풀포기도 당신을 반기며 할렐루야를 외치는 이날, 다시 살아오신 당신께 살아 있는 저를 다시 바치오니, 사랑으로 받아주소서. 기쁨의 향유를 온 세상에 부으며 저도 큰소리로 할렐루야 할렐루야를 외치오리니….
부활이 있기 전에는 거짓된 기쁨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잠시 잠깐 동안의 기쁨만 있을 뿐이지, 이 세상에는 참된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이제는 그 부활을 믿는 자마다 영원한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세상 욕심은 근심과 두려움을 가져오지만, 그 욕심을 버리고
주님의 부활을 믿으면, 마음에 기쁨이 있고 평안함이 있습니다.
죽을까봐 두려워서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오셔서 “너희에게 평안함이 있기를 빈다.”고 축원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참기쁨과 참 평안의 축복을 누리게 된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자신 있게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은 성도들은 서로가 한 마음이 되어서 서로 뜨겁게 사랑했다고, ‘누가’라는 사람이 사도행전 4장 33절에서 그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 부활하신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있는 저와 여러분도 이 축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혹시 아직도 부활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성도가 있다면, ‘부활의 기쁨과 평안’이라고 하는 놀라운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귀한 특권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어서 속히 그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무쪼록,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한 번 만나 뵙고, 그 기쁨과
평화를 맘껏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펀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