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상덕은 1881년 경남 의령(宜寧)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한국군에 입대하여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견습육군보병참위(見習陸軍步兵參尉)로 임관(任官)해 시위 보병(侍衛步兵) 제2연대 1대대에서 근무했다. 을사늑약의 무효와 일제 침탈의 불법성을 알리고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파견을 구실로 1907년 7월 19일 고종황제가 강제 양위되었다. 8월 1일에는 아침 7시 대대장 이상 장교를 관저에 긴급 소집해 군부대신 이병무(李秉武)의 「군대해산조칙」 대리 낭독으로 대한제국 군대 해산 사실이 공포되었다.
맨손으로 무예를 연습한다는 구실로 병사들을 무장 해제 시키고 오전 10시까지 훈련원(訓練院)에 집결하라는 명령에 제2연대 1대대 병사를 연병장에 정렬하여 훈련원으로 이동 준비했다. 그러던 중 제1연대 1대대 병사 3명이 제2연대 1대대로 달려와 시위 제1연대 1대대장 박승환(朴昇煥) 참령(參領)의 자결과 제1연대 1대대의 봉기 소식을 전하며 함께 일어날 것을 호소했다. 이에 시위대 제2연대 1대대 장병들의 훈련원 동원을 거부하고 무기고 및 탄약고를 점령하며 군대해산에 반대하는 항거에 나섰다.
시위대의 봉기에 일본군 제13사단 소속 보병 제51연대 3대대의 제9중대와 제10중대에서 차출된 각 1개 소대가 반격했다. 이에 맞서 시위 제2연대 1대대 병사들을 이끌고 우세한 무기와 증원된 병력으로 반격해 오는 일본군의 공격에 대항하여 오전 8시부터 약 3시간 동안 병영을 지켰다. 하지만 일본군 제3대대장 사카베[坂部] 소좌(少佐)의 총공격 지시 아래 오전 10시 40분 일본군 제9중대를 지원하고자 제12중대장 가지하라[梶原義久] 대위의 증원부대가 투입되면서 병영이 3면으로 포위당했다. 결국 시위 제2연대 1대대는 탄환과 무기의 부족으로 10시 50분경 일본군에게 병영을 빼앗기고 병영 밖 시가에서 백병전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남상덕은 일본군의 총탄에 사망했다.
일찍이 군에 입대하여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견습육군보병참위로 임관, 서울 시위보병 제2연대 제1대대에서 근무하였다.
1907년 8월 1일 일본의 강압으로 대한제국군대의 해산령이 내려지자 오전 8시부터 10시 50분까지 약 세시간 동안 항전하였다.
이 항전의 도화선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의 자결로, 제1대대 병사들이 무기고를 부수고 일본군대에 항전함으로써 불붙은 것이다.
또한, 중대장 오의선(吳義善)도 자결함으로써 사병들의 대일항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부하 1,000여 명을 진두지휘하여 제9중대장 대위 가지하라[梶原義久] 등을 비롯한 4명을 사살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때마침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빈약한 무기와 부족한 탄약을 가지고 백병전을 벌이다 전사하였다. 이로써 우리 군대의 항전은 단 하루뿐이었으나 8월 3일부터 계속될 지방 진위대의 해산계획을 수포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뒤의 의병봉기에 도화선이 되었다.
선생은 “상관이 나라를 위해 죽음으로 의로움을 보였는데 내가 어찌 홀로 살기를 바라겠는가.”라며 부하들을 이끌고 서울 남대문 근처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총격전과 백병전을 벌이다 27세의 젊은 나이에 전사했다.
“오늘 아침에 저 아랫마을에서 전투가 있었습니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기기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싸우다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맥켄지는 그의 책에서 ‘한국인은 비겁하지도 않고 자기 운명에 대해 무심하지도 않다.
한국인들은 애국심이 무엇인가를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대한제국의 고종은 이 사실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했다. 이 일을 빌미로 일제는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옹립했다. 그리고 일제의 침략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 생각되는 군대를 해산하는 과정이 ‘미스터 선샤인’ 중에 묘사됐다.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인 박승환이 자결을 하자 그 부하들과 제2연대 제1대대 소속 군인들이 총기 반납을 거부하고 군대해산에 항거하며 1907년 8월 1일, 서울의 하늘을 총성으로 가득 채웠다. 이때 남상덕이라는 제2연대 제1대대 소속 참위가 일어나 부하들을 독려하며 1000여명과 함께 일병들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