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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31일 송구영신예배 메시지
제목: 지나간 4년, 그리고 다가오는 새해
디모데전서 3:14~15
지나간 4년을 돌아보며
내가 새소망교회에 부임한 지 이제 4년이 지나간다. 새해가 되면 5년째 사역에 접어든다. 나는 목회자요 설교자로서 무엇을 선포하고 가르쳤는가? 그것을 둘로 정리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과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했다. 그것이 우리 교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는 이야기인가? 우리는 그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도 혼자만의 외로운 노래인가? 그리고 그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인가? 나는 지나간 4년을 뒤돌아보기를 원한다.
가장 먼저 나는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삶에서 자유를 선포하는 것을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예수께서도 그렇게 가르치셨고 사도 바울의 메시지도 그것을 강조한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신앙이란 자발적으로 따르는 삶이지 의무감으로 부과된 임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억지가 되고 외식하는 자가 되기 마련이다. 속은 그렇지 않은데 겉으로만 시늉을 내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양심을 거스르게 하고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일이다.
언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그것은 억지로 누군가에게 무엇을 강요할 때 발생한다. 사람이 왜 억지로 누군가에게 무엇을 강요하는가? 그것은 자기 확신이 크고 자기가 옳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낫다는 우월감 속에 사로잡혀 그들을 설득하여 동의를 구하지 않고 자기의 뜻을 따르라고 억압할 때 발생한다. 여기에는 독선과 월권이 작용한다. 그래서 그의 말이나 주장을 듣고 있으면 사람들은 마음이 불편해지고 인권을 침해 당했다고 느낀다. 나의 가르침이나 설교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이런 독선(獨善)과 월권이나 강압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해 본다.
교회, 진리의 기둥과 터
교회를 지킨다는 것은 건물을 지킨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을 붙드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진리를 붙드는 것이다. 사람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을 중심으로 모인 모임은 언제든 깨질 수 있다. 그러나 진리를 중심으로 모인 모임은 사람이 혹시 죽더라도 그 곳에 중심이 되는 진리로 인하여 그 모임은 영원하다. 그런 모임을 가리켜 교회라고 한다.
교회의 이런 특성을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여 그려준다: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디모데전서 3:14~15, 개역개정성경
나는 속히 가서 그대를 만나게 되기를 바라면서
이 편지를 씁니다.
만일 내가 늦어지더라도 그대가 하느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집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교회이고
진리의 기둥이며 터전입니다.
딤전 3:14~15, 공동번역성경
나는 목회자로서 교회를 섬기라고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는다. 그런데 교회를 섬긴다는 것은 성도들을 섬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성도들을 어떻게 섬기는 것인 가? 나는 여러 방식으로 섬기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을 가르치고 전함으로 섬긴다. 이를 ‘말씀 사역’이라고 하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회란 진리의 기둥이고 터전이라는 사실이다.
그 동안 나는 교회를 어떻게 정의했는가? 교회란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부르신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다. 하나님의 뜻을 무엇이라고 하느냐에 따라 교회의 방향은 결정되고 그 건강성이 정해진다. 하나님의 그 뜻을 우리는 진리라고 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든든히 서려면 진리가 분명하고 뚜렷해야 하며 그것을 굳건하게 고수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 진리가 성경 전체를 통하여 흐르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라고 확신한다. 모든 설교와 성경해석은 이 빛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하며 그 해석에 오류가 발생하거나 자기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끌어다 쓰는 것은 사실 진리를 가로막는 행위가 된다.
사람과 건물은 유한하나 진리는 영원하다!
나는 오랜 연구 끝에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전이라고 한 말씀대로 우리가 붙들고 배우고 가르치고 그에 의해서 살아야 할 진리를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과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결론 지었다.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이미 진리의 기둥과 터전이 아닌 것으로 세워진 건물이 된다. 그런 교회는 반드시 무너질 것이고 우리는 지난 역사를 통해서 그렇게 무너져 황폐화된 교회들을 수없이 많이 보아왔고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그렇게 교회들이 무너지고 있다. 지금 아무리 크고 화려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지라도 진리가 아닌 것을 붙들고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무너질 것이다. 그래서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고 예수께서 한탄하신 말씀을 성경은 소개한다: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3:37~39
예루살렘성전도 무너졌지만 예루살렘 교회도 더 이상 없다. 안디옥교회도 더 이상 없다. 유럽의 기라성(綺羅星, glittering stars) 같이 빛나는 예배당들에서도 찬송과 뜨거운 기도소리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영원하다. 건물은 무너지고 사람들은 흩어졌을지라도 진리를 붙드는 사람들은 남아 있어서 그들이 있는 곳으로 교회가 옮겨졌을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붙들어야 할 것은 건물도 아니요 사람도 아니요 진리다. 진리를 목숨처럼 붙드는 교회는 결국 그 진리를 위해 피 뿌린 사람이 있는 곳에 세워질 것이다.
우리 교회가 속한 교단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다. 1932년 4월 럼시 선교사가 허홍이라는 통역을 만나 서빙고에 세운 교회가 최초의 기하성교회다. 그 교회는 용산구 보광동에 자리잡은 성광교회다(서울시 용산구 보광동 264-74). 그런데 지난 2000년대 초 기하성교단 최초의 교회가 문을 닫았다. 그 교회를 담임하던 김성수 목사의 건강이 악화되어 더 이상 교회를 운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기하성에 속한 교회는 사라졌는가? 그렇지 않다. 진리를 붙드는 성도가 있는 한 하나님의 교회는 사라지지 않고 그들을 중심으로 세워진다.
우리 교회만큼은 영원하리라는 생각은 교회를 우상화하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한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키고 살던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었던가? 하나님은 영이시며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성령은 어떤 교회도 독점할 수 없으며 그래서 바람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누가 바람을 붙잡을 수 있는가? 바람을 잡으려는 시도는 헛될 뿐이다. 도리어 우리는 바람을 타야 한다. 바람을 타고 항해하는 배처럼 우리는 어디서 오는지 모르지만 불어오는 바람 같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한다. 그리고 그 성령은 진리를 따를 수 있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를 붙드는 한 교회는 망하지 않으며 영원하다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한다.
보광동에 성광교회가 문을 닫았고 지금은 없어졌다. 그리고 여러 교회가 문을 닫기도 한다. 우리 교회도 어떤 이유로 인하여 문을 닫을 수 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흩어질 수도 있다. 이민을 가거나 지방에 출장을 가거나 별세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각 사람이 진리를 붙들고 살아가는 한 교회는 없어지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방에 홀씨를 퍼트리는 민들레처럼 온 세상에 퍼질 것이다.
진리와 성경해석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 위에 세워지는 것이라면, 무엇이 진리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믿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발견한다. 여기서 성경을 해석하는 일이 필요하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여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밝힘으로 우리는 진리를 알아간다.
문제는 사람마다 성경해석이 다르다는 점이다. 목회자들도 같은 성경본문을 가지도 다양한 메시지를 전한다. 그래서 신자들은 마치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듯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설교를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오늘날 많은 설교가 있지만 듣는 사람들이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기본적으로 저 분의 말씀과 성경해석이 옳은가 하는 의구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비극이다.
중세시대에는 성경해석이 사제들에게 독점되었다. 물론 성경 자체가 라틴어로 되어 있어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도 고등교육을 받은 전문사제집단이나 지성인들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일반 신자들은 성경을 읽을 기회도 없었다. 그저 성직자들이 하는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부 성직자들이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폐단이 생겼고 이것을 막고자 종교개혁자들은 모든 사람들의 손에 성경을 들려줄 수 있게 하려고 성경번역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 일에 가장 먼저 착수했다.
그 결과 모든 신자들의 손에 성경이 들려졌고, 더 작게 분화된 신앙공동체마다 성경해석을 하는 지도자들이 일어나 다양한 의견을 가진 그룹들이 생겼으며 개신교회의 분화를 가속화했다. 그래서 이제는 누구의 해석이 옳은지 알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성경을 많이 읽는 것으로 위안을 삼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지도자의 말을 맹신하여 그가 해석해주는 메시지를 맹신하기도 한다. 그래서 교회는 다시 종교개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고 말았다. 즉, 하나님의 진리가 교회와 신자들 사이에서 희귀해져 버린 것이다. 성경을 들고 있으되 그것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고, 설교를 듣고 있으되 그 설교의 성경해석이 옳은지 확신할 수 없으니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의 비극이다.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으로’를 외쳤으나 그 후예들은 이제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의 문제에 봉착했다. 누구의 해석이 옳은가 알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경우를 두고 예언자들도 말을 했으며 예수께서도 인용을 하셨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사야 6:9~10
예수님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이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이유를 묻는 제자들에게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태복음 13:10~13
바울은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가 가택연금을 받고 있던 집에 오는 동족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한다: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 하더라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사도행전 28:21~28
왜 이사야에게 그런 말씀이 임했을까? 왜 예수님은 다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셨을까? 그리고 왜 바울은 동일한 구절을 인용하였을까? 그것은 듣는 사람들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는 고정관념이 하도 견고하여 새로운 메시지를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이사야에게는 예루살렘이 초토화되어 그들이 자랑으로 여기던 성읍이 황폐화된 후에라야 비로소 진리의 말씀이 들릴 것이라고 하셨다(사 6:11~12).
예수께서는 그런 이유로 예루살렘에 가서 말씀을 전하기를 꺼리시고 갈릴리로 가셨고 그리고 국경을 넘어 두로와 시돈으로 다니시면서 가나안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예루살렘 성읍 사람들은 예수를 갈릴리 촌놈이라고 박대했으며, 갈릴리 지방 동향인들은 예수를 목수의 아들이라고 무시했다. 그렇게 예수님을 육신으로 대하는 곳마다 진리의 말씀을 들을 귀는 막히고 눈은 감기게 된다(고후 5:16). 이것이 예수님과 육신적으로 동일한 유대인의 비극이요,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지낸 나사렛 사람들의 비극이다. 누가 그랬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그러나 진리는 피로 말미암아 가려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동일한 이유로 바울의 복음도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당했다. 세계의 수도 로마(Roma Urbs Mundi, Rome the capital city of the world)에 사는 유대인들은 죄수의 몸으로 끌려와서 가택연금을 받고 있는 바울의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바울은 동족인 유대인들을 떠나 이방인들에게로 향하면서 그들은 들으리라고 비통한 걸음을 옮겼다.
착하고 좋은 마음과 열린 마음으로
그러면 수도 예루살렘에서 살았기에 갈릴리 출신의 선지자를 배척한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어렸을 때부터 보아왔고 그가 목수의 아들임을 뻔히 안다는 사실이 진리를 배척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세계의 수도에 사는 유대인들이 죄수로 끌려온 바울의 복음을 거절한 것도 당연하다고 보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진리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만 열릴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것을 이렇게 소개한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3:19~21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은 착하고 좋은 마음을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옥토(沃土) 즉,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인내하면 반드시 결실할 것이다(눅 8:15). 우리도 진리를 발견하려면 먼저 진리를 행하고자 하는 결심이 있어야 한다. 장난으로나 반신반의하는 태도로나 혹은 시험하는 자세로 말씀을 받는다면 그 마음을 기경하여 옥토로 만들 때까지는 결코 결실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이사야의 예언이 저주가 되는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여러 회당에서 유대인들로부터 배척을 당했다. 그는 빌립보에서는 이방인들에게 고소를 당해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에서는 동족인 유대인들이 돌로 치는 바람에 바울은 실신하기도 했다. 그래서 바울은 베뢰아로 옮겨 말씀을 전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곳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다. 바울의 동역자 누가는 그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사도행전 17:11~12
그들은 달랐다! 베뢰아 사람들은 더 신사적이었다! 그들은 더 너그러웠다. 그들은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진 좋은 땅이었다.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 이것을 영어성경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Now the Bereans were of more noble character than the Thessalonians, for they received the message with great eagerness and examined the Scriptures every day to see if what Paul said was true.
Acts 17:12, NIV
열의를 가지고 바울의 메시지를 받았으며 바울이 한 말이 맞는지 성경을 찾아보았다! 설교자는 코메디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설교를 너무 지루하게 한다든지 자신의 학식을 뽐내기 위해서 자랑질을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열의와 진정성을 가지고 전한다면 그 말씀은 반드시 들어볼 가치가 있다. 하지만 들을 때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 반드시 추가되어야 할 태도가 있다. 그 설교자가 한 말이 성경과 부합하는가 살펴야 한다. 그렇게 자세히 상고하는 이유는 그들이 설교자의 메시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의미요, 기본적으로 진리를 추구하고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과 비교해서 맞지 않으면 버리겠다는 오만한 마음이 아니요, 이미 나는 진리를 다 알고 있다는 식의 태도도 아니다. 오늘 종에게 말씀하여 주옵소서 라고 하는 사무엘의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진리는 멀지 않다.
이런 태도로 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경을 통해서 진리를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로 설교를 듣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어눌한 설교자의 메시지라도 거기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로 설교를 들을 수 있다면 오늘날과 같이 말씀의 홍수 속에서 생수 같은 진리를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난 4년간 새소망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나는 현실을 어떻게 진단하는가? 그리고 다가오는 새해의 문턱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와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가? 나는 일년만 더 새소망교회에서 사역을 할 각오를 가지고 새해를 맞이할 것이다. 건물도 아니요 사람도 아니요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며, 그 집을 떠받치는 기둥과 터전은 바로 진리의 말씀이다. 그 진리를 전하는 설교자가 될 것이다. 교우들은 당연히 그 진리를 간절하게 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과연 성경적인지 상고해야 할 것이다. 그런 마음가짐이 없다면 새해는 지나간 해의 반복이 될 것이요, 결코 새해가 아닐 것이다. 새해가 정말로 새로운 해가 되려면 우리가 새로운 마음과 결단으로 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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