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갑사의 수박을 논하기에 앞서 수박의 형태가 다양하였다는 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 고려시대의 자료를 중심으로 수박을 분석하고자 한다. 고려는 거란, 여진, 몽고 같은 북방민족의 잦은 침입으로 군사적 긴장은 고조되어, 적과 충돌 시 일어나는 격투기예 이른바 수박과 같은 훈련이 중요시 되었을 뿐만아니라, 의종조에 발생한 무인정변으로 인한 정권장악시대에 이른다면 여러 家兵들의 조직과 아울러 이들의 관로 진출의 일환으로 무예 특히 수박 능력의 정도에 따라 결정되는 사례가 비교적 많이 나타나 소개 하고자 한다.
특징적 의미의 수박의 기법을 설명하기 전에 주목해야할 것은 사료 상에 수박을 수행하는 무인들이 '勇力' 혹은 '旅力 絶人'이라 표현한 것으로 보아 기본적으로 기초체력에 있어서 다른 일반인들보다 강했고 수박을 수행하는데, 상당한 체력을 요하는 것이 기본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무예를 겸비한 사람이 체력이 우수하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이러한 단어는 민첩하고도 빠른 무인들 보다는 근력이 좋고 체격이 큰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이러한 체력적으로 우수한 무인들의 군사적 무예로서 전투수행에서 수박을 어떠한 기법을 구사하였는지 본격적으로 살펴보자.
“이의민이 (毅宗의) 허리뼈를 부러뜨리는데, 손에 응하여 소리가 났다. 이윽고 크게 웃었다” 이 사료는 무인정변 시에 이의민이 의종을 시해할 때의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여기서는 왕의 허리뼈를 부러뜨렸다고 나온다. 수박의 어원으로 볼 경우에 손으로 쳐서 허리가 부러졌다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손으로 친다는 일반적인 의미로는 왕의 허리를 꺽는다는 장면을 묘사하기에는 부족하다. 이에 대하여 한양대 이진수교수는 北齊書의 孝昭帝記에서 '角力批拉'단어가 보이고 여기서 각력은 힘을 겨룬다는 말이요 비랍은 '손바닥을 쳐서 꺽는다' 라는 데 초점을 두어 위의 수박의 수행형태를 묘사하고 있다. 수박의 여러 형태가 있겠으나 당시의 허리가 부러졌다면 지금의 단순한 주먹 지르기나 손을 편 상태에서의 내려치기는 아니었을 것이며, 이진수 교수의 주장대로라면, 의종을 팔로 감싸 껴안아 허리뼈가 상하게 했다고 생각할 수 있어, 오늘날의 합기도나 유도 같은 꺽기 동작의 성향이 강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욱 무난한 해석으로 보인다.
“드디어 주먹으로 기둥을 내어 지르니 서까래가 들썩거렸다 마찬가지로 주먹을 지르니 (주먹이) 벽에 파묻혔다)” 당시의 이의민과 두경승의 무력 행위를 말하는 것인데, 기둥이 흔들리고 주먹이 벽에 파묻힌 것으로 보아 상당한 실력을 가졌음이 분명하며, 수박이 단지 꺽기의 동작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위 내용과 같이 주먹 지르기 즉, 오늘날의 태권도 의 타격 동작도 발견되고 있다. 단지 두 경우만으로 수박의 전체적 측면을 알아 볼 수는 없지만, 형태상으로 다양했을 것으로 보이며, 다만 무예의 식견이 좁은 당시의 사관들이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는데 전체적으로 맨손무예를 수박으로 일반화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수박을 어의적으로 분석해 본다면, 단순히‘손으로 친다'(手:손(수),搏:치다(박))으로만 해석하는 것으로 볼 수 는 없다. ‘搏'에는'搏執'이라고 하여,'포박하여 잡는다'는 어의도 가지고 있기도 하여, 원거리타격기술 뿐 아니라, 지금의 씨름와 유도와 기술과 같이 비교적 근접하여 상대방을 제어하는 수단을 포함하고 있어, 수박이라는 무예가 당시에 다양한 기법이 존재 했으며, 지역적으로 특이한 양식이 있었으며, 많은 계파가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이를 수련했다고 사료된다.
갑사는 조선 초에 체계화된 특수병종>
甲士는 고려시대부터 정식으로 등장하여 조선 초기에 들어 체계화된 특수병종으로서 주로 국왕의 근접 경호를 맡아보는 역할을 하였던 무인집단이었다. 여기서는 갑사의 그 구체적인 특징을 살펴보면서 그들이 수박의 수행했던 스타일을 추론해 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갑사라고 하면 대개 갑주를 입은 즉, 무장을 갖춘 군사의 명칭으로 본다. 즉, 머리에 쓰는 투구와 몸을 가리는 갑옷을 입고, 여타의 병기를 착용한 군사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혹자들은 갑사를 일반적으로 대단위 군대의 병사를 총체적으로 볼 때의 의미로 보는 경우가 있으나, 그렇지는 않다고 보며 그증거로 중국의 司馬穰?가 지은 司馬法에서 보건데, 엄연히 일반적인 步卒과는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조선 초기 군제의 정비 시에 나타나는 왕조실록 사료에서 갑사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당시의 기록을 보면, 三軍甲士를, 갑옷을 입고 병기를 가진 이들이라 분명히 명시하고 있어, 갑사라는 해석에는 논리적으로 문제가 없을 것으로 사료된다. 갑사가 갑옷을 입고 군무를 수행하는 것을 확인하였던바, 이번에는 이들이 착용하는 갑옷과 투구에 대하여 확인하도록 하며, 여기서는 고려와 조선시시대의 무인들의 갑옷을 살펴보았다.
갑옷은 현존하는 유물로 파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만 고려시대의 것은 지금으로선 거의 전무한 실정이며, 조선에 있어서는 전기 이후 현물이 소수남아 있다. 사료에 나타난 내용과 함께 기타 그림과 고려 및 조선시대 갑옷의 특성을 살펴보자. 우선, 고려시대는 대외적으로 거란과 몽고 일본과 같은 주변으로부터 많은 침략을 받아 왔다. 따라서 전쟁에 대한 대비가 항시 이루어 졌으며, 전쟁에 필요한 軍裝備의 체계화가 있었다.
갑옷에 있어도 그러하였는데, 특히 예종대에 軍機監을 설치하여 皮甲匠, 和匠, 白甲匠, 皮匠 등 전문적 갑주제작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따라서 비교적 전에 비하여 양질의 것을 군에 보급할 수 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의 갑옷의 경우 현재 자료의 부족으로 설명되기 어려우나, 미약하게나마 형태의 묘사한 《高麗圖經》에서 “ 투구와 갑옷은 아래 위가 붙어있는데, 그 제도는 縫 掖과 같아서 그 형상이 괴이하다.”, “ 六軍 左右衛 장군은 갑옷과 투구를 입었는데, 검은 가죽과 쇠로 만들었으며, 무늬있는 비단으로 꿰메어 서로 붙어있게 하였다. 허리 아래로는 10개의 띠를 드리웠는데, 오색 수 놓은 꽃무늬로 裝飾 하였고 왼쪽에는 활과 칼을 찾다”, “ 용호중맹군은 靑布窄衣(푸른 베로 만든 좁은 저고리)와 白苧窮袴(흰 모시로 만든 바지저고리), 입고 다시 투구와 갑옷을 덧 입었는데,…… ”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사료들은 고려 宣宗代에 당시 송나라로부터 사신으로 온 서긍이 수도 개경(당시 송악)의 중앙군에서 각기 군인들의 모습들을 글로 묘사한 것이다. 사료 1을 본다면 갑옷이 위와 아래가 붙어있고 늘어진 옷차림 즉, 봉액과 같다한 것을 인지한다면 외형적으로 보기에 상당히 투박한 형태의 것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사료 2에서는 비교적 고위무반이 착용하는 것으로 가죽과 철제로 이루어졌으며, 아래로는 많은 장식물을 했다는 것으로 보아서 무겁고 화려한 형태임을 더불어 생각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사료 3은 사료 2의 무인보다는 상대적으로 낮은 지위가 입은 것으로 보이며, 일반적으로 모시나 베로 만든 옷을 착용 후 갑옷을 입는 것으로 보아 활, 창 그리고 칼 같은 병기를 방어하는데 우수성을 가질 것이라 보지만 이 역시 착용 후 움직임에 대한기동력은 한계가 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고려시대의 갑옷은 그림으로 추론할 수 있을 것이며, 충렬왕 1년(1247) 10월과 충렬왕 7년(1281) 5월 두 차례에 걸친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을 담은 蒙古襲來繪詞의 그림에서 이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충렬왕(1247) 7년 2월의 내용을 보면, 김방경 장군이 賀正使로서 원(몽고)에서 돌아올 때, 원세조는 일본과의 전투를 위해 활을 비롯하여 검과 백우갑과 갑주 일백령 등을 준 것으로 보아 순수 고려의 갑옷으로 생각하기는 힘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료에서 나오는 고려시대의 갑옷과 같이 그 대체적인 틀은 대체로 유다고 보며, 이 역시 형태가 비교적 투박하여 활동상의 제약됨은 생각할 수 있다.
다음으로 조선시대 갑옷을 확인하고자 한다. 조선시대의 갑옷은 고려의 것과 큰 차이가 있지는 않지만 그 종류가 다양하여, 방호재인 금속제 혹은 가죽제 찰(札, 갑옷 비늘)을 가죽끈으로 서로 연결한 찰갑(札甲)이 일반적이었으나 그 밖에도 쇄자갑, 경번갑 등 여러 종류의 갑옷이 사용되었다. 세조 13년에 명나라가 합동 작전을 위해 조선군 갑옷의 색깔과 형태에 대해서 조정에 문의 했을 때, 세조는 조선군 갑옷의 색깔과 형태가 제각각이어서 뭐라 단정해서 말하기 어렵다고 답변했을 정도로 다양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중 그나마 형체가 보관되어 있는 두석린갑을 살펴보자. 두석린갑의 길이를 분석한 것으로 전체적인 길이가 119cm일반적 사람의 키의 무릎 부분까지 이어진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또한 병기의 공격에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비늘로 만든 철갑을 입힌다던 지, 혹은 여러 겹의 종이 혹은 가죽으로 만든 형태상의 특징을 생각하면, 고려 이후 조선시기의 일반적 갑주에 있어서도 활동의 제약성은 상당하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당시의 갑옷을 보건데, 착용하고 민첩성 있는 점프 동작이라던 지 발차기 동작의 수행은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허리 부분 밑 그 중에서도 무릎부분으로 갑옷의 하부가 가리어졌을 것을 생각 한다면 이를 더욱 뒷받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근력을 요구하는 둔탁한 수박이 존재했을 가능성 있다” 고려?조선시대의 갑사가 수박을 하였다는 것에 관해 자료의 부족으로 인하여 확실한 확증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격투무예로서의 수박의 시행을 하였다는 심증은 조선 초기 사료에서 나타난 갑사의 試取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시취는 정기적으로 무인을 선발하도록 하는 시험을 말하는 것으로, 고려시대의 무인의 選軍 형식을 보강하여 체계적으로 군사들에게도 체계적 실기시험의 검증을 통해 선발과정을 법제화 한 것이고 이러한 시취를 갑사라는 특수군인을 선발하는 데에도 적용하였다.
따라서 기록상으로 조선전기실록에 있는 시취 과정에서 갑사들의 수박을 하였다는 것은 단순히 조선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해왔던 것을 명문화 했다고 생각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성계의 권력 독점기인 고려 말에 갑사의 근거가 있으며, 바로 이러한 관례가 조선 갑사시취의 근간이었다고 본다면 이러한 논리는 분명하다고 사료된다. “임금이 上王(定宗)을 慶會樓에서 받들어 맞이하여 獻壽하고 노래 부르고 화답하여 지극히 즐기었으니, 상왕의 誕辰인 때문이었다. 여자와 여러 宗親이 모두 侍宴하였다. 이어서 入直한 大小臣僚에게 술을 주고 甲士와 防牌軍으로 하여금 막대로 角鬪하게 하고 또 手搏戱를 하게 하고 이를 구경하였다”
“王이 景福宮에 거둥하여 上王(定宗)을 奉迎하여 경회루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세자 종친이 시연하였다. 갑사와 방패로 하여금 막대기를 가지고 서로 싸워 방패가 이기지 못하였고, 또 혹은 수박하고 혹은 경주하고, 혹은 말을 타고 쏘도록 명하여 능하고 능하지 못한 것을 보아서 正布ㆍ錦布ㆍ楮貨를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이러한 사료들은 임금이 왕실의 행사에 갑사를 동원하여 그들의 무예재능을 관람하는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당시 왕실의 근위병인 갑사들의 용맹함을 여러 대소신료와 여러 종친에게 보여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당시의 왕권의 건제함을 보여 주기 위함이요 또한 당시 어수선하던 왜구와 주변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군비강화를 대내외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더욱이, 수박에 능한 갑사들을 연회에 투입한 것으로 보아 조선군 내에서 전투무예로 수박이 상당히 일반화된 것이며 정예화 되었음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갑사들이 수박을 하였다는 것에 더하여 이번에는 구체적으로 갑사를 선발할 때에 이루어지는 여러 체력실기시험과 아울러 수박을 시행하였다는 자료를 토대로 구체적 수박기법에 관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병조에서 무사(武士)를 뽑는 법을 올렸다." 이에 앞서는 三軍甲士는 騎射와 步射를 시험하여 額數를 채웠습니다. 그러나 兵法에,'발이 戎馬보다 빠르고 힘이 솥을 드는 자를 모아서 하나의 군졸로 삼는다.' 고 하였습니다. 이제부터 창 쓰는 부대는 갑옷을 입고 병기를 가지고 능히 3백보를 달리는 자를 上等으로 삼고, 2 백보를 달리는 자를 中等으로 삼으며, 완력이 남보다 뛰어나서 네 사람을 이기는 자를 상등으로 삼고, 세 사람을 이기는 자를 중등으로 삼아, 試取하여 牌를 만들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甲士를 選拔하였다. 봄부터 여름에 이르기까지 義興府 兵曹에서 武士를 興仁門 안에 모아 騎射ㆍ步射를 시험하여 甲士에 충당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능하지 못한 자를 三軍府에 모아 놓고, 走步와 手搏을 시험하여 3명이상 이긴 자를 모두 取하고 능하지 못한 자는 모두 陶汰시켰다.”
이러한 사료들은 태종과 세종실록에 나와 있는 갑사들의 구체적 시취과정을 기록한 것으로, 갑사를 선발하는데 있어서 우선, 말을 타거나 일상 적으로 보행할 때에 있어서 활을 쏘는 능력을 테스트함과 동시에 수박을 통하여 갑사들의 개인무예 실력을 측정하였다. 앞의 사료는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는데, 병기를 가지고 무장한 상태에서 보행능력 측정과 수박을 함에 이긴 사람의 수에 따라 등급을 매겼으며, 활 쏘는 능력과 더불어 무거운 부하에도 능히 견딜 수 있는 능력 측정을 함을 알 수 있다. 이로 보아 갑사는 다른 군인과는 달리 많은 체력을 요하는 능력을 측정함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비교적 무거운 것을 들게 하거나, 병기를 들고 일정 거리를 달리는 능력을 측정하는 것은 당시의 중량 있는 갑주를 착용하고 무장한 상태에서 장기간의 전투에 임할 수 있는 능력을 고려하여 근지구력적인 면을 위한 시행 형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위와 같은 체력테스트를 함과 아울러 사료에서는 갑사들에게 도수무예인 ‘手搏’이란 무예를 측정하고 있다. 수박을 수행하는 특성에 관해 많은 이견이 많으나 이러한 갑사들의 여타 실기 테스트들과 수박을 연관하여 보건데, 지금의 태권도 발차기와 같은 날렵한 동작은 힘들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갑사들의 수박을 본다면 무거운 갑주 착용 시에는 민첩한 동작이 나오기 어려운 것으로 사료된다. 더불어 전투 시에 투구를 쓰고 갑옷의 특성상, 끝부분이 하지 무릎부위까지 이르고 최소 30Kg임(張京淑, 2001)을 생각 한다면 수박의 형태상 제약을 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갑사들이 하는 수박은 사료에 나타난 여러 정황과 비교하여 볼 때, 근지구력과 근력과 같은 체력의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루어지는 둔탁한 움직임의 수박 시행이 이루어 졌으리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