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장흥 안양 기산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봉명제
(문집 표지 타이틀,)
八文章 전통 文化마을
岐山 文集
발행처;"참"살기좋은마을 기산마을 추진위원회
책 갈피와 첫장에 마을 칼라 전경사진 넣을것,
일러두기
그동안 우리 기산마을이 "참" 살기좋은 마을가꾸기 사업을 추진해 오면서
팔문장 전통 문화마을 가꾸기 사업을 진행해 왔습니다,
이명흠 군수님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주무 담당자님들과 온마을 주민들의
열렬하신 협조로 전국 대상을 수상할수 있었습니다,
400 여년 동안 오랜 세월이 지나다보니 팔문장님들의 자료를 확보하는데
참으로 어려움이 많았었고 이 모든 문제들을 김규정님과 백수인 교수님께서
자료를 찾아주시고 번역해 주셨습니다,
이제 마을가꾸기 사업의 준공식과 더불어서 팔문장 시가비 제막식을 오늘 시행하고
그동안에 모아지고 번역된 자료들을 엮어서 팔문장 전통문화마을 기산 문집을 발간합니다.
여기에 수록된 자료들은 원칙적으로 "참" 살기좋은 마을가꾸기사업 과정의 서문에서부터
팔문장님들의 시문을 기록하는것을 기본으로 하고 그당시 팔문장님들에 대한 찬 이나
애도의 글을 싣는 순서로부터 14~19세기 까지의 기산마을 출신님들의 글을 실었습니다,
다만 예외적인 글의 한두편은 기산 봉명재 혹은 유허비의 내용을 번역해서 실었습니다,
많은 자료들이 아직 미쳐 번역되지 못해서 아쉬운점이 많이 있습니다만,
우선 번역된 자료들을 여기에싣고 원문들은 스케너로 복사해서 첨부합니다.
말미에 "참"살기좋은 마을가꾸기 사업에서 전국 대상을 수상한 이후로
신문에 기사화된 내용 일부를 참고로 수록했습니다,
2009년 4월26일 "참"살기좋은마을 기산마을 추진위원회
發 刊 辭
- 盧賢機-
무릇 학문은 수신제가나 立身揚名을 하는데 근본이 되며
先人들 께서 獅子山 南麓에 鳳鳴齋를 建立하여
興學契를 조직 後孫들의 학문을 通習하는데 최선을 다 하여
名人達士가 대대로 輩出되어 士林들의 귀중한 詩文들이 많이 발간 되었으나
現존하는 詩도 있지만 많은 詩文이 자취마저 없어 안타까움을 금할수 없던차
마을里長 白光哲氏 께서 先賢들의 詩文을 發掘 하고저 백방으로 수소문 하여
서울에 거주하시는 金圭錠 선생님과 朝鮮大學校 白洙寅 敎授任의 諮問을 받아
선현들의 詩文을 發掘하여 마을앞 낙원동산에 金石文字화 하였으며
名作 詩文이 많아 岐山마을 文集을 編纂 하게되어 매우 뜻깊게 생각합니다.
끝으로 詩文을 發掘하는데 협조해 주신 金圭錠 선생과 白洙寅 敎授任께
진심으로 感謝드리며 마을가꾸기 사업에 財政지원을 아끼지않고 해주신
李明欽 군수님과 主務 담당자님 들께도 감사말씀 드립니다,
아울러서 이책이 나올수 있도록 협찬해 주시고 후원해주신 재경향우회,
백천근,양철중 회장님외회원님들,재부 향우회,우정회 회원님들, 백수인교수님,
그리고 영김 김윤환님,전남대 의대 백영홍 박사님 형제분들, 노진기, 마을에 남녀
敬老 회원님들께도 진심으로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리는 바 입니다,
감사합니다,
西記 二千九年 四 月 日
"참" 살기좋은마을 기산마을 추진위원장 盧賢機 上
길 따라 너울너울 문학 꽃은 피고!”
이명흠 (장흥군수)
- 기산문집(岐山文集)발간을 축하하며…… -
마을 가운데에 네모난 우물에서 ‘퐁퐁’ 솟아나는 것은 여느 공기방울이 아닙니다. 그곳엔 파란 하늘이 흐르고 억불산․사자산에서 깊은 숲에서 맑은 바람이 일고 ‘털털털’ 좁은 골목 비탈길 오르는 경운기의 가픈 숨소리며 구수한 차(茶) 내리는 동네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보입니다. 가만! 귀를 쫑긋 세우면 경연대(慶宴臺)에 오른 기산 8문장의 낭랑한 목소리 차례로 들리더니 어느덧 “아아! 마이크 시험 중입니다.” 회관 지붕 커다란 스피커에서 정겨운 이장님의 목소리도 들립니다.
황톳길 따라 어른 어깨높이의 돌담이 쭉 늘어서있고 정자나무 그늘 아래에는 도란도란 앉아있는 어르신들, 계단처럼 늘어선 작은 논 내려다보며 옹기종기 아늑한 시골집들 모여 있는 곳. 누구나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밖에 없는 곳, 안양의 기산마을 입니다.
지난 해「 참 살기 좋은 마을가꾸기 」공모전에서 최우수마을로 선정되어 세간(世間)의 눈과 귀를 모으더니 온 마을 주민들이 팔 걷어 부치고 뜻을 모아 한 삽 한 삽 흙 떠올리며 마침내 조선중기 최고 문인 팔문장을 배출한 옛 명성이 되살아나듯 아름다운 ‘ 팔문장 전통문화마을’ 을 가꾸 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장흥의 옛 모습과 이야기들을 구석구석 그려 놓은 이 곳은 누 구에게나 기분 좋은 웃음을 줍니다. 그동안 마을에 뿌려진 마법가루에 길가에 듬직한 관서별곡 시비 들이 우뚝 서고, 아담한 옛 우물 이 맑게 살아나고 나지막한 벽에는 옛 이야기들이 그려졌습니다.
거기에 조선중기 기산팔문장(岐山八文章)을 비롯한 기산의 필력(筆力)을 한 데 모아 하나의 혼으로 승화시킨「 기산문집 」을 발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 기쁨을 감출 길 없어 이렇게 진심어린 축하를 띄웁니다.
문림(文林)장흥을 있게 한 기봉 백광홍 선생을 비롯하여 한 마을에서 배출한 8문장의 빼어난 작품들을 모아 기산 문맥을 집대성 한 이 문집은 마을의 자랑임과 동시에 우리 장흥문학의 얼이 담긴 재산입니다. 날로 각박해지는 사회, 삶에 참된 것이 무엇인지 ‘진정 소중한 것’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이 시대에 「기산문집」 발간은 참으로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겉치레와 본질을 둘러싼 주변 것들에 의해 평가받는 사람이 아닌 의미 있는 삶에 대한 고민과 바른 것의 추구, 인간다운 향기가 묻어나는 삶을 통해 진정 평가받는 사람을 만들어 내는 문집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달콤한 초콜릿 한 조각 대신 작품을 통해 마음에 전하는 감동과 깨달음! 이것이 진정 후세를 위한 길이고 우리 장흥문맥을 이어가는 소중한 작업입니다. 문집을 통해 자연스럽게 우리 지역의 문학의 내면을 읽고 가슴 가득 자긍심과 장흥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야말로 큰 성과이자 지역문학의 줄기를 잇는 일일 것입니다.
산천의 풍경, 작가를 둘러싼 사람들과 처지, 이 뿐 아니라 글을 써 내려간 이의 감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모든 작품은 어느 한 편도 결코 간과할 수 없이 소중한 유산들입니다. 기산문집 발간이 앞으로 우리 장흥문학이 번성하고 전국의 작가들과 문학도들을 불러 모으는 ‘ 문학의 요람’ 으로 자리하는 밑거름으로 2009년 문학관련 사업의 단단한 반석이 되리라 믿습니다.
다시 한번 기산문집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더욱 깊이 있고 풍성한 ‘ 문학 동네 ’, ‘ 팔문장 전통문화마을 ’로 번성하시길 기원합니다.
축하합니다.
2009. 3월
문림고을 문학도 한사람
이명흠 장흥군수
가사문학의 아름다움과 참된 의미를 깨닫게 하는 좋은 계기
이승일(장흥군의회의장)
존경하는 "참"살기좋은마을 기산마을 추진위원회 여러분, 그리고 주민여러분!
팔문장 전통문화마을「기산문집」을 발간하게된 것을 참으로 기쁘게 생각하며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정남진 장흥은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중심지였습니다. 우리나라 최초 기행가사의 효시로써 관동별곡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기봉 백광홍 선생의 관서별곡을 필두로 호남 가사문학의 27%가 우리 장흥에서 창작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지역이 가사문학의 산실이었음은 쉽게 증명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학이란 체험으로 얻어진 진실을 언어를 통하여 표현하는 예술로써 독자들에게 교훈을 주고 인생의 진실을 보여주어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가 하면 고차원적인 정신적 즐거움이나 미적 쾌감을 주는 사회생활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정신교양의 한 부분입니다.
이러한 문학이 우리지역에서 더욱 세상에 알려지고 확인되어 재평가 되고 있는 것은 "참"살기좋은 마을 기산마을추진위원회의 끊임없는 활동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즈음 급속한 정보화의 확산으로 상업성이 중시된 나머지 문학이 갈수록 위축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아 많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러한 때에 발간되는「기산문집」은 우리들로 하여금 가사문학의 아름다움과 참된 의미를 깨닫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될 뿐만 아니라, 가을의 잘 익은 열매처럼 알찬 가사문학이 세태에 젖어 메마르고 삭막한 우리들의 가슴을 기름지게 하여 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끝으로「가사문집」을 발간하느라 노고를 아끼지 않으신 노현기 "참"살기좋은마을 기산마을 추진위원장님, 백광철 이장님을 비롯한 관계자 여러분께 거듭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드리며 기산마을의 무궁한 발전과 주민 여러분의 가정에 항상 건강과 행복이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 감사합니다. -
2009년 4월
장흥군의회의장 이승일
축 간 사
장흥문화원장 김 기 홍
문림의향의 고장, 우리장흥은 고려시대 이래 많은 문인과 학자들이 정신문화적 토양을 일구고 가꾸어
왔습니다. 현세의 우리들은 선인들의 업적과 문화의 실적(實績)을 통하여 새로운 가치 창조의 기반으로 삼아 왔습니다.
문림의향 장흥의 학문적 향맥의 한 가닥이 안양 기산의 봉명재(鳳鳴齋)와 경연대( 慶宴臺)를 중심으로
한 문화공간이라 생각합니다. 조선 중기에 이곳 봉명재에서 수학을 하였던 학자 가운데 기봉 백광홍
(岐峰 白光弘)선생이 조선 팔문장(八文章)으로 배출되었고, 기봉선생을 비롯한 학자 여덟 분이,
기산팔현(岐山八賢, 세칭 長興 八文章)으로 추앙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림고을 장흥의 전통은 근년에 이르러서도 기산마을에서 계속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1961년
기봉 백광홍의 기봉집 발견, 1963년의 기봉선생의 관서별곡 논문 발표, 1987년 전국시가비 건립동호회
의 기봉 가비(岐峰歌碑) 건립,1999년 ‘선시보주(選詩補註)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지정, 2004년 기봉선생
의 문화관광부 이달의 인물 선정, ‘기봉집’ 국역, 학술발표회 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 주민과 향우의 열정과 장흥군 등 관계 기관의 지원아래 추진했던 ‘팔문장 전통문화
마을 조성사업’은 정신의 계승은 물론 역사문화공간의 재창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2008년도에는 국가에서 추진하는 ‘"참" 살기 좋은 마을가꾸기 사업’ 공모전에서 최우수 大賞마을
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기도 했습니다. 팔문장의 역사성은 물론이요 기산 주민과 향우, 나아가 장흥의
자랑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기산 팔문장이 장흥 팔문장이라는 소이연(所以然)이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특히, <八文章 전통 文化마을>로 발간되는 기산문집은 팔문장을 비롯한
선현의 행적과 교류, 강학 활동, 문학 작품에 대한 문헌들을 종합하여 기록자료화 한다는데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습니다. 우선은 그간에 알려진 자료와 단편적으로 전해지던 기록을 집대성 했다는 점,
그리고 새로운 자료를 찾아서 깁고 메꾸었다는 점, 또한 주민과 향우, 행정기관, 전문가들이 함께 참여
했다는 점, 무엇보다도 후세들이 보고 읽고 알 수 있도록 번역 해설했다는 점 등이 <기산문집>의
빛나는 가치라 여겨집니다.
우리 문화원에서 장흥 지역 문집의 수집과 해제 작업을 하여 지난 1997년에 발간한 <장흥문집해제>에
기봉 백광홍(1522-1556)선생, 옥봉 백광훈(1537-1582)선생, 서곡 임분(1501-1556)선생, 죽곡 임회(1508-1573)선생의 문헌과 수원백씨 삼세삼강록(동계 백광성[1527-1595] 등)을 개략적으로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분들의 문헌의 수집이나 번역 해설 작업은 임하고 있지 못하던 터에, 이번에 <기산문집>으로 집대성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자료들을 많이 찾게 되어 더 없이 기쁜 일입니다.
이 일을 주관해 주신 노현기(盧賢機) "참" 살기 좋은 마을 기산마을 추진위원장님을 비롯한 추진위원과
동네 어르신들, 말 그대로 불철주야 좋은 마을 만들기와 기산문집 발간, 그리고 선현의 현창사업에 헌신해 오신 백광철(白光哲) 기산리장님, 문헌의 발굴과 번역 해설에 지혜를 모아 주신 김규정(金圭錠)선생과 백수인(白洙寅) 조선대 교수의 노고에도 정말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끝으로 <기산문집>의 간행을 계기로 선현들의 얼과 혼, 사상과 철학이 후대에게 교훈으로 이어져 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산문집>발간을 다시 한번 축하드리며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경의와 감사를 드립니다.
2009년 4월 일
장흥문화원장 김 기 홍
문화 향기 가득한 사자산 기슭
-백 수 인(조선대 교수 ․ 시인)
사자산 기슭에 봄기운이 완연하다. 파릇파릇 나뭇잎이 돋아나고 온갖 예쁜 꽃들이 시샘하여 피어난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자연 속의 꽃만이 아니라 오랜 동안 묻혀 있던 역사의 꽃이다. 이미 500년 전에 화려하게 피어났던 문학의 꽃이 어느 땅 밑, 어느 바위틈엔가 숨어 있다가 지금 이렇게 피어나기 시작하는가.
1960년대 이전만 해도 ‘관서별곡’이라는 가사 작품은 인멸되어 그 내용이 현전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져 왔으며, 작자에 대해서도 玉峯 白光勳 선생으로 오인한 전적이 많았다. 심지어 별개의 가사인 ‘箕城別曲’과 ‘香山別曲’을 합쳐서 ‘관서별곡’이라고 하였을 것이라는 추론도 있었다. 그러던 중 李相寶 박사가 1961년에 기산마을의 수원 백씨 기봉공파 종가에서 기봉 선생의 시문집인 ‘岐峯集’을 발굴하였다. 그리고 거기에 게재되어 있는 ‘관서별곡’을 분석 평가, 소개한 ‘關西別曲 硏究’(국어국문학 26호, 국어국문학회, 1963)를 발표함에 따라 ‘관서별곡’의 진면목이 알려지게 되었다. 따라서 이때부터 여러 학자들에 의해 관서별곡과 작자인 기봉 선생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졌고, 기봉 선생의 인품과 문학이 평가를 받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이상보 교수는 우리 기산 8문장의 선두인 기봉 백광홍 선생을 역사의 전면에 내세운 공이 큰 학자이다.
이후 국문학계에서는 송강 정철 선생의 관동별곡이 관서별곡의 절대적 영향으로 탄생되었다는 사실은 정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1986년 무렵 백남신 선생은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기봉 선생을 후세에 현창하려 팔방으로 뛰어 다니며 노력하였다. 그 결과 당시 연세대의 김동욱 교수와 국민대의 이상보 교수가 이끌고 있던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에서 기봉 선생 묘소 아래에 “기봉가비”를 세우고 1987년 가을 그 제막식을 가졌다. 이 제막식에는 전국에서 수많은 국문학자와 학생들이 참석했다. 장흥 고을이 생긴 이래 이렇게 많은 박사급 국문학자들이 한꺼번에 모인 일은 없었다고들 했다. 이 제막식에서는 “기봉집”을 영인 중간하여 참석자들에게 배부하였다.
이 무렵 나는 광주 그랜드호텔 커피숍에서 “기봉집” 중간본에 서문을 쓴 한학자 변시연 선생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분은 나에게 “기봉 선생은 장흥 팔문장일 뿐 아니라, 조선팔문장일세. 내가 조선왕조실록에서 똑똑히 확인했네.”라고 하는 것이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이전까지는 ‘기산팔문장’의 한 분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북한에서 번역되어 반입된 ‘조선왕조실록’을 찾아서 확인해 보았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봉 백광홍 선생이 거명된 것은 두 번이었다. 두 번 모두 이산해(李山海), 최경창(崔慶昌), 최립(崔笠), 이순인(李純仁), 윤탁연(尹卓然), 하응림(河應臨) 혹은 이이(李珥), 송익필(宋翼弼) 등과 함께 ‘팔문장’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토록 그 시대에 온 나라에서 이름을 떨쳤던 문장가요 시인이었지만, 그의 전기적 기록은 많지 않다. 그 이유는 그가 생애를 너무 일찍 마감하였기 때문이다.
기봉 선생과 더불어 기산마을이 본격적으로 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2004년 6월 당시 문화관광부가 기봉 선생을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하면서부터이다. 한양대 정민 교수에 의해 “기봉집”이 처음으로 완역되었고, 기봉 선생의 한시와 “관서별곡”에 대한 학자들의 집중 조명이 있었다. 여러 가지 기념행사를 통한 기봉 선생에 대한 문화적 스포트라이트가 기산마을, 기산팔문장, 기양사, 봉명재 등에 강하게 비추기 시작했다. 이 때 나는 문화관광부의 요청을 받아 “기봉 백광홍”이라는 소책자를 집필했는데, 거기에 이런 구절을 썼다.
기봉이 태어나서 자란 기산의 사자산 기슭에는 ‘봉명재(鳳鳴齋)’라는 서당이 있었다. ‘봉명재’는 당시 사설 교육기관으로 널리 명성을 얻어서 이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몇 백리 밖의 타 지역에서도 학문을 닦기 위해 찾아 올 정도였다. 기봉도 어린 시절 이 서당에서 학문의 기초를 닦는데 전념했다. 이 마을은 ‘봉명재’가 있어서인지 조선 중기에 명성이 높은 문인을 한꺼번에 여덟 명이나 배출하여 이들을 ‘기산 8문장’이라 불렸다.
그러나 기산 8문장 중 기봉과 옥봉 두 분 선생 외에는 별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학계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런데 기양사와 봉명재의 역사적 의미에 착안한 기산마을의 “참 살기 좋은 마을 가꾸기-팔문장전통문화마을조성” 사업이 전국에서 대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이는 백광철 이장의 굳건한 의지와 문화에 대한 신념이 없이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장거라고 생각한다. 특히 백광철 이장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조선시대 기산마을의 문학적 성가를 재현시키는 일을 이루어내고 있다. 그 일 중 가장 중요한 사업이 바로 이 책 “기산문집”이다. 자칫 역사 속에 묻혀버릴 뻔했던 기산팔문장에 대한 시문들과 당대의 사실, 평가 등이 담긴 전거들을 모두 모은 것이다. 시골 마을 이장 한 사람이 학자, 전문가, 행정가 등을 동원하여 이런 엄청난 일을 이루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사자산 기슭 기산 마을에는 역사의 굳건한 바위틈에 깔려 묻혀 있던 전통문화가 햇빛 찬란한 세상 밖으로 뻗어 나와서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고 있다. “기산문집”의 발간은 기산의 문화 역사를 밑받침하는 학문적 토대를 이룰 것이다. 이를 기회로 ‘봉명재’가 복원되고, ‘가사문학박물관’이 건립되면 기산마을은 세계에서 유일한 문화 향기 가득한 “참 살기 좋은 마을”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岐山文集序
김규정
땅의 기운 돌아오는가.
사자산록 기슭에
오롯이 횃불 치켜든 사람
미럭딩이 넘어 오네.
조선 문물이 만개하던 15,6세기 호남정맥 줄기 기산언덕 오동나무에 봉황이 깃들어 우니 저 아침 해가 뜨는 동산에 팔문장이 탄생했습니다.
헌걸찬 팔준사의 덕은 장흥을 넘어 호남을 거쳐 조선 팔역에 백성의 교화가 뻗게 했습니다.
한 시대를 울렸던 기산촌의 기상을 이제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늘이 창창하고 바다가 광활하듯이 기국이 상쾌하고 도량이 넓은 백광철 이장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궁벽한 시골에서 이장 일을 맡아 참신한 생각으로 살기 좋은 마을 가꾸기에 나서 불도저 같은 우직한 뚝심으로 밀어 제칩니다.
그것도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기산마을에 태어나 기산에서 살다 가신 선현들의 정신 고갱이를 팔아서 승부하려 합니다.
기산은 산 좋고 물 좋아 아들딸 많이 낳아 자손도 번연했지만 탁절한 인물도 있습니다.
이런 재주와 행실이 올바른 선인들은 평생의 발자취를 남겼는데 세월이 흘러 시루떡처럼 차곡차곡 쌓여 풍요로운 인문 자원으로 부활합니다.
부활의 주인공은 밝은 눈을 가진 백 이장입니다.
가벼움이 흘러넘치는 황량한 세태에 조선 문명의 보고 우리 고적에 눈길을 돌려 문화 컨텐츠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자산이 중심이던 시대는 가고 앞으로 우리 미래는 지식재산에 달려 있습니다.
생각하는 바나 취미가 서로 맞는 것을 氣味相合 이라 합니다.
기산 이장님과 저는 이 말이 적절합니다.
민주당이라는 정당에서 우연찮게 인연의 끈이 연결됐지만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 일도 중요합니다.
이장님의 부탁으로 팔문장 가운데 글이 하나도 없이 사라진 광산 김씨 남계 김윤, 지천 김공희 두 부자 선생, 동계 백광성, 풍잠 백광안 두 수원 백씨 선생의 유문을 서울과 장흥을 다 뒤져 온전하게 아쉬움 없이 찾아 내 번역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기산 마을에 터 잡고 살았던 여러 성바지 문집과 문헌을 전부 발굴했습니다.
일실됐던 수원 백씨 삼세 삼강록, 명강 백봉흠 선생의 문집도 완정한 형태의 서물로 자료를 보내드렸고 유집의 출처도 소개했습니다.
시대별로 켜켜이 온축된 기산문명 전체를 세상 밖으로 건져 올렸습니다.
여러 문적을 국역해 다음 인터넷 까페 기산마을에 올려 소통에 막힘이 없게 했습니다.
면면이 내려온 고가의 전통을 일별할 수 있습니다.
선인들의 삶의 궤적도 밤하늘의 별같이 맑은 영혼의 순수함도 느껴 볼 수 있습니다.
옛사람들은 삶의 지향점이 우리시대와 다릅니다.
대부분 지금은 돈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을 성공한 사람으로 치지만 고인들은 자기 수양을 통한 내면의 완성입니다.
이런 일련의 모든 과정은 아무런 물질적 대가 없는 순정한 마음의 발로였고 그간 지켜보면서 장흥이라는 고을을 이야기할 때 왜곡되고 표피적으로 흐르는 것을 보아 왔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마을 앞 팔문장 기념 표석을 세우면서 공시적으로 통시적으로 아우르는 모든 기산의 구적을 총괄해 수습하게 되었지만 감히 자부하건대 장흥이라는 지방을 이해하는 배경이 없이는 아무도 앞으로 이런 일을 할 수 없으니 이번 기회에 꼭 책으로 발간할 것을 누차에 걸쳐 이장님께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후인들로 하여금 계속 이어가게 할 수 있습니다.
기산문집이 발간됨으로써 올바른 장흥담론이 시작되는 단초가 되길 기원합니다.
유독 장흥은 예부터 사대부들이 모여 들어 살았던 사림의 부고요 바다였습니다.
충분하게 남아 있는 전적들을 열람하지 않고 장흥을 해석하는 일은 어불성설입니다.
장흥의 속살 읽기는 글의 말결을 느끼며 글자 냄새를 맡았을 때 가능합니다.
그것도 선조들이 남겨 놓은 풍성한 재적의 연원을 통해서입니다.
철학은 보편성이요, 문학은 구체성이고 향토학은 종합과학으로 학제간 연구가 필연적입니다.
아무쪼록 의미를 부여한다면 작다면 작고 크다면 한 없이 큰 실마리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도 지속 가능한 진보가 있기를 바랍니다.
기산마을 어른들을 한 분도 뵙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제게 보내주신 한없는 사랑과 관심에 인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원 백씨 외손이 할 노릇 했고 광산 노씨 증조할머니 친정 일문에도 조금 도움이 됐다고 자부하고 우리 영김 건산파 신헌 낙헌 선생에게도 면목이 있고 저의 작은 집 통덕랑공 종가 양대 효자 집안에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기산마을 영원하라.
감사합니다.
2009년 2월 19일
金圭錠 씀
장흥문학의 시원 ― 그 찬란한 마을
김석중
큰 누님은 안양의 동계마을로 시집을 가시었다. 눈발이 휘날리는 겨울날 누님은 고운 한복을 입으시고 가마를 타시면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어머니처럼 곱고 자상하고 이쁘면서도 억척스러운 일꾼이던 누님이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집을 떠난 다는것이 못내 믿기지 않았지만 현실이었다. 아주 어린 심정에도 누님의 빈 자리는 너무 허전하고 아쉽기만 했다.
어느 해 늦 가을 필자는 어머니를 따라 시집간 누님댁을 찾아 갔다. 어머니는 찰떡을 머리에 이고 계시시었고 나는 살찐 씨암탉을 보자기에 싸서 짊어진 사돈댁 나드리였다. 그렇게 찾아간 마을이 안양면 기산리의 동계마을이었다.
유년의 시선에서 보여지는 누님댁을 찾아가는 골목은 온통 돌 투성이였다. 길도 돌멩이 천지였고, 밭두렁도 나직한 돌담이었으며 골목은 구불구불한 돌담으로 미로와 같이 이어지고 있었다. 누님 마을의 첫인상은 「돌이 천지로 깔린」그런 곳으로 각인 되었다. 그마을이 사자산 아랫녘이어서 흘러내린 돌들이 그 마을을 덮고 있는 것 같았다.
매년 여름이면 동계마을의 사돈댁에서 장꾼들을 통해 이바지를 보내왔다. 이바지 보따리가 전해지면 필자와 동생은 목을 빼고 그 보따리를 기웃거렸다. 행여 떡이나 유과 같은 먹거리가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 였다. 그러나 이바지 보따리는 「짓감」이었다.
안양기산마을의 「미영밭 짓감」은 척박하던 시절의 여름철을 메꾸는 꽤나 유명한 먹거리 였다. 보리밥 그득 담은 양푼에 「재장」이나 「고추장」을 곁들어 적당히 익은 「무시짐치」를 넣고 비벼 먹으면 그 담백함과 개운함은 따를것이 없었다.
그 맛이야 지금에 와서 논하거니와 당시에는 값싸고 맛깊은 것중에 유난히 기산마을의 「미영밭 짓감」이 회자 되었으니 그 연유에 대해서는 지금도 알길이 없다. 어떻든 기산 동계마을은 필자의 유년시절부터 큰 누님의 시갓댁으로 다가워서 기억속에 자리잡은 마을이 되고 있었다.
1984년에 장흥에서 최초로 시작된 본격적인 문화운동의 단체로 「별곡문학동인회」가 태동되었다. 이 동인회는 발전적인 모양으로 「장흥문화동인회」로 확대 되었으며, 민속(한들농악), 향토사,미술,사진(억불사우회), 음악등 다양한 장르의 동인회들이 함께하는 문화운동의 단초가 되었다.
「별곡문학」과 「동인회」는 장흥의 민간문화 운동을 복격적으로 시작한 단체가 되었으며, 전시, 공연, 발표회등의 문화행위를 접목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중에서도 別曲文學同人會는 장흥의 문맥을 보존 계승 발표 정리 편찬 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고 자평 할 수가 있다.
이제는 대내외적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어서 장흥의 대표적인 문학단체로 인정받고 있는 동인회의 명칭인 「別曲」은 어디에서 연유 되었을까.
대강 짐작되거니와 「별곡」은 장흥문학의 지평을 연 기봉 백광홍(1522-1556)의 문학적 업적과 관서별곡(關西別曲)의 문맥을 이어 받겠다는 의지에서 명명된 것이다.
따라서 別曲文學同人會는 關西別曲의 토양위에서 지난 20여년간 장흥의 문학을 가꾸고 문학현장을 지켜온 것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별곡문학동인회는 동인지(별곡문학)를 20호(2008년)에 이르기까지 단 한번의 결호도 없이 간행하면서 동인회원, 장흥출신작가들의 창작열의를 담아왔다.
뿐만 아니라 장흥문학의 현장 지침서인 장흥의 문학기행(2004 별곡간행, 2005 증보개정판)을 간행 하면서 「장흥가단」과 백광홍, 관서별곡의 문학적 성취와 장흥문학과의 상관관계를 널리 입증 하는데 기여 했다.
나아가서는 기봉 백광홍의 보다 실체적인 평가를 받기위한, 더불어 장흥가단과 장흥의 가사문학을 정리한 「장흥의 가사문학,-1997년 초판 2002년 증보개정판, 김석중, 백수인, 편저」을 간행하여 집대성하였다.
이제는 고인이된 장흥이 낳은 큰 소설가인 이청준은 귀향길마다 기양사를 즐겨 찾았다. 이청준은 사자산 업고 억불산을 마주한 기산리의 풍광을 유난히 좋아했다. 그래서 기양사의 마루에 앉아 장흥문학을 담론의 주제로 하여 기억될만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정민교수(한양대 국문학과, 기봉집 번역) 이만재(카피라이터) 장찬홍(안양출신 문인화가) 김영남(대덕, 시인) 김선두(중앙대교수, 관산,화가)등 동행한 지인들은 이땅의 쟁쟁한 예인들이었다. 더불어 한국문학 번역원의 연수생들이 기양사를 방문한것도 하이라이트였다. 한국문학을 자국의 언어로 번역하기 위하여 연수하는 11개국의 외국인들은 기양사에서 한국의 가사문학 산실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섭렵했다.
아담하고 서정좋은 마을에서 조선조 서경기행가사의 효시인 관서별곡이 창작되었다는 것은 지나칠수 없는 수업의 과제였다.
필자가 문단에 데뷔하여(1980, 삼성문학상 소설당선) 문학의 행로를 걷게 되면서부터 유년시절의 누님댁, 그 돌밭 마을은 언제부터인가는 장흥문학의 산실로 팔자의 의식과 동행하여 온 것이다.
그런 연유로 별곡문학을 통한 장흥문맥의 정립에 직간접적인 연고를 갖게되었고 지금까지 해마다 수십여회 기양사를 찾게되는 인연으로 연결지어 지는 것이다. 그만큼 기양사는 팔자와 장흥의 문인들이 지나칠수 없는 문학의 공간으로 자리 하고 있는 것이다.
기산마을과 기양사에는 필자의 개인적이며 지나칠수 없는 인간관계들이 연결되어 있다. 기양사를 찾을때마다 뒤뜰 돌담밖으로 울창하게 성장하는 귀족호도나무 그 집에는 칠순을 바라보는 누님이 살고 계시는 곳이다. 그래서 필자는 기양사 들리는 길목마다 돌담에 기대어 목을 빼고 누님의 안부을 묻는다.
그 마을의 백낙홍님은 장흥문화원의 이사로 활동하며 장흥의 문화운동에 기여한 분이며 오래동안 연고를 갖고 있는 분이여서 만남이 반갑고 즐거웁다.
기산마을 출신으로 필자와 함께 「장흥의 가사문학」을 편찬한 백수인(조선대교수,시인, 문학평론)교수와 그의 동생인 백성우(소설가)와의 인연 또한 남다르다.
거슬러 올라가면 어찌 그 인연 뿐이겠는가 기산 봉명재에서 서원을 열어 후학들을 양성한 김윤(金胤 1506~1571)과 김공희(金公喜 1540~1604) 부자는 광산문중(光山金氏)의 선인이며, 장흥팔현 기산 팔문장으로 거명되는 문인학자들의 스승이니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의 학문이 이 땅에서 열린 것 같은 자긍심을 갖게 해주는 곳이 또한 이 마을이다.
2008년 장흥의 문학사에는 남다른 경사가 있었다. 전국최초로「문학특구」로 지정된 일이다. 문학이라는 예술의 장르가 한 지역에서 특화되었다고 인정되는 「문학특구」의 지정은 문학인으로써는 어떤 표현으로 부족한 경사였다.
남녘의 고적한 마을 장흥이 문예의 향풍으로 거듭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며 은인자중 내공을 기르고 있던 장흥문학의 쾌거임이 틀림없는 일이었다.
그 단초를 시작한 곳이 또한 기양사를 근거로 하는 기산마을 사람들의 남다른 행보이니, 그 선진의 의식이 의연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팔문장 전통문화마을 조성사업」은 그 제목부터가 차별화 된다. 일응 묵향이 느껴지고 기개와 향맥이 돋보이는 글발이어서이다.
인문(人文)의 붓질이 스치고 지나간 듯 수려한 마을을 지키는 사람들이 옛적의 학맥과 문맥을 이런 모양으로 재현 하는 것은 실로 미쁘고 아름답게 비쳐 질 수 밖에 없다.
지난해(2008년) 이 마을이 「참 살기 좋은 마을 가꾸기」의 사업으로 행정안전부에서 대상을 수상 했다는 것이 그다지 큰 뉴스는 아닐 것 같다.
참 살기 좋은 마을 이라는 수식어 이전에 기산리에는 빼어난 학문과 예지의 향맥이 눈 부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산리와 동계마을을 지키며 사는 분들에게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복잡다단한 세간의 사연들 속에서 「문학」과 「학문」을 형상화하여 드디어는 이런 모양으로 선보일 수 있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봉의 문학적 성취가 의연하고 당대의 삼당시인으로 평가받는 옥봉의 시문이 다가오고 기산 팔현의 문학이 재현되는 현장은 지나칠 수 없는 이 시대의 매력으로 승화되고 있어서이다.
더불어 이 범상치 않은 마을을 지켜 보며 마음쓰는 이들의 행보를 어찌 소흘히 할 수 있을까.
이웃 마을에서 장흥문학과 한국소설 문단의 큰 자리매김을 하는 한승원 작가의 음덕이 큰 힘이 되고 , 한봉준, 백형갑(전 안양면장 역임), 박해영(안양면장) 제씨의 격려와 지원이 세삼 말 인사를 하게 한다.
더불어 발자욱도 말 소리도 야문 백광철 이장은 이 일이 내 몫이다라고 자처하여 발품팔고 있으니 칭찬의 말이 절로 앞선다.
무엇보다도 시인이며 문화군수를 자처하는 이명흠 군수의 은근한 후원이 고마웁고 이승일 의장의 마음씀도 오래 기억될 것이다.
봉명재 올라가는 길목의 돌담 및 샘물은 지금도 퐁퐁 솟구치고 있을까. 경연대 거쳐 기양사로 우회하는 숲길의 청량함을 어디서 맛 볼 수 있을까.
문학특구 장흥 그 시원의 마을은 고즈넉한 서정속에서 실로 눈부시게 살아 오르고 있는 것을 어찌 표현할까.
이제는 혼자되신 누님댁의 그 맛난 된장을 곁들인 미영밭 무시잎쌈이 그리웁다.
(소설가. 별곡문학동인회장)
碑文과 詩文그리고 岐山,文集에 대하여 설명드립니다,
- 백 광 철 -
우리 마을은 팔문장님들의 빛나는 업적과 얼로인하여 후손들이 정신적 영향과
더불어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너나없는 마음속에 팔문장님들의 시가비를 세우고
현창 시켜드리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진즉에 실현하지
못한데 대한 죄송스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솔직히 말씀드립니다,
금번에 참살기좋은 마을가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이명흠 군수님
한봉준 백형갑 전임 면장님 박해영 신임 면장님 김문호 건설과장님
박광규 행복마을 계장님 이봉간,이지혜,김종일 담당관님들의 각별한 배려속에
팔문장 전통 문화마을 가꾸기 사업이 전국 大賞이라는 성과를 낼수 있었습니다,
마을가꾸기 사업을 진행해 오는동안 알게 모르게 도와주신 노현기 추진위원장님
그리고 추진위원님 여러분 백인천님과 김사섭님 백남호님 노생기님
백 훈님 등 20분이 토지사용승낙을 해 주셨는가하면,
마을 주민들과 재경,재부, 향우,우정회, 회원님들의 열렬한 도움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먼저 표합니다,
비문과 시문은 추진위원회 총회를 거쳐서 확정되어
동광석재 선동권 사장님에서 제작되어 오늘에 세워져 있는 詩文들 입니다,
비문과 번역시문이 확정되기까지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특히 팔문장님들 중에서 기봉님과 옥봉님은 자료가 풍부 하였지만
서곡, 죽곡님의 자료는 그나마 기양사나 장흥 문화원에 문집이 있어서
그런대로 자료 확보가 쉬웠습니다만,
남계,지천님의 자료는 광산김씨 종친회장님 한테까지 연락을 했어도
종중이나 후손중에도 자료를 소장하고 계신분이 없었습니다,
동계공님도 기양사나 종손, 문화원에도 자료가 없었으며
오당 노 관 진사님 역시도 진사시가 있다고해서 숭조 차원에서
진사시를 세워드리기로 협의되어 추진한 것 이었는데
70년전 아래 사랑채 불이나서 문집이나 시본이 소실되고
종가에 소장 되고있지 않았습니다,
명강님 역시도 문집이 있다고 기록이 있었지만, 내 놓으신 분은 없었습니다,
다행이도 김규정님께서 한학을 연구중에 계셔서 대통령선거 과정에 알았던 인연으로
국립중앙 도서관과 한국 고전문학 번역원에서 찾아내 동계공 삼강록문집과 詩4편이
포함된 복사본을 그리고 팔문장님들의 시문, 명강님의시문, 노진사님의 차운詩 등을
찾아 보내주셔서 아쉬운대로 시가비 현창사업에 모양을 갖출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보내주신 시문들은 백수인 교수님께서 바쁘신 업무중에도 흔쾌히 번역을 해 주셨습니다,특히 월송 백남식님 께서는 비문을 지으시고도 성함 올리시기를 극구 사양 하시었고 고증과 교정 부분에 많은 수고를 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주위에 도와주신 분들의 덕택으로 시가비 건립에 첫 단추를 꿸수있는 계기가 된것같습니다, 수고해주신 여러분께 머리숙여 감사 드리는 바입니다,
팔문장님들 중에서 어디에도 풍잠님의 시나 문집은 찾을길이 없었습니다,
화순 능주등 교분이 있었슴직한 분들의 문집을 뒤지고 혹시 차운시라도 찾고자
김규정님께서 노력하신끝에 기산팔현지 원문에 깨알같은 글씨로 하단에 기록된
인품기와 江行 이라고 하는 詩 한수를 뒤늦게 찾아서 번역까지 해 주셨습니다,
아쉬운 점은 사업이 완료된 이후로 백 풍잠님의 시문과 인품기를 찾은탓에
여기에 함께 시가비를 세워드리지 못한것이 못내 죄송스런 마음 뿐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마을가꾸기사업을 진행해 오면서 한국 고전문학 번역원과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국립 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자료중에
팔문장님에 대한 소중한 자료들을 확보할수가 있었습니다,
현재 이희승 국어 대사전이나 인터넷 네이버등에 조선 팔문장이
옥봉 백광훈님으로 오기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만,
조선 왕조실록에서 팔문장에 대해 딱, 두번 기록이 나오는데 두번다
기봉 백광홍님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명단은 백광홍,이산해,송익필,최경창,
이순인,윤탁연, 최립,하응림, 이렇게 여덟분 이라고 합니다,
후세에 전해오면서 넣고 빼고 또는 글 잘하는 사람은 팔문장이라 통칭을 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기봉 백광홍님은 조선 팔문장 이시고
옥봉 백광훈님은 최경창, 이달과 더불어 삼당시인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조선 팔문장과 기산 팔현이 나오신 기산 마을에 조선 팔문장중의 한분이신 기봉 백광홍님과 동 시대에 동문수학 하셔서 진사 현령이 되신 분들을 한 울타리 안에 장흥지역 기산팔문장으로 불리셨다고 사료됩니다,
특히,
금번에 김규정님께서 보내주신 국립중앙 도서관에 소장된 문집중에서
기산팔현에 대한 서문을 강진성전면 월남리 원주이씨 이 금, 님의 문집에서
발견이 되었기에 발췌 번역해 첨부해 보는 바 이며 , 존재 위백규님의 4弟이신
서계 위백순님의 문집에서는 기산 팔현에 대한, 여덟분 모두에 대해서
찬을 해주신 詩를 번역해 보내 주셨기에 조선 왕조실록 (선조18년 2월1일)
(12월 1일분)등을 복사 해서 기산 팔현에 대한 자료등을 여기에 첨부합니다,
"참" 살기좋은 마을가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그동안의 시가비 건립 자료들을 모으고
모든 자료들 중에서 번역이 완료된 작품들 만이라도 묶고 미쳐 번역을 못한 자료들은
복사본을 붙여서 책자로 발간하는 뜻은 후인들의 몫으로 남겨두기 위함입니다,
여기에 번역, 혹은 복사 첨부된 자료들은1400~1900년대까지
기산을 중심으로 살다가신 선현들의 오백년에 걸친 자료들중 일부입니다,
팔문장님들과 이후 선현들의 좋은 詩 작품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균형과 형평상 여기에 다 올려드리지 못함을 매우 아쉽게 생각합니다,
끝으로
기산마을 문집 책자 발간에 협찬해주신 장흥군과 재경향우회 백천근,양철중
회장님외 회원님들, 재부향우회 우정회 회원님들 그리고 백수인 교수님
영김,김윤환님 전남대 의대 백영홍 박사님 형제분들, 노진기님,기산마을
남녀 敬老회 회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번에 미쳐 세워드리지 못한 풍잠님의 시가비는 추후 기회가 되면 세워드릴 계획이며 항차 장흥가단의 노명선님의 천풍가, 이중전님의 장한가, 위세직님의 금당별곡,
이상계님의 인일가, 존재 위백규님의 권학가, 문계태님의 덕강 구곡가등 17수 를
기양사와 봉명재 사이에 시가비로 세워볼 계획도 추진중에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2009년 4월 26일 ("참"살기좋은마을 추진위원회 총무 백광철올림)
조선팔문장과 기산팔현
‘조선팔문장’으로 칭송 받은 기봉 백광홍과 삼당시인으로 문명을 떨친 옥봉 백광훈을 비롯, 봉명재에서 동문수학한 후 동시대에 진사 현령이 된 남계 김윤, 서곡 임분, 죽곡 임회, 동계 백광성, 풍잠 백광안, 지천 김공희를 일컬어 ‘기산팔현’이라 했음.
岐峯 白光弘(백광홍)(1522~1556)
字는 大裕요 號는 岐峯. 一齋 李恒 문하에서 수업. 명종 4년(1549) 사마시에 급제, 1552년 문과에 등제, 홍문관 正字에 임용됨. 詩賦會에서 賦 ‘冬至’로 장원하여 임금으로부터 ‘選詩十卷’을 특사 받고 湖堂에 뽑혔음. 명종 10년(1555)에 평안도 평사가 되어 재임 중 관서지방의 절경을 歌辭로 읊은 관서별곡은 우리나라 기행가사의 효시가 됨. 이산해, 송익필, 최경창, 최립, 이순인, 윤탁연, 하응림 등과 함께 ‘조선팔문장’으로 조선왕조실록에 전해져 옴. 1987년 11월 전국시가비 동호인회 소속 국문학자들이 공의 묘가 있는 부산면 호계리 雲峙에 岐峯歌碑를 세워 그의 문학업적을 기림.
南溪 金胤(김윤)(1506~1571)
光山人으로 字는 纘中, 號는 南溪. 靈川 申潛의 문하에서 수업, 宣祖 3년(1570년) 司馬試에 급제, 참봉을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학문에만 전념함.
書谷 林賁(임 분)(1501~1556)
扶安人으로 字는 成甫, 號는 書谷. 靈川 申潛의 문인. 중종 35년(1540)에 司馬試에 응시하여 급제, 1540년 敎授가 됨. 평생을 經傳과 易傳을 講究하고 현량지사와 교분을 나눔.
竹谷 林薈(임 회)(1508~1573)
扶安人으로 字는 獻可, 號는 竹谷. 初諱 는 誨다. 書谷 분의 아우, 五峯 李好閔 문하에서 수업, 중종 29년(1534) 司馬試에 급제, 1540년에 文科에 등제하여 湖堂에 뽑힘. 工曹正郞을 거쳐 남원부사, 상주, 순창, 나주, 광주, 능주 등 8주 목사를 지내고 檢祥에 오름. 赴京 사신의書狀官으로 천거되어 명나라에 들어가 그 곳 이름 있는 여러 학사들과 교유함.
東溪 白光城(백광성)(1527~1595)
字는 大한, 號는 東溪다. 岐峯 白光弘 의 종제. 명종 16년(1561)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나 科業 을 버리고 은거하면서 오로지 후진 교육으로 여생을 보냄.
風岑 白光顔(백광안)(1527~1567)
字는 而粹, 號는 風岑. 岐峯 白光弘 의 아우. 科業에 나아가지 않고 在家하여
학문에 전념함. 문장으로 이름을 날림.
玉峯 白光勳(백광훈)(1537~1582)
字는 彰卿 號는 玉峯 岐峯의 아우. 靑蓮 李後白의 문하에서 수학, 13세에 상경하여 양응정. 노수신 등에게 사사. 명종 19년(1564)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詩書에 열중함. 선조 5년(1572) 노수신의 천거로 白衣製述官이 되어 나가니 그의 詩書의 뛰어남에 명나라 사신이 감탄함. 벼슬보다는 詩로 이름을 날려 최경창, 이달과 함께 三唐詩人이라 일컬어 칭송함. 공의 遺墨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1981년 그가 살던 해남에 유물관을 세웠음.
芷川 金公喜(김공희)(1540~1604)
光山人으로 字는之鳴 號는 芷川 명종 19년(1564) 사마시에 급제하고 宣祖13년(1580) 문과에 등제.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워 전공을 세우고 郡守를 제수 받아 6郡을 돌며 선정을 베풂.
낙원동산
장흥군에서 2008년도 공모사업으로 추진한 "참 살기좋은 마을가꾸기" 사업에 우리마을의 "팔문장 문화마을 가꾸기사업" 이 선정되었습니다. 이 사업은 우리 마을이 장흥군에서 "제 1 기산" 이라 불리며, 조선 중엽에 배출된 조선팔문장 중의 한분이신 기봉 백광홍 선생님등 장흥 팔문장 여덟분이 모두 우리마을에서 태어나 살다가신 분들로 선현들의 업적을 기리고 유서깊은 유적들을 복원, 보존 함으로서, 과거뿐만 아니라 현대에 이르러서도 전국에서 가장 살기좋고 명망있는 마을로 일구어 가자는 것입니다,
참 살기좋은 마을가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한 이곳 낙원동산은 1977년 새마을 사업 당시 故 백낙형님이 마을회관부지를 희사해 주셨고, 그 분의 장자 백인천님이 ‘낙원거사 행적비’ 주변부지를 사용할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확보한 부지에 상금으로받은 사업지원비, 마을 자부담금 등을 보태 이 소공원을 조성 하였습니다.
특히 시가비 건립 과정에서 용산면 출신 洗石軒 金圭錠님은 문집 등 자료들을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국립 중앙도서관, 한국고전번역원 등에서 어렵게 찾아 보내주셔서 큰 도움이 되었고, 한시 등 자료의 번역은 조선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백수인님께서 맡아 주셨습니다.
‘팔문장 문화마을가꾸기’ 사업을 추진해 오는동안 토지사용을 승낙해 주신 여러분들과 온 정성과 사랑으로 도와주신 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참살기좋은 마을가꾸기" 사업에 도움을 주신분들의 공로와 우리마을 주민들의 마음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그 뜻을 새겨 이 비를 세웁니다.
2008년 9월 일 주민일동 세움
八文章 전통 문화마을
獅子山 南麓 가마등 (鼎嶝) 아래 자리한 우리 마을은
당대 八文章 輩出로 長興에 一岐山이라 전해 오고있다
鳳鳴齋
우리마을 古有書齋로 많은 鴻儒碩學을
배출 하였으며 興學契를 설립 유지하여 왔으나 勢不得己
철거하고 遺虛碑가 있다,
八文章
조선조 중엽 (1500 연대)에 남계 金胤 서곡 林賁 죽곡 林회
기봉 白光弘 동계 白光城 풍잠 白光顔 옥봉 白光勳
지천 金公喜 等 八賢이며 기양사에 配享되셨고
繼出名儒하니 조선조 후기 梧堂 盧瓘은 成均進士로
세인의 존경을 받으셨으며 孝星祠에 配享되셨다
明岡 白奉欽은 鳳鳴齋 訓長으로 著名하셨다
慶宴臺
參判 白繪의 네 아들이 登科함으로 마을뒤 광장 (진챙이)에
築臺하여 경연을 베푼 곳으로
八文章 또한 이곳에서 경연을 하였으므로 文章臺 라고도 한다
近世에 까지 마을 民俗놀이 祭典場으로 이용하여 왔으나
현재는 사유화 되고 경연대 碑가 그 흔적을 전하고 있다
특히 조선 팔문장중의 한분이신 岐峰 白光弘先生이 지은 關西別曲은
우리나라 기행가사의 효시로서 조선조 이후 모든 기행가사 문학의
모체라 한다
이러한 선현들의 명예로운 문화유산의 연유로
팔문장 문화마을 가꾸기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선현들의 遺址를 보존하고 길이 전 하고자 이 비를 세우노라
2008년 9월 水原人 白南植 謹識
내가 사는 집
남계 김윤 (1506-1571)
추운 겨울에 이르러도 소나무 계수나무 향기 가득하고
짙푸른 구름 겹겹이 떠 빈 산을 채우네.
창가에 앉아 밤새우는 이야기 하늘에 먼동이 하얗게 터오는데
술 외에는 매화향기조차 끼어들지 못하네.
卜居
- 南溪 金胤(1506-1571)
松 桂芳 盟 到歲寒
翠雲浮重滿空山
一窓夜話天將雪
酒外梅香未入欄
南溪 金胤(1506-1571) 영천은 자신의 학문을 이을 사람은 윤과 분이라고 했다.
선조 3년 사마시에 급제, 참봉을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역, 백수인교수)
贈印上人 인 상인에게 주다.
-南溪 金胤-
靈籟飄空壑 그 바람소리 빈 골짝에 떨어져
纖雲纈碧岑 푸른 멧부리엔 고운 구름 군데군데
僧窓今夜話 지금 승방엔 밤 이야기
江郭昔年心 강마을은 옛 생각하네.
註)上人 은 사찰의 큰 스님이나 주지 스님 등 중량감 있는
인사에게 儒子들이 부르는 호칭이다.(역,김규정)
이성주에게 감을 보내며
서곡 임분 (1501-1556)
바닷가 가을은 빨리 찾아와 산밭에 감이 벌써 붉었소.
동글동글 이슬 빛이 맑고, 알알이 서리가 짙게 맺혔소.
맛은 당신께서 드시기에 알맞고 과육도 당신께 적합할 것이오.
가난한 집에 마땅히 드릴 게 없어 대바구니 가득 채워 보내드리오.
送枾李城主
海國秋來早 山園枾子紅
團團露色嫩 箇箇霜華濃
風味宜尊長 王更漿合相公
貧家無表物 緘送满筠笼
書谷 林蕡(1501-1556) 8세 때 태수가 시를 짓게 할 만큼 신동으로 알려졌다.
중종 35년 사마양시에 급제했으나,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나라의 특명으로 정해군 장례를 집례했다. (역,백수인교수)
수영의 풍경을 읊음
죽곡 임회 (1508-1573)
수루에 늙은 장수 귀밑머리 하얗듯이
달밤에 파도 노래 무수히 밀려오네.
몇 해 전 집 떠나와 해안 방위 힘쓰면서
사람 시켜 한양 가는 배를 자주 묻곤 하네.
詠水營風土
戌樓老將鬢皤然 月下啇歌無數入
前歲辭家鎭海邊 伻人頻問漢陽船
竹谷 林薈(1508-1573) 중종 29년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에 뽑히고 남원 부사와
상주, 순창, 나주, 광주, 능주 등 8주 목사를 지냈다.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역,백수인 교수)
관서별곡
기봉 백광홍 (1522-1556)
관서 명승지에 왕명으로 보내시매
행장을 다스리니 칼 하나뿐이로다.
연조문 내달려 모화고개 넘어드니
귀심이 빠르거니 고향을 생각하랴?
벽제에 말 갈아 임진에 배 건너
천수원 돌아드니 송경은 옛나라라
만월대도 보기 싫다 황강은 전쟁터라
가시덤불이 우거졌다.
산 해가 기울거늘
말채찍 다시 빼어 구현을 넘어드니
생양관 기슭에 버들마저 푸르렀다.
감송정 돌아들어 대동강 바라보니
십리파광과 만중연류는 상하에 어리었다.
봄바람이 불어와 화선을 비껴 보니
녹의홍상 비껴 앉아
섬섬옥수로 거문고 이어 타며
하얀 이 예쁜 입술로 채련곡 부르니
하늘 신선 연엽주 타고 옥하수로 내려온 듯
설마 나랏일에 바쁜들 풍경을 어찌하리?
연광정 돌아들어 부벽루에 올라가니
능라도 방초와 금수산 연화는 봄빛을 자랑한다.
천년 기양에 태평 문물은 어제인 듯 하다마는
풍월루에 꿈 깨어 칠성문 돌아드니
세마태 홍의에 객흥이 어떠한가?
누대도 많이 있고 산수도 많건마는
백상루에 올라앉아 청천강 바라보니
삼차 형세는 장함도 끝이 없다.
하물며 결승정 내려와 철옹성 돌아드니
연운 분첩은 백리에 펼쳐있고
천설 중강은 사면에 비꼈구나.
사방 거진과 일국 웅관이 팔도의 머리로다.
배밭에 꽃 피고 두견화 못다 진 때
진영이 무사하니 산수를 보려고
약산 동대에 술을 싣고 올라가니
눈 아래 구름이 바라봐도 끝이 없다.
백두산 내린 물이 향로봉 감돌아
천리를 비껴 흘러 대 앞으로 지나가니
반회 굴곡하여 노룡이 꼬리치고 해문으로 드는 듯
형승도 끝이 없다 풍경인들 아니 볼까?
작약 선아와 선연 옥빈이
운금 단장하고 좌우에 펼쳐 있어
거문고 가야고 봉생 용관을
불리거니 잇게커니 하는 양은
주목왕 요대상에 서왕모 만나 백운곡 부르는 듯
서산에 해 지고 동령에 달 오르고,
녹빈 운환이 반함 교태하고
잔 받드는 양은 낙포 선녀
양대에 내려와 초왕을 놀래는 듯
이 경도 좋거니와 원려인들 잊겠는가?
감당 소백과 세류장군이
일시에 동행하여 강변으로 순하하니
빛나는 옥절과 드높은 깃발은
장천을 비껴지나 벽산을 떨쳐간다.
도남을 넘어들어 배고개 올라 앉아
설한재 뒤에 두고 장백산 굽어 보니
중강 복관은 갈수록 어렵구나.
백이 중관과 천리 검각도 이렇듯 하였던가?
팔만 비휴는 계도 전행하고
삼천 철기는 옹후 분등하니
호인 부락이 망풍 투항하여
백두산 내린 물에 일진도 없도다.
장강이 천참인들 지리로 홀로 하며,
사마 정강한들 인화 없이 할 수 있나?
시평 무사함도 성인의 교화로다.
소화도 쉽게 가고 산수도 한가할 때 아니 놀고 어이하랴?
수항정에 배 꾸며 압록강 저어 내려
연강 열진은 창기 편듯 하였거늘
호지 산천을 역력히 지내보니
황성은 언제 쌓여 황제묘는 뉘 묘인가?
감고 흥회하여 잔 다시 부어라.
비파관 내리 저어 파저강 건너가니,
층암 절벽 보기도 좋도다.
구룡소에 배 매고 통군정에 올라가니,
대황은 장려하여 침이하지교로다.
제향이 어디인가? 봉황성 가깝구나.
귀서할 이 있으면 호음이나 보내?다.
천배에 대취하여 무수를 떨치니,
박모 한천에 고적성이 시끄럽다.
천고 지형하고 홍진 비래하니, 이 땅이 어디인가?
사친 객루는 절로 흘러 알 수 없네.
서변을 다 보고 반패 환영하니,
장부 흉금이 조금은 나아지리라.
설마 화표주 천년 학인들 나 같은 이 또 보았는가?
어느 때 형승을 기록하여 구중천에 아뢸까?
미구 상달 천문 하리라.
기봉(岐峰) 白光弘 (1522-1556) 명종 4년 사마양시와 대과에 급제, 홍문관정자를 지냈다.
어명으로 반궁에서 公이 冬至 賦로 장원하여 명종으로부터 ‘선시 10권’을 하사받았다.
1555년 평안평사를 지내면서 가사 ‘관서별곡’을 지었다.(역,백수인 교수)
關西別曲
岐峰 白光弘 (1522-1556)
關西 名勝地에 王命으로 보실
行裝을 다사리니 칼 이로다
延詔門 달아 모화고 너머드니
歸心이 르거니 故鄕을 思念랴
碧蹄에 말가라 臨津에 건너
天水院 도라드니 松京은 故國이라
滿月臺도 보기 슬타 黃岡은 戰場이라
荊棘이 지엇도다 山日이 半斜컨을
歸鞭을 다시 와 九硯을 너머드니
生陽館 기슭에 버들죠차 프르럿다
感松亭 도라드러 大同江 보니
十里波光과 萬重烟柳 上下의 어뤽엿다
春風이 헌야 畵船을 빗기 보니
綠衣紅裳 빗기 안자 纖纖玉手로 綠綺琴 니며
皓齒丹唇으로 采蓮曲 브니
太乙眞人이 蓮葉舟 고 玉河水로 리
셜라 王事靡鑒 風景에 어이리
練光亭 도라드러 浮碧樓에 올나가니
綾羅島 芳草와 錦繡山 煙花는
봄비슬 쟈랑다 千年 箕壤의
太平 文物은 어제론닷 다
風月樓에 여 七星門 도라드니
細馬駄 紅衣예 客興이 엇더뇨
樓臺도 만고 山水도 하건마
百祥樓에 올나안 晴川江 라보니
三叉 形勢난 壯홈도 가이 없다
믈며 決勝亭 려와 鐵瓮城 도라드니
連雲 粉堞은 百里에 버려 잇고
天設 重崗은 四面에 빗겼도다
四方 巨陣과 一國 雄觀이
八道 爲頭로다
梨園의 피고 杜鵑花 못다 진 제
營中이 無事커늘 山水를 보랴야
藥山 東臺에 술을 실고 울나가니
眼底 雲天이 一望에 無際로다
白頭山 린 물이 香爐峯 감도라
千里를 빗기 흘너 臺 압프로 지가니
盤回屈曲야 老龍이 리치고
海門으로 드난 形勝도 이업다
風景인달 안니 보랴
綽約 仙娥와 嬋姸 玉鬂이
雲綿 端粧고 左右의 버려 이셔
거문고 伽倻皷 鳳笙 龍管을
부거니 니애거니 양은
周穆王 瑤臺上 의 西王母 만나
白雲曲 브난
西山에 지고 東嶺의 달 올아고
綠鬂雲鬟이 半含 嬌態고
盞 밧드 양은 洛浦 仙女
陽臺에 려와 楚王을 놀닷
이 景도 됴커니와 遠慮 이즐쇼냐
甘棠 召伯과 細柳 將軍이
一時예 同行야 江邊으로 巡下니
煌煌 玉節과 偃蹇 龍旗
長天을 빗기 지나 碧山을 쳐 간다
都南을 너머 드러 고 올나 안자
雪寒 뒤에 두고 長白山 구버보니
重岡 複關은 갈쇼록 어렵도다
百二 重關과 千里 劒閣도 이럿텃 하던도
八萬 비휴 啓道 前行고
三千 鐵騎는 擁後 奔騰니
胡人 部落이 望風 投降야
白頭山 나린 물의 一陣도 업도다
長江이 天塹인달 地利로 혼쟈 며
士馬 精强들 人和 업시 올쇼냐
時平 無事홈도 聖人之化로다
韶華도 슈이가고 山水도 閒暇 졔
아니놀고 어이리
受降亭의 여 鴨綠江 리 져어
連江 列鎭은 창긔 버듯 엿거늘
胡地 山川을 歷歷히 지보니
皇城은 언제 며 皇帝墓 뉘 무덤고
感古 興懹야 盞 고쳐 부어라
琵琶串 리 저어 坡渚江 건너 가니
層巖絶壁 보기도 죠토다
九龍쇼의 를 고 統軍亭의 올나가니
臺隍은 壯麗야 枕夷夏之交로다
帝鄕이 어듸오 鳳凰城 갓갑도다
西歸리 이시면 好音이 보고져
千盃에 大醉야 舞袖를 치니
薄暮 寒天의 鼓笛聲이 지지괸다
天高 地逈고 興盡 悲來니
이 히 어듸오
思親 客淚 졀로 흘러 모로라
西邊을 다 보고 返旆 還營니
丈夫 胸襟이 져그나 리로다
셜라 華表柱 千年鶴인들 날 가타니 보안난다
어늬제 形勝을 記錄야 九重天의 로료
未久 上達 天門리라
기봉(岐峰) 白光弘 (1522-1556) 명종 4년 사마양시와 대과에 급제, 홍문관정자를 지냈다.
어명으로 반궁에서 公이 冬至 賦로 장원하여 명종으로부터 ‘선시 10권’을 하사받았다.
1555년 평안평사를 지내면서 가사 ‘관서별곡’을 지었다.
冬 至 賦
기봉 백광홍
嘉靖 임자년(명종 7년 1552) 과거에 급제 하였다. 그해 11월에 임금께서
영남과 호남의 문신들에게 성균관에서 재주를 겨루게 하셨다.
공이 이 동지부 (冬 至 賦)로 장원을 차지했다. 임금께서 선시(選詩) 10권을
하사 하셨다,
惟乾坤定位乎上下 하늘 땅 아래 위서 자리를 정해
二氣往來而 탁약 음양이 오가면서 풀무질 하네.
玆有消而必長 소멸함이 있으면 다시 자라고
亦旣剝而乃復 또한 이미 깍여도 되살아나네
窮四時之차行 네 계절의 운행이 다 하여가니
절獨感此冬至 다만 홀로 동지 때에 느낌이인다.
際衆陰之斯極 뭇 음(陰)이 이때에 지극 하다가
會一陽之兆始 한 양(陽)이 시작될 조짐 있었지
律黃鍾之應節 율력은 황종 의 절기 응하고
星斗柄之建子 별자리는 두병의 건자 이라네
日行極於南斗 태양은 남두에서 운행 다하고
月御貞於黑道 달은 흑도에서 다스림을 곧게한다
가六管之飛灰 여섯 구멍 가관에서 재가 날리고
景一線兮添度 볕이 한 줄 나란히 도수 더 하네
梢玄冥之弛威 현명의 위엄 점차 느슨해지고
始氷師之讓事 얼음 신령 비로소 일 넘겨주네.
端乾心之發仁 하늘 마음 인을 펴는 실마리되고
漸坤차之升氣 땅의 굴대 조금씩 기운이 솟네.
默一元之動氣 일원 기운 움직임은 고요 하건만
彙衆명之生意 많은 싹의 생기가 모여 드누나.
芸始芽兮여將挺 운초는 싹이 트고 여초 움 돋아
首萬卉而(芽)候 초목 앞서서 절기를 맞네
柳思舒兮梅欲(綎) 버들가지 움터나고 매화 벙글어
咸就新而替舊 모두 새롬 나아가 옛것 바꾼다.
雷鼓夜動於(還)丘 천둥소리 한밤 중에 환구 울리고
奏雲和之遠響 운화의 갖은 악기 연주 하누나.
玉佩朝趨於紫殿 옥패소리 자황전서 조회를 하니
賀君道之益長 군도가 더욱 유장해짐을 하례 하누나
斯一歲之歷元 동지는 한 해 역수 으뜸이 되니
日三百之是初 삼백 예순 날 한해의 시작이된다
噫天地之交泰 아! 하늘 땅이 엇갈려 태괘가 되매
兩儀互其升降 음양은 서로서로 오르내린다.
陰始孼於夏至 음은 하지에서 처음 싹터나
十月之交極壯 시월의 얼음에는 거세차지네
互上下固閉 아래 위 모두 서로 굳게 닫히매
陽和幾乎剝喪 양의 기운 거의 다 시들어졌네
然碩果之不食 하지만 종자씨마저 먹지는 않아
진一맥於一夜 하루밤에 한줄기 조짐 있었지
噓微焰於寒爐 식은화로 남은 불씨 입김 불어서
起군伏於陰하 음(陰)의 틈새 엎드렸던 기운 일어나
二之日兮漸陽 2월들자 점차 양기 감돌고
越春三之和照 三월지나 온화한 봄날이 온다
芸發生而長養 운초는 돋아나 부쩍 자라고
매元氣之流布 자욱하니 원기가 펼쳐 지도다
제저陽之著散 모든 양이 나타났다 흩어 짐이니
原權與之自是 원래 그 출발이 이로 부터라
偉天心之於穆 위대하다 하늘 마음 심원 하여서
信行健而不己 굳건히 운행하여 그침이 없네
感消長之有數 소장(消長)에도 운수 있음 느껴 알아서
悟義理之無窮 의리의 끝없음을 깨달으리라
惟人具此健順 인간만이 하늘 굳셈 땅의 순응함 갖췄으니
配乾元於性中 본성중에 건원(乾元)과 합하는 도다
嗟物累之交蔽 아! 사물에 얽매여 가리워지면
鮮不至於고亡 어지러이 사라짐에 이르쟎음 드므나니
窮陰凝閉於心天 궁음(窮陰)이 마음 하늘 꽉 막아 버려
慾波氷호於方塘 욕심 물결 못물을 꽁꽁 얼게 해
然虛靈之本然 하지만 텅 비어 깨끗한 본성
尙一端之不滅 그래도 한 실마리 남아 있어서
乘夜氣而善명 밤 기운을 타고서 싹을 잘 티워
見人井而출척 우물 드는 아일 보고 슬퍼 하였네
玆心上之至日 이것이 마음의 동지 이거니
합反身而省식 어찌 몸을 돌이켜 삼가쟎으리.
苟因此而善保 진실로 이로 인해 잘 보존하면
豈牛山之濯如 어이해 우산(牛山)이 헐벗으리오?
竟條暢而四達 마침내 활짝펴서 사방 이르면
先天下而有餘 천하에 앞장되고 남음 있으리
觸一理而長之 한 이치에 접촉하여 잘 기른다면
亦可驗於邦國 나라에도 또한 징험할 수 있으리
當世道之極否 세상 도리 지극히 비색함 만나
몰淹미而昏塞 어리석음 빠지고 어둠에 묻혀,
紛陰類之用事 어지러이 음한 무리 일을 꾸미니
계北風之其凉 북풍의 싸늘함이 안타깝구나.
時有人其挺起 이때에 어떤 사람이 벌떡 일어나
稟正氣之純綱 바른 기운 옳은 도리 품부 받아서,
開一曝於十寒 열흘 추위 하루 볕을 들게 하여서
庶陽和之可回 양기(陽氣)를 회복하길 바라는 도다.
致國步於明昌 나라운명 환히 밝게 이르게 하고
絶陰진之爲災 음기(陰氣)가 재앙 부림 끊어야 하리
是즉君子類進兮 이야말로 군자 무리 나아갈 바니
固陽生之一始 진실로 양(陽)이 돋는 한 시작이라,
諒天人之一揆 참으로 하늘 사람 한 이치이니
합審幾於彼此 어찌 이것저것 살피쟎으리.
肆先王之謹始 때문에 선왕은 시작을 삼가
每閉闕於是日 언제나 동짓날엔 관문을 닫네.
敬順時而撫事 때를 따라 공경하여 일처리하면
成歲功而不특 한 해 공을 이룸이 틀림 없으리.
願聖上之體元 원컨대 성상께선 원기 체득해
玆乾乾而夕창 종일 애를 쓰시고 저녁에도 삼가소서.
察進退於羲易 "주역"에서 나고듦을 곰곰 살피고
法欽苦於帝典 "제전帝典"을 공경히 본받으소서.
念一心之操存 한 마음을 잡아 지킴 유념 하셔서
明峻德乎勉勉 높은 덕 밝히심에 힘 쏟으소서.
微臣亦際昌辰 미천한 신 또한 좋은 때 맞아
欣陽德之昭融 양덕(陽德)의 밝고 환함 기뻐하리라.
嘉履長而納慶 좋구나! 이 좋은 날 경사 올리며
頌康衢之祥風 강구(康衢)의 상서로움 송축하노라. (역,정 민교수)
三玉堂書
務安政史
二音悉於修上叔父主之書不復提煩而朴生等訟辨聞甚難處何以則兩隻俱無怨尤耶
닦아 올린 숙부 주 편지에서 두 소식 모두 다시 돌아오지 않아 번거로운 것은 끊어 버리고
박생 등이 송변한 일은 심히 난처하게 들리니 어떻게 하면 양측이 모두 원망이 더욱 없겠습니까.
諒處焉 六寸 季父主喪其季女甚切嗟痛似易損攝憫何居也林婚事金上舍明彦甫來言閨姿每每熟見無少然疑云云强勸不已而去 六寸 不得已力勸於左右諒而行之至望至望
살핀 곳은 이와 같습니다.
계부 주 초상에 그 막내딸이 심절하게 애통해 하니 생을 쉽게 상할 것 같아
불쌍히 여기니 어떻게 살겠습니까.
임 혼사 건은 김 상사 명언 씨가 와서 말씀하시기를 규수의 자품이 언제나 익혀 드러나니
모자람이 없는듯하다고 운운 하시며 강권하여 그만 둘 수 없습니다.
去는 부득이 하게 좌우를 살피며 힘써 권장하시고 가시니 지극히 소망합니다. 지극히 소망합니다.
謹按三玉堂旁祖書札郎廳大父之所謄留而本邑金氏各家元無明彦進士且考司馬齊案亦無矣想必金月峯先生字是彦明則或其倒錯且不知月峰或以明彦行字矣石川乃監司錢公晟婿也錢公卽石亭婿也於月峰妹夫則通內外盖可知矣[溪西白鎭恒]
삼가 살펴보건대 삼옥당 방조 서찰은 낭청대부가 베껴 두었는데 본 읍 김씨 각 집안에
원래 명언 진사가 없었고 게다가 사마제안을 고찰해 보니 또한 없었다.
생각건대 기필코 김 월봉 선생 자가 언명이다.
혹 그것이 거꾸로 뒤 바뀌어 우선 월봉인지 모르겠다.
혹 명언으로 자를 썼다.
석천은 이에 감사 전공 성의 사위이다.
전공은 바로 석정 김괴의 사위이다.
월봉 김광원의 매부여서 안팎이 통하는 것을 대개 알 만 하다.
#歲丁酉石川林先生只有一女求婚於公之胤子盖取公之持心純正處事質素也公白于貞海君曰
議婚不可以一般取之林憶齡雖可愛其弟兄間有不吉之人如見其來頭將何爲之時同鄕進士金明彦
力勸因爲連婚[溪西白鎭恒]
해는 정유년(1537,중종32,월봉공60세) 석천 임 선생이 단지 딸 하나만을 두어
공(白世雄,무안현감)의 맏아들(白珩)에게 청혼하자 대개 공의 마음가짐은 일을 처리하는데
순정하고 순박한 본분대로 취하는 것이었다.
정해군 백공이 이르기를
혼인을 논할 때는 일반에서 취하는 것은 불가하다.
임억령은 비록 아낄 만하나 그 형제 사이에 불길한 사람이 있어
만약 그 장래를 안다면 장차 어떻게 할것인가 하였다.
당시에 동향 진사 김 명언이 힘써 권장하므로 인하여 연혼했다.
注)三玉堂은 기봉 백광홍의 父인 白世仁의 號이다.
務安政史는 貞海君 白壽長의 子인 白世雄.
백세웅은 함평, 무안 등지의 현감을 지냈다.
백세웅의 子인 珩이 석천 임억령의 딸에게 장가갔다.
月峯公 光遠의 매제는 세 분이다.
淸風人 金世傑, 長淵人 邊以安, 智禮人 大司成 錢晟.
대사성 성의 사위가 善山人 石川 林億齡,
월봉공이 조카사위 석천의 딸을 백수장의 손자 형과 결혼시키는 내용이다.
석천은 해남 동문 관동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동생 임백령과 함께 눌재 박상 형제 문하에서 수학해 둘 다
문과에 급제해서 출세의 길을 달렸다.
동생 임백령이 호조판서 재직 시 윤원형, 이기, 등의 小尹에 참여 윤임, 유관, 유인숙 등
大尹을 사사시킨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금산군수로 있으면서 이 사실을 안 석천 임억령이 의롭지 못한 거사를
그만 둘 것을 간곡하게 말렸으나 듣지 않자 관직을 버리고 해남으로 낙향했다.
이외에도 동생 백령은 중상과 모략으로 많은 사람을 제거하여 원한을 샀다.
이러한 이유로 정해군가에서 혼사를 꺼리는 것 같다.
석천은 사위가 셋인데 첫째는 정해군 수장의 손자 형,
둘째는 장흥 고씨 맹영, 셋째는 김성원이다.
셋째 사위 서하 김성원은 息影亭을 건립 석천에게 제공했다.
석천은 담양 성산가단을 일으켰으며 湖南詞宗이라 부른다.
많은 시가 석천집에 전하며 그 당시 교제했던 분들의 문집에서도 시를 감상할 수 있다.
도교, 불교를 깊이 이해했던 것 같다.
儒家 지식인의 범주를 뛰어 넘는 사고의 활달함이 있다.
五言律에 능하다.(역,김규정)
挽 白部將世禮 백부장 세례를 애도하다.
書谷 林 賁
爲爲盡虛事 다하고 다해도 허사이고
胡乃獨爲爲 어찌해 홀로 홀로 했는가.
謾托煎熬裏 부질없이 속 끓여 띄우니
勞生困苦涯 괴로운 인생 고생 끝
孤魂嗟已逝 아!외로운 영혼 이미 갔으니
愛妾又何隨 또한 애첩 어떻게 따를까.
終古無期返 예부터 돌이킬 약속 없다오.
愁雲結海湄 근심스런 구름 바닷가에 맺히네
註)白部將世禮 , 光城,光麟,의 先考이며 乙卯倭邊때(1555년) 해남현감이 白部將지원 요청으로
장흥부사 한온이 白部將과 상의 관군과 의병을 이끌고 달량포(현,해남 남창)전투에 참여
왜군을 섬멸하였으나 전투중 독화살을 맞자 화살을 뽑아 버리고 전쟁에 임해 몸에 독이퍼져 전사했음
남원에있던 장자 光城이 전장을 3일동안뒤져 부친의 시신을수습 장흥 장동 두룡으로 장사한 기록이
호남절의록에 있음(자료출처, 호남절의록 사본 첨부)( 역,김규정)
소소래사에 묵으며
- 기봉 백광홍 -
등나무 덩굴과 다래 줄기는 옛 길을 덮었고
사슴과 고라니는 뜰에 나와 뛰노네.
수행 중인 스님은 말이 없는데
빈창에 비친 바닷달만 차갑네.
宿小蘇來
藤蘿籠古逕 麋鹿出堂壇
入定僧無語 虛窓海月寒
기봉(岐峰) 白光弘 (1522-1556) 명종 4년 사마양시에 급제, 홍문관정자를 지냈다,
어명으로 반궁에서 公이 冬至 賦로 장원하여 명종으로부터 ‘선시 10권’을 하사받았다.
1555년 평안평사를 지내면서 가사 ‘관서별곡’을 지었다.(역,백수인 교수)
만수원에 붙임
- 기봉 백광홍 -
사자산 아래 호계 근방
만수원 높은 다락 낮 꿈이 기네.
생각은 서쪽 변방에 있는데 소식이 끊어지니
도리어 남녘 고을이 내 고향임을 잊고 있다네.
題滿樹院
獅山之下虎溪傍 滿樹高樓午夢長
西塞有思消息斷 却忘南國是吾鄕
기봉(岐峰) 白光弘 (1522-1556) 명종 4년 사마양시에 급제, 홍문관정자를 지냈다.
어명으로 반궁에서 公이 冬至 賦로 장원하여 명종으로부터 ‘선시 10권’을 하사받았다.
1555년 평안평사를 지내면서 가사 ‘관서별곡’을 지었다. (역,백수인 교수)
최고죽의 부채에 붙임
- 기봉 백광홍 -
관서 명승지에 큰 강 셋 흐르고
곳곳마다 꽃피는 정자에 말 수레가 매어 있다네.
그대 백상루에 이르거든 물어나 보아주오.
푸른 창에는 강남을 꿈꾸는 이가 꼭 있을 것이니.
題崔孤竹扇
關西名勝大江三 處處花亭駐客驂
君到百祥樓下問 碧牕應有夢江南
기봉(岐峰) 白光弘 (1522-1556) 명종 4년 사마양시에 급제, 홍문관정자를 지냈다.
어명으로 반궁에서 公이 冬至 賦로 장원하여 명종으로부터 선시 10권’을 하사받았다.
1555년 평안평사를 지내면서 가사 ‘관서별곡’을 지었다.(역,백수인 교수)
문득 떠오른시
동계 백광성 (1527-1595)
가을날 맑은 물을 내 정신으로 삼고, 옥을 내 비장으로 삼으니
대바람, 매화 달은 내 시 속에 담겨지네.
시내 동녘은 흥하고 발전하여 보기는 좋다하나
낙북을 내 스스로 영원히 떠나온것을 누가 알리오,
偶題
秋水爲神玉作脾 竹風梅月入新詩
溪東謂興長相好 洛北誰知自永離
東溪 白光城(1527-1595) 명종 16년 사마시에 급제했다.
송강, 일휴당과 사귀었고 학포의 문하생이었다.
벼슬에 뜻을 두지않고 동계에 정자를 짓고 지내며 교육에 힘썼다.(역,백수인 교수)
洪上舍縝 홍 상사 진에게
-東溪白光城
君居連岳下 그대는 연악 아래 살고
我居岐山麓 나는 기산 산기슭에 살지.
邇來兩乖張 요즈음 둘 다 순탄치 않아
鬱鬱念我獨 나 홀로 우울한 생각
今夕是何夕 오늘 저녁이 어떤 날 저녁인가.
一堂忻伴宿 한 집에서 기쁘게 짝해 묵었네.
同傾燈下醪 등 아래 막걸리 함께 기울였어.
共煮山間籟 산간의 소리 맛 좀 보여 주소.
危辭駕班馬 준엄한 언변은 반고와 사마천을 능가하고
壯氣壓頗牧 씩씩한 기운은 廉頗와 李牧을 압도하네.
確然放意談 확고하게 담소 마음대로 해도
璆鏘鳴佩玉 패옥 부딪쳐 울리는 아름다운 소리
展懷到盡夜 밤 다하도록 회포를 펴니
飽聞芝蘭馥 지란의 향기 실컷 들었네.
偲偲若快得 격려하고 권장하니 시원한 것 같고
信如車馬軸 믿음 말 수레의 굴대 같아
況當春雨後 하물며 봄비온 뒤에는
物色生兩目 물색 두 눈에 자라네.
江湖增綠波 강호에 푸른 물결 더하고
巖巒摜相眞 바위산은 서로 참되게 익히네.
光景可共樂 광경 함께 즐길 만하니
煩君勿鞭促 그대여 번거롭게 서두르지 마소.
姑遲數日留 잠시 수일 머물러 지체해도
東溪更有卜 동계에 다시 살만한 곳 있다네.
褰衣踏洞石 옷 걷어 올리고 동네 돌 밟으니
松間採赤茯 소나무 사이에서 붉은 복령 캐네.
歸來且掇茗 돌아가서는 또 차를 따고
細湔燒綿竹 면죽을 조금 씻어 불사르네.
飮罷浴溪水 다 마시고 계곡물에 목욕하고
引風倚高木 높은 나무에 기대니 바람이 당기네.
俛仰發長嘯 쳐다보고 굽어보면 길게 휘파람 부니
款款情益熟 곡진하게 정 무르익어 가네.
終始願勿虧 원컨대 시종 망가지지 마소.
高山仰高躅 높은 산 높은 자취 우러르네.
行止聽天爲 행동거지는 하늘 시키는 대로 따르니
無爲事局束 하는 일 없는 것 속박되고 움츠려드네.
勗余別後思 작별 후 사려 나를 힘쓰게 해
淸篇日三復 맑은 시편 날마다 세 번 반복한다오.
동계(東溪) 白光城(1527-1595) 명종 16년 사마시에 급제했다.
송강, 일휴당과 사귀었고 학포의 문하생이었다.
벼슬에 뜻을 두지않고 동계에 정자를 짓고 지내며 교육에 힘썼다. (역,김규정)
挽金子久恒(1542生-1589卒,향년48)
자구 김 항을 애도하다.
-東溪 白光城(1527-1595)-
祖子孫連逝 아버지 아들 손자가 연거푸 서거해
長嗟宇宙昏 크게 탄식하니 우주가 어둡구나.
那堪情漠漠 어떻게 막막한 인정을 견딜 것인가
無復對溫溫 온화한 모습 다시 대할 수 없으니.
痛哭今三世 통곡하노라 ! 오늘 이 삼대를
儀形隔九原 몸가짐 저승과 떨어졌는데,
平生滿樽酒 평소 풍족한 술 마셨으나
此日但空村 다만 오늘은 마을이 텅 비었네.
裕後看榮慶 넉넉한 뒤에는 영화와 경사 볼 수 있으니
賢男有弟昆 어진 사내 형제 있네.
龍輀返舊隴 천자의 상여 선산으로 돌아가니
曉月渡江濆 새벽달 강 물가를 건너네.
我女門連住 내 딸자식 연달아 貴門에 머무니
君家意益敦 그대의 집안과는 뜻 더욱 돈독해 지네.
去來有節序 오가는 절기 차례 있으니
言語混卑尊 언어 높낮이 섞여 지네.
可奈蒿里餞 어찌 상엿소리 전송 하겠는가
風飄涕泗飜 우는 눈물 콧물이 바람에 날리네.
他年高地 ? 다른 해 높은 곳 ?
鵬化北溟鵾 붕새가 북쪽 큰 바다 곤계로 화했는지.
동계(東溪) 白光城(1527-1595) 명종 16년 사마시에 급제했다.
송강, 일휴당과 사귀었고 학포의 문하생이었다.
벼슬에 뜻을 두지않고 동계에 정자를 짓고 지내며 교육에 힘썼다. (역,김규정)
江行 강가에 거닐다가
風岑 -白光顔-(1527~1567)
江上人家不記村 강가 인가에서 마을 기억하지 못하니
月明時露小峯痕 달 밝을 때 이슬 작은 봉에 자취 있네.
維舟獨聽鍾來處 배에서 홀로 종소리 오는 곳 들으니
烟樹依微是寺門 안개 낀 나무 아물아물 이것이 절 입구...
風岑 白光顔 (1527~1567) 字는 而粹, 號는 風岑. 岐峯 白光弘 의 아우.
科業에 나아가지 않고 在家하여 학문에 전념함. 문장으로 이름을 날림. (역,김규정)
風岑白先生諱光彦改光顔字而秀岐峰第也
풍잠 백선생의 휘는 광언이었으나 고쳐 광안으로 했고 자는 이수로 기봉 아우이다.
天性耿介見識明達搆數間屋於山下每晨必整巾危坐讀經傳有意會
處沈潛忘食爲文必肆意縱筆逼韓柳體詩甚淸絶而不事公車業嘗語
人曰程文出而士之操行炳矣
천성이 깔끔하고 식견이 분명하게 통달해 산 아래 수간의 초옥을 짓고
매일 이른 아침 부모의 침소에 나아가 안부를 살폈으며 두건을 바루고
단정히 앉아 경전을 읽으면서 뜻을 아는 곳이 있으면 침잠해 밥 먹기를 잊었다.
글을 지으면 반드시 마음대로 붓대를 휘갈겨 한퇴지, 유종원 체를 가까이 했다.
시는 맑기가 그지없었으며 과거공부는 일삼지 않았다.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일정한 형식에 맞는 문장에서
이탈하려는 것이 선비 품행의 폐해라고 했다.
與四從昆季團會一室講論道德時人比之於元方季方 詩
사종형제가 한방에 단란하게 모여 도덕을 강론할 때에는
사람들이 중국 東漢의 원방계방(陳紀와 陳諶)에 비교했다.(역,김규정)
여원에 와서 월출산을 바라보며
옥봉 백광훈
두 해 동안 서울 땅 나그네로 떠돌 땐
꿈에 본 고향 산 얼마나 정겨웠나.
오늘 와 참모습 만나고 보니
꿈일까 두려워 고개를 드네.
到女院望月出山
二年辛苦客秦城 夢見鄕山別有情
今日却逢眞面目 擧頭猶怕夢中行
玉峰 白光勳(1537-1582) 명종 19년 진사가 되었으나 선조 10년에야 관직에 나섰다.
최경창 이달과 함께 3당시인으로 불렸다.
영화체에 뛰어난 명필로 유묵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역,백수인 교수)
고향을 그리워하며
지천 김공희 (1540-1604)
푸른 산 하늘금 너머 달이 밝으니
아우와 나, 저 가을 하늘 서로 바라보겠네.
늙은이에게 주는 축수 잔, 늦가을 국화 더디 지게하고
흰 구름 마른 눈물이 단풍잎에 방울지네.
가마 오기 어렵게 하는 냇물과 산고개가 참으로 밉지만
오히려 관직으로 떠도는 내 신세를 한탄하네.
외딴 곳에 사는 이 마음을 담은 편지 한 장
이제 남녘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편에 부치네.
懷鄕
靑山連界月明通 相望秋天弟我同
黃髮壽觴遲晩菊 白雲枯淚滴殘楓
生憎川嶺遲來駕 却歎瓢旅繫佩銅
陋地論心惟一紙 自今勸付向南鴻
芷川 金公喜(1540-1604) 명종 19년(1564) 사마시에 급제하고 宣祖 13년(1580)
등제 하여 임진왜란에 왜적과 싸워 전공을 세우고 郡守를 제수받아
6郡을 돌며 선정을 베풀었다.(역,백수인교수)
芷川金先生諱公喜字之鳴南溪子也德業文章世趾其美世以岐山鳳毛之
明廟甲子司馬
宣廟庚辰登第龍蛇之亂三年從事累著軍功嘗獻詩
天將劉綎曰
지천 김 선생 휘는 공희이고 자는 지명으로 남계의 아들이다.
덕업과 문장 대대로 발자취 그 아름다움을 세상에서는 기산 봉모라 한다.
명종 갑자년(1564)에 사마시에 선조 경진년(1580)에 대과에 합격해 임진왜란 때
삼년 종사하면서 많은 군공을 세우자 일찍이 중국의 장수 류정이 시를 헌정하기를
將軍爲石柱狂瀾 장군 돌기둥 광란 다스리니
羅濟乾坤保彈丸 신라백제 하늘 땅 탄환 막네.
擊楫威勢衝日本 뱃전 치는 위세 일본 찌르고
圖城方略達長安 도성 방략해 장안에 이르네.
鼇頭上釣三山動 자라머리 낚자 산 세 번 진동하고
鯨膾飛霜一劒寒 한 차가운 칼에 고래회 서리처럼 날린다.
會斫扶桑書姓字 모여서 일본 베어 성명 써두니
晩生功業試橫看 늘그막 공업 시험 삼아 비껴보네.
天將十襲藏去後歷典郡邑賦歸田錄退臥邱園
중국의 장수가 떠나간 뒤로 소중히 보관했다.
각 고을의 수령 자리를 역임한 후 귀전의 부를 지으며 초야에 누웠다.(역,김규정)
鳳鳴亭 봉명정
-岐山 林弘毅, 서곡 임분의 큰 아들.
亭上靑山亭下流 정자 위는 푸른 산 정자 아래는 흐르는 물
長堤十里暮烟脩 긴 뚝방 십리 길에 저녁연기 멀다.
滿目風光吟不盡 눈 가득한 풍광 다 읊을 수 없어
洞賓誰識岳陽樓 동네 손님 악양루 누가 기억할까.(역,김규정)
외진 곳에 살다
- 옥봉 백 광훈 -
<1>
외진 곳에 사니 후미져서 오는 이 드물고
일 없어 사립문은 낮에도 열지 않네.
꽃 가득한 작은 뜨락엔 봄기운 고요한데
한 마디 산새 소리가 푸른 이끼에 내려오네.
<2>
종일토록 사립문에 찾는 이 없고
때때로 먼 곳 새는 온갖 소리로 지저귀네.
매화꽃 다 지자 살구꽃 피어나고
가랑비 한 줄기에 봄이 더욱 깊어지네.
幽居
<一>
幽居地僻少人來 無事柴門晝不開
花滿小庭春寂寂 一聲山鳥下靑苔
<二>
竟日柴門人不尋 時聞幽鳥百般吟
梅花落盡杏花發 微雨一簾春意深
옥봉(玉峰) 白光勳(1537-1582) 명종 19년 진사가 되었으나
선조 10년에야 관직에 나섰다.최경창 이달과 함께 3당시인으로 불렸다
영화체에 뛰어난 명필로 유묵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역,백수인 교수)
鳳鳴亭 봉명정 -丁景達(1542-1602)-
山濕今朝雨 산은 축축한데 오늘 아침 비가 내리니
溪含昨夜雲 계곡은 어젯밤 구름을 머금었지.
西林僧有路 서림사 스님 길이 있어
芝蕨自芸芸 지초와 고사리는 저절로 많다네.
鳳鳴亭 (二首) 봉명정 2수
綠楊江水野烟生 푸른 버들 강물은 들에 연기를 일으키고
舞蝶飛花滿鳳鳴 춤추는 나비 날리는 꽃은 봉명정에 가득하네.
人去酒醒春寂寂 사람은 가고 술은 깨었으나 봄은 조용하고 쓸쓸해
一聲鳴鳥下西城 한 마디 새 울음 소리 서쪽 성에 내려 오네.
小學書中悟昨非 소학책 가운데 어제의 잘못을 깨우쳤다 했으니
寒暄有語得依歸 한훤당(김굉필) 말씀 얻어 돌아와 의지하리.
優游涵泳無窮樂 조용히 학문의 깊은 뜻을 완미하는 끝없는 즐거움
顔孟何人亦庶幾 안회와 맹자는 어떠한 사람이기에 되려하는가?(역,김규정)
庚午季冬五六同年期會于社稷洞酒闌善初首題一絶諸人和之或卽席或追述 -
懷齋 朴光玉詩題
경오년(1570년,선조3) 겨울 12월에 동년(同榜及第人,함께 과거에 급제한 사람) 5,6인이
사직동 술집에 모였다.박선초(朴好元,당시 형조참의)가 먼저 시 한 수를 짓고 모든 친구가
화답했는데 혹은 즉석에서 혹은 나중에 지었다. - 회재 박광옥시제
追和 뒤에 화답한 시 -南溪(金胤時叅奉)-
朝旭昇天歛海烟 아침해 솟아 오르자 바다연기 걷히고
松雲灑露上林前 솔구름은 상림 앞에 이슬을 뿌리네.
滿城多少公卿宅 성 안은 대부분 공경대부 집인데
幾許同寅有耆年 함께 공경하던 늙은 재상 몇이나 될꼬?(역,김규정)
友人金上舍 胤溺水再生 因而有作 次韻以寄 -梁應鼎(1519 - ?)-
벗 상사 김 윤이 물에 빠졌다가 다시 살아 나서
시를 읊었는데 그 시에 차운하여 보내다.
排空濁浪太無情 치솟는 거친 파도 너무도 무정하여
舟折中流命旣輕 중류에 배 뒤 집혀 거의 죽을뻔 하였다네.
始覺文章難棄擲 그대 뛰어난 문장 그냥 버리기 아까워
江神奔走叫天庭 강신이 달려 가서 하늘에 애원하였으리.(역,김규정)
挽金進士胤 김진사 윤을 애도하다.
-梁應鼎-
痛惜金徵士 슬프고 애통하도다. 김징사여 !
魂隨萬里旌 그대 넋이 명정따라 만리를 가네.
依依婦巖月 부암 위의 달은 헤어지기 서운해 하는
能照舊心情 우리의 옛 마음을 비춰주리.
註) 徵士 - 조정에서 부른 학덕이 높은 선비 (역,김규정)
訪金南溪于長興邸次韻奉示(至月十九日夜) -朴光玉(1526-1593)-
장흥저택으로 김남계를 찾아가 차운을 지어 보이다.(동짓달 19일 밤에)
海客初經北地寒 섬 나그네 처음 추운 땅을 지나다
愁吟相望聳肩山 서로 시름에 젖어 용견산을 바라보았네.
數杯今夕城西酒 어젯밤 성 서쪽에서 두어 잔 술 들이켰더니
恰聽南溪水拍欄 흡사 난간을 치는 남쪽 시냇물 소리 들리는 것 같네.
滯客無何歲又寒 나그네 부질없이 또 일년이 지났으니
孤吟日日對南山 외로이 날마다 남산만 바라본다.
朝來偶得江湖信 아침에 우연히 세상 소식 들으니
梅竹依然滿舊欄 매화 대나무 변치 않고 옛 난간에 가득하다고...
翌朝復用前韻奉問 다음날 아침 앞 운자를 사용해서
시를 다시 지어 여쭘.
昨夜風威十分寒 어젯밤 바람끝이 매우 차갑더니
朝看木覓幻氷山 아침에 보니 나무들이 빙산으로 변했네.
應知病瘧南溪老 응당 알지 못하겠는가? 병에 시달린 남계 노인을
閉戶愁吟雪滿欄 문 닫고 시름에 겨웠는데 눈 만 난간에 가득하구려!!! (역,김규정)
挽金上舍龜命(1517生-1564卒,향년48)
김상사 귀명을 애도하다.
-竹谷 林薈(1508-1573)-
天胡生是賢 어찌하여 하늘은 이 현인을 낳았는가
而不假之年 자네는 수를 다할 수 없는가
正氣分光岳 바른 기운이 큰 산 빛을 나누니
高才繼祖先 재주 있는 인재가 선조를 잇네.
風流元跌宕 풍류와 질탕을 근본으로
質朴自純全 질박과 순수를 따랐네.
勿哭靑山塜 청산의 먼지에 곡하지 말게
歸爲紫府仙 자선부로 돌아갈 것이기에.....(역,김규정)
吟漁村(二首) 고기 잡이 하는 마을을 읊다, 2수.
-金公喜-
桃花流水白鷗波 복사꽃 흐르는 물, 흰 갈매기 파도는
山口長天吐大羅 산 입구 끝없는 하늘에 큰 비단을 토해내니,
千傾鏡中分太白 천이랑 거울 속에 거의 하얗게 부서 지고
一帆風外散東坡 한결같이 부는 돛바람 밖 동쪽 제방에 흩어지네.
鰲呈細島初粧黛 자라는 가는 섬 드러내니 처음 눈썹 그렸고
魚代新鶯欲擲梭 물고기는 초봄 꾀꼬리 베틀의 북처럼 오가네.
回棹夕陽迷泊處 해 질녘 노 저어 돌아오니 배 댈곳 알 수 없어
數叢踈竹是漁家 몇 떨기 성긴 대나무 이곳이 어부의 집이라오.
又
浦口蒸霞打作波 포구의 짙은 노을 파도를 만들고
落花驢背拍紅羅 떨어 지는 꽃은 나귀등의 붉은 비단을 때리네.
潮痕猶在無心店 밀물 흔적 아직도 있는데 내 마음에는 없고
汐水全呑未斷坡 썰물 완전히 삼켰는데 제방 끊기지 않았네.
來影白衣應佩酒 온다는 선비 응당 술병은 찻겠지
近吟鮫婦定停梭 근처에서 교부가 읊으니 베틀의 북도 멈추네.
沿洄已醉東風興 물 들고 날때 이미 취해 동쪽 바람 일어 나니
不必前村問酒家 앞 마을 술집은 들를 일 없겠지.
註)擲地作金石聲이라 - 땅에 던지니 금석 소리가 나네.
詩文이 잘 되어 辭句가 아름답고 운치도 훌륭하며 對丈이 좋다. (역,김규정)
挽白岐峯
-梅山林弘侃-
天地無窮極 천지 다함이 없고
山高更水深 산 높고 다시 물 깊어
悠悠此生裏 끝없는 이 인생 속
獨見伯牙心 홀로 백아의 마음 보네.
註) 처음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기봉집에 없습니다.(역,김규정)
岐山八賢贊 幷引
-書溪 魏伯純(1737-1815)-
장흥위씨 안항공파,직계 후손들이 안양면에 거주
有山巖巖冠邑所瞻斬截四壁直聳萬丈靈淑之氣磅礴之容不與衆山等宜乎諸賢鍾出其閒也然不有斯人止於湖堧下邑尋常一塊山而已孰知玆山之稱名也哉然則人之云出亦山之幸也夫
높디 높은 산 있어 관산읍 쳐다 보니 네 벽을 베어 끊어 버리고 만 길 곧 바로 솟아 신령하고 맑은 기운 가득 차 뭇산들과 함께 하지 않은 것이 당연하네.
그 사이 여러 현인 나와 모였으나 이 사람들 호남 강가 땅 하읍에 자리잡지 못해 언제나 한 흙덩어리 산이었을 뿐이니 누가 이 산에 이름 부칠 줄 알았겠는가?
그런즉 사람이 말하여 내기를 역시 산이 다행이구나야 !
南溪金先生 諱胤
人品狂簡天性純孝詩不工俗文足貫道硏幾經籍踐履眞的士林歸望鄕里無
斁
인품은 뜻이 크고 일에는 소략해 천성 순수하고 효성스러우며 시는 속된 것을 익히지 않았으며 문장은 도를 꿰었고 경적은 연구가 정미하며 실천은 참되어 사림의 돌아올 꿈이어서 향리에서도 싫어하지 않았다.
書谷林先生 諱賁
先立乎大行直而方命矣窮達介于行藏階庭槐杏門巷軒裳空谷傳聲燁然其光
큰 데서 몸을 먼저 세웠으며 행실은 곧고 방정해 곤궁과 영달을 운수로 여겨 출세하고 은둔하는데 초연했다.
뜨락의 홰나무 살구나무이며 문 밖의 높은 벼슬아치이다.
空谷 소리 전하니 그 빛 찬란함이여 !
竹谷林先生 諱薈
沂水高鳳洛波臥龍觀心止水希音洪鍾秋月出海春草生塘海陬蒼生賴以衣裳
기수의 봉황새고 낙파의 엎드린 용이다.
마음을 보면 안정되고 희귀한 음악 큰 종소리에 가을 달 바다로 나온다.
동생 안부 궁금해 하고 바다구석 백성 사림에 믿고 의지한다.
岐峯白先生 諱光弘
宗師一齋鳴世文章學有淵源提挈綱維立朝正笏士類有依訐直則無怨仇用希
종사로서 재계는 한결같았으며 문장은 세상을 울렸고 학문은 연원이 있으며 기강을 세우시고 조정에 나아 가시어 홀을 바르게 잡으셨으며 사류에서 의탁하는 바 되었다.
자신이 바르다고 자임하는 원칙이 없어 원수가 드물었다.
東溪白先生 諱光城
才行卓絶兼之好學鄕有先生人薰其德一以聽天浩然養靜任重斯道開來繼往
재주와 행실이 탁월하고 아울러 학문을 좋아해 향당에서 선생 있다 했으며 사람 감동시키는 그 덕은 하나로써 하늘에 맡겨 호연지기와 고요함을 길렀다.
유학에 대한 짐이 무거워 오는 사람 깨우쳐 주고 가는 사람에게 이어줬다.
風岑白先生 諱光顔
志決箕山恥奔終南澗槃永矢壽與道參篤信不疑勇於克復不出門外敎成于國
뜻 기산에서 결단하고 부끄럼 종남산으로 달린다.
산골물 즐거움 길이 길이 수명과 도도 참여한다.
독실한 믿음 의심하지 않아 극복하는데 용감하다.
문밖 나가지 않고 가르침 나라에서 이루었다.
玉峯白先生 諱光勳
正道逌鍾文行絶卓耽於玩賾直踐閫域潛心主敬外直內方玉壺氷淸瓊林鳳翔
옳바른 도 쌓인 바 문장과 행실 탁월하고 뜻 깊이 연구해 찾는데 탐닉했으며 충직하게 나라 밖 밟으셨고 경을 주로해서 마음 잠기어 밖이 곧고 안이 바르시니 청정하고 고결한 품격은 글을 잘해 봉황이 날아 빙빙 세상을 주유했다.
芷川金先生 諱公喜
鞭辟理會近裏着己武夷精舍樂窩閒趣琴書自娛軒裳無累偃仰方外錦帶居士
학문은 채찍질하여 내면으로 가까이 하여 자기 몸에 붙게해서 이해했다.
무이정사 움막에서 한가한 정취 좋아하며 서책은 자신만이 즐겼다.
고관대작으로 굽어 보고 쳐다 보아도 누가 없는 밖이 방정한 비단 띠 두른 거사이다.
註) 引 이라는 문학 양식은 당나라 이후에 생겼으며 序 처럼 지으나 소품을 말한다.
序 의 기원인 것 같다.
이 작품을 지은 서계 위백순 선생은 字가 子建이고 號는 書溪 또는 通齋 입니다.
詠而齋 文德의 다섯째 아들이고 23세 때 수원 백씨 崇采의 딸에게 장가들었습니다.
賦에 특히 능하였으며 당시 강진 成鍾仁이 보고 탄복하였습니다.
64세의 봄에 會試에 응했으나 불합격되었고 말년까지 학문에 힘쓴 탓인지 문장이 좋습니다.
문집에 策 두편이 실려 있는데 七政策,心策 으로 당시 시폐를 논한 글입니다.
(역,김규정)
岐山八賢誌序
-李 嶔(1842-1928)-
원주 이씨,字는 峙穆,號는 桂陽, 강진 성전면 월남리 居
天運循環地靈毓精大賢君子間世而作膺期而生周有八士漢有八俊飮有八仙文有八家是皆一代矜式而百世流芳者也於戱我東八域海左偏壤而儒賢之風亞於中華
하늘의 운수 순환하고 땅의 신령함 인간세에 정예로운 대현군자 길러 시기에 응하여 나온 이로 주나라 8사, 한나라 8준음, 8선문장, 8가, 이 모두가 한 시대의 자랑이고 모범이니 백세의 향기를 전하는 것이다.
아 ! 우리동방 8역 우리 나라 좁은 땅 유현의 기풍 중화에 버금간다.
蓋長興之爲邑流峙明麗風俗惇樸衣冠之淵藪材德之府庫也昔者 祖宗郅
治之世五星聚奎文章輩出有曰金南溪林書谷林竹谷白岐峯白東溪白風岑白玉峯金芷川世稱岐山八賢鄕之士林山斗而仰之俎豆而享之此皆秉彛好德之心也
장흥읍의 산과 물 밝고 고우며 풍속은 도탑고 박실해 사림이 모여드는 곳이고 인재의 부고다.
옛날 조종의 교화가 두루 미칠 때 5성이 규수에 모여 들어 문장을 배출했으니 가로되 김남계,임서곡,임죽곡,백기봉,백동계,백풍잠,백옥봉,김지천 이니 세상에서 기산팔현이라 일컫고 향당 사림의 태산 북두라 우러러 제사 받들어 이곳에서 향사하니 모두 천부의 좋은 양심이다.
且於遺集中百選其一編成小규題曰岐山八賢誌是雖泰華之拳石溟渤之勺水而光焰之崢嶸氣韻之汪洋可認其來處有本也嗣玆以來家藏以戶誦之數百載之下遺風尙存不亦偉哉
더불어 유집 가운데 백선을 그 한 편으로 작은 책을 만들어 제하기를 "기산팔현지" 라 했다.
비록 태화(중국태산,화산)의 주먹만한 돌멩이요 큰 바다의 한 웅큼 물이지만 빛나는 불꽃 기운 크고 넓어 인정할 만 하니 그 전래된 곳이 근본이 있어서다.
이로부터 집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을 집집마다 암송한지 수백년 뒤를 이어서 전해오는 풍속이 아직도 있으니 또한 훌륭하지 아니한가?
溪圃白司果永昇卽東溪公之後而生乎八賢之鄕志於斯文者雅矣手奉此誌請弁卷首自顧不佞極知僭踰然昔我八世祖執義公以玉峯公之外孫文翰夙著詔使姜曰廣之東來北渚金相公瑬爲儐薦爲白衣從事今於是役油然興感義不敢辭
계포 백사과 영승은 바로 동계공 후손이고 팔현향에서 태어 났으니 뜻이 사문에서 아름다운 선비이다.
이 誌를 손으로 받들고 서문 지을 것을 청하자 머리를 저절로 돌리니 아첨하지는 않았지만 외람됨을 잘 알겠더라.
그러나 옛날 나의 8세조 집의공이 옥봉공의 외손이다.
문한의 직책을 맡아 일찍부터 드러냈으니 조서를 받든 사신 姜이 가로되 넓은 것은 동래 북저 김상공 류의 빈천을 했고 백의종사 때문이다.
지금의 이 행역 유연하다.
뜻 감흥을 일으켜 감히 사양하지 못하겠다.
(역,김규정)
岐山 鳳鳴齋 기산 봉명재
지오재 선시계 (1742-1826)
齋名不偶瑞禽鳴 서재 이름은 상서로운 날짐승 울음 짝하지 못한다.
一髮岐山文氣晴 작은 기산 문자 향기 맑아
玉女峯精一輩出 옥녀봉은 뛰어난 인재 계속 쏟아내고
德林峙秀八賢生 덕림재는 빼어난 팔문장 낳았으니
海鄕從此斯文蔚 세상은 이를 일러 사문이 성하게 일어났다 했네
東國當時吾道明 당시 조선의 우리 도는 밝아
自遠方來友朋樂 멀리서 벗이 오니 즐겁지 아니한가 했다네
不惟登只盡詩聲 다만 시를 얻어 다 읊을 뿐이겠는가?
知吾齋 宣始啓(1742-1826) 본향은 보성이며 안양 비동에서 태어 났다.
禮說 공부에 힘썼고 "선씨삼강록"을 편찬했고 "睦族歌"를 지었다.(역,김규정)
충의
오당 노관 (1797-1882)
한 잎 푸른 느릅나무 잎새가 자기 몸을 보호하고
당당히 충성과 의리로 마음껏 봄을 드러내네.
황실의 옛 이름 홀로 존경하고 아끼는
그대 참된 성품 우러러 부럽소.
忠義
- 梧堂 盧 瓘
一葉靑楡保一身 堂堂忠義露心春
皇朝舊號獨尊愛 景慕吾公性任眞
梧堂 盧瓘(1797-1882) 成均 進士로 世人의 尊敬을 받았다 (역,백수인교수)
崇禎通寶和韻
盧 珏 (1781~1833)
愛此 崇禎卽佩身 이것을 사랑해 숭정패옥 바로 몸에 지녀
須臾不去保 王春 잠시도 떼버리지 않고 명나라 봄 보전하네.
魯連以後蹈東意 노중련이후 동쪽으로 물 흐르는 뜻 밟아
今日吾公獨是眞 오늘 우리 공은 유독 바로 진실하도다.
註)王春 - 천하를 통일한 제왕의 봄이라는 뜻으로 숭정 연호를 사용한 명나라를
가리킨다.魯連 - 전국시대 제나라 높은 선비 魯仲連이다.
秦 나라가 천하를 지배하여 황제 노릇하면 차라리 동해에 빠져 죽겠다고 한 고사가 있다.
(史記) 東意 - 순자(旬子) 유좌(宥坐)에 "물이 만번 꺾여도 반드시 동으로 흐르는 것은
굳은 의지가 있는 것 같다."[其萬折也必東似志]에서 인용했다.
짧은 7언 절구 詩이지만 어려운 典故가 있는 것은 작자의 역량을 짐작할 수 있다.(역,김규정)
사자산에 올라
명강 백봉흠 ( 1859~1909 )
평지에서는 산이 가장 높더니
산에 오르니 내가 가장 높네.
높은 곳에 있는 것은 내 소원이 아니니
걸어 내려와 높은 자리 양보하네.
登獅子山
- 明岡 白奉欽
平地山爲頭 山上我爲頭
居高非心願 步下讓一頭
明岡處士 白奉欽( 1859~1909 ) 鳳鳴齋 訓長으로 著名 하였다 (역,백수인 교수)
慶宴臺行鄕飮禮有感
-明綱 白奉欽
경연대에서 향음례를 행하면서 느낌이 있어
八賢三百有餘年 팔문장 삼백여 년
景慕遺臺設禮筵 우러러 사모하는 대 남아 있어 향음례를 베푼다.
秦漢江山嗟廢盡 진나라 한나라 강산은 다 없어 졌음을 탄식하며
宋明日月喜頒傳 송나라 명나라 문명은 내려 전해 옴을 기뻐하노라.
階列東西籩豆獻 섬돌에 동서로 제기를 진열해 향음례를 올리고
堂分上下瑟笙懸 당 위 아래에는 거문고 생황이 나뉘어 걸려 있네.
若令天下同斯習 만약 천하로 하여금 이 유습을 함께 익히게 한다면
孝友家家善俗遷 효도와 우애의 풍속이 집집마다 잘 옮겨가리.(역,김규정)
鳳齋數郡詩會 봉명재에서 여러 군의 시 모임을 열다.
-명강 백봉흠-
白雲有客好相尋 오가는 나그네 서로 좋아 찾으니
滿壑風聲閉戶深 첩첩 골짜기 바람소리 문 닫힌 집에도 들리네.
數郡靑春詩士面 여러 군 젊은 시객들 대하니
萬家喜雨野人心 온 마을 시골사람 가슴에 좋은 비 내리네.
山暗燈光沉草閣 깜깜한 산 밝은 등잔 불은 초가집에 가라 앉고
月明夜色隱篁林 달밝은 밤경치는 대숲에 숨어 든다.
別後書臺君記否 그대는봉명재에서 헤어진 일을기록했는가 아니했는가?
溪邊梅柳滿庭陰 시냇가 매화버들 뜰에 가득 그늘지네 (역,김규정)
挽金公贊洪 김공 찬홍을 애도하다.
-誠菴李洙爀-
白首窮經造詣深 백발에 경서 궁구하여 조예가 깊어
南鄕秀士摳衣尋 남녘고을 뛰어난 선비 아랫도리 걷고 찾으니
先王冠帶全歸地 선왕관대 온전히 지하로 돌아가
汜彼西瀾莫敢侵 저 사수의 큰 물결 감히 침범하지 못하리.
注)金漢璹(1862-1937)
字는 贊洪, 號는 溪窩, 父는 養鉉, 母는 전주 李氏 鍾斌의 女,
又 장흥 魏氏 榮煥의 女, 금곡 通德郞公 揚派 종가,
諱 養鉉은 자친 병환이 위급할 때 하늘에 울부짖으며
빌고 대변을 맛보고 손가락을 깨서 피를 들게 하시니
삼일동안 소생했다.효자로 이름이 났다. 諱 世鳴의 6세손이다.
溪窩公은 부모를 섬김에 소학에 나타난 대로 하였다.
병환이 나면 늘 똥의 맛을 보고 손가락을 깨서 피를 자시게 했으며
온갖 힘을 다하여 보살펴 수일간 회생케 하였다.
집안에는 2대에 걸쳐 손가락을 깬 돌이 있다 한다.
장흥 안양 기산 기양사 입구 길옆에 양대 효자비가 서 있다.
用明崗贈溪窩金贊洪韻呈溪窩族祖
명강 백봉흠이 계와 김찬홍에게 준 시운을 사용하여
계와 족조에게 바친다.
-愼軒金玉燮-
擧世滔滔獨歛蹤 온 세상 사람들 도도하니 홀로 자취 감추고
縱橫推筭置心胸 종횡으로 미루어 셈하며 심흉에 두네.
守分無憂行履虎 범 꼬리 밟았으나 분수 지켜 근심 없고
反躬却笑坐談龍 용 이야기하다 자신 돌이키니 웃음 나오네.
歌托榛苓懷故國 진령노래에 가탁해 고국 그리워하며
力耕稼穡夢神農 힘써 농사지어 신농씨 꿈꾸네.
安豊行義無人擧 사람 일어나지 않으니 풍성하게 의 행하리오.
惟有門前索吏從 생각하며 문 앞에 있으니 아전이 찾네.
謹次族大父孝子養鉉韻 삼가 족대부 효자 양현의 시운에 따라 짓다.
服公孝友自童年 공 효우 행하기 어린나이부터
就養誠深每感天 봉양정성 깊어 매번 하늘이 감동했네.
三日回春灌指血 손가락 피 드시게 해 삼일회춘하고
幾時抱鱉泣氷川 몇 번이나 언 개울가에 울어 자라 안았던가.
高風能使頑懦立 고풍 모질고 게으른 자 뜻 세우게 했으나
貤典嗟遲旌楔懸 아! 겹치는 법 시호 정려 표창 더디네.
當世無人編小學 당세 사람들 소학 책 무시하니
長令鄕里口碑傳 오래도록 향리에 구비로 전하게 해야겠네.
注)金玉燮(1878-1930)
字는 贊英, 號는 愼軒,
父 邦植과 어머니 장흥 魏氏 道昱의 딸 사이에서 안양 기산에서
태어났다. 봉명재에서 수십 년간 독서와 훈도에 힘썼다.
금곡, 장성 수산 할아버지들과 교유가 깊었다.
和金贊洪大人養鉉孝行韻 김찬홍 아버님 양현의 효행 시운에 화답하다.
-春軒魏啓泮-
淋漓指血益親年 흥건한 손가락 피 어버이 연세 보태니
昭昭之誠亦感天 해 맑은 정성 또 하늘이 감응하네.
已有香名流里巷 이미 향기론 명성 마을에 흐르니
更有精采耀山川 다시 정채 있어 산천이 빛나네.
儘知兀上瓊琚頌 아는 것 다해 우뚝한 주옥 시 읊으니
勝似門前綽楔懸 문 앞 旌表 걸려 있는 것보단 한결 낫네.
聞道賢兒能繼志 도 듣는 어진 아이 뜻 잘 이어
一家兩孝世相傳 한 집안 양대 효자 세상은 서로 전하리.
注)魏啓泮(1848-1939)
字는 致周, 號는 春軒, 玉隱 魏錫說과 영광 丁氏 사이에서
관산 玉山에서 태어났다.조부는 魏德祚, 子는 重窩 魏洪良,
위씨 선조에 대한 많은 글을 남겼다. 향년 92, 수를 누렸다.
(역,김규정)
鳳鳴齋詩會(二首) 봉명재 시 모임, 2수
-愼軒 金玉燮(1878-1930)-
海濱群峰都揷天 바닷가 여러 봉우리 모두 하늘에 꽂고
書樓已建百年前 글 공부하는 다락집 이미 백년전에 세웠네.
層層松桂千秋雨 여러 층 소나무 계수나무에 오랜 세월 비 내리니
往往桑麻萬戶烟 때때로 누에치고 길쌈하며 많은 집에 연기 나네.
奔競歲華曾幾日 몹시 다툼질 하던 세월 일찌기 몇 날이었나!
尋常詩酒易流年 예사롭게 시와 술로 쉬이 세월 보냈네.
淸絶此遊難再得 이곳에서 즐기는 정갈한 절조 다시 얻기 어려우니
須令今夜又留連 모름지기 오늘 밤을 오랜 동안 이어 가게 하세 !
又
群生物物各成區 여러 백성 물물마다 각각 경계 지었으니
色色分排活盡圖 색색으로 나누어 늘어선 멋있는 그림이네.
樓角風微賓驚賀 다락 모퉁이 실바람 손님을 반갑게 맞아 들이고
庭園日暖友鶯呼 뜰의 해는 따뜻해 벗과 꾀꼬리를 부르네.
隱居未愜村墟近 숨어 사는 집은 상쾌하지 않지만 마을터에 가깝고
治圃無妨婦子携 가꾸는 채마밭은 지장없이 아내가 일궈 간다네.
岐路多門人易惑 기산마을 길거리에 있는 많은 문인들 쉽게 미혹되니
却嫌平日少工夫 평소에 조금 공부하는 것 혐오하여 물리치노라.(역,김규정)
柏山次韻
-蓮谷 盧玟植 (1878~1943)
柏翁志業日成章 백옹의 뜻과 사업 날로 문장 이루니
大義斯門一線陽 대의는 우리 유학 한줄기 양기일레.
貞節許同松竹社 정절은 사장의 솔 대나무 같아
繁華肯逐李桃鄕 번화한 고향 영재 기꺼이 뒤좇네.
枝頭明月琴書穩 나무 위 밝은 달은 금서가 제격이고
葉底淸風夢寐長 잎사귀 밑 맑은 바람은 꿈이 길어지네.
半步門前摠荊棘 반걸음 문 앞에는 가시나무 우거져
避名當世亦鞱光 이 세상에서 명리피해 빛을 감추네.
柏山次韻
-思軒 白漢包 (1883~1967)
柏山翁隱柏山章 백산옹은 숨어 백산을 밝히니
山外皆陰獨一陽 산 밖은 모두 음인데 홀로 양이네.
海近舠通知已客 바다 가까이 거룻배 다니니 객은 알아
洞深雲蔽學侏鄕 마을 깊어 구름이 가리니 유학을 배우네.
日憂九仞簣功缺 아홉 길 산 한 삼태기 부족해 공 무너질까
時愛百年春色長 때론 백년의 오랜 봄빛을 사랑한다오.
更問芽枝高幾尺 새싹가지 높이 몇 자나 되는지 다시 물으니
爲言世世襲餘光 남은 그 빛 대대로 이어받는다 말해다오.
柏山原韻
-柏山 文昌洙-
學而不達未成章 배우고 통달하지도 문장도 이루지 못해
況是羣陰攻一陽 하물며 이 여러 음이 한 양을 공격하네.
樂靜重遷安故土 마음 편히 제자리 움쭉 않고 고향에 안주해
無才甘自老窮鄕 재주 없어 달게 절로 시골에서 궁하게 늙네.
須令穉幹眼前茂 아름다운 어린줄기 눈앞에 무성하길 기다려
敢望餘陰身後長 끼친 그늘 죽은 뒤에도 더하길 감히 바라네.
世界侏離還閉耳 세계 오랑캐 돌아와 귀 닫으니
丸丸柯葉穩藏光 가지 잎사귀 곧은 기상 평온하게 빛 감췄네.
注)文昌洙(철종 辛酉 6월8일1861년 -壬申 1월10일1932년)
字는 平仲, 號는 柏山, 楓庵 緯世后, 父는 錫五, 母는 영광 金氏,
井湖面 花谷里(現 寶城郡 會泉面 花谷里)에서 태어났다.
配는 김해 金氏 會基의 女, 卒又 配 광산 金氏 最璜의 女에서 3남2녀,
장남 相烈, 차남 相訓, 相暾, 사위는 영광 丁倫燮, 관산 魏啓昌이다.
世系는 三憂堂 益漸-楓庵 緯世-瞻依齋 德麟-忱松軒 漢光-高祖 灘巖 正國
-曾祖 耕讀堂 思玉- 祖 弼周- 考 樵隱 錫五.(역, 김규정 선생님)
鳳鳴齋八景
-樂軒 金夤燮 (1884-1949)
削玉蒼峰半揷天 옥을 깎은 듯 푸른 봉우리 절반 하늘에 꽂아
烟凝淑氣下晴川 연기 엉긴 따뜻한 기운 맑은 내로 내려오네.
岐陽勝狀今猶在 기양의 훌륭함이 오늘 더욱 있어
無限風光到幾年 한없는 풍광 몇 년 만에 왔나.
-玉峰炊烟 옥녀봉에 밥 짓는 연기
甑巖圓立獅山東 시루바위 사자산 동쪽에 둥글게 서있어
一陣淸風轉此中 한바탕 맑은 바람 이 속에서 돌아나가네.
勝日登臨遙聘目 좋은 날 올라 굽어보니 멀리서 눈 불러
故人來處爽衿通 벗 오는 곳 시원하게 옷깃을 스치네.
-甑巖淸風 시루바위 맑은 바람
樵子樵歌歌野農 나무꾼 뗄나무 노래는 농부의 노래
水如鏡面谷應鍾 물은 거울 같아 골짜기에 모여 대꾸하네.
負下春光春不盡 봄 아래 봄빛 짊어져도 다할 수 없어
高低聲裡屹晴峰 높낮이 소리 속에 맑게 갠 묏봉우리 우뚝해.
-鏡洞樵夫 거울 동 나무꾼
小艇輕輕泛彼江 작은 거룻배 경쾌하게 떠 저 강으로 가니
滄浪一曲響書窓 물 한 굽이 서창에 울리네.
無數歸來烟渚上 셀 수 없이 돌아오는 안개 낀 물가
落霞點點鳥雙雙 지는 놀 점점이 새는 쌍쌍이.
-木浦歸帆 목단포구에 돌아오는 돛대
玉叢閃忽接天隨 구슬떨기 번쩍해 하늘 접해 따라가니
速似郵傳起一時 빠르기 역마 같이 일시에 일어나네.
千里王城關緩急 천리왕성 관문 느리고 빠르기도 해
詩人到此感題詩 시인 여기 이르러 감동해 시를 쓰네.
-佛峰夕烽 억불 봉 저녁 봉화
掛岑初月上書扉 봉우리에 걸려있는 초승달 책 문짝 위에
只望前頭夜夜肥 다만 앞머리를 저녁마다 살지게 바라보네.
雲間一片嬋姸照 구름사이 한 조각 곱고 아름답게 비추니
正好閨娥寒攘衣 바로 예쁜 규방의 항아 추워 옷 훔쳐가네.
-鷄山初月 계산 초승달
笛聲淸絶牧牛初 피리소리 맑게 끊기니 소 먹이기는 처음
能罷山人寂寞居 그만 둔 산 사람 적막하게 사네.
何日周王先放去 어느 날 주왕은 먼저 불고 갈까.
悠悠千載此音餘 유유히 천년동안 이 소리 남으리.
-桃林牧笛 도림의 목동 피리소리
覽物主人今坐吾 물건 보는 주인은 지금 앉아있는 나
綿綿一帶下平湖 일대에 이어지니 아래는 평평한 호수
彼鷲亦能變化否 저 독수리도 능히 변화하지 않겠는가.
晨天落落鶩相驅 새벽하늘에 따오기 서로 몰며 사라져가네.
-鷲嶺曉霞 독수리 재 새벽노을
注)金夤燮(1884-1949)
字는 德繪, 號는 樂軒, 장흥 安良 岐山里에서 農窩 金邦植과 어머니 장흥 魏氏
參奉 道昱의 女 사이에 태어났다. 愼軒 金玉燮의 弟이다.
기산마을 봉명재 훈장을 지냈다. (역,김규정)
慶 宴 臺 (文 章 臺)
水原 白氏 參判公 諱 繪 의 아들 四 兄弟가 함께 進士 에 登科함 에 이를 慶祝 하기위해 土築 하고 慶宴 을 베풀었던 곳으로
그후 한 마을안 三 家 에서 八 文 章, 輩 出 로 역시 이곳에서 慶 宴 을 베풀었으니 文章대 라고도 함, 마을 民俗 놀이터로 이어오다 지금은 私有化 되고 其 遺 址 에 白氏門中 에서 세운 慶 宴 臺 碑 가 옛 흔적을 전하고 있다,...
"碑 의 後 面 에 參 判 公, 諱 繪 의 慶 宴 詩 가 있으니 다음과 같다",
八 十 光 年 隨 處 身 ( 팔십년을 아루렇게나 지내온 몸이 )
幾 登 此 地 講 親 親 ( 몇번이나 이곳에 올라와서 親 親 을 講 할고)
四 兒 次 第 慰 吾 喜 ( 四 兒 가 차례로 나에게 기쁨을 꾸며주니 )
只 願 他 時 摠 及 人 ( 다만 他時에 남들에게도 미처 가기를 원 하노라 )
鳳鳴齋 遺墟碑 (봉명재 유허비) 栢堂 魏 大煥 撰 (백당 위 대환 찬)
里 曰 岐 山 (리왈기산, 마을 이름은 기산이고)
齋 曰 鳳 鳴 (재왈봉명, 재호는 봉명 이니)
周 岐 偶 同 (주기우동, 주나라 기산과 우연히 한가지니)
亦 得 嘉 名 (역득가명, 또한 아름다운 이름을 얻었도다)
八 賢 以 后 (팔현이후. 팔현 배출이후로 八文章)
繼 出 群 英 (계출군영, 이어서 군영들이 났도다)
域 中 學 舍 (역중학사, 우리지역중에서 학사가)학자는 학교 황자인데 컴에 없슴
莫 與 爲 京 (막여위경, 더불어 이보다 클수가 없다)
凡 物 有 數 (범물유수, 온갖 물체 수가 있으니)
歲 久 而 傾 (세구이경, 해가 오랠수록 기울이다)
只 保 其 墟 (지보기허, 다못 그 빈터를 보존함에)
時 勢 便 然 (시세편연, 시세가 그러 함이라)
名 不 忍 沒 (명불인몰, 이름이라도 차마 인몰하지 못하게)
刻 石 永 傳 (각석영전, 돌에 각하여 길이 전할것이라)
千 秋 過 者 (천추과자, 천추에라도 지내는자 있거든)
瞻 此 徵 知 (첨차징지 , 이를보아 증거하여 알것이다)
興 學 諸 彦 (흥학제언, 배움을 일으킨 모든 선비들이)
是 謨 得 以 (시모득이, 이 마땅함을 꾀 하리라 )
昔 陪 先 師 (석배선사, 옛적 선생님을 모시고 )
遊 陪 於 斯 (유배어사, 이곳에서 유학 하였도다)
今 感 西 林 (금감서림, 이제 서림을느껴, 서림은 중국 사찰, 절의이름,)
繼 以 銘 辭 (계이명사, 이어 써 사를 명 하였도다)
*朱夫子의 先生인 李 延平이 西林寺에 遊居 하였는데 朱子가 그 선생님을
모시고 다녔음을 비유한말, 栢堂께서 愼軒 선생님을 항상모시고 鳳鳴齋에서
유학 하셨다고함,...
상기의 봉명재 유허비는 월암. 백당 위 대환님이 지으셨고 다행이 그분의 문집에 기록이 상세히 있어서 백당의 장자이신 위 성모 님께서 해석해 주셨습니다,..
" 선현 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기산 팔경"
星 田 樵 歌 (빌밭등에서 들려오는 나뭇꾼의 노래소리)
桃 林 牧 笛 (도리뫼 에서 들려오는 목동들의 피리소리)
寒 泉 飛 瀑 (참새미 나르는듯한 폭포~)
木 浦 歸 帆 (목단포에 돌아오는 돗단배의 모습)
鷄 山 初 月 (닭뫼산에 걸친 초승달의 모습)
玉 峰 暮 烟 (저물녘 옥녀봉에 드리워 걸쳐진 저녘연기)
億 夫 山 烽 燧 (억부산 봉화대 봉수연기 피어나는모습)
甑 山 淸 風 ( 가매등에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 오늘날 시대의 변천으로 인하여 사라져버린 옛모습들이 아쉽습니다,
목단포는 간척으로 농지로변했고,참샘도 경지정리후 사라졌으며,
봉수대도 흔적은 있지만 옛모습을 볼수없으며 나뭇꾼, 목동,옥녀봉 모연도
이제는 볼수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그려,.....
* 자료출처 : 안양면지
"참" 살기좋은 마을가꾸기 추진위원 명단및 자치규약
2008 년 4월 28일 저녘 8시
회의장소 : 기산 마을회관
기산마을주민 39명이 출석 하여서 주민총회를 하였습니다
회의 안건은 참살기 좋은마을 가꾸기 사업의 장흥군 1등으로 선정 됨으로 해서
전국 1등을 목표로 사업계획을 작성하기 위해서 추진위원회의 구성을 위한 총회였습니다,
주민총회를 통해서 선출된 임원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문 : 노기재 , 백남식
추진위원장 : 노현기
부 위원장 : 김재철 ,백남송,
총무 : 백 광철
재무 : 백 남현
감사 ; 노 갑기 , 백 관인,
부녀부장 : 이 춘자
가사문학 시가비 책임 분과장 : 백 남식, 노 현기, 백 광철,
우물분야 추진책임 분과장 : 백 관 인
돌담분야 추진책임 분과장 : 백 남송, 백 광철,
산책도로 정비 책임 분과장: 노 생기, 백 형보,
청년분과 책임 위원장 ; 백 인 천
추진위원 ; 노양기, 이홍집, 문점님, 노석재, 오평순, 백인순, 백남주, 김정례,
(상기의 각 임원은 전체 추진위원임)
총회 참석자 명단
백남식 노양기 김재철 백영환 백남석 백관인 백인천 노현기 백남현 백남송 이홍집
백형보 백남주 백광철
유동댁 내강댁 단산댁 항촌댁 마동댁 연동댁 해양댁 내반댁 백산댁 해동댁
나주댁 오동댁 행장댁 학송댁 지동댁 대원댁 송정댁 노동댁 봉산댁 화방댁
미동댁 삼봉댁 광주댁 장세댁 옥천댁
"참살기좋은 기산마을 자치규약"
우리 기산 마을은 유구한 역사적 전통과
빛나는 조상님들의 업적으로 이어져온
사람이 살기좋은 마을이다
오늘 우리 기산마을 주민들이 모두 함께 모여서
더욱더 살기좋은 마을과 주민 서로간에 화합으로
이어지는 "참" 살기좋은 마을을 가꾸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몇가지 규약으로
권리와 의무를 다하는 기산마을 주민이 될것을 천명하는 바이다,
1, 기산마을 주민이면 누구나가 다 참 살기좋은 마을가꾸기 사업의
일원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함께 가진다,
2, 마을의 화합과 발전을 위하여 마을 총회에서 임원을 선출하고
임원에는 원칙과 사업의 원할한 추진을 위하여
고문 2명 추진위원장 1명 부위원장 2명 총무 1명 재무 1명
각 사업 분과 위원장 약간명 감사 2명 추진위원 약간명을 주민 총회에서 선출한다
3, 선출된 임원은 마을발전의 100년 대계를 위하여 노력하며 매사를 주민총회에서
토론과 결의를 거쳐서 최종 시행한다
4. 임원은 사업 시행에 있어서 그 명확함을 위하여 사업계획은 총회에서
주민의견을 수렴하여 최종 다수결에 의하여 결정되며 모든 자금 관리는
재무명의 통장에 입금해서 추진위원장과 총무 승인후 지출되며
주기적으로 감사를 받아서 감사는 총회마다 주민에게 결과를 보고할 의무를 지닌다
5, 우리 기산마을 주민들은 마을발전과 주민 화합을 위하여 주민총회에 참석을 원칙으로하며
주민총수 과반수 이상의 참석과 참석회원 과반수 이상의 찬성에의해 사업이 결정 시행된다
6, 마을 주민들의 참 살기좋은 마을의 분위기 조성과 살기좋은 환경을 위하여 상호 노력하며
서로간에 좋은말을 하는 습관을 고취 시키는데 노력한다,
7, 사업으로 얻어지는 모든 이익은 마을공동 소유로 인정되며 개인에 소득으로 할수없다
8, 자부담 부분의 금전 지출은 마을 주민총회의 승인을 얻어서 마을 자산으로 지출한다
9, 본사업 시행의 임원과 회원의 임기는 본사업이 만료되고 난후 주민총회를 통해서
승인후 해산한다
10, 이상의 10개명 규약은 마을발전과 주민화합을 목적으로 시행발효되며 2008년 4월 28일
오후 9시30분부터 시행 발효되며 기록에없는 사항이 발생시는 추진위원회와 주민총회를
통하여 민주방식으로 처리한다,
2008년 4월 28일 저녘 9시 30분 주민총회 통과처리
이상의 회의결과는 2008년 4월 28일 오후 9시30분부터 시행 발효된다,
기양사 '선시보주' 보물 지정 주장 |
기봉선생 학술대회서 고서연구가 박철상씨 주장, 관서별곡을 관동별곡에 인용 주장도.. |
장흥타임스/2004.06.30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동계마을 기양사에 보관된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선시보주’가 지방 문화재가 아닌 국가지정 문화재 보물로 지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
| |||||||||||||
| |||||||||||||
|
아랫샘 玉 井
이 우물의 샘물은 석간수로서 가뭄이나 홍수에도 수량의 변함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샘물은 주기적으로 기포를 형성하며 끓듯이 솟아오르는데, 수온은 항상 섭씨 16도를
유지하므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샘물이 끓어서 넘칠 때 떠 마시면 만병통치요, 또한 부자가 된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오고 있다.
옛날에 어떤 하반신이 마비된 앉은뱅이가 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서 끓어 넘치는 샘물을
떠 마시고는 걸어서 나갔다는 설화도 전해져 온다.
이 우물 때문에 우리 마을이 형성 되었을 것으로 보는데, 바위 틈 사이에서 자라고 있는
백일홍 나무 밑동의 나이테와 팔문장님들의 詩 구절에 우물가 고목의 백일홍 나무가
거론 되는것을 보더라도 600년은 훨씬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2008년 11월 일
기양사 (팔문장을 배향하는사우)
(1999년 2월26일 도 지정 유형 문화재 207 호이며
고려말 대제학 精愼齋公을 주벽으로 13현을 배향하는 기양사 신실)
(기양사 강당 사진)
장흥군 안양면 에서는 기산리에 소재한 봉명재 서재터 복원을 위하여 지금 한참 공사중입니다
봉명재는 조선의 팔문장중의 한분이신 관서별곡의 기봉 백 광홍님 삼당시인 옥봉 백광훈님.
동계,풍잠.그리고 임죽곡 임서곡 김 남계 김지천님 등 13현을 배출한 장흥의 유일 무이한 전통
서재입니다,
한봉준 전 면장님이 시작하셔서 새로 부임하신 백 형갑 면장님께서 팔문장이 공부하시고
유서깊은 팔문장 전통문화 마을의 복원과 발전을 위하여 도지정 문화재인 기양사와 연계해서
봉명재까지 새롭게 길을내고 주변에 꽃길 조성과 돌담, 돌탑,
그리고 詩歌碑 건립을 목표로 봉명재 서재 복원을 준비 중입니다.
가사문학의 테마마을 조성을 위해서도 그동안 우리들이 관리소홀과 잊고지낸
문화유산을 복원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장흥군 문화관광 과장님을 하시다가 안양 면장님으로 부임 하셔서 커다란 문화유산이
묻혀져 있음에 한탄하시고 기양사와 연계한 가사문학 테마마을 을 만들고
전통문화 마을로 개발해 보자고 말씀하시던 한봉준 전 면장님!
그리고 새롭게 부임해오신 행정의 달인이신 백 형갑 면장님!
계속사업으로 사자산권 개발 차원에서 八文章 전통 文化 마을로 개발해 가려면
봉명재 서재를 복원해서 기양사와 연계하고 가사문학 테마 마을로
비동, 동계, 기산,을 八文章전통 文化 마을로 개발해야 한다며
발로 뛰시는 백 형갑 신임 면장님!
주민들도 모두다 제대로 아신 면장님 들이 할일을 하신다 면서
찬사와 박수들을 보내고 있답니다~
2008년 2월 16일 토요일
기산리장 白 光 哲 (올림)
(회관 신축시 마을유래 소개비)
참고로 향우와 주민들의 성금 5,980만원이 답지하여 마을회관
자부담 금을 제하고 남은 돈으로 동답 930평을 구입한 바 있습니다,
會館建立 紀念碑
장엄한 獅子山 남단에 수려한 億佛山을 마주보고 자리한
우리 岐山 마을은 고려말(1373년)扶安 林氏가 입주하였다
전하고 있으며 마을앞 지석묘의 분포로 미루어
先史時代때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마을 뒷골에 서재가 있었으니 재호가 봉명재(鳳鳴齋)요
興學을 하였고 선현들의 등과를 경축했던 경연대(慶宴臺)
유지는 오랜 세월에 지금은 유허비가 외롭게 선현의
자취를 전하고 있다
조선조 중엽(1500년대) 당대에 八文章을 배출 하였고
인심이 순후하여 살기좋은 마을로 長興에 一岐山 이라
전하고있어 선현들의 명예로운 업적은 이 고장의 소중한
文化유산이요 자랑이다.
마을의 기존회관이 노후하여 회관신축이 여망 이었든 바
郡 당국의 예산 지원으로 주민들의 誠金과 출향 인사들의
적극적인 협찬으로 本 會館을 신축 하였다
이에 誠金을 기탁해주신 주민들과 출향 인사들의 정성을
기리 전하고자 후면에 誠金자 芳名을 記 하노라.
2007년 3월 3일
주민일동 세움
後記
우리 기산마을은 예로부터 천혜의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도덕과 학문을 숭상 하였기에 조선조 중엽 당대에 팔문장을 배출하였고 다사 군현이 계출 함으로 세칭 병현촌이라 하여 장흥에 일기산이라 전해오고 있으며 이러한 선현들의 위업은
이땅을 지켜온 후세에 정신적 지주로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변천과 현대 문명에 밀려 선현들의 얼이 담긴 찬란한 문화 유산이
온전하게 보존되지 못하고 훼손되고 잊혀져 가고 있어서 이 시대에 살고있는
주민 으로서 매우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다행 스럽게도 늦게나마 군 당국의 지원 사업으로 팔문장 전통문화마을 가꾸기
사업으로 기행 가사문학의 효시인 기봉 백광홍 선생의 관서별곡 시가비와 영호남
문신교예에서 으뜸을 차지한 동지"부" 가비를 비롯하여 선현들의 시가비를
마을앞에 수립하게 되었고,
유지 복원으로 고유 서재인 봉명재 유지를 정비하고 전설로만 믿어온
옥녀바위를 발굴 복원 하였으며 경연대 산책로와 우물정비 마을의
옛 정서가 담긴 벽화며 소공원 조성을 이루어냈고
"참"살기좋은 마을가꾸기 사업으로 영예의 전국 대상을 수상 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동안 수집해온 자료를 근거로 본 마을에서 태어나신
팔문장을 비롯 저명 인사들의 시문을 번역하여 한 책에 모아 기산 문집으로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온 주민과 더불어 경하하며 본 문집 출간을위해 애쓰신 이장 백광철씨의 노고에
찬사를 드리며, 특히 본 문집의 자료수집에 중앙에 여러 도서관을 전 전 하며
도와주신 용산면출신 김규정 선생님과 기꺼이 봉사로써 번역에 임해주신 백수인
교수님 그리고 협조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서기 2009년 4월 26일
"참"살기좋은 마을가꾸기 기산마을 고문 백남식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