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마산(龍馬山)
해발 348m의 용마산은 아차산의 최고봉으로 면목동 동현에 위치하고 있으며
망우리공원, 중곡동 간의 산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등산로를 통해 망우리에서
아차산성을 거쳐 어린이 대공원 후문 근처까지 이어진다. (면적 2,800,619㎡)
▼ 용마폭포공원
면목동 산 1-4번지에 위치한 용마폭포는 세갈래의 폭포 줄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앙의 폭포는 용마폭포, 좌측이 청룡폭포, 우측이
백마폭포이다. 용마폭포는 폭 3~10m, 2단으로 이루어진 51.4m의 높이를
자랑하고 있으며, 청룡폭포는 21m, 백마폭포는 21.4m로 이루어져 있다.
▼ 용마산 사가정 공원
2005년 4월 13일 개장한 사가정공원은 면목동 산 50번지 일대의
면목약수터지구 입구에 약 3만 3천2백여 평 규모로 조성되었다.
공원의 명칭은 용마산 부근에서 거주했던 조선 전기의 문인인
서거정선생의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그의 호를 따서 지어졌다.
또한, 그의 대표적인 시 4편을 골라 시비를 만들어 설치함으로써
공원이용객들이 산책과 함께 명시를 감상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곳에는 피크닉장, 어린이놀이터, 체력단련시설, 자연형 계류,
사가정(전통 정자), 다목적광장, 냇가휴게소 등 다양한 휴게
시설과 운동시설, 조경시설이 갖춰져 있어 주민들의 수준 높고
쾌적한 휴식공간이자 중랑구의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등산로 구의동 영화사 - 팔각정 - 아차산 정상 - 용마봉 - 대원외고
광장동 동의초등학교 - 팔각정 - 아차산 정상 - 용마산 긴고랑
체육공원 용마산길 아성빌라, 선진연립주택 코스 외
출처: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고구려 유적의 보고(寶庫) '아차산'
서울과 구리시에 걸쳐 있는 아차산은 해발 287m의 야트막한 산으로
산세가 험하지 않아 구리와 인근 시민들이 가벼운 산행을 위해 자주
찾는 곳이다. 40분 정도의 등산로를 오르면 한강과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이 일품이다. 조선 시대에는 지금의 봉화산
을 포함하여 망우리 공동묘지 지역과 용마봉 등의 광범위한
지역 모두 아차산으로 불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 백제의 도읍이 한강 유역에 있을 때 우뚝 솟은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일찍부터 이 아차산에 흙을 깎고 다시 돌과 흙으로
쌓아 올려 산성을 축조함으로써 고구려의 남하를 막으려는 백제
인의 노력이 있었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맞은 편 남쪽에 있는 풍납
동 토성과 함께 중요한 군사적 요지로서 백제의 운명을 좌우하던
곳이기도 하다. 아단성(阿旦城), 아차성(蛾嵯城), 장하성, 광장성
등으로 불리우기도 하여 백제, 신라, 고구려가 한강을 중심으로
공방전을 장기간에 걸쳐 벌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출처:(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아차산 고구려 유적
(峨嵯山高句麗遺蹟)
아차산 고구려 유적 1보루
아차산 일원에 분포한 고구려시대 보루성(堡壘城)과 유적지이다. 대표적인 보루성
으로는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과 서울시 광진구 중곡동의 경계지점에 있는 것으로
아차산성에서 능선을 따라 북서쪽으로 약 700m 떨어져 있는 해발 268m의 능선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다. 유적은 능선의 방향을 따라 북동~남서향으로 놓인 긴
타원형의 토루 형태이다. 토루는 둘레 91m, 안쪽에서의 높이 1.5m, 하단부의 폭
6m로 작은 평지 토성을 연상케 하며, 외곽 일부에 3~4단 정도의 석축이 노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석축(石築) 시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유물은 대부분 토기
조각으로 토루 윗부분의 흙 속이나 서편 외곽부에서 주로 발견된다. 검은간토기의
동이류가 가장 많으며 황갈색이나 홍갈색의 연질(軟質)토기도 많이 발견된다.
두 번째 유적은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의 대성암 뒤편 해발 276m 지점의 소봉 정상부
에 있는데, 첫 번째 유적과는 500m 가량 떨어져 있다. 유적은 소봉의 정상부를 돌아가며
쌓은 석축부와 그 안쪽의 소토부로 구분된다. 석축부는 직경 15m 정도의 원형으로 쌓여
있으며 현재 3단 정도 드러나 있다. 석축은 납작한 화강암 판석을 엇갈려 쌓았다. 석축
시설의 안쪽 윗부분에는 깬돌을 쌓은 첨탑 같은 돌무더기가 있는데, 정형성이 없고 석축
유구가 일부 훼손된 것으로 보아 후대에 다른 목적으로 쌓은 것으로 보인다. 석축부의
안쪽에는 단단하게 다져진 적갈색 소토층이 보인다. 부분적으로 흙과 돌이 녹아 적갈색의
덩어리가 형성된 것으로 보아 매우 높은 온도의 열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소토층 속과
주변에서 토기가 많이 발견되었으며, 그 중 대부분이
홍갈색과 황갈색의 연질(軟質)토기이다.
두 번째 유적에서 서북쪽으로 약 200m 가면 세 번째 유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곳은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과 서울 광진구 중곡동의 경계지점이자 아차산의 주능선상으로 길쭉하고
평탄한 지형이다. 이 소봉의 정상부를 돌아가며 보루(堡壘)가 형성되어 있지만 국민체육시설이
들어서면서 상당 부분 파괴되었다. 구릉 정상부를 돌아가며 석축 시설을 한 것으로 보이며,
내부와 높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아 내부가 약간 우묵한 정도이다. 석축 시설 안쪽의 남쪽
그네 앞부분에서 황갈색이나 회갈색, 홍갈색, 회흑색을
띠는 고구려 토기 조각이 주로 발견되고 있다.
네번째 유적은 세 번째 유적에서 400m 정도 거리에 있다. 이곳 역시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과
서울 광진구 중곡동의 경계지점으로 용마봉으로 건너가기 직전의 마지막 봉우리이며, 소봉
정상부 북쪽에는 헬기장이 조성되어 있다. 소봉의 정상부를 돌아가며 석축 시설이 되어 있다
. 석축 시설 안쪽의 북쪽 부분은 헬기장 조성으로 상당부분 유실되었으나 남쪽 부분에서는
노출된 지표면에서 붉게 탄 소토층을 불 수 있다. 복원 작업을 통해 수백 여 점의 토기 조각이
채집되었으며, 그 중 5점은 거의 완전한 상태로 복원되었다. 유물 중 평저호(平底壺, 밑이
납작한 항아리)가 가장 많았으며, 광구호(廣口壺, 아가리가 넓은
동이형 토기)나 접시, 뚜껑류도 많이 발견되었다.
출처 (두산백과)
아차산성(阿且山城)
1973년 5월 25일 사적 제234호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10만 3375㎡이다. 아차산에
있는 이 산성은 아단성(阿旦城)·장한성(長漢城)·광장성(廣壯城)이라고도 한다.
해발고도 200m 산정에서 시작해 동남쪽으로 한강을 향하여 완만하게 경사진
산 중턱 위쪽을 둘러서, 둘레 약 1,000m 이상의 성벽이 구축되어 있으며 동쪽·서쪽
·남쪽에 성문지(城門址)가 남아 있다. 산성의 형식은 테뫼식[鉢卷式]에 속하나
규모가 매우 크고 성안에 작은 계곡도 있어 포곡식(包谷式)으로도 보인다.
성벽 구조는 삭토법(削土法)으로 대체의 형태를 축조한 뒤 그 윗부분을 따라
돌아가면서 낮은 석루(石壘)를 쌓은 듯한데, 지금은 성벽들이 무너져 토석혼축
(土石混築)과 같은 모습이다. 성벽 높이는 외부에서 보면
평균 10m 정도 되며, 내부에서는 1∼2m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475년 백제의 개로왕(재위 455∼475)이
백제의 수도 한성을 포위한 3만여 명의 고구려군과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자 아들 문주를 남쪽으로 피신시킨 뒤 자신은 이 산성 밑에서
고구려군에게 잡혀 살해되었다. 이로써 백제는 한성에서 웅진(熊津)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또 고구려 평원왕(平原王:재위 559∼590)의 사위 온달
(溫達) 장군이 죽령(竹嶺) 이북의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려고 신라군과
싸우다가 아차산성 아래에서 죽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백제 초기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산성은 고구려가 잠시 차지했다가 신라 수중에
들어가 신라와 고구려의 한강유역 쟁탈전 때 싸움터가
된 삼국시대의 중요한 요새였다.
출처:(두산백과)
2017-04-04 작성자 상산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