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 30평형대 아파트, 전세 끼면 돈 안 안들이고 낙찰
깡통 주택·상가의 종착지 경매법정 가보니
팔아봤자 빚잔치하면 남는 것이 없는 ‘깡통’ 부동산 물건이 쏟아지고 있다. 주택과 상가의 시세가 추락해서다. 그 종착역은 전국 지방법원의 경매법정이다. 빚을 감당하지 못하는 소유자가 손을 놓으면 금융회사등 채권자가 원금이라도 건지겠다고 찾는곳이다. 그래서 요즘 경매법정은 불황 산업의 총아로, 부동산 매물들이 많이 몰려든다. 하지만 분위기는 차분한 편이다. 부동산 거래 동맥경화가 오래 지속되는 와중에 매물이 쏟아져도 유찰이 거듭되기 때문이다. 덩달아 낙찰가도 급락해 감정가의 반토막 가까이 떨어지기도 한다. 전세를 떠안고 낙찰받으면 돈 한 푼 안 들이고 강남의30평형대 아파트를 장만하기도 한다.
경매시장도 거품이 빠져 투기 수요자는 자취를 감추고 실수요자 위주로 재편되고 있다. 주거환경이 나은 곳으로 이사하거나 자녀에게 집을 사주려는 여유 계층들이다. 아파트나 상가를 싼값에 사 월세로 돌리는 재테크 실수요도 늘고 있다. 부동산 시장의 ‘블루칩’이라던 서울 강남의 경매물건이 ‘땡처리’되는 현장을 가봤다.7일 서울중앙지방법원 북관 211호. 오전 10시 경매 시작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복도에서 기다리던 이들이 법정 안으로 몰려들었다. 여름 휴가철이지만 200석 남짓 경매법정이 절반 이상 찼다. 50대 이상의 중장년층, 20∼30대 젊은 층, 갓난아기나 초등학생 자녀와 함께 온 이들도 있었다. 법정 앞에서 경매 관련 유인물을 나눠주던 아주머니들이나 서류가방을 든 부동산업체 직원들도 휴대전화로 정보를 주고받느라 분주했다. 입찰 신청이 끝난 11시10분 무렵엔 경매학원에서 현장 교육으로 찾아온 사람들로 다 찼다. 한 경매 참가자는 “여윳돈으로 자그마한 아파트나 상가를 사 노후에 월세를 받아 생활하려고 한다”고 털어놨다. 그는 “경매법정에 몇 번 와보니 이번 기회에 생활권이 좋으면서 집값이 더욱 떨어진 강남으로 이사하려는 실수요자도 많더라”고 했다.
반포 51평형 ,3회 유찰, 반값으로
이날 경매에 오른 매물은 82건, 물어보니 평상시 40~50건보다 많다고 한다. 서울 반포동 피카소빌 51평형은 세 번 유찰 끝에 5억4700만원대에 주인을 찾았다. 감정가 10억5000만원이었으니 절반 가까운 금액으로 팔린 것이다. 대치동 은마아파트의 상가 16평형은 감정가 10억4000만원에 매물로 나왔으나 두 차례 유찰로 최저입찰가 6억6500만원에서 시작했다. 7억5000만원대에 낙찰돼 반 토막은 면했다. 이런 사례는 행운인 편이고 경매에 나온 상가 중에는 감정가의 반 토막 이하로 넘겨지는 매물도 많다. 유인물을 나눠주던 한 아주머니는 “중대형은 인기가 없어 대부분 세 번째 입찰에서 최저 입찰가가 감정가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지기 일쑤”라고 귀띔했다. 옆에 있던 부동산업체 직원은 “경매시장에 잘 나오지 않던 소형 아파트가 슬슬 나오고 있다”며 “소형 물건은 한두 번 입찰에 거의 낙찰된다”고 전했다.
경매법정에는 부동산 경매 초보도 눈에 많이 띄었다. 집값 추락과 깡통 주택 출현 소식을 듣고 여윳돈 있는 사람들이 재테크 차원에서 나온 것이다. 서울 종로에 사는 김모(57)씨는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 은퇴자. 그는 “요새 집값 하락으로 경매시장에서 반값으로 아파트를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여름 휴가 중 부인과 함께 온 회사원 최모(37)씨는 “결혼 5주년에 내 집 마련을 위해 왔다. 전셋값이 자꾸 올라 부담되는 와중에 괜찮은 경매물건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윤모(58) 주부는 혼인을 앞둔 아들과 함께 왔다. 그는 “작은 아파트 하나 마련해줄 참인데 강남 아파트 값도 경매시장에선 싸다는 얘기에 나왔다”고 말했다.
경매시장은 호황이다. 온·오프라인으로 경매정보를 주고받는 부동산경매 전문업체들도 그렇다. 9일 서울 도화동의 부동산태인 사무실. 직원들이 전화나 인터넷PC로 상담을 하느라 바빴다.
한 경매 초보자는 “우리 동네에 경매물건이 나왔는데 낙찰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이곳에는 문의전화만 하루 30~40건에 달한다고 했다. 같은 날 서울 청파동의 경매 포털 지지옥션. 온라인 게시판에 상담문의가 잇따랐다. 이 회사 하유정 연구원은 “고급 아파트 지역의 대명사인 서울 강남 3구에서 입찰 물건이 지난 6월 한 달 145건 나왔다. 1년 전 같은 달 123건보다 10% 이상 늘었다”고 말했다.경매 물건은 반년 이상 연체가 지속된 물건이다. 국민은행 박합수 부동산팀장은 “유찰이 많아 경매 준비부터 채권 일부라도 회수하는 데까지 1년 이상 걸리기 일쑤”고 말했다. 부동산태인에 따르면 전국 법원에서 집행된 경매 건수는 올 상반기에 1만5257건.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2008년 한 해의 1만5216건을 이미 넘어섰다. 감정가 대비 낙찰가 비율은 2008년 86%에서 지난 6월 75%로 떨어졌다. 두세 차례 유찰돼야 입찰자가 관심을 보이기 때문이다.
올 상반기 부동산 경매 급증
경매 낙찰 가격이 떨어지면 집값도 떨어지게 마련이다. 프리미엄 아파트 대명사인 ‘강남3구’의 타격은 더욱 크다. KB국민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대비 지난달 아파트 매매가 하락률은 서울 전체적으로 마이너스 2.1%였다. 그중 강남구는 3%, 서초·송파구는 3.1% 떨어져 낙폭이 컸다. 그러자 강남3구에서도 신규 입주 아파트 물량 중에 전용면적 85㎡를 넘는 중·대형 아파트 비중이 줄고 있다. 불황기 경매 투자는 유리하기도, 불리하기도 하다. 지지옥션에서 경매 컨설팅을 했던 이주연씨는 “아파트 전셋값은 오르고 경매 낙찰가는 떨어져 전세를 떠안으면 돈 한 푼 없이도 살 수 있는 경매물건까지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그런 물건은 은행에서 싼 이자로 빌린 돈을 갖고 전세를 월세로 돌리면 짭짤한 재테크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다만 싼값에 집을 살 때는 주의할 점이 있다. 우선 부동산 가격이 계속 떨어져 감정가에 착시 현상이 있을 수 있다.
부동산태인이 올 들어 전국 경매법정에 나온 아파트 매매물건 1만245개를 무작위 추출해 분석한 결과 현 시세(국민은행 하한가 기준) 대비 감정가 비중은 평균 111.2였다. 무슨 말인가 하면 감정가격이 시세 하한가보다 11.2%나 비싸다는 이야기다. 감정가가 결정된 뒤 경매에 나오는 6개월 동안 집값이 떨어져서다. 제2 금융권이나 대부업체에서 고금리로 돈을 빌려 경매물건을 사는 것도 위험하다. 이영삼 ㈜리앤 대표는 “싼 맛에 덜컥 집을 사는 건 언제든지 다시 날릴 준비를 하는 것과 같다. 매입 금액의 60% 이상을 대출로 충당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충고했다.
이원호·강나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