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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讀後感이기보다는 역사책을 베껴왔다는 생각도 든다.
그 量이 에이4 용지 스물다섯장이나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때의 歷史, 혹은 옛날 이야기를 듣는다고 생각하고
읽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혼자 썼지만 같이 보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 올려본다.
春秋戰國史 - 박영규
〈춘추〉와〈사기〉,〈열국지〉등 중국 고대 역사서들을 나름대로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때마다 우리나라 역사가 아니라서 그런지 어려웠다. 그런데 이 책은 재미있고 쉽게 읽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 책이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등 여러 역사책을 쉽고 재미있게 썼던 박영규 작가가 쓴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춘추전국사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역사를 말하는데, 그 시대는 공자가 쓴 노나라 역사서〈춘추〉와 유향劉向이 썼다는〈전국책〉그리고 유명한 역사서 《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역사를 말하는 것으로, 왕조로 따지면 동주시대의 시작인 기원전 770년부터 주周왕조가 망한 기원전 256년까지의 514년 동안이 여기에 해당하지만, 실제로는 노나라 은공 원년인 기원전 722년부터 노나라 애공 14년이었던 기원전 481년까지를 춘추시대라 하고, 진晉나라가 한·위·조 세 나라로 분리된 서기전 453년부터 진秦나라 시황제가 전국시대를 통일했던 기원전 221년까지를 전국시대라고 한다. 그러므로 춘추시대는 주나라 역사보다 48년 늦게 시작되고, 35년 뒤에 종결된 시기를 말한다. 그래서 춘추시대 241년, 전국시대 232년을 합쳐 473년간이 춘추전국시대인 것이다.
다른 대부분의 책들과 마찬가지지로 이 책도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나누어 편집했는데 1부는 춘추시대, 2부는 전국시대다. 1부에서는‘패자의 시대를 연 제나라 환공, 패자의 망상에 빠져 죽음을 자초한 송나라 양공, 새로운 패자로 등장한 진나라 문공, 서융의 패자로 군림하는 진나라 목공, 중원의 패권을 거머쥐는 남방 촌놈 초나라 장공, 동쪽 바닷가의 패자 오왕 부차, 마지막 패자 월왕 구천’에 대하여 기술하였고, 2부는‘진晉의 몰락은 전국시대의 서막이 되고, 신생국 위나라의 급속한 성장과 추락, 전씨 왕조와 다시 일어나는 제나라, 공손앙의 신법과 강국으로 부상하는 진, 합종책으로 천하를 주무르는 소진, 연횡책으로 합종을 무너뜨리는 장의, 진나라의 재상과 장수들, 천하를 손안에 넣고 주무른 맹상군 전문, 연나라와 제나라의 구세주 악의와 전단, 조나라의 마지막 보루 평원군 조승, 인재를 하늘처럼 떠받들던 신릉군 무기, 천하를 사고 판 장사꾼 여불위, 진秦의 천하통일과 왕전 부자의 활약, 그리고 마지막 장은‘춘추전국시대를 풍미한 사상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독후감에는 책에 기술된 패자와 지략가들의 이야기를 모두 다 옮길 수는 없을 것이다. 읽으면서 새겨두고 싶은 이야기만을 빌려 올 생각이다. 아무튼 세계사 어디에도 1천개가 넘는 나라들이 500년 가까이 전쟁을 계속한 끝에 하나의 통일국가로 탄생한 역사는 일찍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 시대가 전쟁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수많은 사상과 제자백가들을 탄생시켰는데, 이는 후대로 오면서 중국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러 민족들의 문화를 이끌어 온 동력이 되고 또한 리더십의 보고가 되었던 것이다. 저자도 서문에서 쓴 것처럼‘역사를 본다는 것은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는 일과 같다. 거울을 보고서야 비로소 내 얼굴에 주름이 어떻고, 점이 몇 개나 있고, 어떤 상황에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있듯이 역사는 현재상황을 점검할 수 있게 하는 좋은 도구다. 그리고 전쟁으로 점철된 춘추전국시대의 치열했던 현장은 내 얼굴뿐만 아니라 남의 얼굴까지 들여다보고 삶의 지혜를 얻게 하는 좋은 거울이 될 것(龜鑑)’이라고 믿는다.
맨 처음 이야기는 제나라 환공이 패자覇者로 등극하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사실은 환공이 패자가 되는 과정을 이야기했다기보다 환공을 패자로 만든 관중管仲과 그의 친구 포숙아鮑叔兒에 관한 이야기다. 이들의 이야기는 관포지교管鮑之交로 잘 알려진 이야기이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인물열전-관중목민,관포지교 참조)
《손자병법》으로 널리 알려진 오자서伍子胥와 손무孫武, 그리고 손무의 손자 손빈孫濱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술하고 있으나, 이들은 이미 한두 번 접한 적이 있으므로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되, 초楚나라 사람이었던 오자서가 왜 오나라로 가게 되었는지, 왜 갈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사정은 적어보기로 한다.
기원전 522년 3월, 초나라 비무극(費無極 또는 費無忌)이란 신하가 평왕平王에게 태자 건建과 태자의 스승인 태부太傅 오사伍奢가 반란을 획책하고 있다고 고하였다. 비무극은 평왕의 총신寵臣이었고, 오사는 태부니끼 태자의 후견인 격이다. 비무극이 태자와 그의 스승을 비방한데는 그럴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평왕이 태자 건의 부인, 즉 며느리 될 여자를 가로 첸 일 때문이었는데 평왕은 이전에 진나라 공주를 맞아 며느리로 삼으려했다. 그래서 당시 태자의 소부(小傅-태부 보좌관)였던 무극이 진나라로 가서 공주를 맞아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진나라공주를 본 무극은 진나라에서 돌아오자마자 왕에게 달려가 그녀가 절색의 미인이므로 태자에게 주지 말고 부인으로 삼으라고 꼬드긴다. 평왕이 그 말에 혹해 며느리감을 아내로 취하고 그녀를 사랑해 아들 임壬을 낳는다.
무극은 이일로 평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지만 태자와는 사이는 벌어졌다. 그래서 무극은 태자 건을 제거하고 왕자 임을 태자에 앉힐 생각이었고 평왕 또한 그와 같은 생각이었기에 태자와 태자의 스승 오사를 역모로 몰아 죽이 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오사는 역모혐의를 완강히 부인하며 무고의 말을 믿지말라고 충언하지만 평왕은 오사의 말은 듣지 않고 체포하였고, 또한 사마(司馬-군사와 운수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벼슬)분양奮揚에게 태자를 죽이라고 명한다. 하지만 분양은 미리 사람을 보내 태자를 도주하도록 하고 뒤늦게 태자를 체포하러 갔다. 그러나 그 사이 태자는 송나라로 달아났다. 뒤늦게 태자가 달아난 사실을 안 평왕은 분양을 불러 다그쳤다.
“말이 내입에서 나와 너의 귀에 들어갔거늘 누가 그 일을 건에게 알렸단 말이냐?”
분양이 대답했다.
“신이 알렸습니다. 군주께서 신께 이전에 명하기를 태자를 극진히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신은 영리하지 못해 두 마음을 가질 수 없었고, 군주의 처음 명을 받들어 끝까지 지켰을 뿐입니다.”
평왕은 분을 감추지 못하고
“그런 짓을 하고도 네가 감히 내게로 온 까닭이 무엇이냐?”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도 못하고 부르시는데도 오지 않으면 두 번 죄를 짓게 됩니다. 또 달아난다 해도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 말에 평왕은 분양을 용서했다고 한다.
그 뒤 무극이 평왕에게 말했다.
“오사의 아들들은 뛰어난 인재들입니다. 그들이 만약 다른 나라로 도주하게 되면 반드시 우리 초나라의 큰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이들도 부르십시오. 그들이 올 경우 아비를 용서하겠다고 하면 반드시 부름에 응할 것입니다.”
무극과 평왕은 오사는 물론 오사의 두 아들들까지 죽일 생각이었다. 평왕은 사람을 보내 오사의 두 아들을 불렀다.
“너희들이 오면 아비를 용서하겠다.”
그 말을 듣고 오사의 큰아들 상尙은 이미 자신들을 죽일 것임을 예감하고 아우 원員(자서)에게 말했다.
“너는 오나라로 가거라. 나는 장차 도읍으로 가서 죽을 것이다. 나의 지혜는 너에게 미치지 못한다. 나는 잘 죽을 것이니 너는 꼭 복수를 해라. 부친의 죽음을 면하게 해준다고 하니 자식으로서 가지 않을 수 없고, 육친이 살육된데 대해서는 보복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의 길로 달려가 부친의 죽음을 면하게 하는 것은 孝요, 성공을 헤아려 행하는 것은 仁이요, 자신이 맺을 수 있는 일을 알고 나가는 것은 智요, 죽을 것을 알고도 피하지 않는 것은 勇이다. 부친을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없다. 너는 복수에 힘써라. 둘이 함께 죽는 것보다는 그것이 낫다.”
죽음을 기다리던 오사는 둘째아들 자서가 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안도하며“초나라 군주나 대부들이 제때에 밥 먹긴 틀렸군.”하고 탄식했다고 한다. 평왕은 오사와 오상을 죽였고, 도주한 오자서는 처음 태자 건이 도피해 있던 송나라로 갔으나 송나라는 집안싸움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으므로 난을 피해 정나라로 갔다. 다행히 정나라는 태자 건을 잘 대접해 주었다. 하지만 정나라는 약소국으로 초나라와 진나라 사이를 오가며 가까스로 연명해 가고 있었다. 여기도 어렵다고 본 태자는 중원의 강국인 진나라로 갔다. 이에 진나라는 태자 건에게
“정나라는 태자를 신임하고 있소. 그러니 다시 정나라로 가십시오. 우리가 나중에 정나라를 공격할 때 내응하면 필히 우리는 정나라를 무너뜨릴 것이오. 정나라가 무너지면 태자를 봉하여 군주로 삼을 것이오.”
태자는 그 말을 믿고 다시 정나라로 갔으나, 진나라의 음모를 눈치 챈 정나라는 태자를 죽였다. 태자와 있던 오자서는 건의 아들 승勝을 데리고 오나라로 달아났다.
오나라로 간 오자서는 오왕 요遙를 만나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초나라를 징벌하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곁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오왕의 4촌 형 광(光-합려闔閭)은 오자서의 말에 반대했다.
“오자서는 아비와 형이 살육당한 것에 대한 원수를 갚고자 하는 것이니 그 말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이 말에 자서는 뜨끔했지만 속으로 저 사람이 장차 딴 뜻을 드러내겠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데리고 있던 역사力士 전설제鱄設諸(또는 專諸)를 광에게 붙여주고 시골로 가 농사를 지으며 때를 기다렸다.
그 후 전설제는 광과 공모하여 오왕 요를 암살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고, 오나라의 용상은 광, 즉 합려의 것이 되었다. 왕이 된 합려는 오자서를 불렀고 이때부터 오자서와 합려, 합려의 아들 부차夫差의 시대가 열리게 되고 오신상담臥薪嘗膽, 오월동주吳越同舟 등 고사를 낳게 된다.
처음에도 적었지만 춘추시대에는 5패라 하여 여러 많은 나라 중 다섯 나라, 다섯 왕만 패자가 되었는데, 제諸나라 환공桓公, 진晉나라 문공文公, 초楚나라 장왕莊王, 오吳나라 부차夫差, 월越나라 구천句踐 등이 그들이다. 구천은 춘추시대 마지막 패자로 부차와 함께 와신상담의 주인공이다. 월나라 구천에 대해 보자.
월나라는 북쪽으로 오나라, 서쪽으로 초나라와 접하고 동쪽은 바다로 나라의 중심은 지금의 절강성 지역에 위치한다. 《사기》에는 하나라왕 소강小康이 서자에게 회계땅을 봉지로 내리고 규嬀라는 성씨를 썼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확실치 않고 《춘추좌전》에 월나라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601년이고 중원에서 월나라를 인식하는 시기는 초나라가 패권을 행사하고 있던 기원전 509년 무렵이다. 이때는 오나라, 월나라가 초나라 영향력 아래에 있었고 이후 오나라가 힘이 강성해지자, 월나라는 초나라 편을 들었다. 그 때문에 오나라는 월나라를 징벌하기에 이른다.
월나라 징벌에 나선 오나라 합려는 기원전 496년 대군을 이끌고 월나라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상처를 입고 퇴각했다. 그러나 이때 입은 상처가 덧나 죽고 만다. 기세 등등 하던 합려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이가 월나라 구천이었다. 이때 구천은 왕위에 오른 지 1년도 채 안 된 애숭이였지만 뛰어난 지략으로 백성을 하나로 결집하여 강국 오나라를 상대해 승리했던 것이다.
합려가 죽자 아들 부차가 왕위에 올랐다. 부차는 부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원전 495년 대군을 동원하여 월나라를 공격했다. 이때 월나라 구천은 부초산에서 오군을 맞아 싸웠으나 대패하였고, 패잔병 5천과 회계산會稽山에 들어가 몸을 숨기는 신세가 되었다. 궁지에 몰린 구천이 신하들에게
“과인을 도와 오나라를 물리친다면 앞으로 국정을 논하는 경卿의 벼슬을 내리겠소.”라고 하였다. 구천의 책사 범려范閭가 나서서 힘이 없을 땐 복종을 맹세하고 힘을 키우는 것이 상책이라고 충언한다. 그리고 대부大夫 문종文種이 그 말에 이어
“신이 듣건대 장사를 잘하는 상인은 여름에 가죽을 사고, 겨울에는 홑옷을 사며, 가물 때에는 배를 사고, 장마 때에는 수레를 사 두고는 물건이 모자랄 때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비록 사방에 우환이 없을 지라도 모사와 용맹한 군사를 뽑아서 길러 놓아야 할 줄 압니다. 마치 미리 준비해 둔 삿갓이 비가 내릴 때 꼭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이곳 회계산으로 물러나고서야 모사를 구하시니 너무 늦지 않았습니까?”
구천이 대답했다.
“만일 지금이라도 그대의 말을 듣는다면 이 또한 늦은 것이 아니리다.”
구천은 문종과 대책을 논의한 끝에 문종을 오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화평을 맺게 했다. 일단 소나기는 피하고 머리를 조아려 때를 기다리자는 생각이었다.
문종이 오나라 태제 백비를 찾아가 올린 글은 그야말로 오나라의 발바닥이라도 핥겠다는 내용이었다. 「저희 주군은 사신으로 보낼 인재가 없어 저 같은 말단 신하를 보냈습니다. 그 때문에 감히 천왕(天王-오왕)을 배알하지 못하고 집사께 조용히 말씀 올립니다. 보잘 것 없지만 금옥과 미녀를 천왕께 바치고자 합니다. 구천의 딸을 천왕께 바치고, 대부의 딸을 대부에게 바치고, 사士의 딸을 사에게 바치도록 해 주십시오. 월의 보물을 다 바치고 저희 주군은 월의 군대를 이끌고 천왕의 군사를 따르겠사오니 천왕께서는 이들 군사를 마음대로 부리소서.」 그리고는 이렇게 화평을 청하는데도 들어주지 않으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수밖에 없다고도 한다.
부차가 문종의 글을 보고나서 백비와 논의한 끝에 화친을 허락하는 쪽으로 결론을 냈다. 어떤 책에서는 이때 백비에게 뇌물을 주었다고 쓰고 있다. 이에 오자서는 이 기회에 월나라를 무너뜨리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부차는 남방 바닷가 변방에 불과한 월나라를 얻어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는 생각이었고 그럴 힘으로 차라리 중원을 징벌하여 패자의 자리를 얻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러면서도 오자서의 만류가 워낙 강경하여 잠시 주저하고 있었다.
그 무렵 문종은 서시西施를 비롯한 월나라 미녀 여덟 명을 백비에게 바쳤다. 그러면서“경께서 월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면 이보다 더한 미인을 뽑아 바치겠습니다.”고 아부하였고, 백비는 서시를 부차에게 올리면서 간언했다.
“옛말에 나라를 징벌할 때는 복종시키기만 하라고 했습니다. 지금 이미 항복 했는데 굳이 무엇을 더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부차는 화친을 허락하고 군사를 철수시켰다.
월왕 구천은 신하들에게 말했다.
“과인이 힘이 모자란 것을 모르고 큰 나라와 원수가 되어 백성들의 뼈가 들판에 나뒹굴게 했으니 이는 과인의 죄로다.”
그리고 부차에게 사인士人 3백 명을 보내어 환관으로 일하게 했으며 자신도 부차의 경호를 맡는 등으로 철저히 복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나라의 요구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고 부르면 달려가 땅바닥에 엎드리는 자세를 취했다. 때문에 부차는 구천이 자신에게 완전히 복종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구천은 복수의 칼날을 갈며 기회를 엿보았는데 스스로 모범을 보이면서 몸소 심은 것이 아니면 먹지 않고, 밥을 먹을 때도 손으로 돼지 쓸개를 씹으면서 각오를 다졌다. 또 부인이 짠 옷이 아니면 입지 않았고, 10년 동안 월나라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걷지 않으니 백성들은 집집마다 곡식을 쌓아놓게 되었다.
한편, 부차는 회수와 장강을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하는 등 패자가 되기 위해 중원을 정벌할 준비를 착실히 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기원전 482년 대군을 이끌고 북진하여 옛 송나라 땅인 황지에서 작은 나라 군주들을 불러놓고 회합을 가졌다. 구천은 부차가 없는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차 없이 오나라를 공격했다. 오나라는 태자가 군사를 이끌고 나와 싸웠지만 사로잡히게 되고, 그 때쯤 부차는 월군이 침략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돌아와 화평을 청했는데 구천은 부차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아직 때가 아니라고 본 것이었다. 그리고 기원전 475년 오나라를 다시 공격해 도성을 포위하였으며, 473년 마침내 부차를 사로잡았다. 구천은 여세를 몰아 회수를 건너 제齊와 진晉의 군주를 불러 회합하고 주왕조 원왕으로부터 패자의 징표를 받기에 이른다.
구천이 패자에 오른 뒤에는 송宋, 정鄭, 노魯, 위衛, 진陳, 채蔡 등 소국들은 월나라에 조공을 바쳐야 했다. 몇 해 전만 해도 이름도 모르던 남방의 바닷가 촌놈이 일약 중원을 손에 쥐고 흔든 것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구천은 기원전 473년부터 기원전 465년까지 약 8년 동안 패권을 누리고 465년 11월에 죽었다. 그가 죽은 뒤에는 아들 녹영鹿郢이 왕위를 이었고, 다음은 녹영의 아들 불수不壽가 계승하였다. 이후에는 주구朱勾가 왕위에 올랐는데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월나라는 강국이었다. 그러나 주구 이후 서쪽의 촉나라가 세력을 확장함으로써 월나라의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어 전국시대인 기원전 306년에 초나라에 병합되고 만다.
- 2018.11.19. 이상 1부 -
지금부터는 2부 전국시대 이야기다. 전국시대란 말 그대로 싸움의 시대라는 뜻으로 이 때도 춘추시대만큼 드라마 같고,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많다. 어떤 역사서에도 이런 많은 전쟁사는 없는 것 같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전국시대는 진晉나라의 분열로부터 시작된다. 진나라 문공 중이가 중원의 맹주로 활약하던 기원전 496년 진나라는 중대한 위기를 맡는다. 조정을 이끌던 세력들이 편을 갈라 다툼을 벌인 것이다.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집안에는 경卿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요직을 맡겼는데 진나라에는 범씨, 중행씨, 지씨, 한씨, 위씨, 조씨 등 여섯 개 가문이 있었다. 그런데 범씨가 중행씨와 결탁하여 내란을 일으켜 나머지 세력을 누르고 조정을 장악하려 했다. 그러자 나머지 네 가문은 지씨가문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해 맞서 싸우게 된다.
나라 안, 집안간 싸움에 범씨, 중행씨와 인척관계에 있던 제나라와 위나라가 싸움에 가담하면서 상황은 복잡하게 얽혔다. 제나라와 위나라는 범씨와 중행씨에게 군대와 식량을 지원하였고 이 때문에 싸움이 제법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지씨 집안과 네 씨족을 중심으로 뭉친 진나라 군대는 결국은 제나라와 위나라 군대를 물리쳤고, 범씨와 중행씨는 제나라로 달아났다. 이로 인해 군주의 힘은 약화되었고 대란을 수습한 네 집안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처음엔 단합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네 집안은 각각 조정을 꾸렸고, 세력이 가장 강한 지씨 집안이 지백知伯을 중심으로 知나라를 세우고, 다른 세 나라의 땅을 욕심내면서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지백이 나머지 세 집안을 압박하여 땅을 떼 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지백의 말 한마디에 먼저 한나라가 인구 1만 명의 성읍 하나를 내주자 이번에는 위나라에 사람을 보내 영지를 나눠줄 것을 강요했다. 위魏나라 환자桓子는 지백의 요구를 거절하려했으나, 신하 조가趙葭가 거절하면 반드시 지나라의 침략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 그 말에 환자 또한 한나라와 마찬가지로 인구 1만의 성읍 하나를 내줬다. 한과 위로부터 두 개의 성읍을 얻어낸 지백은 마지막 조趙나라에도 땅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조나라에는 채蔡와 고랑皐狼 땅이 속한 진양성晉陽城을 내놓으라고 했다. 지백의 오만방자한 태도에 조나라 양자襄子는 몹시 분개했다. 그는 땅을 내주기는커녕 진양성에 병력을 집결하여 방어진을 구축하고 전쟁을 준비했다. 지백은 조나라 양자를 괘씸하게 여겨 위와 한과 함께 조나라를 쳐서 무너뜨리면 세 나라가 공평하게 나눠 갖자고 했고, 결국 한과 위는 지나라와 연합군을 만들어 조나라를 공격하기로 했다.
한편, 조 양자는 아버지 조 간자가 일러준 대로 진양성에 들어가 수성전을 준비하는데 성 백성들의 호응이 대단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조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양자는 백성들의 반응에 고무되어 승리를 다짐했다. 그럴 즈음 지백이 연합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성을 포위했으나 3개월이 지나도록 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이에 지백은 군대를 물리고 진수晉水의 둑을 무너뜨려 물길을 진양성으로 돌려놓았다. 그렇게 3년이 지나자 성이 수장될 위기로 치달았다. 성 안이 물바다가 되자 새집처럼 둥지를 짓고 살아야했고 솥을 달아매어 밥을 지을 형편이었다. 또한 재물과 식량이 바닥나고 사졸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얼마쯤 지나고 나면 모두가 물고기 밥이 될 신세였다.
결국 조 양자는 항복할 생각으로 재사 장맹담張盟談을 불러 말했다.
“이제 식량도 바닥나고 재력도 없어지고 사대부들도 병들어 지쳤소.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는데 항복하는 게 낫지 않겠소?”
하지만 맹담은 반대했다. 그는 자신이 위와 한의 군주를 만나 설득하면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다고 했다. 양자는 반신반의 하면서 맹담을 두 나라에 보냈다. 맹담이 두 나라 군주를 만나 설득했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지백이 한과 위 두 나라 군대를 이끌고 우리 조나라를 치고 있으니, 조나라는 장차 망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망하고 나면 한과 위도 망하게 될 것입니다.”
위와 한의 군주도 맹담의 말에 동감했다. 그러나 지백의 보복이 두려워 아무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자 맹담이
“조, 위, 한 세 나라 군대가 연합하면 지백을 무너뜨릴 수 있는데 무엇을 걱정하십니까?”하고 설득했다.
하지만 두 군주는 계책을 지백이 먼저 알까 두려웠다. 이에 맹담은 자신과 두 군주만 입을 다물면 누가 알겠느냐며 마침내 그들의 승낙을 얻어냈다.
한, 위 두 군주를 만난 뒤 맹담은 지백도 만났다. 두 군주를 만나고 지백을 만나지 않으면 지백이 의심할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그런데 맹담이 지백을 만나고 나오는데 지백의 신하 지과知果와 마주쳤다. 지과는 지백을 만나고 나오는 맹담의 얼굴을 보고, 위와 한이 배반하여 조나라를 도울 것이라고 판단하고 지백에게 고했다.
“한과 위의 두 군주가 장차 변심할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신이 원문 밖에서 장맹담과 마주쳤는데 표정이 뽐내는 기색이 있었고, 또한 발걸음도 가벼웠습니다.”
그러나 지백은 지과의 판단을 믿지 않았다. 그래도 지과는 굽히지 않고 한과 위 두 군주를 만나서 그들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돌아와 지백에게 다시 고했다.
“한과 위 두 군주가 얼굴색이 달라졌고, 뜻도 변한 듯합니다. 틀림없이 주군을 배신할 것이니 죽여 없애야만 합니다.”그러자 지백은
“군대가 연합하여 진양성을 포위한지 이미 3년이네. 그리고 이제 곧 조나라를 함락시켜 땅을 배분할 터인데 어찌 다른 마음을 품겠는가? 그대는 더 이상 그런 말을 하지 마라.”
그러자 지과는 다른 제의를 했다.
“그들을 죽이지 못하시겠거든 더욱 친해두십시오.”
“그들과 더욱 친하려면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위나라의 모사는 조가이고, 한나라의 모사는 단구입니다. 그들은 능히 자기 군주의 계획을 바꿀 수 있는 자들입니다. 주군께서 조나라를 깨뜨린 후에 그 두 모사에게 각각 1만의 현을 내려준다고 하십시오. 그러면 한과 위의 군주께서 변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지백은 인상을 쓰며
“조나라를 격파한 후에 땅을 셋으로 나누기로 했는데 또 그들에게 1만가의 현을 준다면 내 몫이 너무 작아지니 안 되지.”
지과는 지백이 자기 계책을 써주지 않을뿐더러 자기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판단해 성性을 보輔씨로 바꾸고 지나라를 떠나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맹담이 조 양자에게 말했다.
“신이 지백을 만나고 나오는데 우연히 지과를 만났는데 저를 몹시 의심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런데 지과가 지백을 만나고 나서 성을 바꿨다고 하니 오늘밤 지백을 치지 않으면 때를 놓치게 될 것입니다.”
조 양자는 맹담의 말을 듣고 그날 밤 위와 한의 군대와 함께 지백의 군대를 공격했다. 맹담은 우선 제방을 지키는 관리들을 죽이고 물길을 지백의 군대 쪽으로 돌려놓았다. 지백의 군대는 창졸간에 일어난 일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고 도망가기에 바빴다. 결국 지백의 군대는 패했으며 지백은 사로 잡혔다. 이에 지씨 일가는 진나라로 망명했고 성을 바꾼 지과의 집안은 무사했다.
지백이 망한 후 지나라 땅은 위, 한, 조로 3분되었으니 이때가 서기전 453년. 이후 이들 세 나라는 진을 재건해 경공을 군주로 세워 진의 명맥을 유지하게 했으나 당시 진의 영토는 고작 3개 읍에 불과했으니 진晉군주는 유명무실한 존재일 뿐이었다. 급기야 기원전 403년 주 왕조 위열왕으로 부터 위魏, 한韓, 조趙 세 나라가 제후에 봉해짐으로써 진晉은 막을 내렸다. 이에 따라 진나라 땅을 3분한 기원전 453년을 전국시대의 시작으로 보기도하고, 주 왕실로부터 정식 제후로 책봉된 기원전 403년을 전국시대 시작으로 보기도 하는 것이다.
진나라를 3분한 위, 한, 조나라는 기존의 강대국인 제齊, 초楚, 진秦, 연燕과 더불어 세력을 다투게 되는데, 이들 일곱 나라를 통칭해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 부르고, 칠웅 외에도 중산中山, 노魯, 송宋, 정鄭, 위尉 등 10여개의 나라들이 공존했다. 전국시대에는 주 왕실을 천자국으로 섬겼던 춘추시대와 달리 각국의 군주를 왕이라 칭했는데, 이는 기원전 334년 위魏나라가 가장 먼저 자기 군주를 왕이라 칭하고부터다. 춘추시대는 제후를 공公 또는 후候라고 했던 것이다.
전국시대 정세변화는 크게 3단계로 정리할 수 있는데, 처음에는 위魏나라가 흥성하여 동쪽 제나라, 북쪽 조나라를 치고, 남쪽의 초나라까지 쳐서 최강의 세력을 형성했다. 하지만 위나라가 스스로 인재를 잃고 세력이 약화된 뒤에는 진秦과 제齊의 2강 구도로 양대 세력이 서로 맞선 시대가 있었고 마지막으로 진나라가 패권을 잡아 최대 강국으로 부상하는 시점에 합종과 연횡을 반복하다가 결국 진나라가 다른 6국(한위조연제초)을 병합하여 통일하는 것으로 종결된다.
전국시대에 가장 먼저 강국으로 부상한 위나라는 진나라를 멸하고 들어선 위, 한, 조 중의 하나로 주 왕조와 같은 희姬씨의 나라였다. 시조는 주 문공의 아들 필공畢公인데 필공의 후손 필만畢萬이 진晉을 섬겨 위魏땅에 봉해져 위씨로 불리게 되었다. 필만의 7대손인 환자 때에 조나라, 한나라와 함께 지백을 무너뜨리고 원래의 봉토에 지백의 땅 1/3을 더하여 강국의 기반을 마련했다. 위나라는 환자의 아들인 문후文候 시절에 주나라 무열왕에 의해 제후로 책봉됨으로써 칠웅의 반열에 들게 된다. 문후는 기원전 445년에 군주에 올라 40년 동안 재위하면서 위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그는 현명하며 상황 판단이 빠르고 처세에 능했다.
삼진三晋 중에서 위나라를 제외한 두 나라, 즉 조나라와 한나라가 서로 싸우면서 둘은 위나라에 군대를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먼저 한나라에서 지원을 요청하자 위나라 문후는 거절한다.
“과인과 조나라는 형제의 나라로서 감히 요청을 들어줄 수 없소.”
그러면서 한나라 사신을 돌려보내자 이번에는 조나라에서 구원을 요청하러 사신이 왔다. 문후는 이번에도 한나라와도 형제의 나라라 병력을 보태 줄 수 없다고 거절한다. 문후가 양쪽의 요청을 모두 거절하자 한, 조 두 나라는 싸움을 멈추고 회군했다. 그리고 두 나라 군주 모두는 사람을 보내 고맙다고 인사해 왔다.
또 문후 당시에 서문표四門豹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현령이 되어 문후에게 부임인사를 왔다. 문후가 말했다.
“그대는 가서 반드시 공을 세워 이름을 이루시오.”
문표가 물었다.
“감히 여쭙겠습니다. 공을 세우고 이름을 이루는 데는 어떤 기술이 있습니까?”
문후가 대답했다.
“물론 있지요. 무릇 임지에 가서는 마을의 노인들이 오면 먼저 자리를 내어 앉도록 하고, 공부하는 선비들이 오면 현량한 선비를 물어서 스승으로 모시고, 남의 미덕은 덮어두고 잘못을 잘 들춰내는 자들을 알아놓되 그들의 의견은 참조만 하시오. 대개 물건이란 서로 닮았지만 다른 것이 많소. 유幽라는 잡초는 어릴 때 벼이삭처럼 보이고, 황흑의 얼룩소는 호랑이와 닮았으며, 흰 뼈는 상아로 오인하기 십상이고, 무부라는 돌은 옥돌처럼 보이지요. 이런 것들은 모두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것들이외다.”문후는 사람을 쓸 때는 재주만 보지 말고 선인인지, 악인인지 확인하고 쓸 것을 충고하고 있는 것이다.
위나라가 강국으로 성장하는데 크게 공헌한 인물로는 오기吳起*가 있었는데 그는 장군으로 진나라와 싸워서 성을 다섯 개나 빼앗는 등 공을 세워 문후에 의해 서하태수가 되었지만, 그를 아끼던 문후와 재상 전문이 죽고, 무후武候가 군주가 되자 부마 공숙公叔이 재상이 되었는데 공숙은 오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공숙은 오기를 쫓아낼 방법을 찾고자 했는데 어느 날 시종이 말했다.
“오기를 내쫓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어떻게 말인가?”
그러면서 공숙에게 아주 절묘한 방법을 알려줬다. 공숙은 곧 무후에게 종이 알려준 대로 말했다.
“오기는 현명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 위나라는 작은 나라인데 바로 옆에 강국 진秦이 버티고 있습니다. 신은 그 때문에 오기가 위나라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다른 나라로 갈까 봐 염려가 됩니다.”
그 말을 들은 무후도 문득 오기의 속내가 궁금해졌다. 그때 공숙은 한 가지 계책을 내놓았다.
“군주께서 오기에게 시험 삼아 공주를 그에게 시집보내겠다고 해 보십시오. 그가 위나라에 머물 생각이라면 필시 무마가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사양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뒤에 공숙은 돌아오면서 오기에게 들러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공숙은 이미 아내에게 오기가 집에 오거든 자신을 마구 구박하라고 시켜놓은 터였다. 오기가 오자 공숙의 아내는 남편에게 말을 함부로 하고 온갖 구박을 다했다. 오기는 그 모습을 보고 치를 떨었는데, 얼마 뒤에 무후로부터 부마가 되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는다. 그러나 오기는 자신도 공숙처럼 아내에게 천대받는 신세가 될까 봐 사양했다.
그때부터 무후는 오기를 의심하여 가까이 두지 않았다. 오기는 무후가 자신을 꺼린다고 판단해 초나라로 가버렸다. 초나라 도왕悼王은 오기가 현명하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를 반갑게 맞아 재상의 자리에 앉혔다. 위나라에서도 오르지 못한 재상이 되자 오기는 성심을 다해 정치를 펼쳤다. 법法을 밝히고 명령을 구체화시켰으며 필요하지 않은 벼슬은 과감하게 줄이고 촌수가 먼 왕족들의 녹봉을 없앴다. 그러자 국고가 튼튼해져 그 돈으로 군사를 양성해 남쪽의 백월百越을 평정하고, 북쪽의 진陳, 채蔡를 공격해 병합했다. 게다가 한, 위, 조 등 삼진을 압박하고 서쪽의 진秦나라까지 공격함으로써 초나라의 국력은 어느 때 보다 세졌다. 잇달아 공을 세워 영향력이 커지자 초나라 내부에선 오기를 시기하는 자들이 늘어났다. 그런 가운데 도왕이 죽자, 종실의 대신들이 반란을 일으켜 오기를 공격했다. 오기는 도왕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달아나 시체 위에 엎드렸다. 오기를 뒤쫓던 무리들이 그를 향해 마구 활을 쏘았고, 창을 찔러대는 바람에 도왕의 시신도 난도질을 당했다.
도왕을 장사 지내고 태자가 왕이 되자 오기에게 활을 쏘고 창을 찌른 자들을 찾아내 모두 죽였다. 이때 오기를 죽이는 일에 가담한 집안이 무려 일흔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오기는 죽을 때조차 복수를 생각할 정도로 병법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러나 사마천은 《사기》에서“오기는 무후에게 산천의 험난한 형세가 덕을 닦는 것보다 못하다고 했지만, 그가 초나라에서 행한 정치는 각박하고도 포악했으며 은정이 적었다. 그래서 자기 몸까지 망쳤으니 슬픈 일이다.”고 적었다. 이렇듯 사마천이 오기를 평가절하 한 것은 재주는 많으나 덕과 의리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오기(吳起): 노(魯)나라에서 제나라 출신인 아내를 맞았으나 출세를 위해 아내를 죽이고 장군이 되었으나 결국 배척당했다. 위(魏)나라 문후(文侯)의 명성을 듣고 위나라로 갔는데 문후는 오기가 병법에는 따를 자가 없다는 말을 듣고 장군으로 임명해서 진(秦)을 쳐 다섯 개 성을 빼앗았다. 그는 신분이 가장 낮은 사졸과 의식을 같이하고, 잘 때도 자리를 깔지 않고, 행군할 때도 말이나 수레를 타지 않고, 자기가 먹을 식량을 손수 짊어지는 등 사졸들과 노고를 같이했다.
그런 오기가 병영을 시찰하던 중 병졸 가운데 종기를 앓는 자가 있어 고름을 입으로 빨아 주었다고 한다. 병졸의 어머니가 그 소식을 듣고 통곡하자 까닭을 물으니 병졸의 어머니가 대답했다.“지난날에 오기 장군이 저 아이 아버지의 종기를 빨아 주었습니다. 저 아이 아버지가 전쟁에서 뒤로 물러설 줄을 모르고 싸우다 죽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는 장군이 또 아들의 종기를 빨아주니 저 아이도 언제 죽을지 몰라서 우는 것입니다.”(卒有病疽者 起爲吮之 卒母聞而哭之 人曰, 子卒也 而將軍自吮其疽 何哭爲. 母曰, 非然也 往年吳公吮其父 其父戰不旋踵 遂死於敵 吳公今又吮其子 妾不知其死所矣 是以哭之) 《사기》
춘추시대에 환공과 관중의 지략으로 패권을 잡았던 제나라가 전국시대 중기 이후에는 지속된 내분으로 쇄락해갔다. 기원전 548년 최저와 경봉이 군주 장공을 죽이고 경공을 즉위시킨 이래 대부와 경들이 서로 편을 갈라 싸우는 바람에 내분이 그치지 않았다. 경공이 죽은 뒤에는 국씨와 고씨 일족이 안유자를 즉위시켜 조정을 농단하였고, 이후 표씨 세력이 진陳과 연합하여 안유자를 살해하고, 도공을 즉위시켰으나 즉위한지 4년 만에 피살당하자 아들 간공簡公이 즉위했다. 그러나 그 역시 진陳나라 성자成子에게 피살되었다.
이렇듯 겨우 유지되던 제나라가 기원전 386년 다시 일어서게 되었는데, 제나라는 원래 강姜씨인 태공망 여상을 시조로 하지만 패자였던 환공시절 진陳나라 군주 여공의 아들 완完이 제나라로 망명하여 전田씨로 바꾸고 환공을 섬겼다. 전씨 가문은 제나라에서 중추적인 역할로 신뢰를 얻었고 완의 후손인 태공太公 전화田和가 서기전 386년 반란을 일으켜 강공康公을 내쫓고 제후가 되었는데, 이때부터 제나라 군주의 성이 강씨가 아닌 전씨가 되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를 전씨제田氏齊라 하고, 이때 제를 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은 손빈孫濱이 있다. 손빈은 오나라 책사로 오자서와 같이 활약한 손무의 후손으로 이들 두 사람이 만든 병법서가《손자병법》이다.
손빈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베일에 싸인 인물인〈귀곡자〉에게 병법을 배웠다. 동문수학하던 방연龐涓이 먼저 위魏나라에서 혜왕 휘하의 장군이 되었는데, 방연은 손빈이 자기보다 뛰어난 것이 두려워 그를 시기했다. 그래서 그를 해칠 요량으로 사람을 보내 손빈을 위나라로 불렀다. 손빈이 위나라로 오자 그를 첩자로 몰아 두 다리를 자르고, 이마에다 먹 글씨를 새기는 자자형刺字刑을 가했다. 그러면 부끄러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손빈은 어떻게든 제나라로 돌아가 재기하여 복수할 궁리를 했다. 마침 제나라 사신이 위나라 수도인 대량大粱에 왔으므로 손빈은 사신을 몰래 만나서 자신을 데려가 줄 것을 부탁했다. 사신은 그의 말과 논리가 예사롭지 않음을 알고보고 몰래 수레에 태워 제나라로 돌아갔다.
제나라로 돌아온 손빈은 제나라 전기田忌장군의 눈에 들어 식객노릇을 하며 그를 조언해 주었는데, 한번은 전기가 공자들과 마차경주를 하며 돈내기를 하곤 한다는 것을 안 손빈이 마차를 끄는 말들을 살펴 본 뒤에,“장군이 내기를 좋아하니 제가 이기게 해 드리겠습니다.”하고 말했는데 전기가 손빈의 말을 믿고 공자들에게 천금을 걸고 경주가 시작되자 손빈이“이제 장군의 하등 수레를 상대방의 상등 수레와 달리게 하고, 장군의 상등 수레를 상대방의 중등 수레와, 장군의 중등 수레는 상대방의 하등 수레와 달리게 하십시오. 그러면 한번은 지고, 두 번은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라고 했다.
세 번의 경주가 끝나자 과연 손빈의 말대로 되자 전기는 천금의 상금을 챙겼다. 그 후 전기는 손빈의 뛰어난 재주를 인정하여 왕에게 추천했다. 제나라 위왕威王이 손빈에게 병법에 대해 물었는데 막힘이 없자 손빈을 군사로 삼았다. 손빈이 군사가 된 기원전 354년 위나라가 조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을 공격했다. 다급해진 조나라는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해 왔고, 위왕은 신하들에게 구원해 줄 것인지를 묻고 단간륜段干綸이라는 신하의 의견이 논리 있다고 여겨 출병을 명령했다. 그리고 손빈을 장수로 삼으려하자 손빈이 자신은 죄인이라며 사양하므로 전기를 장수로, 손빈을 군사로 임명했다.
전기가 군대를 이끌고 조나라로 향하려 하자 손빈이 만류하며,
“엉킨 실을 풀려면 주먹만 휘둘러선 안 됩니다. 급소를 치고 빈틈을 찔러 상대방의 형세를 불리하게 만들면 저절로 싸움은 풀리게 됩니다. 지금 위나라와 조나라가 맞붙어 싸우고 있기 때문에 위나라의 정예군대는 모두 나라 밖으로 나가고 수도 안에는 늙고 병든 자들만 있을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위나라 수도인 대량으로 바로 치고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저들은 조나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 대량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한번 움직여 조나라의 포위를 풀고, 위나라가 패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전기는 손빈의 말대로 했더니 과연 위나라는 조나라에 대한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그러면서 제나라 군대는 계릉桂陵에서 위나라 군대와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이것이《사기》〈손자열전〉에 기록된 내용이다. 그러나《전국책》에는 이 계책을 단간륜이 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에 조나라는 결국 위나라에 함락되었다. 그러나 제나라는 양릉에서 위나라를 쳐서 위기에 빠뜨린 다음 계릉桂陵이란 곳에서 싸워 크게 승리했다.
계릉 싸움이 있은 후, 13년 뒤 기원전 341년 위나라는 방연을 장군으로 이번에는 한韓나라를 공격했다. 한나라는 삼진 중에서 가장 약한 나라로 위나라의 남쪽 낙수洛水지역에 위치하는데 위나라가 팽창정책을 펴고 있었으므로 북쪽에 있는 조나라 공략이 제나라의 간섭으로 좌절되자 이번에는 남쪽 한나라를 쳤던 것이다. 한나라 6대 소후昭候(기원전 350-331년 재위)는 재상 신불해申不害의 의견에 따라 제나라에 구원요청을 했다. 제나라 위왕은 한나라의 구원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한나라를 구해주되 일찍 구해주는 것과 천천히 구해주는 것 중 어느 쪽이 좋겠소?”
신하들의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위왕의 뒤를 이을 선왕이 한나라 사신에게 우리가 구원해 줄 것이니 염려 말고 가서 싸우라고 했다. 그 뒤에 위와 한은 다섯 번을 싸웠는데 모두 위나라가 승리했다. 망할 지경에 이르자 한나라는 다시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해 왔다. 그때서야 전기를 장수로, 손빈을 군사로 삼아 한나라를 지원하도록 했다.
한나라 국경에 나가있던 위나라 장수 방연은 제나라 지원군이 위나라 수도 대량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되돌렸다. 한편 위나라 군이 제나라 군을 쫓아오고 있다는 정보를 받은 손빈은 전기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들 삼진의 군대는 원래 사납고 용맹스러워 늘 제나라 군대를 깔보며 겁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점을 역이용하면 우리가 크게 승리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매일 아궁이 숫자를 줄이도록 했다. 첫날에는 10만개, 다음날에는 5만개, 그 다음날에는 3만개의 아궁이를 만들면서 군대를 물리도록 했다. 그렇게 하면서 후퇴하면, 쫓아오는 방연은 제나라 군대가 매일 겁을 먹고 대열을 이탈한다고 믿을 것이고 그 때문에 더욱 다급하게 쫓아 올 것이라고 했다.
손빈의 계략대로 매일 아궁이 수를 줄이면서 후퇴하자 뒤쫓던 방연은, “내가 처음부터 제나라 군대가 겁쟁이인 줄은 알았다. 우리 땅에 온지 겨우 사흘 만에 절반의 병력이 도망갔구나.”
방연은 급히 쫓아가서 남은 제나라 군대를 무너뜨리고 승리를 얻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그래서 보병은 떼어 놓고 기병만 이끌고 뒤쫓았다. 하지만 손빈은 마릉馬陵에서 진을 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릉은 길이 좁고 험난하며 막힌 곳이 많아서 복병에 걸리면 전멸을 면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러나 방연은 뒤쫓는데 급급해 그런 상황을 헤아리지 못했다.
손빈은 방연이 그곳에 도착할 것을 예상하고 큰 나무 껍질을 벗겨놓고 거기에 “방연이 이 나무 아래서 죽는다.”라고 써놓고는 군사들에게 쇠뇌를 주어 매복시킨 뒤 불빛이 보이면 일제히 쇠뇌를 쏘라고 명령했다. 그날 밤 방연은 마릉까지 쫓아왔고 큰 나무 둥지가 길을 막고 있어 불을 비춰 살폈는데 거기에는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글귀가 있었고 그것을 보는 순간 사방에서 쇠뇌가 날아들었다. 위나라 군사가 갈팡질팡하며 달아나자 방연은 비로소 손빈의 계략에 말려든 것을 깨닫고 자신의 칼로 자결했다. 그는 죽으면서 “끝내 터벅머리 아이놈의 이름을 떨치게 만들었구나.”라고 읊조렸다고 한다. 손빈은 위나라 군대를 이끌던 태자 신申을 포로로 잡아서 제나라로 끌고 왔으며, 이후 제나라는 한나라, 위나라의 상국이 되었는데 이는 실로 춘추시대 이후 처음이었다.
다음은 소위 유세가遊說家들의 이야기인데 소진蘇秦과 장의張儀가 전국칠웅끼리 물고물리는 합종연횡合終連橫*을 펼쳐 나가는 이야기로, 처음에 소진이 강국이던 진秦나라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다른 여섯 나라가 합종할 것을 설득해 동맹을 맺게 하였고, 나중에는 장의가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려면 합종을 깨뜨려야 한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진나라는 먼저 위나라를 압박하되, 다른 나라들은 진나라와 연횡해야 한다고 유세하고 다닌 그런 이야기다. 그래서 둘 다 나름대로 성공해 소진은 6국의 재상이, 장의는 진나라의 재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마천은 이들을 좋아하지 않은 모양으로, 소진과 장의에 대해 《사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삼진에는 임기웅변의 유세객이 많았다. 합종책이나 연횡책을 말해 진나라를 강하게 만든 자들은 대개 삼진출신이다. 장의는 소진보다 임기웅변에 더 크게 의존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소진을 미워하는 까닭은 소진이 먼저 죽자, 장의가 그의 단점을 들춰내 자기주장을 강조하고 연횡의 길을 성공시켰기 때문이다. 요약해 말한다면 이 두 사람은 참으로 위험한 인물이다.”
소진과 장의는 말주변이 좋고 잔꾀에 능한 인물이었으나 행동과 마음은 지혜에 비해 대의大義에서 멀고 또한 도道에서도 먼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중용된 데는 당시 세상이 원하는 것이 지혜나 덕 혹은 충심이 아닌 잔꾀와 속임수 그리고 탐욕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독후감치고는 너무 길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전국시대도 마지막으로 치닫고 있는데 그것은 진시황이 중국의 천하를 통일하기 때문으로, 그의 천하통일방편에 대해 살피고 나서 끝맺을까 한다.
사실 진시황은 전대 왕의 적자로서 기회가 닿아 왕이 되고, 인재를 잘 활용해 천하통일을 이룬 것이 아니다. 그는 여불위呂不韋라는 장사꾼에 의해 왕이 되고 중국역사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천하를 사고 판 장사꾼 여불위’를 통해 그가 군주가 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여불위는 원래 위나라 복양(濮陽-하남성)사람으로 나중에 한나라에서 장사해 대부호가 되었다. 그가 조나라 수도 한단에서 장사 할 때 조나라에 볼모로 와 있던 진나라 공자 자초子楚를 처음 만나게 되는데, 당시에 진나라 왕은 소왕昭王으로 소왕 재위 40년에 태자가 죽었다. 그래서 차남 안국군安國君이 태자가 되었는데, 안국군에게는 아들이 스물다섯명이나 있었고 자초는 그 중의 한명이었다. 자초의 어머니는 하희夏姬라는 후궁이었으며, 하희는 안국군을 매료시키지는 못한 모양으로 그 때문에 자초 또한 주목받지 못하는 신세였고 결국 볼모로 보내졌던 것이다.
볼모로 와 있던 조나라에서도 별로 대접받지 못하고 궁핍했던 자초가 여불위의 눈에 띈 것은 우연이었지만 여불위는 그런 자초를 보고서 주판을 튕겼다.
“이야말로 진귀한 재화가 아닌가? 사서 둘만하다.”고 생각했고, 그는 여러 가지 정보들을 모았는데, 안국군에게는 아직 후계자가 없다는 것과 안국군의 정부인 화양華陽부인에게는 아들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여러 서자들 가운데 하나를 양자로 삼아 뒤를 계승해야만 했고 후계계승문제의 선택권은 화양부인에게 있었던 것으로 이런 사실을 알고 여불위는 잘만하면 자초가 진나라 왕위 계승자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되면 진나라를 손안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불위는 자초에게 접근하여 말했다.
“제가 공자님의 집을 크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자초가 웃으며 대꾸했다.
“먼저 당신의 집부터 크게 만든 뒤에 내 집도 크게 해 주시오.”
하지만 여불위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공자께서는 모르십니다. 내 집은 공자님의 집을 크게 해야만 따라서 커진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자초는 말뜻을 알아차리고 여불위를 안으로 불러들여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먼저 여불위가 말했다.
“진나라 왕은 이미 늙었고, 안국군이 태자가 되었습니다. 제가 듣기로 안국군은 화양부인을 사랑하지만 화양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후사를 결정할 권한은 화양부인에게 있습니다. 지금 공자의 형제들이 스물다섯명이나 되고 공자는 그중에 중간정도 서열입니다. 그나마 사랑받지 못하고 오랫동안 제후의 나라에 볼모로 잡혀와 있습니다. 지금 진왕이 돌아가시고 안국군이 왕위에 오른다면 아마도 공자는 다른 여러 형제들과 후계다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자초가 머리를 끄덕이며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겠소?”하고 반문한다. 여불위는 이미 계획을 짜둔 터라 막힘없이 이야기를 풀어갔다.
“공자께서는 가난한데다 이곳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와 있는 몸입니다. 그러니 어버이를 받들거나 빈객들과 사귈 재화도 개회도 없는 것이 당연하지요. 제가 아직은 가진 것이 모자라지만 공자를 위해 천금을 가지고 진나라로 가서 안국군과 화양부인을 섬겨 공자를 후사로 삼도록 힘쓰겠습니다.”
자초는 고마워서 머리를 조아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말했다.
“정말로 당신의 계획대로 된다면 나는 진나라를 나누어서 당신과 함께 가질 것이오.”
이에 여불위는 자초에게 5백금을 주어 여러 빈객들과 사귀게 하고, 자신은 5백금으로 진귀한 물건들을 사서 진나라로 가 화양부인의 언니를 먼저 만나 화양부인에게 진귀한 물건을 전하게 하고, 화양부인과의 면담을 청했고 화양부인을 만나서는
“자초 공자는 어질고 슬기롭습니다. 공자께서는 천하 제후의 빈객들과 두루 사귀고 있으며, 부인과 안국군태자님을 하늘처럼 생각한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고 또 화양부인의 언니에게 선물을 안기며 자초를 후계자로 삼도록 해 달라고 했다. 결국 화양부인은 안국군에게 자초의 이름을 거론하며,
“조나라에 볼모로 가 있는 자초는 뛰어나고 현명하다는 소문이 무성합니다.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그 아이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자초를 후사로 삼아 신첩이 몸을 의탁하게 해 주십시오.”
안국군은 화양부인을 사랑했으므로 그녀의 청을 들어주기로 하고, 옥부玉符에 자초를 양자로 삼는다는 내용을 새겨서 주었다. 그리고 자초에게 재물을 보내고 여불위를 자초의 태부太傅로 삼았다. 덕분에 자초는 주변의 관심을 끌게 되고 위상도 높아졌다.
이때 여불위는 집안에 종을 1만명, 식객 3천명, 첩을 여러 명 데리고 있었는데 첩 중에 주희라는 여자를 총애하고 있었고, 하루는 자초를 초청하여 술을 마시다가 자초가 주희에게 한 눈에 반해 그녀를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여불위는 그녀를 내주기 싫었지만, 이미 자초에게 투자한 것이 너무 많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녀를 자초에게 보냈다. 이내 주희가 임신하였고 자초는 그녀를 부인으로 삼았다. 여불위가 준 주희가 바로 중국천하를 통일한 시황제의 어머니 제齊태후*다.
*제태후 :《사기》〈여불위열전〉에는 그녀가 자초에게 가기 전에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기에 그녀의 아들인 영정은 자초의 아들이 아니라 여불위의 아들이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분명치 않고, 여불위나 제태후가 이런 일을 스스로 발설한 적이 없고, 자초 또한 그렇게 어리석은 인물이 아니었기에 아마도 이는 소문으로 떠돌던 것을 사실처럼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진나라 소왕 50년에 진나라는 조나라를 정벌할 계획으로 장군 왕위로 하여금 조나라 도성 한단을 포위하게 했다. 이에 조나라는 볼모인 자초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여불위는 황금 6백근을 관리들에게 뇌물로 주고 자초와 그 가족을 빼내 진나라로 도망가게 했다. 그로부터 6년 뒤 소왕이 죽자 안국군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효문왕인데, 효문왕은 재위 1년만에 죽었다. 효문왕이 죽자 자초가 왕위를 계승하니 바로 진시황의 아버지인 장양왕이다. 그런데 장양왕도 오래 살지 못했다. 왕위에 오른 지 3년만에 생을 마감했다. 그러자 진나라의 권력은 여불위에게 집중되고 여불위는 자초의 아들인 영정嬴政을 왕위에 올리고, 제태후가 섭정하게 했다. 때는 기원전 245년, 영정의 나이 13세였다.
여불위는 상국相國으로 지위가 높아졌고, 정은 그를 중부仲父라 부르며 아버지처럼 대했다. 또한 제태후는 여불위와 간통하는 사이로, 진나라의 권력은 여불위에게서 나온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이후 여불위는 10년간 상국의 자리에 있으면서 권력을 손 안에 쥐고 흔들었다. 그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여불위는 제태후의 색욕을 채워주기 어렵게 되자 노애嫪毐라는 건장한 젊은이를 환관이라고 속여서 별궁으로 들여보냈다. 그러자 노애가 제태후와 아들을 둘이나 낳고 권력을 농단했다. 이 사실이 영정에게 알려지자 영정은 엄청난 현상금을 걸고 노애를 생포해 죽이고, 두 아들과 삼족을 멸했다. 급기야 노애를 태후에게 바친 이가 여불위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영정은 여불위도 잡아 죽여야 했지만 그간의 공을 생각해 하남 땅으로 쫓아버렸다. 그러나 1년 뒤에 영정은 여불위가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생각해 편지를 보내 가족을 데리고 촉으로 가라고 했다. 이에 여불위는 촉으로 가면 다음에는 독약을 보낼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해 술에 독을 타서 마시고 자결했다.
사마천은 말한다.“공자孔子가 말한바 헛된 이름만 난 자가 바로 여불위와 같은 사람이던가???”
추신 :“군주가 자식을 태자로 삼으면 그 태자의 어미는 군주가 빨리 죽기를 바란다.” 이 말은 전국시대 한나라의 왕족으로 법가의 맥을 이은 한비자가 한 말이다. 진시황은 한비자의 저술에 매료되어 그를 찬양하고 그의 법사상을 통치수단으로 이용하였으나 기원전 233년 그를 죽이는 등 많은 학자들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