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요한 10,1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귀 들려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잠시도 쉬지 않으신 채, 이 고을 저 고을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아픈 이들과 허약한 이들을 어루만져 주시고 그들의 고통을 낫게 해 주십니다. 쉴 틈 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아프고 고통 받는 이들을 찾아다니며 하느님의 사랑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을 보고 많은 이들은 그 분의 행하시는 일에서 하느님의 흔적을 느끼며 감탄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일을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이 보고서도 바리사이들은 무슨 이유인지 악의적으로 예수님을 흠집 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마귀의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마태 9,34)
바리사이들의 이 같은 반응은 실로 기가 찰 정도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예수님이 행하시는 그 놀라운 일들,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이가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놀라운 기적을 보고 또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시는 기적으로 보고서도 왜 그들은 믿지 못하고, 아니 믿는 것을 떠나 악의적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행동을 의도적으로 하는 그들의 모습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칭찬을 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다된 밥에 코를 빠뜨리듯, 그것도 다분히 의도적으로 악의를 품고 이 같은 말을 해대는 그들의 속마음이 궁금합니다. 질투심인지, 아니면 허영심과 교만함 때문인지 자신이 원치 않는 이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바리사이들의 그 같은 마음의 근본이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한 그 상황에서 정작 험한 꼴을 당한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할 바, 곧 다른 마을로 찾아가 하시던 일을 계속 하실 뿐입니다.
자신을 험담하며 악의적으로 방해하는 이들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저 묵묵히 본인이 해야 할 바에 충실한 예수님의 모습. 오늘 복음 안에서 예수님의 이 모습이 개인적으로 제 마음 안에 큰 울림을 주며 다가왔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들은 우리가 하는 일들에 대해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기를 바랍니다. 아니 칭찬까지는 아니더라도 비난받고 모함을 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내가 원치 않게 흘러 내가 본래 의도한 바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아, 다른 이들로부터 오해와 비난과 모함을 받게 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상황을 억울해하며 자신의 상황을 항변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그러나 정작 내 상황에 대한 항변은 더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며 상황을 더 악화시킬 때가 많습니다. 그 때 많은 이들은 무력감을 느끼고 허무감에 사로잡혀 희망을 잃어버리기까지 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새로운 모습의 희망을 보여주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와 같은 예수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마태 9,35)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이 악의를 갖고 하는 험담이든 아님 칭찬 일색의 찬양에 가까운 입에 발린 말이든 그것에 괘념치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 나가는 그 충실함, 오늘 복음 안에서 보이는 예수님의 이 모습은 저로 하여금 이 순간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듯 다가왔습니다. 그러한 면에서 마태오 복음의 말씀을 인용한 오늘 영성체송의 말씀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위안으로 다가옵니다. 오늘 영성체송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마태 11,28)
세상과 남들의 시선과 판단에 나의 삶과 행동의 기준을 두지 않고, 오직 하느님 그 분께 나의 모든 마음을 향해 두는 삶, 그래서 사람들이 뭐라 하든 그것이 설사 악의적인 비난이나 험담, 모함을 넘어 나를 향한 의도적 박해와 시련이라 할지라도 오직 하느님께 믿음을 두고 그 분 말씀을 내 생명의 샘으로 삼아 그 분의 빛으로 빛을 바라볼 때, 우리 삶은 삶이 우리에게 주는 모든 허무함을 극복하고 새 빛 안에서 참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진리, 그리고 그 희망이 우리에게 안식을 준다는 바로 그 진리를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오늘 복음의 말미 예수님의 다음의 말씀 안에서 그 같은 예수님의 삶의 태도를 다시금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ㄴ-38)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은 상황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직접 나서 일꾼을 찾으려 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시자 당신이 일하는 포도밭의 진짜 주인인 하느님께 일꾼을 보내주시기를 간절히 청하는 그 자세, 바로 그 자세 안에서 예수님이 당신이 일을 어떠한 마음으로 대하고 행하시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오늘 독서에서 호세아 예언자는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들, 곧 송아지와 은과 금으로 만든 신상들로 하느님을 대체하고 하느님을 떠나 사는 이스라엘이 어떠한 벌을 받게 될지를 냉혹하게 예언합니다. 그것은 모두 오늘 화답송의 시편이 말하듯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부질없는 세상의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믿고 희망을 두어야 하는 것은 오직 하느님 그 분, 오늘 복음환호송의 말씀처럼 양들의 목소리를 알고 계신 착한 목자 하느님 그 분뿐입니다.
오늘 말씀이 전하는 이 진리, 곧 우리의 믿음과 희망을 온전히 하느님 그분께로 향하는 삶을 자세를 통해 여러분 모두가 세상이 주는 시련과 박해를 당당히 이겨내고 하느님 안에서 참 기쁨을 찾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요한 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