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정보름우물, 가회동성당…천주교 역사 현장을 찾아서
신병주 교수 / 발행일 2023.03.15. 16:18 / 수정일 2023.03.15. 17:36
서울 곳곳에 천주교 수용과 박해를 기억하는 주요 현장들이 남아 있다. 사진은 가회동성당.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42) 천주교 탄압의 현장들
조선후기 정치, 사회적으로 가장 큰 탄압을 받은 종교는 천주교였다. 17세기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인물로부터 처음 전래가 되기 시작한 천주교는 18세기 이후 정치인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널리 수용되었다.
천주교가 급속하게 전파되자, 조정은 큰 위기의식을 느끼고 천주교 탄압에 적극 나섰고, 천주교 신부를 비롯하여 신자들 다수가 희생을 당하였다. 조선후기에는 1791년의 신해박해,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 등 대규모 천주교 박해 사건이 일어났고, 서울에도 천주교 수용과 박해를 기억하는 주요 현장들이 남아 있다.
조선후기, 천주교 박해로 많은 신부와 신자들이 희생을 당했다. 사진은 가톨릭 순교성인화를 감상하는 시민.
천주교의 전래와 탄압
조선시대에 천주교 전래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는 허균(許筠:1569~1618)을 들 수 있다. 허균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유럽의 지도와 천주교의 「게십이장(偈十二章)」을 얻어왔다는 기록이 유몽인의 「어우야담」이나 이익의 「성호사설」에 전해진다. 당시의 명나라도 마테오리치에 의해 막 천주교가 도입되는 시점이었음을 고려하면, 조선에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천주교가 소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1637년 삼전도 굴욕의 조건으로 청나라 심양에 인질로 갔던 소현세자 역시 천주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소현세자는 북경의 남천주당에 머물던 독일인 신부 아담샬과의 만남을 통해 천주교 교리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조선후기 점차 교세를 확장해가던 천주교에 대한 최초의 대대적인 박해는 정조 때인 1791년(정조 15)에 일어났다. 신해사옥, 또는 신해박해는 1791년 전라도 진산(珍山)의 선비 윤지충(尹持忠)이 모친상을 당하여, 외사촌 권상연(權尙然)과 함께 신주(神主)를 불사르고 천주교식으로 제례(祭禮)를 지내면서 시작되었다.
신주를 불사른 진상이 중앙에 보고되자, 조정에서는 정치와 제도의 위신을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천주교인에 대한 공세에 나섰다. 진산군수를 시켜 두 사람을 체포한 후, 도덕을 문란하게 하고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상을 신봉하였다는 죄명을 씌워 사형에 처했다. 정조는 사건을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고, 천주교의 교주(敎主)로 지목받은 권일신(權日身)을 유배시키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했다.
조선후기 정치, 사회적으로 가장 큰 탄압을 받은 종교는 천주교였다. 사진은 명동성당 내부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했던 정조가 1800년 승하한 후에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이 시작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이다. 신유박해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 이외에 천주교 신자인 남인에 대한 정치적 탄압의 성격을 띠면서 대규모 박해가 시작되었다.
1800년 순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15세의 어린 나이로 영조의 계비로 들어왔던 경주 김씨 정순왕후는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되어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노론 벽파 정치적 입장을 띠었던 정순왕후와 그의 친정 경주 김씨 세력은 정조의 그림자 지우기에 나섰다. 정조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혁파와 개혁정치의 진원지인 규장각이 축소된 것은 신호탄이었다.
반대파인 남인 세력의 탄압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801년 천주교 서적을 읽었다는 이유로 남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가하는데 이것이 신유박해이다. 이가환, 이승훈, 정약종 등은 처형되었고, 정약용은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강진으로, 정약전은 신지도에서 흑산도로 각각 유배되었다.
헌종 때는 기해박해가 일어났다. 1839년 3월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에 의해 시작되어 10월까지 계속되었다. 천주교 박해와 더불어, 벽파(僻派)의 입장을 견지한 풍양 조씨가 시파(時派)인 안동 김씨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정치적 목적도 컸다.
프랑스에서 발행된 'Vie de Just de Bretenieres(쥐스트 드 브르트니에르의 생애)’.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9명 선교사를 다룬 책이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 피에르 모방, 자크 샤스탕, 주교 앵베르 등이 처형을 당하였고, 정하상 바오르 등 참수되어 순교한 사람이 54명, 옥에서 죽고 장하(杖下)에 죽고 병들어 죽은 사람들이 60여 명에 이르렀다.
기해박해 다음으로의 대규모 천주교 박해는 1866년(고종 3)에 일어난 병인박해이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고 있던 시기에 프랑스인 선교사 9명을 체포하여 처형하였고, 프랑스는 이를 빌미로 군대를 이끌고 조선 침략에 나섰다. 1866년에 일어난 병인양요 때는 강화도를 점령했던 프랑스군이 외규장각을 방화하는 한편 이곳에 보관되어 있던 왕실의 주요 전적(典籍) 340여 점을 약탈해 갔다. 이 가운데 297책의 어람용(御覽用) 의궤(儀軌)는 2011년에 반환되었고,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천주교의 수용과 탄압의 현장들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면, 이들은 중죄인을 심문하는 기관인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에 대한 『순조실록』의 기록 중, “추국하였으니, (담당 관리는 영부사 이병모, 판이금부사 서정수, 지의금부사 이서구, 동의금무사 윤동만, 한용탁이었다.) 사학(邪學) 죄인을 국문한 것이었다.” 거나, “사학의 망명죄인(亡命罪人) 황사영(黃嗣永)을 충청도 제천 땅에서 포착하여 의금부로 이송하였습니다.”는 기록 등을 통해서, 천주교 관련 수사와 심문은 의금부에서 의금부 소속 관리들이 집중적으로 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의금부가 위치했던 곳은 현재의 종로 1가 일대로, 종각역 1번 출구 앞에 가면 ‘의금부 터’라는 표지석을 볼 수 있다. 의금부는 태종 때인 1414년(태종 14) ‘의용순금사(義勇巡禁司)’를 개편한 관청으로, 형조, 사헌부와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사법기관이었다.
‘의금부 터’ 옆에는 ‘한국천주교 순교터이자 신앙증거 터’라는 표석이 옆에 있어서 이곳이 대표적인 천주교 순교지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실제 1801년에는 주문모 신부와 평신도인 최창현, 정약종 등이, 1839년에는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 1866년에는 베르뇌 주교, 남종삼 등이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았다.
전옥서(典獄署)는 형조 산하의 관청으로, 감옥과 죄수들을 관리하였다. 현재 종각역 6번 출구 앞 오른쪽 화단에 표석이 설치되어 있다. 서린방(瑞麟坊)에 있어서 서린옥(瑞麟獄)이라고도 불렀다. 1392년(태조 1) 조선의 새 관제를 정할 때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전옥서를 설치하였으며,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전옥서를 감옥서(監獄署)로 개칭하고 경무청 소속으로 하였다.
전옥서는 이호영 베드로, 김 바르바라 등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신앙을 고백하고 순교한 장소였는데, 김대건 신부의 부친인 김제준 이냐시오는 의금부에서 형조로 이송되어 처형될 때까지 전옥서에 구금되었다.
새남터 순교기념 대성전은 종래의 서양식 교회건축 양식을 탈피하여 한국식 건물로 지어졌다.
새남터 역시 대표적인 천주교 순교지이다. 현재 서울시 용산구 이촌동 앞 한강변의 모래사장으로, 일명 ‘노들’ 또는 한문으로 ‘사남기(沙南基)’라고도 한다. ‘새남터’는 ‘사남기’를 우리말로 부르는 호칭이다.
조선시대에는 넓은 백사장이 있어서 군사훈련장인 연무장(鍊武場)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456년(세조 2) 성삼문 등 사육신이 이곳에서 처형을 당했으며, 천주교 전파기에는 신자들의 처형장으로도 사용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청나라 신부 주문모가 이곳에서 처형당한 뒤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지가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앵베르, 모방, 샤스탕이, 1846년 병오박해 때는 김대건과 현석문이, 1866년 병인박해 때 베르뇌와 도리등 6명의 서양인 신부들과 정의배, 우세영 등의 신자들이 이곳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에 처해졌다.
한국천주교에서는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순교한 것을 기억하여, 1950년 처형지로 추정되는 인근의 땅을 매입하여 순교기념지로 지정하였다. 1956년 ‘가톨릭순교성지’라는 기념탑을 세웠고, 1984년에는 새남터 순교기념 대성전을 착공하여 1987년에 축성식을 거행했는데, 이 성전은 종래의 서양식 교회건축 양식을 탈피하여 한국식 건물로 설계하였다. 2006년에는 새남터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15일 동안은 맑고 15일 동안은 흐려진다는 ‘석정보름우물’
현재 서울의 북촌에는 천주교와 관련된 현장들이 다수 남아 있다. 대표적인 곳이 ‘석정보름우물’이다. 15일 동안은 맑고 15일 동안은 흐려지곤 했기 때문에 ‘보름 우물’이라 불렸다고 한다. 서울에 상수도가 도입되기 전까지 계동 주민의 중요한 식수원이었다고 한다.
최초의 선교사였던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794년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들어와 계동 최인길 마티아 집에 숨어 선교 활동을 벌일 당시 이 우물의 물로 영세를 주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천주고 박해 시에는 우물의 물에서 쓴맛이 났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주문모 신부는 밀고가 들어가 체포령이 내려진 후에는 여신도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하여 6년 동안 포교 활동을 하였다. 이 시기에 주문모는 정약종, 황사영 등과도 접촉을 하였다고 한다.
1949년 한옥 형식의 가회동 성당이 건립되었다. 위 사진은 2013년에 재건축한 가회동 성당
북촌이 천주교 전파의 중심 공간임을 기억하기 위해 1949년 이곳에 한옥 형식의 ‘가회동 성당’이 건립되었다. 가회동 성당은 최근에 와서 유명 연예인들의 결혼식 장소로도 활용이 되면서 북촌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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