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것도 없어
편재영
직지사에 가서 레지오 친목회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숙자 언니를 차 뒷자리에 태웠다. 말이 없는 숙자 언니 침묵만이 흐른다.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물었다.
“언니는 친정에 누가 살고 있나요?”
“나는 아무것도 없어.”
무엇이 없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언니가 막내입니까?”
“나는 일본에서 태어났어.”
어쩐지 발음이 이상했다.
“아버지가 전쟁에서 돌아가셨어, 그때 집에 큰 개가 있었는데 일본 국기를 몸에 감은 개가 군인들한테 끌려갔어. 그 모습은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전쟁에 끌려갔다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나지 않아.”
잠시 말을 끊었다. 숙자 언니가 1941년에 태어났으니까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돌아가신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엄마가 동생을 데리고 시집을 가서 할머니가 엄마를 몹시 미워했어. 시집간 엄마는 학교 가는 길목에 살았는데 그 집에는 절대로 가면 안 된다고 할머니가 신신당부 했지. 언니는 할머니 말을 잘 들었었는데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학교 갔다 오는 길에 엄마 집에 가서 아기도 봐주고 그랬어. 할머니는 전쟁에서 원자폭탄을 보고 기겁을 하며 놀랐어. 죽어도 고향에 가서 죽겠다고 언니와 나를 데리고 조선으로 나왔지. 그때가 내 나이 일곱 살이고 언니와 나는 쌍둥이야. 할머니는 진주 시골 동네를 찾아가서 여러 집을 옮겨 다니며 신세를 졌어. 할머니를 따라다니다가 개한테 물려서 개 코털을 태운 재를 기름에 개어 할머니가 개한테 물린 자리에 발라주었어. 진주 개안골에서 대나무로 소쿠리 만드는 사람 집에도 들어갔다 나오고 앉은뱅이 아저씨 집에도 들어갔다 나왔어. 그러던 할머니가 나를 아는 집에 맡기고 나보고는 “그 집에 있어라.” 하고 언니를 데리고 가버렸어. 큰소리로 서럽게 울면서 집을 뛰쳐나갔지. 할머니와 언니 이름을 부르며 낯선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고 돌아갈 집도 길도 다 잃어버렸어. 한국말을 못하니까 그렇게 고아가 되었어. 시장 통 포목상 가게 처마 구석에서 삼일을 자고, 오바짱 할머니를 따라 갔어. 비단장사 가게에 가서 오바짱 할머니가 불러낸 아주머니를 만났어. 일본 말로 사정 이야기를 하니 할머니도 찾아주고, 학교도 보내 주겠다며 나를 그 아주머니 집으로 데리고 갔어. 설거지와 청소를 하고 추운 겨울에는 진주 남강에 가서 빨래를 하고 식모살이를 했어. 주인아저씨는 소방관인데 술을 마시고 오면 술주정이 심해서 식구들이 다 밖으로 쫓겨났어. 아, 6.25 전쟁에 피난도 갔다 왔어. 아주머니가 나를 집으로 데려 갈 때는 할머니도 찾아주고, 학교도 보내주고, 내 딸 하자하더니 열두 살이 되도록 일만 했어. 주인집 아들과 딸은 학교에 다니며 공부를 하는데 나도 공부가 너무나 하고 싶어서 야간학교에라도 다니고 싶다고 말하니 식모 주제에 무슨 공부냐고 하더라."
숙자 언니가 울먹울먹한다, 잠시간 응어리를 가라앉혔다. 일본에서는 일학년 때 배우는 ‘가타카나’, ‘히라가나’ 를 익히고 왔으니 얼마나 학교에 다니고 싶었을까.
“다행히 이웃에 사는 고마운 분이 주인 모르게 살짝살짝 한글을 가르쳐 주어 한글은 깨쳤지만, 배움에 한이 맺혀서 책을 보면 무조건 읽어야 해.”
아하! 그래서 오늘 시립박물관 휴게실에 비치된 동화책을 불편한 어린이 의자에 혼자 앉아서 읽고 있었구나. 단원들은 편한 의자에 앉아서 창밖의 풍광을 감상하며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데 숙자 언니는 오라고 몇 번이나 불러도 오지도 않고 동화책만 열심히 보고 있었다. 사연은 계속된다.
“설 추석 대목에 비단 장사하는 집에 가서 망도 봐주었어. 주인이 높은 곳에서 비단 필을 아래로 펼쳐 내릴 때 가짜 손님이 주인 모르게 비단을 빼내는지 잘 봐야했어. 양녀를 키운다는 비단 장사 시누이도 올케를 도와주려고 여수에서 왔어. 이래저래 소방관 아저씨 집에서 식모로 살다 열여섯 살이 되었지. 동네에 친구 옥자가 있었는데 옥자 언니가 술집에서 일한다며 예쁜 옷을 입고 다녔어. 부러워하는 나를 보고 우리 언니 따라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옥자 말에 옥자 언니를 따라가려고 주인 모르게 보따리를 쌌어. 도망갈 기회를 엿보다 옥자 언니를 따라서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탔는데 배멀미를 심하게 했어. 부산에서 술집 사람들은 내 이름을 숙자라고 불렀어. 일본 이름은 ‘지예고’이고 언니 이름은 ‘후미꼬’였어. 술집에서 일을 하는데 피난 온 사람이 술집 주인 몰래 나한테 와서 말하더라고. 여기 있으면 인생 망친다. 그는 나를 데리고 나와서 중국 남자와 조선 여자가 사는 가정집에 식모로 들여보냈어. 참으로 정직하고 고마운 사람이라고 생각해. 조선 여자는 중국 남자가 죽고 나서 범일동에 사는 천순반점 주방장과 결혼을 했어. 그래서 나는 범일동 천순반점에 가서 일을 했어. 이웃에 빵 장사 하는 사람이 나를 보고 착하다고 탐을 냈어. 천순반점 일을 해놓고 빵 장사 집에 가서 만두 만드는 법도 배우고 공갈빵 만드는 법도 배웠어. 그렇게 두 집을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일을 잘 한다고 서로 나를 빌려다 썼어. 이집 저집 뽑혀서 다녔지.”
“언니 이름이 어떻게 최숙자가 되었나요?”
“최숙자 이름은 천순반점 이웃에 식당을 하는 희수오빠가 아버지 최육홍에게 인사를 시키고 집을 나간 딸 이름인 최숙자로 호적에만 올려주었어. 딸 최숙자가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으니 최육홍 아버지가 딸을 찾으려고 애를 써 봐도 찾을 길이 없었던 거야. 그래서 술집에서 사람들이 불러준 이름 숙자에다 최육홍 아버지의 성을 붙이게 되었어.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살아 계실 때는 좋아하는 음식을 사 갖고 자주 찾아갔어. 내 결혼식에도 오고 단체사진도 찍었지. 그때 사진을 우리 아이들과 보고 있으면 꿈만 같아.”
“아하! 이름에 그런 인연이 있었군요. 결혼은 어떻게 하게 되었나요?”
“범일동 빵장사 집에서 친구 정자를 사귀었어. 정자가 식당에서 일 하는 것을 마치고 자취방으로 놀러 갔는데 집주인 박씨가 나를 보고 마음이 곱고 예쁘다고 했어. 박씨 친구 김씨가 딸을 시집보냈는데 딸 신혼집에 사위 친구가 자꾸 놀러 오니 사위 친구를 빨리 장가보내야 하겠다 싶었나 봐. 중신 서라는 부탁을 받은 박씨가 나를 보고 선을 보라고 권했어. 그래서 정자 자취방에서 선을 보는데 부끄러워서 총각 얼굴을 보지 못하고 방바닥만 쳐다봤어. 며칠 지나서 정자가 일하는 식당에 가니 손으로 웬 남자를 가리키며 ‘너 선 본 사람 저기 있네,’ 하는 거야. 그래서 총각 얼굴을 보았지, 안 그랬으면 얼굴도 모른 체 시집갈 뻔 했다. 결혼식에 중매쟁이 박씨, 최육홍 아버지, 희수오빠, 천순반점, 빵장사, 비단장사, 정자, 모두 와서 축하해 주었어.”
소중한 가족이 생긴 숙자 언니는 밖에서는 남편을 우리 아저씨라고 부른다.
“우리 아저씨도 전쟁고아야, 아기 때 고아원에 맡겨져서 우리 아저씨도 나처럼 아무것도 없이 고아원에서 고등학교를 나왔어. 부산에서 살다가 우리 아저씨 친구가 소개해 준 유한킴벌리에 취직이 되어서 김천으로 이사 왔어, 우리 아저씨가 보일러 자격증이 있거든. 나이가 많아서 퇴직을 하고 보일러 설비를 했는데 교회 다니는 사람이 코오롱에서 일감을 빼 준다고 해서 믿었는데 사기를 당했어. 그래서 살고 있는 집을 날렸어, 그 집만 있었어도 고생은 안 했을 텐데…….”
“슬하에 삼 남매를 두고 사람 좋은 우리 아저씨 때문에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어.”
숙자 언니는 ‘오뚝이 식당’에 다니며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었다. 그러나 남편은 돈도 벌지 않고 ‘뚱보 식당’에서 여자들에게 술 사주고, 밥 사주고 늘 사주기만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도 숙자 언니는 싫은 기색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소문은 알고 있었지만, 집이 시끄러운 게 싫어서 참았어. 우리 아저씨가 한번 화를 냈는데 너무너무 무서웠어.”
숙자 언니는 아저씨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나이가 많아서 식당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그동안 가고 싶었던 성당에 다니며 레지오 단원이 되었다. 말없이 부지런하다고 소문이 난 숙자 언니는 어려운 사람을 잘 도와주고 레지오 활동도 열심히 한다. 가난한 사람을 평화시장 노점상에서 장사하도록 도와주고 먹거리를 챙겨다 주며 돌보았다. 음식 솜씨도 좋아서 각종 모임에 맛있는 음식을 푸짐하게 싸가지고 가서 나누었다. 왜소한 체구로 무섭고 험난한 가시밭길을 외롭게 걸어온 숙자 언니가 너무나 가여웠다.
“할머니와 언니를 찾으려고 노력해 봤나요?”
“해보지도 않았어, 그 당시에 파출소 같은데 누가 나를 데려다주었으면 찾았을지 모르지만 이제 찾아서 뭐 하겠나? 하느님이 돌보아주시니 늘 인복이 많아, 오늘도 그렇고.”
그 당시에 할머니는 숙자 언니가 아는 집에 있다고 생각했고 아는 집에서는 숙자 언니가 할머니를 따라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 후에 할머니와 언니가 숙자 언니를 찾으려고 노력했는지, 어디서 어떻게 살아 왔는지 궁금했다. 어느새 숙자 언니가 사는 모암동에 다 왔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집 가까이 차를 세웠다.
집으로 걸어가는 84세 숙자 언니, 흔들리는 굽은 허리가 험난한 인생사를 말해준다. 기구한 운명으로 태어나서 전쟁고아가 되었고 부모, 형제, 고향, 아무것도 없지만 지금은 사 남매의 효도를 받으며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