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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寅年 *정착과 부흥의 해* 3月 ☞소통과 합력의 달☜
창2:1-3절) 최초의 안식일
하나님께서 처음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이 세상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습니다. 홍수가 휩쓸고 간 후의 모습과 같아서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엉망진창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하나씩 하나씩 창조해 나가셨습니다. 하늘을 만드시고 *하늘*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때부터 하늘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는 하늘이. 하늘이 아니었습니다. 혼란의 공간이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바다를 만드시고 *바다*라고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바다는 자연의 일반법칙에 복종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정한 간만의 차이가 생겼으며, 아무리 땅으로 기어 올라오고 싶어도 모래를 넘어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때부터 해와 달과 별은 자연법칙에 복종하기 시작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생물들을 만드시고, 그것들이 자연법칙에 따라 생존하며, 번식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만드시고, 그들의 지위를 정하시고, 그들이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규정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모든 창조는 완성되었습니다.
뒤죽박죽이던 이 세상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무질서하거나 제멋대로 날뛰는 부분이 하나도 없는 완전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안식(安息)을 선포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다 끝났다는 뜻입니다. 즉 *이제 작업이 끝났다. 이제는 안식이다*라고 선포하신 이것이 곧 최초의 안식일(安息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할 때에는 안식일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로의 노예였기 때문입니다. 노예에게는 안식일이 없습니다. 끝없는 일만 있습니다. 즉 여기 있는 흙을 여기 갖다 놓고, 저기 있는 흙을 여기 갖다 놓고, 끝없이 왔다 갔다 합니다.
노예는 일하는 짐승이기 때문에 할 일이 없는 노예는 죽였습니다. 무슨 목적이 있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 자체를 위해 일하는 것이 노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奴隸)였습니다. 그들은 늘 무언가 일을 해야 합니다. 일하지 않으면, 불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후, 그들에게 안식일(安息日)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 최초의 안식일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얼마나 부담스럽고, 어색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무슨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한 그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하루를 꼬박 지낸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안식일에 너무나 불안해서 나무하러 갔다가 돌에 맞아죽기도 했습니다.(민15:32-36절)
입시생들을 보십시오. 하루라도 공부하지 않으면, 불안합니다. 진도(進度)가 나가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하기 때문에 공부합니다. 즉 *친척집에 갔다 와라*해도 수학의 정석을 꼭 가지고 갑니다. 가서 공부해서가 아니에요. 가지고 가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安息日)을 강하게 명령하신 것은 그들이 더 이상 노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지켜라. 너희들은 이제 노예가 아니야!*
다시 말해서 그들은 더 이상 생존(生存)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동역자로서 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안식일에는 무조건 쉬라*고 하시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 안식일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일요일 하루 일하지 않고, 집에서 쉰다는 뜻이 아닙니다. 노동의 의미가 무엇이냐, 왜 직장을 가지려 하고 일을 하느냐, 먹고 살기 위한 몸부림이냐,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냐, 하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하는 공부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냐, 먹고 살기 위한 발버둥이냐, 하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Ⅰ.완전한 세상
오늘 첫째로 본문은 하나님께서 완전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선포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일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2:1-2절)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의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의 창조는 완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더 이상 손을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다 만들어졌고, 하나님이 정하신 그 위치에서 작동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안식(安息)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고 하는 것은 정말 쉬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을 사람처럼 의인화(擬人化)시켜서 표현한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을 신학적으로 *신인동형적*표현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주일 동안 열심히 일을 했기 때문에 피곤하기도 하고, 열도 좀 나서 안식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피곤하셔서 쉬신 것도 아니고, 실제로 이날 아무 일도 하시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가 완성된 것을 스스로 기뻐하시고. 선포하시고. 이날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셨다는 것입니다.
1:31절)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은 완전했습니다. 그 안에 부족한 것이나 모순된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性品)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때에는 모순이나. 갈등이 일어나게 하지 않으십니다. 즉 앞에서 어떤 일을 해놓고, 나중에 취소하거나 물리지 않으십니다.
처음에 만드신 것이 뒤에 만드신 것과 충돌을 일으킨다거나. 나중에 불필요하게 되는 일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완전한 조화를 이룹니다. 여기에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것은 경치가 좋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완전한 조화와 일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모순이나 갈등이 없었고, 이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움직임으로써 하나님을 매우 기쁘게 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있는 추악(醜惡)하고. 더러운 것들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순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니고,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죄(罪)와 타락(墮落)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려서는 안 되며,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만드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악(惡)한 일이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것을 주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악(惡)까지 사용하셔서 *합력하여 선(善)을*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선(善)하고 아름다우십니다. 하나님 안에는 모순된 부분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말씀의 다스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하나님 말씀의 다스림을 받기만 하면, 모든 것이 아름다움을 회복(回復)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물질(物質)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것은 물질(物質)자체는 악(惡)하거나, 나쁘지 않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지배당하지 않기 때문에 나쁜 것이고, 악(惡)하게 사용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財産)이나. 내가 공부한 지식(智識)이나. 어떤 것도 말씀의 다스림을 받기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보시기에 좋은 것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Ⅱ.안식일의 의미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安息日)을 선포하신 후에 이날을 특별히 구별하셔서 의미를 주셨습니다.
2:3절)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은 용도를 특별히 구별하셨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특별한 용도로 구별하는 것을 *거룩하게 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것은 절대로 다른 용도로 써서는 안 됩니다. 다른 용도로 쓰면, 저주(咀呪)가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전(聖殿)안에 있는 물건들은 전부 거룩한 것입니다. 그 안에 있는 것들은 다른 용도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제사장이 자기 집에 불집게가 없어졌다고 해서 성전에 쫓아가서 거기에 있는 불집게로 자기 집에 있는 불을 집는다면, 그것은 거룩함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또 성전에 있는 제사장들은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들인데, 지금 밭에서 일할 사람이 없다고 해서 제사장을 불러내 일을 시킨다면, 용도를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바벨론 왕 벨사살은 아주 교만(驕慢)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아버지 느부갓네살이 성전에 있는 모든 기구들을 바벨론으로 옮겨갔는데, 벨사살은 그 성전에 있던 잔(盞)으로 술을 퍼 마셨습니다. 그는 그날 밤에 죽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하루를 거룩하게 구별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하루는 하나님의 용도(用途)를 위해서만 사용해야지. 다른 목적으로 쓰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완성하시고. 안식(安息)의 상태에 들어가셨습니다. 안식은 계속되었습니다. 모순이 없고, 갈등이 없는 상태에서 모든 생활이 아름답게 유지되었습니다. 모든 날이 안식일(安息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하루를 특별하게 구별하셔서 *이날만큼은 다른 용도로 써서는 안 된다. 이 날은 내 날이다. 내 목적만을 위해 써라*하고 선포(宣布)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安息日)에 두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첫째로 이 하루가 *하나님의 날*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순간부터 *인간이 노동해야 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사람들은 타락(墮落)하기 전에도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일이 중요하고, 바쁘다 하더라도 이날만큼은 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루를 구별하셔서 *하나님께 바치게 하심으로써 이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스스로 선포*하셨습니다.
아무리 일을 좋아하고, 그 일이 바쁘고, 중요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에서 우리는 주인이 아니고, 사용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하루를 구별하여 일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을 계명(誡命)으로 주셨습니다.
출20:8-11절)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문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옛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안식일이 왜 중요합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주인이십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신 날입니다. 안식일이 없으면 우리는 누가 이 모둔 것을 만드셨는지 잊어버린 채 일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에는 일의 노예였습니다. 그들은 바로의 종이었기 때문에 안식일이 없었고, 한평생 쉬는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인이 되셨기 때문에 그들은 새로운 원리에 따라서 살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 새로운 원리가 무엇입니까? 살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동참자로 일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창조해야 하는 삶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문화나 기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사는 새로운 윤리의 삶이요. 새로운 가치관의 삶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에는 맞아 죽지 않기 위해서 일을 했습니다. 병이 나면 죽습니다. 일 못하는 노예는 바로가 죽입니다.
옛날 노예 상인들은 노예를 거래할 때, 상품 가치가 없는 노예들은 곧 바다에 빠뜨려 죽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노예가 아닙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일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통해 얻은 열매로 사랑하는 것이고, 그 일을 통해 남을 섬기는 것입니다. 일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일을 다 못하고 죽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강하게 명령하셔서 더 이상 일의 노예가 되지 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일꾼이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러분, 안식일은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날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닙니다. 사장이 주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하루를 그냥 보내는 것을 그렇게 배 아파합니다.
즉 *24시간 동안 예배만 본다느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이런날 어떻게 그냥 있을 수 있어?*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이날을 자기를 위해서 씁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하루라도 우리의 욕망에서 풀려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누구며,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잊어버립니다. 사람의 약점이 무엇입니까? 작은 일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일에 집착해서 한 것을 놓쳐 버리는 것이 우리의 약점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복을 주셨습니다. 복을 주셨다는 것은 이 하루를 쉬는 것이 결코 우리에게 손해가 되지 않고 축복이 된다는 뜻입니다.
고대(古代)사람들에게 하루를 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루를 쉬어 버리면, 엄청나게 손해를 봅니다. 하루라도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는데, 하루를 쉬어 버리면 대책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하루를 복된 날로 만드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6일만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7일을 일해도 모자라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6일만 일해도 충분하게 하셨습니다. 하루를 쉬는 것을 통해서 6일 동안 믿음으로 살도록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창조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 보십니다. 하루의 손해가 아까워서 이 하루를 쉬지 못하면, 6일 내내 믿음으로 살지 못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안식일은 아예 *없는 날*입니다. 안식일에 약속을 해서는 안 됩니다. 안식일은 완전히 비워 놓으십시오. 내 달력에서 안식일을 공백으로 만들어 놓으십시오. 왜냐하면 이 날은 하나님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그냥 쉬는 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바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 마음대로 쓰시게 하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그날이 더 피곤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그날을 바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남을 위하여 나의 쾌락(快樂)을 포기하는 날입니다. 이날에는 아들도 쉬고, 딸도 쉬고, 종들도 쉬고, 가축들도 다 쉬기 때문 무엇을 하려면 내가 직접 해야 합니다. 우리는 안식일에 더 많이 수고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더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을 통하여 약(弱)한 자를 돕고, 안식일을 통하여 사람들을 기쁘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안식일을 통하여 사람들을 억압하고,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었지만, 예수님은 이 안식일을 기쁨을 날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Ⅲ.불안전한 안식일
셋째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안식일은 불완전한 안식일이었습니다. 이 안식인은 얼마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즉 몇 달이 지속되었는지, 몇 년이 지속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죄(罪)가 들어오자 안식일은 끝장이 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 이상 좋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끝장나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거창하게 안식일을 선포하셨는데, 죄가 들어옴으로써 깨져버리고 만 것입니다.
여기에서 궁금한 것은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불완전한 안식일을 주셨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불완전한 안식일을 통하여 우리에게 깨우치시려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첫 번째 사실은 하나님께서 안식일의 파괴를 허용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불완전했기 때문에 안식일이 깨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문제인데, 하나님은 사람을 더 완전하게 하시려고 안식일이 깨지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최초의 사람들은 죄는 없었지만,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마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유혹을 받을 수 있고, 죄에 빠질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성품대로 완전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큰 것을 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더 성숙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얼마든지 기계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찍어 내기만 하면 되니까요. 우리 머릿속에 하나님만 섬기도록 입력하기만 하면, 우리는 로봇이나 노예처럼 하나님을 섬길 것입니다.
하나님 주위에는 사람 수만큼이나 많은 천사들이 있습니다. 천사들은 무조건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천사는 자유의지가 없습니다. 사탄은 자유의지로 타락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냥 타락시켜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버리시니까 그냥 사탄이 되어 버렸어요.
즉 사탄에게 선택권을 주어서 *너 천사가 될래. 마귀가 될래?*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버리면, 그냥 사탄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 죄가 창조 세계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셨습니다. 죄가 들어옴으로써 안식이 깨진다는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그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무조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죄가 무엇인지 알고 죄를 거부하며,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게 하기 위해 이 아름다운 세계가 엉망이 되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억지로 신앙 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신앙 생활하게 하려면, 이 창조 세계를 파괴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입력만 시키면 됩니다. 처음부터 무조건 섬기게 만들면, 무조건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천사들로도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억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죄(罪)가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죄를 지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죄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몇몇 사람들을 얻기 위해서 이 아까운 세계가 파괴되도록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얼마든지 죄 짓는 생활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죄 짓는다고 해서 당장 벼락이 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도 우스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속에 하나님을 기억하는 본성이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누르고 스스로 죄를 거부하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 얻기 위해 이 아름다운 창조 세계가 깨지고, 안식이 갈등으로 변하도록 내버려 두셨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셨을 때, 이 최초의 인간은 죄가 없었습니다. 죄가 주는 양심의 고통이나. 가책이나. 열등감이나. 피해의식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가끔 아주 순수한 사람들을 볼 때, *저 사람은 지리산에서 내려온 모양이야. 무공해 인간이네* *저 여자는 산소 같은 여자야*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최초의 인간은 정말 *무공해 인간이었고. 산소 같은 부부*였습니다. 즉 *악한 감정, 분노, 신경 질, 부부 싸움, 짜증* 같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죄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죄에 감염되지 않았을 뿐이지. 죄를 짓는 지. 안 짓는 지. 여부는 시험해 보아야 하는 단계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선(善)하기는 했지만, 죄를 이길 능력이 없었고, 죄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몰랐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죄를 짓게 되자 하나님의 안식(安息)은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셨고, 죄를 혐오하게 하셨고, 죄의 추악성에 치를 떨게 하셨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믿게 하시고, 정말 자원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갖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 몇 명을 얻기 위해서 그 아름다운 하늘과 땅과 모든 자연계가 파괴되고, 안식(安息)이 깨지는 것을 조용히 내버려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작품이 깨지는 것을 보면서도 참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스스로 자기 자신을 쳐 복종시켜서, 죄를 지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 짓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이런 사람을 몇 명이라도 얻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억지로 신앙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지 모릅니다. 정말이지 억지로 신앙 생활하지 말아야 합니다. 억지로 신앙 생활하게 하려면, 창세기와 이 모든 기록이 필요 없습니다.
내 안에 욕심도 있고 죄 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하나님, 저는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하는 사람을 얻으시려고, 하나님은 이 모든 고통과 깨지는 아픔을 감수하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내 속에 있는 죄 성을 이기는 것이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미 없는 신앙 생활은 이제 그만해야 합니다. 세상의 유혹이 너무나 두렵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너무 많은 것을 손해 보는 것 같습니까?
즉 돈 손해 보고, 명예 손해 보고, 친구 잃어버리고, 세상 재미 잃어버린 게 그렇게 아깝습니까? 그런 사람은 왜 이 최초의 안식이 깨졌는지, 하나님이 왜 이런 아름다운 세상이 깨지도록 내버려 두셨는지.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강에서 물고기들이 죽어서 떠오르는 것을 보면서도 왜 물고기들이 떠오르는지, 왜 하나님께서 바다에 적초 현상이 일어나게 하셔서 그 많은 바다의 생물이 죽게 하시는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몇 사람을 얻기 위해서 이 아름다운 우주 전체를 대가로 치르셨음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참된 안식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안식을 깨뜨리신 것은 더 온전한 안식을 만드실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시작하시면. 절대로 그만두는 법이 없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한번 시작한 일은 끝장을 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조금씩. 조금씩 헌금을 모아서 바울의 선교 사역을 도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분명히 이루실 것을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일단 나를 다루기 시작하시고, 변화시키기 시작하셨으면, 끝까지 변화시키십니다. 중간에 포기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고난을 주시고, 환난을 주셔서 새 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면, 완전히 새 사람이 되기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꾸 손을 대시기 전에 빨리 바꾸어야 해요. 나중에는 오른 손으로 치십니다. 즉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만들어 놓으십니다. 미련한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내가 너무 변한 것 아니야? 신앙 진도가 너무 나간 거 같아* 그래서 두 주 열심히 교회 나오면, 네 주를 내리 빠져서 균형을 맞추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 봐주시지 않습니다. *이만하면 되었겠지*가 안 됩니다. 완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 때까지 절대로 중간에 포기하는 법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최초의 안식을 포기하신 것은 새로워진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완전한 안식을 만드실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주 전체가 새로워집니다. 그것에 대한 성경의 증거는 너무나도 풍부해서 인용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새로 회복되는 세상은 처음 세상보다 훨씬 더 성숙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구체적으로 이 모든 피조물들이 어떻게, 또 얼마나 성숙할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주가 훨씬 더 성숙한 모습으로 회복된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중에 우리 인간이 최고로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를 *무공해 인간*이라고 부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무공해라니요! 우리는 죄를 이긴 승리자로서, 정복자로서, 영광의 아들로서 그 자리에 앉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산소 같은 여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죄를 이긴 사람들입니다. 그때는 죄가 없을 것입니다.
죄가 없어서 없는 것이 아니라, 죄를 넣어 주어도 아무도 죄를 짓지 않아서 없습니다. 마귀를 몇 마리를 풀어놓아도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가 어떤 것인지, 그 정체를 다 알았고,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다 알았기 때문에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들은 죄를 발로 차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주일에 그 영광을 미리 맛보고 있습니다. 주일에 참으로 은혜 받은 증거는 집에 돌아가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부어지면. 집에 안 가려고 해요. 왜냐하면 영광을 미리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아! 내 욕심은 중요하지 않구나!*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주 새로운 은혜를 맛본 사람은 교회에서 하루 종일 찬송 부르고 이야기하고 성경 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일만이라도 내 속에 있는 갈등과 분노를 끝내야 합니다. 셀(cell)공동체에 않은 시간이 조급하고 아깝 다면, 천국에서는 진짜 앉아 있지 못합니다. 천국에는 뛰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급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천국은 느리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너무 급하고. 바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말씀으로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말씀으로 싸우십시오. 말씀의 다스림을 받는 곳에는 안식이 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다. 안식일을 넓혀 갑시다.
내 안에 용서받지 못한 부분이 무엇인지 찾아보십시오. 내 속에 있는 분노가 없어져야 합니다. 용서를 누려야 합니다. 가정이 말씀의 다스림을 받을 때, 부부가 싸울 이유가 없고, 언성을 높여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생명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말씀이 없기 때문에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게 하십시오. 그러면 자기 욕심을 위하여 달려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기는 믿는데, 너무나 안식이 없는 상태에서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디를 향하여 그렇게 급히 달려가고 있습니까? 거기에는 안식이 없습니다. 참된 안식은 하나님의 용서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영원한 기쁨이 거기에 있습니다. 내 속에서 갈등이 그친 거기에 안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는 더 큰 안식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는 더 큰 평화를 맛보게 될 것이며, 고난 중에 주님이 얼마나 큰 안식과 평화로 지켜 주시는지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죄를 자발적으로 물리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게 하시려고 최초의 안식이 깨지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억지로 믿지 마십시오. 억지로 믿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고, 즉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는 참된 안식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안식을 성령 충만한 중에서 미리 맛보고 있으며, 또 맛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성령이 부어져서 우리 속에 있는 갈등과 분노기 끝나야 합니다. 이 안식을 위하여 말씀으로 싸워서 승리하십시오. 아-멘
찬송가 354장 *주를 앙모하는 자*
율법서(모세 오경)
셀보고서 정직과 투명케 하는 습관▣ 예배 3월 20일(주일)결과는 6월30일 복사하여 결정됩니다.
주일 예배와 헌금 봉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천국시민된 특권과 은혜감사
요4:23절)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순서 : ☆사도신경으로 시작하여 ☆성경 : 본문 읽기와 생명의 양식 공유, ☆찬송 : 삽입된 찬송, ☆헌금 : 헌금과 봉헌기도, ☆연구원 설립을 위한 합심기도와 주기도문으로 끝내십시요.
◈후원금 외 헌금은 전체의 10/1을 연구원 설립비로 ▽입금하고, 나머지는 성도간 교제비, 애경사, 새신자 환영, 전도비 등으로 사용하십시요.
농협계좌 NH콕뱅크 302-8772-0191-01(헌금 종류)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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