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발, 황등행 열차는 20시에 떠나네.(제5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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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8월 어느 날, 북의 김일성은 남한의 최고 권력자가 된 박정희의 과거 남로당 경력에 호의적 평가를 하고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황태성을 부른다. 그때 황태성은 한쪽 신장을 떼어내는 수술을 받을 만큼 건강이 안 좋은 상태였다.
"님댜, 디금 몸은 둄, 어떤가?"
"많이 좋아 졌습니더."
"님다례, 박뎡희, 다알~ 알고 있디?"
"네 잘 압니더, 수상동지."
"어느뎡도 아나?"
"그러니까네. 박정희는 제가 남에 있을 때, 둘도 없는 제 친구였던 박상희의 친동생으로서 마~지한테도 행님! 행님! 하며 잘 따랐습니더."
"박상희라면, 디금 남됴선의 듕앙뎡보부(중앙정보부) 부당으로 있는 김둉필(김종필)이의 당인(장인) 이 아니었던가?"
"그렇습니더, 그의 장모 이름은 조귀분으로서 제가 박상희에게 중매를 섰습니더."
"듕매까지 섰다!? 기리타면, 됴귀분이 와도 보통 틴한 사이가 아니었갔구만?"
"네, 그렇습니더,"
"기리타면 말이디. 님자가 디금 몸이 안 도은 상태디만 됴국과 닌민을 위해 남됴선에 밀사로 내려갈 용의는 없나?" 김일성은 꼭 그렇게 해주었으면 하는 눈치를 보였다.
"네, 밀사요!? 수상동지께서 내리시는 영광스러운 특명인데 마~ 지가 거절 할 리가 있겠십니꺼?" 황태성이 머리를 조아리며 쾌히 받아드리자, 김일성은 입이 벌쭉해지며,
"됴아, 됴아, 기리타면 님다례 남됴선에 내려가서리 김둉필이 댱모 됴귀분이를 통하건 아니면 김둉필이를 딕덥 만나건 간에, 니것을 그쟈들에게 뎐해 두면서리. 북남간의 경데협력과 통일 문데를 논의 할 수 있도록 그 발판을 마련 해보라우. 알갔디?"
하면서 김일성은 황태성에게 미화 20만 달러가 든 작은 가방을 들려주었다. 당시, 20만 불이란 엄청난 거금이다. 김일성이가 이렇게 호기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북한의 경제는 남한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6,25 직후, 김일성은 소련의 원조를 받아 전쟁복구사업에 총력을 경주한 결과 그 효과가 컸다.
당시 북한은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기관차를 생산해서 그것을 동구권에 수출할 정도의 중공업 시설을 갖추었고 농촌에서는 트랙터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다. 아무튼~ 황태성은 20만 달러뭉치가 든 그 가방을 들고 비밀리에 휴전선을 넘었다. 그때가 1961년 8월말, 박정희의 쿠데타 성공 후, 약 100일 뒤였다.
그는 휴전선을 넘어 서울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의 고향 사람인 중앙대학교 강사 김민하(나중, 중대총장 역임)를 맨 먼저 만난다. 김민하는 황태성의 절친한 친구였던 김원출의 막내아들이다. 그런데 김원출의 가족사가 복잡했다. 그것은 김민하 위로 두 아들과 딸이 좌익 활동을 하다 6,25동란의 와중에 월북을 한 것이다.
그들이 월북하자 그때, 이미 북한에서 무역상 부상(차관급)으로 탄탄한 기반을 닦아 놓고 있던 황태성이가 그들을 잘 돌봐 주었다. 아무튼 그런 저런 연고가 있어 황태성은 김민하를 찾은 것이다. 이것을 김민하는 이렇게 증언한다.
------------------------------ "황태성씨는 상주군 청리면에서 출생했다. 우리 집과는 담 하나 사이를 두고 살았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무렵 그는 "독립운동가"니 "황 태성선생"이니 하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다 해방이듬해인 1946년 10월1일 대구민란이 나자 박상희라는 이름과 황태성이란 이름이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그때부터 그에겐 "독립운동가"나 "황태성 선생"이란 말은 사라지고 "빨갱이"란 말이 퍼졌다.
그 후,나는 황태성이란 얼굴은 물론 이름까지 까맣게 잊고있었다. 그러다 10여 년이 훨씬 넘은 1961년 9월1일 학교에서 강의를 마칠 무렵이었는데 그는 가방 하나를 달랑 들고 나를 찾아 왔다. 당시 나는 대학원을 막 졸업하고 중앙대학교의 시간강사로 있으면서 부평의 경찰 전문학교 내에 설치된 재건국민훈련소에도 강사로 나가 군사정부의 이념을 전파하고 있었다.----------
김민하의 이런 활동 배경에는 당시, 고려대학교교수 겸, 국가재건최고회의 고문역할을 하던 박정희의 대구사범 동기생 왕학수(나중 문화방송사장 역임)의 도움이 컸다. 김민하의 고향선배인 그는 김민하를 친동생처럼 여러 모로 돌봐주고 있었다.
그렇게 김민하를 만난 황태성은,
"나, 황태성이라고 한데이."
"??황태성??!!" 많이 들어본 이름이긴 한데??!! 김민하는 한참 기억을 더듬어 봤다. 아하!! 그 독립운동가!? 아니 빨갱이!? 그 기억이 되 살아나자, 김민하는 소스라치게 놀랬다.
"아저씨, 지금 어디 계십니까?"
"내는 지금 평양에 있데이."
"!?네!!" 김민하는 다시 까무러치게 놀랬다. 그렇다면, 간첩!? 김민하의 그런 표정을 읽으며, 황태성은,
"마~내가 평양에서 왔다케서 간첩은 아니니까네 놀랄 것은 없데이." 라고 하면서 황태성은 북한에서, 자신의 위치며 남한에 내려온 이유를 설명했다. 김민하가 듣기에 그것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일단 흑석동의 자기 집으로 황태성을 안내했다.
그 날 밤, 황태성은,
"마~자네, 형과 누이의 소식은 모르제!?"하면서 북한에 있는 김민하의 두 형과 누이도 잘 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김민하는 자신의 핏줄소식을 전해주자, 눈물을 흘리며,
"제 두 형님과 누나를 잘 알고 계십니까?"라고 바짝 다가앉았다. 황태성은,
"하모, 지금 북에서 아주 몸 편히 잘 있제, 내가 수상동지께 잘 말씀 드려서 수상동지의 보호 하에 아주 잘 있데이..." 김민하는 황태성 자신이 그들을 잘 돌봐 주었다는 것에 무한한 고마움을 가졌다.
"그라니까네, 그 형들과 누이를 빨리 만날 볼 수 있는 길이라 카는 거슨, 통일이 빨리 되어야 할 것 아이가? 마~그라고 말이데이, 지금 북한에서는 남쪽을 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는기라, 오로지 북남간의 갱제협력과 통일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할라꼬 내를 밀사로 내려 보낸기라."
김민하가 듣기에 그것도 사실처럼 들렸다. 왜냐하면, 5,16 쿠데타직후, 북한은 남한의 군사정부란 그 주동자인 박정희의 과거 좌익경력으로 보아 자기들 쪽에 그렇게 큰 적대감은 갖지 않고 있다. 라고 판단하며 북은 박정희에게 매우 호의적이다. 라는 정보를 김민하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극비리에 서해의 도서지방에서 남한과의 접촉을 시도해 남북 간의 비밀요원들이 가끔씩 만나고 있다는 것도 대충 알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