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와 신라왕릉
현재 경상도 경주를 신라의 서울이라고 합니다. 그 증거로 경주에는 수 많은 왕릉이 있으며, 불국사도 있고, 토함산도 있고, 가지가지 유물이 있다고 합니다. 신라왕릉을 지칭하면서, 이것은 누구의 왕릉이니 어쩌구 합니다만, 누구의 릉이라고 알려주는 지석이나 비석은 하나같이 없습니다. 태조 왕건이 신라를 경주라는 주로 정했다는 기록은 있어도, 신라의 서울을 경주로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신라의 서울이 경주로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의 경상도 경주에, 신라의 왕릉이라는 것은 하나 같이 지석이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천마총이니, 금관총이니 하는 것은 금관이 나와서 금관총, 말 배가리개에 천마의 그림이 있다고, 천마총이니 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무덤의 주인을 말해주는 지석은 없는 것일까요? 예전에(1911년이후 일제에 의해서)경주의 왕릉이라는 것을 발굴하고자 하니, 그 지방 노인들이 그것은 가묘(가짜 무덤)이다 파지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발굴을 해보니 유물이 나오기는 합니다만..그래서 그들이 봉분을 다시 올리고 해서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경주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조선시대까지만해도 아니 현재까지도 무덤을 훼손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경주에 있다는 왕릉중 어느 것은 도굴이 되기도 하고, 도굴이 안 된 것도 많습니다만,, 도굴이 되었다고 해도 값이 나가는 금은붙이를 가져가지, 돈도 안되는 돌맹이인 지석이나 비석은 가져가지 않습니다. 무겁기만 하고, 가지고 가다 들키기 쉽상이기 때문입니다..경주에 있는 유물은 도굴꾼들이 돌맹이인 지석은 모두 가져가고 금붙이는 그대로 남겨 놓았다는 희한한 유적입니다. 도굴이 안 된 것도 이상하게도 하나같이 무덤주인의 신분을 알려주는 지석은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또한, 당시는 왕릉주위에 배총이라고 해서, 당시의 신하나 공주,왕자의 무덤을 만들어 놓는데, 경주의 고분에는 이것이 없고, 왕릉옆에 바로 왕릉이 있다고 합니다. 학계에서는 옆의 배총은 아마 도굴이 되어서 없어졌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왕릉과 비교해서 값이 될 만한 것은 왕릉에 있지 배총에 있으면 얼마나 있겠습니까. 돈이 되는 왕릉은 도굴하지 않고, 장상(將相)의 고분만 도굴했다는 설명도 어설프게 보입니다..
토함산이 경주에 있다고 하는데, 앞에서 천문학적 증거에서 언급했지만, 무열왕때 토함산은 화산폭발한 기록이 있습니다만, 지금의 토함산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산일 뿐 현무암은 보이지 않습니다. 또, 토함산이 신라에 있다고 했지, 경주에 있다고 한 기록은 없습니다. 토함산이 폭발했을 때, 그것이 신라의 서울에 있었다면 상당히 많은 사람이 피해를 봤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라중심의 반도사관이라고 배우는 삼국사기에는 신라왕릉의 위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이상하게도 위치가 기록된 왕릉은 하나같이 못 찾고 있습니다. 선덕여왕의 릉은 낭산(狼山)의 꼭대기 천림사(泉林寺) 뒷산에 있다고 기록하는데, 우리는 어느 산인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상고사학회에서 대륙에서, 아직도 대륙에 그대로 남아 있는 "천림사(泉林寺)"를 찾아내고 그 뒤에 있는 낭산(狼山)의 꼭대기에서 고분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진을 찍어 온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고분은 당국에 의해서 파헤쳐지고 지금은 그 유적만이 남았다고 합니다. 과연 신라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요? (이중재님의 "상고사의 재발견"이라는 책 참조)
경주에는 신라 김유신장군의 무덤이 있다고 하는데, 그러면, 수많은 다른 장군들의 무덤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장군은 김유신만이 아니었을텐데..수많은 왕후장상(王侯將相)의 고분은 어디로 갔을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신라의 수도가 지금의 경주라면 당연히 왕궁터가 발견되어야 합니다. 신라 천년동안의 서울이었던 경주의 왕궁의 남쪽에 황룡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황룡사지가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경주가 신라의 서울이고, 경주에서 큰 절터를 발견했으니, 그곳이 황룡사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바로 북쪽에는 천년왕도 신라의 왕궁이 있었을터인데, 어째 발굴되었다는 소식은 없습니다. 물론, 수 많은 전란으로 소실(燒失)되었을 수도 있지만, 그런 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또, 소실되었다고 하더라도 주춧돌은 남아 있어야 하는데, 주춧돌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당시 신라가 불교를 신봉했던 국가라고는 하나 황룡사가 황궁보다 컸을까요? 물론 컸을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1,000년동안의왕궁은 어디있습니까? 건물은 파괴돼도 주춧돌까지 모조리 가져가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춧돌하나 나오지 않는 곳을 신라의 왕궁이 있었던 곳이라고 하는 것도 어설프기 짝이 없습니다.
과연 그곳은 신라의 수도가 맞는 것인가요 아니면 그러기를 바라는 것일까요? 발굴이라고 했다고 방송에 나오는 것은 돌칼이나 항아리이지 왕궁에서 사용한 물건이라고 보이지 않습니다.
주춧돌하나 나오지 않는 것은 백제의 서울도 고구려의 서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째서 우리의 고도(古都)는 모두 주춧돌 없이 건물을 세운 것일까요? 경주가 신라의 서울이라고밝혀준 일본사람들이 정말로 고마운 것인가요?
[주]
토함산은 화산(火山)인가?
"...신라 진평왕 31년(서기509년) 봄 3월에 모지악산의 땅이 탔다. 구덩이 너비가 4보, 길이가 8보, 깊이가 5척이나 되었고, 10월15일 꺼졌다..."
" ...신라 무열왕 4년(서기657년) 가을 7월에 동악(東岳) 토함산의 땅이 타서 3년만에 꺼졌다..."
국내 사학자들은 모지악 산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고 했고, 토함산은 현재 그대로 경주에 있는 토함산으로 본다. 또, 토함산의 화산활동에 대해 일부 사학자는 천연가스의 폭발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만약에 그렇다면 이들 화석연료가 생기는 층이 경주 일대에 있어야 하는데, 세계지질학계 보고에 의하면 한반도는 석탄이외에는 화석연료가 없는 지층이라고 한다.
만약 경주 토함산에서 천연가스가 3년 동안이나 뿜었다고 한다면 최소한의 흔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해발 750m의 평범한 화강암석으로 이루어진 경주 토함산은 천연가스가 나올 수 있는 산도 아니고, 더더욱 화산폭발에 의한 휴화산도 아니다. 한반도 어느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토질과 석질의 산인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기록은 분명히 토함산이 화산활동을 했음을 보여준다. 먼저 화산활동에는 바늘 가는데 실 가듯이 지진이 따라 붙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무열왕때 토함산이 불기둥을 뿜기 241년전인 실성왕15년(서기416년)에 "토함산이 무너져 샘물이 솟았고 물기둥의 높이가 3장이나 되었다는 기록과 186넌전인 자비왕 14년(서기471년)에는 신라의 서울 땅이 갈라져 동서남북 넓이가 20장이나 되는 대규모 강진이 있었다는 기록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즉, 토함산은 화산활동을 하기 전에 전주곡으로 지진현상까지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토함산은 어디에 있을까? 정용석씨는 중국 "안휘성 소호시 합비"라는 곳에 함산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토함산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화산으로 용암을 뿜어내는 활화산일 때는 토함산이 되지만, 요즘 말하는 휴화산일때는 토(吐)하지 않기 때문에 함산(含山) 이 바뀌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중국대륙의 지형지리지인 중국지에 이하면 함산은 화산활동을 한적이 있는 휴화산이고, 그 인근의 합비 지역은 화산활동의 여파로 토질이 좋아 작물이 잘 자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