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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보가 표적이다(눅 2;8-13)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8-14)
세월호가 바다에 가라앉은 후 수 백일이 지났습니다. 시신이 하나 둘 인양되었습니다.
인양될 때마다 온 유가족들이 시신을 자기 자녀인가 확인하여야 합니다.
어머니는 접근 금지입니다. 아버지가 시신을 확인하였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고등학교 아이를 물에서 건지고 보니 물고기가 얼굴을 파먹어서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때 우선 표적을 제시하면 그의 자녀로 분류합니다. 시신의 특징을 제시합니다.
예를 들면 “지금 건진 아이는 손가락 하나가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느 부모가 눈물을 터뜨리며 달려 듭니다.
“내 아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버지와 작두로 소여물을 썰다가 손가락을 잘렸습니다.
손가락이 없다면 내 아들이라는 표적입니다.”
증명하는 것이 표적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입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의 표적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바울이 당시 온 아시아를 다니며 복음을 증거하고 한 말이 있습니다.
“유대인을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한다”(고전 1;22)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하늘로 오신 분임의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 12:39-40)
요나가 고래뱃속에 들어가 있다가 3일만에 살아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죽어서 무덤속에 계시다가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표적은 없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표적보다 더 큰 표적은 없습니다.
이것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적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표적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7-18)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부터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이신 표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목자들이 밖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그리고 하늘에서 수많은 천사들이 외쳤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우리에게 표적이라고 말했습니다.
강보가 표적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구유가 표적입니다.
강보 표적
강보가 표적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일가요?
먼저 강보가 무엇인지 알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제사장은 24,000명입니다. 이들은 흰 옷을 입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성전에는 제사장 옷을 만드는 방이 있었습니다. 핀처의 방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제사장 옷을 입다가 해지거나 찢어지거나 못 입게 되면
거룩한 옷이라 버리지 않습니다. 모아 둡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는 절기중에 초막절 절기에만 거리에 가로등을 밝히게 됩니다.
추수후 축제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전기가 없었습니다. 가로등을 높이 만들고 감람유를 붓습니다.
그리고 심지는 제사장들의 헌 옷을 사용합니다. 이것을 강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일년중에 강보가 거리에 나오는 절기는 초막절입니다.
강보가 표적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초막절에 탄생하셨다는 표적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자 말자 강보로 예수님의 알몸을 쌌습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이라는 표적입니다. 제사장은 라틴어로 폰티텍스입니다.
폰티텍스라는 말은 다리라는 말입니다.
다리는 이 쪽과 저 쪽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소통입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틈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 사리에 다리를 놓아 주셨습니다. 다리를 건설하려고 오셨습니다.
이것이 표적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학문이 없는 것이 가장 가난하고, 친구가 없는 것이 가장 외로우며
식견(識見)이 없는 것이 가장 괴롭고, 절조(節操)가 없는 것이 가장 천합니다.
학문이 없는 것은 질병과 같아서, 어려움을 오래 견딜 수가 없고
친구가 없는 것은 우물 속에 떨어짐 같아서, 누가 구해주지 못하며
식견이 없는 것은 맹인과 같아서, 길을 갈 때에 실수가 많고
절조가 없는 것은 창기(唱妓)와 같아서, 아무나 꾈 수가 있습니다.
학문으로 몸을 기름지게 하고, 친구로 의리와 사랑과 감사를 더 하며
식견으로 마음을 탁 트이고, 절조로 분별에 신중히 함이 가장 올바름입니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꾸어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것이 가장 가난하고, 예수님이 없는 것이 가장 외로우며
예수님이 없는 것이 가장 괴롭고, 예수님이 없는 것이 가장 천합니다.
예수님이 없는 것은 질병과 같아서, 어려움을 오래 견딜 수가 없고
예수님이 없는 것은 우물 속에 떨어짐 같아서, 누가 구해주지 못하며
예수님이 없는 것은 맹인과 같아서, 길을 갈 때에 실수가 많고
예수님이 없는 것은 창기(唱妓)와 같아서, 아무나 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몸을 기름지게 하고, 예수님으로 의리와 사랑과 감사를 더 하며
예수님으로 마음을 탁 트이고, 예수님으로 분별에 신중히 함이 가장 올바름입니다
강보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적입니다. 확실한 표적입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입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다리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사랑의 감역되어 살아가는 초등학교 선생님 이야기입니다.
믿음이 독실한 선생님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같이 계셔 주시기에 늘 주님과 함께 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린 학생이 조그만 선물을 가지고 오면 받고 나서 밤에 조용히 편지를 씁니다.
“얘야! 선생님에게 선물을 주어서 고맙다. 그러나 선물을 주지 못 하는 아이도 생각하여야지.
선물을 주는 마음만 받고 선물은 돌려 준다.
다음부터는 절대로 선생님에게 선물을 가지고 오지 말아라.”
그리고 다음 날 조용히 불러서 편지와 선물을 돌려 주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침 학교로 출근하면서 빵과 우유를 사가지고 와서
아침 식사를 못 하고 오는 결식 아이들을 불러 먹이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잘못 나가는 아이들이 있으면 고칠 때까지 기도하여 주고 충고하여 주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아이들을 사랑하였습니다.
해마다 반이 바뀔 때면 학부모들이 교장선생님에게 편지를 보내거나 찾아와서
내 자녀를 그 선생님 밑으로 넣어 달라고 아우성입니다.
작은 예수입니다. 성탄절을 맞아 우리도 강보에 싸여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덮여야 합니다.
강보는 빛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강보하면 떠오르는 것이 빛입니다.
일년 중에 초막절에만 강보에 불을 붙입니다.
강보를 일년동안 보관하는 이유는 초막절 밤에 빛을 내기 위함입니다.
빛은 보이는 것입니다. 밝은 것입니다.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이며 우리에게 빛된 생활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빛을 세상에 전달하는 방법에는 3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1. 거울을 통한 빛
거울은 빛을 받게 되면 그대로 반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빛을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거울과 같은 단계입니다. 가감할 필요없습니다.
거울은 온 대로 쏘아주기만 하면 됩니다. 어차피 우리 인간은 한계 상황적인 존재입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무엇이든지 주지 않으면 받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거울 단계도 참으로 좋은 단계입니다.
2. 프리즘을 통한 빛
거울은 태양빛을 받게 되면 있는 그대로 반사합니다. 그
러나 프리즘은 태양빛을 받게 되면 영롱한 빛을 구분하여 발산합니다.
빛의 굴절이 일어납니다.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남색, 보라색등 7가지 색깔로 구분하여 반사합니다.
화려하고 찬란한 빛을 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대로 반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완전히 내 안에 들어와 녹아져서 더 멋지게 반사합니다. 거울이 아니라 프리즘입니다.
3. 볼록렌즈를 통한 빛
태양광선을 볼록렌즈를 통과시키면 불이 날 정도로 뜨거워 집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받으면 불이 나는 단계입니다. 얼음이 물로, 물이 김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펄펄 끓는 물이 되기도 합니다. 성령의 불덩어리를 만들어 냅니다.
이렇게 우리는 거울의 단계에서, 프리즘의 단계로,
프리즘의 단계에서 볼록렌즈의 단계로 삶의 변화가 일어 납니다.
슈바이쳐는 30세에 신학박사, 철학박사, 오르간 연주가, 목사, 교수가 되었습니다.
이대로도 좋은 세상이었습니다. 최고 인테리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 주님으로부터 3가지 사인이 왔습니다.
“첫째 네가 다른 사람보다 많은 특혜를 받았다. 그 특혜를 나누어 주어야 한다.
둘째 이 땅에는 고통받는 이들이 많은 데 네가 나누어야 한다.
셋째 흑인들이 지금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데 이것은 백인들 책임이다.
백인들이 흑인들을 가르치지 않고 부려만 왔기에 백인들이 그대로 받는 것이다.
심는 대로 거두는 법이다. 네가 백인들 대신 속량해야 한다.“
이런 깊은 감동이었습니다.
슈바이쳐는 30세에 이를 그대로 실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30세에 의과대학에, 부인은 간호대학에 등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졸업 후 아프리카에 들어가서 검은 대륙의 흑인들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한 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빛을 아프리카 검둥이들에게 반사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하는 거울과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강보는 빛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태어나셔서 강보에 싸이셨습니다.
그는 제사장입니다. 그는 다리입니다. 그는 빛입니다.
우리에게 다리가 되라고 하십니다. 빛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강보로 표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중국 선교사로서 평생을 헌신한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 이야기입니다.
그에게 하루는 한 청년이 와서 물었습니다.
“선교사님! 이제는 저는 예수를 믿고 세례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성경을 얼마나 알아야 하나요?
몇 년 정도 예수를 믿어야 그래서 괜찮은 기독교인이 될 수 있을 가요?”
이 때 테일러 선교사가 물었습니다.
“촛불은 언제부터 빛을 발하는 가요?”
“심지에 불을 붙인 순간부터 빛을 내지요.”
이런 대답을 듣고 테일러 선교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몰라도 됩니다. 신앙 년조가 짧아도 괜찮습니다.
촛불이 심지에 불을 붙이는 순간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기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신앙생활이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교회에 발을 들여 놓고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빛은 발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순간부터 훌륭한 성도가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는 태양빛같이 빛을 발하지 못 하여도 작은 불꽃이 되기를 주님은 바라고 계십니다.
구유 표적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우리에게 표적이라고 말했습니다.
강보가 표적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구유가 표적입니다.
그러면 구유가 표적이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마굿간 짐승들이 밥을 먹는 밥통에 태어나셨습니다.
구유가 들려주는 음성이 무엇입니까? 무슨 표적으로 우리에게 주고 있나요?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를 가본 적이 있습니다.
히틀러가 유대인들 600만명을 학살할 때에 가장 많이 학살한 자리입니다.
그 곳에 가면 유대인들의 울분이 들립니다.
“우리는 용서한다. 그러나 잊지 않는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에는 남대문과 동대문은 있어도 북대문과 서대문은 없습니다.
4 대문이 있었는 데 왜 두 대문은 없어지고 두 대문만 남은 것일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일제 시대 일본 장군들이 서울에 입성할 때 동대문과 남대문으로 들어 왔습니다.
서대문과 북대문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사용하지 않은 문이라고 헐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두 대문을 볼 때마다 당당하게 서울을 점령하던 일본 장군들의 함성이 들립니다.
그런데 구유를 보면 무슨 음성이 들릴까요?
구유를 보면 우리는 이런 음성이 들리는 것을 듣게 됩니다.
겸손의 음성이 들립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십니다. 그런데 왕궁에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부잣집에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구유에 누우셨습니다.
이는 겸손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구유는 우리에게 외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겸손하라."
솔로몬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겸손한 자와 함께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어거스틴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큰 덕목은 무엇입니까?”
어거스틴이 대답하였습니다.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겸손이다. 둘째는 겸손이다. 셋째도 겸손이다.”
먹을 것을 주는 것이 구유입니다.
구유는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말이나 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곳입니다.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의식주>
그 중에서 옷이나 집은 없어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먹는 것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구유는 먹을 것을 공급하는 도구입니다. 구유는 오늘도 우리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먹을 것을 주어라. 그래서 사람을 살리라.”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베들레헴이란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요6:47-51)
예수님은 떡이십니다. 우리는 살리는 생명의 떡이십니다.
구유는 오늘도 우리에게 소리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먹을 주어 사람을 살리라.”
몇 일전 뉴스에서 우리는 한 37살 된 아버지가
한 살된 자기 딸의 병을 고치려고 자기의 간을 3분의 1을 짤라
간 이식수술로 자식을 살려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수술을 위험률이 대단히 높아서
수술하다가 아버지가 죽을 확률이 50대 50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사랑하여 간을 짤라 주었습니다.
놀라운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 지고 죽으심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어
죽음에서 영생으로, 저주에서축복으로, 병에서 건강으로 흑암에서 광명으로
문제에서 해결로 운명이 바뀐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때문입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사상가 루소는 예수를 안 믿다가 예수님을 알고 나서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오,
쏘크라테스는 철인이기 때문에 예수님과 쏘크라테스는 비교할 수 없다.”
쏘련의 톨스토이도 예수님을 안 믿다가 믿고나서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나는 35년간 사회혁명가로서 아무 것도 믿지 않은 허무주의였다.
그러나 5년 전부터 예수를 믿기 시작하였는 데 그 뒤 내 생애는 변화되어
절망과 허무는 사라지고 죽음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체험하였다.”
세익스피어도 말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확실히 믿으며
나의 창조주 하나님의 손에 나의 영혼을 맡긴다.”
그렇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표적이 있습니다. 강보가 표적입니다. 구유가 표적입니다.
- 갈보리교회 강문호 목사의 보혈의 강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