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행48- 여수 오동도, 해상공원
2020년 새아침을 맞이하여 2월3일-4일 2틀간 여수로 향했습니다.
여수시(麗水市)는 전라남도에 있으며 면적은 510.08km²이고, 해안선 길이는 879.03km이며,
365개의 부속 섬이 있습니다. 임해산업단지인 여수국가산업단지에 GS칼텍스, LG화학, 롯데
케미칼 등 264개 기업이 입주하여 석유화학공업이 발달하였습니다. 대한민국 비료의 33%,
석유화학(에틸렌)의 47%, 정유의 26%를 생산합니다
진남관은 공사중이라 출입이 안되었습니다.
여수 진남관(麗水 鎭南館)은 조선시대 사백여 년간 수군의 본거지(전라좌수영)로 혹은
구국의 성지로 이용되었고 전승의 사명을 다한 역사적 현장으로 여수를 상징하는 곳입니다.
진남관 정면에 있는 망해루는 일제강점기에 철거된 것을 1991년 4월에 재 복원한 2층
누각입니다. 또한 1599년 선조32년 기해년 12월에 통제사 겸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시언이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린 진해루터에 세운 75칸의 거대한 객사입니다. 그 후 절도사 이도빈이
1664년 갑진년에 개축하고 숙종 42년(1716) 94대 이여옥 수사 때 불의의 화재로 소실되고
숙종 44년(1718) 95대 수사 이재면이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객사는 조선 역대 왕들의 궐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정례참배를 행했으며
또한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는 하례를 드리고 나라에 슬픔이 있을 때는 봉도식을 관민일동이
수행해 왔다. 1910년 고종 4년 경술년 때에는 여수공립보통학교를 시초로 여수중학교와
야간상업중학원 등의 학교로 사용한 바 있습니다. 준국보 제480호로 1959년에는 보물
제324호로 지정됨에 따라 본격적으로 보수에 착수하게 되었으며 1973년 단청을 하고
1978년에 4억 2천만원을 투입하여 진입도로를 개설한 바 있다. 2001년, 국보로 승격 지정했습니다.
명소로 이순신장군이 근무했던 전라좌수영 본영인 진남관(국보304호) 한려해상 국립공원
지정된 오동도도 있습니다.
시내 중심지에 이순신장군과 거북선이 남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순신(李舜臣 1545년4월28일-1598년12월16일)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였으며 한성출신입니다.문반 가문 출신으로 1576년 (선조 9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그 관직이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발포진 수군만호, 조산보 만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정헌대부 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이 이순신광장입니다. 가끔 생각합니다.
임진왜란때 이순신장군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일본어를 사용하고 있을것입니다.
태종실록 30권(태종 15년) 좌대언 탁신이 올린 상소에 "거북선(龜船)의 법은 많은 적과 충돌
하여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가위 결승(決勝)의 좋은 계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견고
하고 교묘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戰勝)의 도구를 갖추게 하소서."라는 구절이 있어 적을 방어
해내기 위한 방호 장비는 갖춘 것 같습니다
당시 일본 수군의 전술은 배에서 직접 사격 공격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기동성이 빠른 소형
배를 타고 적함에 난입하여 근접전으로 배를 뺏거나 횃불을 던져 태우는 것이었기 때문에
옻칠한 나무 지붕에 쇠못을 빼꼭하게 박은 거북선에는 상륙 자체가 불가능하여 통하지
않았고, 거기다가 근접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의 화력으로 적함을 격침시켰기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에는 말 그대로 해상 요새 수준의 위용을 자랑했습니다.
나대용이 거북선의 제작자라 하지만 공식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고 야사에만 등장하는데
야사에 거북선 제작에 관여한 사람 수만 20이 넘었습니다. 배한성의 고전열전에선 나대용
설을 채택했는지 이 사람이랑 동생이 어느날 이순신 앞에 설계도를 가져와서 브리핑합니다.
다른 야사에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자 도인이었던 송구봉이 임란을 예견하고 거북선의
설계도를 만들어두었다가 이순신에게 주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에는 전라 좌수군 방답진에 소속된 방답 귀선, 전라 좌수영 본영에
소속된 영귀선, 통제영 창설 이후 건조된 통제영 귀선의 3척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원균의
칠천량 해전 당시 당시 모두 침몰했습니다.
이순신 광장에 보성 군수 깃발이 그려져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 1척에는 약 120여명이 승선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단, 이는 전시 병력
부족으로 인해 최소한으로 승선했던 숫자로 보입니다. 전후 숙종 대의 기록에 따르면
정상적인 편제라면 약 150여명이 승선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광장 옆에는 중앙선 어시장이 있습니다.
여수중앙선어시장은 전라남도 여수시 중앙동 위치한 어시장으로 생선, 각종 해산물 등을 판매
하고 있으며 이른 새벽 갓 잡아온 활어와 선어들의 경매가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갓 잡은
활어를 그 자리에서 잡아 신선함의 일품을 맛볼 수도 있습니다.
새벽부터 장이 서지만 낮에도 전국각지 관광객들이 와서 싱싱한 생선을 사가지고 갑니다.
가격표를 보니 싼 가격입니다.
우럭이 많습니다.
오동도의 용굴입니다. 비가 오면 오동도에 사는 용이 지하동굴을 이용해서 연등천의 용굴로
와서 빗물을 먹고 간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마을사람들이 연등천 용굴을 막은 후
부터 오동도 바다에는 새벽 2시이 되면 자산공원 등대밑에 바다로 흘러내리는 샘터로 오동도
용굴에서 용이 이동하였다고 합니다. 그때문에 파도가 일고 바닷물이 갈라지는 소리가
밤하늘에 메아리쳐 울렸다고 전해집니다.
오동도는 본래 여수항 동쪽에 있는 섬이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35년 축조한 길이 768m의 방파제로 육지와 이어져 있습니다. 면적은 약 0.12㎢. 행정 주소는 전라남도 여수시 수정동 산1-11.
섬의 이름은 오동나무 에서 유래했는데, 섬의 모양이 오동나무 잎을 닮았고, 섬에 오동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고 합니다. 고려 말 신돈이 오동나무 숲은 왕조에 불길하다고
주장하여 오동나무들을 모두 베어버렸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동백나무에 꽃이 피었습니다. 근데 동백나무가 맞나???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이 갑자기 생각납니다. 가사에 동백섬이 있습니다. 여수시가 관광
도시로 유명해지기 전부터 유명한 관광지로 꼽히고 있었습니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동백꽃
자생지이며 해식애가 발달해 여러 기암절벽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섬 정상에는 1952년에 세운 오동도 등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근방에 전망대를 만들어
일반인에게 개방했는데, 올라가보면 여수항과 남해바다가 꽤 잘 보입니다.
여수 전체시내가 보입니다.
여수 해상 캐이블카를 타고 돌산으로 갔습니다. 아시아에서는 홍콩, 싱가폴, 베트남에 이어
네번째로 바다위를 통과하는 해상케이블카로써, 이제 국내에서도 바다위를 통과하는 해상
케이블카에서 바람을 가르는 짜릿한 스릴감과 함께 아름다운 바다와 하늘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크리스탈 캐빈 15대와 일반 캐빈 35대, 총 50대의 케이블카를 운영중입니다. 특히, 여수해상
케이블카가 자랑하는 크리스탈 캐빈은 바닥을 강화유리로 만들어 짜릿한 스릴감과 함께,
아름다운 바다를 발밑에 두고 즐길 수 있는 특별한 캐빈입니다.
앞에 보이는 것이 오동도입니다. 대학시절 졸업반때 수학여행을 오동도를 갔던 생각이 납니다.
여수시에 있는 위치한 케이블카. 시 당국에서는 대한민국 최초의 해상 케이블카라고 홍보
하고 있으며, 여수 관광 10경에도 선정되었습니다. 개통된 이래로 매년 200만명의 관광객을
불러모으며 말 그대로 대박을 터트리고 있습니다.
케이블카가 설치될 예정이란 소문은 2009년부터 있었습니다. 당초 노선도를 보면 오동도까지
연결할 심산이었던 듯 보이지만 사업성이 떨어진다 판단했는지 현재의 노선으로 축소,
2013년 3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2014년 12월에 개통하였습니다.
길이 450m, 너비 11.7m, 높이 62m인 돌산대교는 1980년 12월 착공이 되어 1984년 12월
준공되었으며, 진도대교에 이어 두 번째입니다.
이 대교는 '큰사랑 큰 그리움이 다리가 되어 놓였네'라는 사람들의 염원을 담아 돌산을
상징하는 마스코트가 되어 있으며 그 옆에는 왜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수중에 성을 쌓은
장군도가 존재합니다
사장교로 밤이면 50가지 색상으로 옷을 갈아입으며 찬란한 위용을 뽐내는 돌산대교는 '돌산'
이라는 섬이 이제 육지가 된 결정체임과 동시에 돌산을 상징하는 요소 중의 하나가 된 연륙교
입니다.
국내 유일의 수중 성이라 불리는 장군도는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1497년 이량이 절도사로
와서 파도가 거세게 치는 이곳에 돌을 쌓아 성곽을 만들어 왜적, 도적들이 감히 이곳을
넘보지 못해 장군도라는 이름이 지어지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돌산과 장군도는 바닷물이 가장
많이 빠지는 영등사리나 백중사리 때 걸어서 들어갈 수 있으며 지금은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사람들이 가공한 흔적이 있는 커다란 돌들이 남아있어 과거 장군성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오동도 뒤의 배들이 지나갑니다.
낭만의 우체통.
15,0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돌산도는 여수시와 아주 가까운 거리이면서도 섬이라는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주민들이 생활과 교육 전반에 반드시 선박을 이용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불편을 해소하기 위하여 돌산도와 육지를 잇는 교량을 건설하기로 하고, 1980년 착공
하여 1984년 12월 15일 돌산대교가 준공되었습니다.
1984년 완공 당시 돌산대교 준공 기념식은 대통령까지 참석하는 큰 행사였다. 돌산대교의
완성으로 돌산공원이 조성되었으며, 돌산 지역의 무슬목해수욕장, 동백골해수욕장과 더불어
조용한 암자였던 향일암이 전국적인 일출 명소와 기도처로 알려지게 되어 여수 관광의
필수 코스가 되었습니다.
도로가 육지와 연결되면서 돌산 지역의 농산물 유통이 활발해졌으며, 돌산갓은 갓김치의
대명사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2000년 10월부터는 8개의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50여 가지의 기본 색상 연출이 가능한 경관 조명 시설을 설치하여 아름다운 장관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수를 대표하는 지역명물 여수돌산갓김치입니다. 아삭하고, 알싸한 갓김치 하나면
밥 한 공기는 뚝딱입니다. 시내에는 갓김치를 파는 상점들이 여러군데 눈에 띕니다.
돌산대교 준공기념탑
여수 타임캡슐이 이곳에 묻혀져 있습니다. 여수 타입캡슐은 여수시, 여천시, 여천군이 여수시
로 통합을 3여 통합을 기념하여 1999년 매설하였습니다.그 당시 각종자료, 통합과정 시민생활
과 사회문화등을 캡슐에 담아 땅속 깊이 매설하여 100년후 후손들에게 100년전 선조들이
살았던 역사 문화를 전하는 생생히 전수하는 문화유산입니다.
옛날 이곳 어부들의 풍랑에서 사고 나는 것을 추모하는 추모기념탑입니다.
그물을 끌어 올리는 어부의 모습이 역동적입니다.
여수에서 제일 맛집인 "꽃돌 게장 1번가"를 찾았습니다.
맛갈스런 반찬과 게장으로 밥 한그릇을 뚝딱 비웠습니다. 마침 송만우한테 전화를 왔는데
송만우 어머님이 여수분이라고 하더군요. 어쩐지 어머님 음심솜씨가 유명한데, 아버님이
평양분이시고 경찰이 아버님이 여수반란사건때 이곳에 오셔서 어머님을 만나셨다는
러브스토리를 들었습니다.
여수 하멜등대는 ‘하멜표류기’로 잘 알려진 네덜란드 하멜 일행의 제주도 표착부터 여수
에서는 3년 6개월 간의 삶과 흔적을 모아 하멜 일행이 고국을 향해 떠난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밤바다 관광의 성지(聖地)' 전남 여수 종화동 종포해양공원 인접 보행로는 밤이면 포차
거리로 변신합니다. 130m 길이 인도에 이동식 포차 18개가 빼곡하게 늘어있습니다. 여수의
명소 '낭만포차' 거리입니다. 2016년 5월 개장한 '낭만포차'는 이곳 젊음이들의 거리입니다.
지난해 여수의 관광객은 1508만명으로 전국 시·군 1위였습니다. 지난해 해양공원의 밤바다
관광객은 680만명이었습니다. 낭만포차가 이들의 발길을 잡아당겼습니다. 한 50대 상인은
"작년 포차당 관광객 3만명씩은 담당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렇다 보니 매출은
상당합니다. 여수시가 카드 결제 기준으로 분석한 결과 포차 한 곳의 연간 최대 매출은
6억원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50대 상인은 "유명세를 치른 포차는 연간 최대 1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고 말합니다.
낭만포차로 주변이 '뜨는 상권'이 되자 길이 1㎞ 왕복 4차로 도로변에 상가가 24곳이나
생겼습니다. 일대는 낭만포차 개장 전만 해도 밤이면 인적이 끊기는 쇠락한 원도심
이었습니다. 낭만포차가 대박을 터뜨리면서 5층 상가 2개 동, 펜션 2곳, 각종 음식점, 카페
건물이 들어섰습니다.
낭만포차에서 바라본 다리
여수의 야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