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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당시 황토현 전투에서 동학 농민군을 지휘한 오세동五歲童
신순철, 이진형이 지은 <실록 동학농민혁명사>에 보면 관군의 자료에서 발췌한 것으로 보이는 맨 아래 함평에서의 자료는 어린아이의 지휘를 받는 동학군의 모습이 생생하게 전해오고 있다. 다음은 동학 농민군이 함평에 있을 때의 광경을 묘사한 것이다. “평민 한명이 14~5세쯤 되는 아이를 (어깨에) 올려놓고 군대 앞에 섰다. ※ 오세동이 백복남(본명: 백인수白仁秀,1888~1955 경남 밀양군 산내면 회곡리(山內面 回谷里)의 가족들 증언으로는 당시 14~5세가 아니라 5세 때 였다고 한다.)
아이가 작은 남색 깃발을 쥐고 마치 지휘하듯 하니, 모든 적(농민군)이 그 뒤를 따랐다. 앞에 피리를 부는 자가 섰고 다음은 인․의(仁․義) 자를 쓴 깃발 한 쌍, 다음은 예․지(禮․智) 자 깃발 한 쌍, 다음은 백기 두 개가 뒤따랐는데, 하나는 보제(菩提) 하나는 안민창덕(安民創德)이라고 썼다.
다음은 황색기에 보제중생(菩提衆生)이라고 썼고 나머지 깃발에는 각각 읍명을 표시했다. 그 다음에는 갑옷 입고 말을 타고 칼춤을 추는 자가 따르고 그 뒤를 칼을 잡고 걷는자 4~5쌍, 큰 나팔을 불고 붉은 단령을 입은 자 두명, 피리를 부는 자 두명이 뒤따랐다. 다음에 한 사람이 절풍모를 쓰고 우산을 들고 나귀를 타고 가는데 이 사람 주위에 같은 모습을 한 여섯명이 말을 타고 뒤따랐다. 그 다음에는 만 여명의 총 가진 자가 두 줄로 가는데 제각기 다섯가지 색깔의 두건을 둘렀다. 총 가진 자의 뒤를 죽창을 쥔 자가 따랐다. … 이들은 모두 (맨 앞에 선) 아이의 남색 깃발이 가리키는대로 하였다.<출처: 실록 동학농민혁명사>
맨 선두에서 동학군을 지휘하던 오세동五歲童이에 대해서 문공신(본명: 문남용文湳瀧,1878 ~ 1954 전북 태인 강삼리(江三里)에서 출생)씨의 증언을 보면, 정읍 대흥리에 사는 열다섯 살 차경석(車京石,1880 ~ 1936 후일 600만 명의 교도들을 이끌었던 보천교普天敎 창시자)과 각기 접주인 중형(仲兄) 문선명(文善明)과 차경석의 아버지 차치구(동학군 내 지도자급(장령將領:장군에 해당함)를 따라 이 전투에 참가하였다.
조선총독부와 미국 국무성의 기록을 보면, 보천교의 수가 600만이라 했다. 이 문서가 지금도 남아 있다. 1920년~ 1940년까지의 그때 당시 조선일보 기사를 보면 기독교의 항일기사 건수 총계가 23건, 천주교 2건, 불교 18건, 유교 15건, 천도교 32건, 보천교 147건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면, 보천교가 가장 활발하게 항일운동을 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근대사가 기독교 중심으로 정리되면서 우리 한민족의 본래 종교인 보천교는 외면된 것이다. 한국인조차도 이러한 진실을 모르고 있다.
동학군의 장령(將領)이었던 차치구(車致九)의 아들 - 보천교 600만의 교주차경석(車京石)과 차경석(車京石)의 아들 차일혁(車一赫)총경.
차치구(車致九,1851 ~ 1894 본명은 중필(重弼), 정읍의 접주로 1, 2차 봉기에 모두 가담했으며 정읍·흥덕·고창지방의 토호로 악명이 높은 강영중과 현감벼슬을 샀던 은수룡 등은 이른바 창의문을 돌리고 농민군 탄압에 나섰는데, 특히 그의 활동에 대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지금 도둑의 형세는 날이 갈수록 뻗어가고 심지어 수령을 죽이기도 하며 군·현을 함락하고 성지(城地)를 점거하기도 한다. 하물며 동학의 도둑 차치구는 관아에 들어가 행패를 부리고 삼강오륜을 깡그리 저버리고 있으니 일이 매우 절박하다”고「거의록(擧義錄)」에 기록하고 있다.
문공신씨와 오세동五歲童 의 만남
문공신이 황토현 전투에 참여한 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어디선가“생불(生佛)이 들어온다!”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거늘 공신이 보니 키가 큰 장정 하나가 어린아이를 업고 들어와 자리에 내려놓더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 때 여기저기서 수군거리기를“신인(神人)이라, 오세동(五歲童)이라.”하는데 공신이 그 체구를 보니 일곱 살 정도이더라.
얼마 후 오세동이 자신을 업고 온 장정에게 묻기를“진중에 총 든 군사가 몇이냐?” 하니 그 사람이 대장에게 물어 오세동에게 그대로 전하거늘 오세동이 좌중을 향해 호령하기를“총 든 군사는 모두 모이라!”하고“지필을 들이라.” 하더니 문공신을 가리켜 먹을 갈게 하였다. 이에 오세동이 총 든 군사의 숫자대로 손바닥만 한 종이에‘푸를 청(靑)’자 비슷한 글을 써서 군사들에게 각기 나누어 주며 말하기를“이것을 잃어버리면 너는 죽는다.”하더니 얼마 후 다시 말하기를“하나는 할 수 없이 죽겠구나.” 하고,
이어 오세동이 이것저것을 일일이 지시하니 동학군이 그 명에 따라 산을 둘러가며 잔솔가지에 이불보와 치마를 뜯어 중간 중간에 쳐 놓고 밤새 간간이 관군을 향해 총을 쏘며 신경전을 벌이매 관군이 이불보를 동학군으로 오인하여 총을 쏘아대거늘 그 틈에 동학군이 관군 진영을 기습하여 동이 틀 무렵에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였던 홍계훈(洪啓薰, 1842년 ~ 1895)이 동학군의 귀화를 회유하도록 각 읍에 보낸 공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부적을 붙이고 있으면 칼날이 들어오지 못한다고도 하였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아이를 신인(神人)이라 부르며 모든 폐단을 제거해 준다고 꾸며서 악독한 무리가 함부로 날뛰게 하여 시끄럽게 만들었다.”
동학혁명 당시 가장 신비한 전설로 내려오던 오세동이에 대한 이야기는 천도교 교령사에도 일부 나오지만 오세동의 신원이라든지 구체적인 내용은 모두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오세동을 찾아나선 문공신의 구도 열정
문공신이 갑오년에 중형을 좇아 황토현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아직 때가 아니라는 오세동의 암시에 동학군에서 이탈하여 사지(死地)를 벗어나더니‘도를 닦으리라.’는 열정에 사로잡혀 하루도 그 소년을 잊지 못하고 만나고 싶어 하나 혼란한 시국에 이름도 고향도 몰라 찾지를 못하니라.
그 후 백방으로 소년의 행방을 찾다가 무술(戊戌,1898)년에 이르러 우연히 소식을 접하고 소년의 집이 있는 밀양군 산내면 회곡리(山內面 回谷里)를 찾아가니 그곳은 건지봉과 곤지봉에 둘러싸인 시골 마을이거늘 오세동은 없고 홀어머니만이 집을 지키고 있더라.
공신이 오세동의 행방을 물으매 재인(才人)인 그 어머니가 대답하기를“안 그래도 우리 아들이 아침에 나가면서 오늘 귀한 손님이 오실 테니 대접 잘해서 보내라고 합디다.”하거늘 공신이 다시“그럼 아드님은 언제나 돌아옵니까?”하고 물으니 모친이 대답하기를“나가면 한 달이 되어서도 돌아오고 두 달이 되어서도 들어오니 언제 들어올지 모릅니다.”하니라. 이에 공신이‘날 안 만나 주려고 자리를 피했구나.’하고 허탈한 마음에 떠나려 하다가 미련이 생겨 아들의 방을 보여 달라 하여 들어가 보니 방 안에 네 기둥을 세우고 종이로 삼면을 발라 한쪽으로만 출입할 수 있도록 하여, 혼자 눕기에 딱 알맞을 정도로 따로 방을 만들어 놓았더라.<道典1:71>
오세동이 백복남(본명:백인수白仁秀 戊子,1888 ~ 1955년 9월 10일 68세로 작고)씨의 부인 강야모(1915 ~ 2006)와 아들 백복식(1945~ ) 증언.
백복남은 무자(戊子,1888)생으로 손이 귀한 집안의 3대독자로 태어나. 인수는 영이 그지없이 밝아 세 살에 이르러서는 만물의 속을 환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영이 맑고 그 언어동지(言語動止)가 남달라 인근 동리에 신동으로 불렸다. 혼자서 걸을 수 있게 된 세 살 이후로는 틈만 나면 밖으로 나가 사라지기 일쑤여서. 그 때마다 그 부모가 크게 놀라 겨우 찾아서 데려다 놓으면“꼭 찾을 분이 있어요.” 하며 몰래 집을 나가는데 아버지가 행여 찾아낼까 싶어 가명까지 쓰며 숨어 다니니 나중에는 부모도 지쳐서 찾기를 포기하였다 한다.
오세동이 백복남씨의 두번째 부인 강야모씨의 증언
이 세상이 천 년, 만 년이나 살 것 같아도 눈 깜짝할 새여, 참말로. 그리고 아무리 세상이 거시기 한다 해도 이북서 넘어오고.
넘어온다는 게 쳐들어온다는 얘기인가요?
이북서 넘어와, 이런 소리는 안 할라고 했는디.
아까 백복남 어르신이 오신 것도 이런 이야기 해 주라고 하신 거예요.
아 세상이 막차면 넘어와야지. 참말로 이 소리 누설하면 못써, 모든 것이 다 천기누설여.
어디로 온대요?
모르지.
백복남 어르신이 하신 말씀만 전해 주시면 됩니다.
우리집 양반이 그랬어. 세상이 막 차면 꼭 넘어온다고. 그런디 시방 왔다갔다하고, 길은 다 터지고, 철길도 다 시방 잇고 안 했어? 그러는디 더 물어볼 것이 뭐 있어, 시방? 전쟁 나도 뭐 그 오래 가도 안 해요. 전쟁 나도 인제 시절이 막 차면 전부 병病이 더 세져. 그런데 시방 살아서 다니는 사람들도 병 안든 사람이 어딨어? 이 채소 같은 것도 약을 해야 먹지, 약 안 하면 어떻게 먹어요?
그러니까 전쟁 나면, 금방 병겁이 돈다는 얘기죠?
눈 깜짝 새 된다고 그랬어, 오래 길게 가지도 않고.
눈 깜짝할 새에?
아무리 믿는 사람도 방에 가만히 들어앉았어야지, 나가면 죽는다고 했어. 천지가 개벽되면 아무리 믿는 사람도 정신이 혼몽하다고 그랬어. 다 시상 돌아가는 거 보면 알지. 말하라고 할 것이 뭐 있어?
세상 돌아가는 것을 뉴스 일부에 국한된 것만 보는 것이지, 그 내막이 어떻게 되는지, 그런 것은 잘 모르죠
모든 것이 다 천기누설여. 천지누설인게, 말할 것도 없고 말 것도 없고. 세상사 돌아가는 거 보면 다 알아, 아무리 멍청한 사람도 돌아가는 거 보면 알지 뭐. 시방 젊은 사람들이 더 잘 알아.
아니, 어르신은 여기서 혼자 이렇게 떨어져서 사세요?
난 하느님만 믿지, 인간은 아무도 안 믿어.
오늘 만나서 말씀을 들어보니, 여기 앉아서 세상일은 혼자 다 아시는데요.
아이고 모른다는 사람이 더 잘 알아 암말도 말아.(출처: 월간개벽 2004년 2월호)
이왕선(李旺善)(1934년, 갑술(甲戌)생, 증언 당시 71세)
전북 진안의 마이산(馬耳山) 탑사를 쌓으신 이갑룡(李甲龍, 1860~1957) 처사의 손자
그러니까 조부님이신 이갑룡 처사께서 전쟁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되는지, 그걸 그대로 한번….
그걸 그대로 얘기하면 남북이 뒤죽박죽이 되고 이긴 사람도 진 사람도 없다고 하더라고.
그것은 언제쯤 말씀을 하신 거여요?
6.25사변 난 뒤에..
앞으로 또 그렇게 된다고?
말하자면 3차 대전이 온다는 식으로 얘기를 하더라고.
道의 原典,道典5편406장: “장차 난리가 난다. 우리나라에서 난리가 나간다.” 하시고 이어 말씀하시기를 “대란지하(大亂之下)에 대병(大病)이 오느니라. 아동방(我東方) 삼일 전쟁은 있어도 동적강(銅赤江)은 못 넘으리라. 서울은 사문방(死門方)이요, 충청도는 생문방(生門方)이요, 전라도는 둔문방(遁門方)이니 태전으로 내려서야 살리라. ○○은 불바다요 무인지경(無人之境)이 되리라.” 하시니라.
道의 原典,道典5편415장:난의 시작은 삼팔선에 있으나 큰 전쟁은 중국에서 일어나리니 중국은 세계의 오고 가는 발길에 채여 녹으리라.” 하시고 “장차 병란(兵亂)과 병란(病亂)이 동시에 터지느니라. 전쟁이 일어나면서 바로 병이 온다. 전쟁은 병이라야 막아 내느니라. 그 때는 모든 것이....
道의 原典,道典7편 41장 “앞으로 세상이 병란(病亂)으로 한번 뒤집어지느니라.” 하시고 “장차 이름 모를 온갖 병이 다 들어오는데, 병겁(病劫)이 돌기 전에 단독(丹毒)과 시두(時痘)가 먼저 들어오느니라. 시두의 때를 당하면 태을주를 읽어야 살 수 있느니라.” 조선을 49일 동안 쓸고 외국으로 건너가서 전 세계를 3년 동안 쓸어버릴 것이니라. 군창에서 병이 나면 세상이 다 된 줄 알아라. 나주에서 병이 돌면 밥 먹을 틈이 있겠느냐.” 하시고.....
道의 原典,道典7편47장: 앞으로 시두가 없다가 때가 되면 대발할 참이니 만일 시두가 대발하거든 병겁이 날 줄 알아라.”
道의 原典,道典7편40장: 한 성도가 여쭈기를 “괴병이 온 세계를 휩쓸게 되면 어느 나라에서 먼저 발생하게 됩니까?” 하니 말씀하시기를 “처음 발병하는 곳은 조선이니라. 이는 병겁에서 살리는 구원의 도(道)가 조선에 있기 때문이니라.” 하시니라.
첫댓글 민비라고 비하해도 손색없는 명성왕후. 동학혁명 실패 후 일제의 침탈이 심해지자 또 농민들이 봉기하지만 오히려 관군들이 일제와 합세해서 의병들을 토벌했다고 합니다. 헌종말에 권문세족 김씨가 다음 왕위 계승자인 이하전을 반역죄로 죽이는데 만약 이분이 왕위를 계승했다면 세도정치를 청산하고 국력을 더 키웠을지도 모르죠. 그러면 식민지신세를 면했을지도.
네, 관군들이 일반 백성들에게는 일제와 합세한 적이나 다름없었지요. 이하전이 왕이 되었다면 그럴수도 있었겠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