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10월에 극동공화국 내의 볼셰비키당 최고기관인 원동부(遠東部 ; 다르뷰로)에 상해파의 박애(박마다베이)·계봉우(桂奉瑀)·김진(金震)·장도정(張道政)·박창은(朴昌殷 ; 박이완)을 간부로 하는 5두제(五頭制) ‘한인부’가 조직되었다. 「고혁군」에 보면 한인부는 “고려군중에게 공산주의를 선전하여 장차 무산혁명을 인도하려는 기관”이라고 규정했다.
극동공화국이 수립되기 전에는 원동부가 존재하지 않았고 시베리아혁 명위원회가 이 지역의 볼셰비키혁명을 지도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1921년 1월 보리스·스미야스키를 우두머리로 하여 이르쿠츠크에 코민테른 동양비서부가 설치되었다. 이르쿠츠크는 극동공화국의 영외(領外)이다. 동양비서부는 볼셰비키혁명의 동점에 따라 시베리아의 이민족문제를 관할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여기에 부설된 것이 이르쿠츠크파의 ‘고려부(高麗部)’이다. 이리하여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무력을 놓고 상해파의 한 인부와 이르쿠츠크파의 고려부 간에 군권투쟁이 벌어졌다.
1921년 1월 상해파의 이용·장기영(張基永)·채영(蔡英) 등은 한인부와 합작하여 ‘한인군사위원회(韓人軍事委員會)’를 조직하여 이르쿠츠크파의 무력인 자유대대와 대립불화관계에 들어갔다. 그 원인은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무력을 이르쿠츠크파의 자유대대가 관할하려는 것을 상해파의 한인군사위원회가 자기네에게 관할권이 있다고 주장한 데 있다.
이용은 이준(李儁)열사의 장자(長子)로서 이동휘 일당의 상해파에 속 한다. 「고혁군」에 보면 “이용은 임시정부에서 동로(東路 ; 간도)사령관, 채영은 북로(노령)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특히 이용은 “임시정부가 발행한 공채증권(公債證券)을 휴대하고 간도에 와서 내외에서 금전을 모집하여 간도국민회와 연락하여 명월구(明月溝)에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사관을 양성하던 중 훈춘사건(琿春事件)으로 일본출병과 동시에 노령으로 들어왔다”고 하였다.
일제기관에 횡취(橫取)된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 비서실장 김립, 의정원(議政院) 의원 계봉우 3인이 간도대한국민회장(間島大韓國民會長) 구춘선(具春先)에게 보낸 1920년 5월 11일자 서한에 보면 이용은 1920년 5월 임시정부로부터 동로군사령관에 임명되어 10만 원 상당의 임시정부가 발행한 공채를 구춘선에게 수교(手交)하고 4만 원 한도의 현금을 융통받아 명월구에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사관양성에 힘쓰다가 일제의 간도출병으로 노령으로 넘어간 것이 분명하다(조선총독부 경무국, 「露國過激派ト間島不逞鮮人團トノ關係」).
이용은 스스로 한인군사위원장이 되고 채영·한운용(韓雲用)·장기영 박원섭(朴元燮)·박영(朴英)·주학섭(朱學燮)·박애·장도정·김진을 위원으로 하여 “대한민국 3년 1월 ○일 한인군사위원회 위원장 이용”의 경고문을 발표했다.「고혁군」에 보면 경고문의 제1항에서 “갑(甲), 본 ○○세력범위 내에서는 한인군대의 편성을 무제한 승인하고 무기·피복·식량은 본 ○○의 능력이 되는 데까지 공급하며, 을(乙), 본 ○○세력범위 내에서는 한인군사위원회 이외에는 여하한 단체를 막론하고 군권을 양여하지 아니함”이라고 했고 제2항에서는 사관학교 설립과 군대편성 및 운영에 관한 사항이 들어 있다.
한인부의 박애는 임시정부의 극동공화국 주재영사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극동공화국 총리 크라스노·슈티코프와는 구면의 동지이기 때문에 자파의 한인군사위원회와 극동공화국정부 간에 모종의 군사협약을 성립시켰는지도 모른다. 「고혁군」문서는 이용의 경고문을 “기괴한 음모” 라고 일축하고 있다.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무력이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어느 편을 지지하는가에 따라서 군권이 좌우되기 마련이었는데 니항군대의 본대를 이끌고 자유시에 도착한 박이리아는 자유대대측의 만류를 뿌리치고 치따로 박애 등의 한인부를 찾아가 니항군대가 자유대대에 편입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그간의 사정을 보고했다(「고혁군」).
박애 등의 한인부 당국은 대한국민의회 및 자유대대 측과는 협의도 없이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하여 박창은(한인부 5두 중의 1인)을 총사령 관, 그레고리예프(러시아인)를 참모부장으로 지정하여 자유시로 파송(派送)하는 동시에 니항군대의 명칭을 ‘사하린의용대’로 개칭하면서 자유시에 집결한 이 밖의 한인무력과 종래의 자유대대까지도 사하린의용대의 관할을 받게 하는 극동공화국 군부의 명령을 대동(帶同)케 했다.
1921년 2월 중순에 자유시에 도착한 박창은 일행은 이용·장기영·채영·김민선(金敏先)·박이리아 등과 합세하여 총사령관으로서의 지휘권을 행사하려 했으나 자유대대측에서 불복하므로 한인부와 극동공화국 군부에 총사령관사임을 제출하였다. 이를 접수한 한인부는 다시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하여 이번에는 그레고리예프를 연대장, 박이리아를 군정위원장으로 지정했다. 두 사람은 즉시 군대관리에 착수하고 자유대대에 편입된 종래의 니항군대와 다반군대를 마사노프(자유시 북방 70露里)로 이주시키고 간도군대에 대해서도 이곳으로 이주할 것을 회유권고 했으나 자유시보다 불편한 곳이므로 불응했다. 당시 자유대대장 오하묵은 자유시 군대사정 보고차 치따에 체재중이었으므로 자유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그레고리예프와 박이리아는 간도군대에 대한 3일 간의 식료를 단절(斷絕)하면서 군대이주를 강요하므로 부득이 마사노프로 이주했으나 자유대대는 사령관(오하묵)의 부재를 이유로 불응하였다. 그러나 임시대대장 황하일을 비롯한 그 밖의 장교들을 포착(捕捉)하고 기관포와 대대문서를 압수하는 등의 횡포에 못이겨 크라스노야르(자유시에서 20露里)로 이주했다. 이 조치는 자유시에 군대를 그대로 두고서는 지휘권을 행사하기가 어렵다는 데 그 이유가 있었다. 자유대대는 이주하는 즉시 니항군대와 다반군대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였다. 그리고 지방수비대에 강제로 인도되었다. 그러나 지방수비대에서는 자유대대의 역사를 알고 있었고 오하묵을 사령관으로 하는 부대이기 때문에 무장을 재정제(再整制)하여 체리니곱까(자유시에서 7露里)로 이주시키고 직접 관리했다(「고혁군」).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무력에 대한 군권이 이처럼 일단 상해파의 승리 로 돌아갔으나 사태는 다시 역전되었다. 1921년 3월 8일 치따에 도착한 김하석(金夏錫)·최고려 등의 이르쿠츠크파는 상해파의 박애를 만나 자유시에서 발생한 군대응급문제를 가지고 극동공화국 군부에 출두하여 시비를 가릴 것을 요구했다. 이에 응한 박애가 김하석·최고려와 더불어 극동공화국 군부에 출두하였다. 이에 극동공화국 군무총장은 “의회(議會)정부 중앙명령에 대한 원조상(태닌정권의 명령에 의한 처리라는 뜻:筆者) 제반대책과 지휘는 국제공산당에서 직접 관계하게 되어 국제공산당 지부로 설립된 동양비서부가 이르쿠츠크에 있는 바 고려군대에 대해서도 그 비서부에서 인도하게 되었으므로 본 군부에서는 처리인도할 권리가 없다”고 언명하므로 실망한 박애는 이르쿠츠크에 가지도 않았고 김하석과 최고려가 이르쿠츠크의 동양비서부에 출두하여 임시 고려군정의회(高麗軍政議會)를 조직하게 되니 총사령관은 러시아인 빨치산 영웅 갈란다라시윌린, 부사령관은 오하묵, 군정위원은 김하석·채성룡(蔡成龍)이었다(「고혁군」). 이로서 모든 것은 이르쿠츠크집단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 무렵 이용·박이리아·장도정·계봉우·김진 등은 사하린의용대가 주둔하는 마사노프에 와서 한인군사위원회를 조직했다. 이것은 1921년 1월에 이용을 위원장으로 조직했던 한인군사위원회의 확대강화였다. 이 위원회는 명예회원으로 레닌·트로츠키·슈티코프·이동휘 등을 추대하고 위원은 이용·채영·한운용·장기영·박이리아 등 15인이다. 이용 등은 이 위원회의 합법성을 주장하면서 극동공화국정부와 한인무력의 군권에 대한 교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극동공화국정부는 한인무력에 대한 관할권이 이미 자기네 수중에 있지 않음을 명백히 하고 이용과의 교섭에 응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박애·계봉우·김진·이용 등은 외교의 문이 폐쇄되었음을 깨닫고 이제부터는 실력으로 대항할 수 밖에 없다는 마지막 수단에 착수하게 되었다. 곧 박이리아로 하여금 어떤 경우에 있어서든지 군대를 내놓지 말게 하며 최악의 경우에 오하묵계의 자유대대는 별문제라 하더라도 그 밖의 모든 군대는 끝까지 상해파의 영향 하에 두고자 하였다. 그렇게 하면 국면은 다시 역전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이용 등의 한인군사위원회는 극동공화국정부에 대하여 확실히 불손했다. 극동공화국 군무총장은 마침내 이들을 체포하여 이르쿠츠크로 압송하였다. 이용은 탈출하여 한인농가에 피신했다가 그해 7월 하순 연해주로 도망했다.
1921년 5월 23일 갈란다라시윌린 일행이 치따를 출발하여 6월 6일 자유시에 도착해보니 구(舊) 니항군대·총군부군대·독립단군대·국민군대·다반군대 및 이만군대 등 1천 4백여 명이 사하린군대라는 이름으로 1개 연대를 편성하고 있으면서 아직도 고려군정의회의 산하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이들 부대들은 마사노프와 그 밖의 러시아인 부락에 주둔하고 있었고 자유대대와 홍범도군대는 자유시에 돌아와 있었다.
1921년 6월 7일 갈란다라시윌린은 자유시의 전부대를 소집하여 오늘부터 자기가 총사령관임을 선포하고 고려군정의회의 사명을 역설했다. 그는 다음 날(6월8일) 박이리아에게 군대를 인솔하고 자유시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박이리아는 여러 가지 의혹이 풀리지 않아서 군대전원을 인솔하고 출동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으니 총사령관이 마사노프까지 와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회보했다. 박이리아는 자기가 갈란다라시윌린의 부하가 아님을 자인하고 있었다.
6월 9일 안무군대는 마사노프를 탈출하여 자유시로 돌아왔다. 이것은 박이리아에게 중대한 타격이었다. 사하린의용대는 점점 불안해졌다. 이미 홍범도군대가 떨어져 나갔고 이번에는 안무군대도 떠나가 버리니 차츰 고군(孤軍)이 되었다. 게다가 총군부군대는 매일같이 이탈자가 발생하여 1921년 6월 10일 당시 자유시에 돌아간 자가 70여 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박이리아는 고려군정의회에 대한 반항을 조금도 늦추지 않고 갈란다라시윌린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다.
1921년 6월 27일 하오 11시 사하린군대의 연대장 그레고리예프가 자유시에 출두하여 자기로서는 더 이상 사히린의용대를 지휘할 수 없으니 연대장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사표를 제출했다. 갈란다라시윌린은 마침내 사하린의용대의 무장해제를 단행하기로 최후결정을 내렸다.
다음 날(6월 28일) 상오 1시경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와 교섭하여 동 연대의 4개 중대병력을 동원하여 수라세프카의 동정을 감시케 했는데 그곳으로부터 수십 발의 총성이 들려왔다. 총사령관 일행이 편마(鞭馬)로 향하는 도중에 특립부원을 만나 상황을 들으니 제29연대에서 파견된 군대가 사하린의용대의 보초선에 접근하자 보초병들이 사격을 개시하므로 뒷산으로 퇴각했다는 것이었다.
이때의 형편은 고려군정의회로부터 교섭을 받은 제29연대가 제12여단 을 경유하여 제2군단 본부에 사하린의용대의 무장해제에 관한 건을 보고하고 회보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으며 또한 증원을 요청한 장갑부대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같은 날(6월 28일) 상오 5시경부터 하오 4시에 이르는 동안 제29연대장은 사하린의용대 본부에 들어가서 사태가 무장해제에 이르지 않도록 복종할 것을 종용했으나 끝끝내 불응하므로 마침내 공격명령이 내려졌다. 승패는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러시아적군의 공격 앞에서 사하린의용대의 응전은 문제도 아니었다. 혁명을 하겠다고 총을 잡았던 한인무장대가 러시아적군의 총탄에 무수히 쓰러지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러시아적군에 가담한 군대는 오하묵·최고려의 자유대대 병력이었다. 이것이 수리세프카의 참변 즉 세칭 자유시사변이다.
자유시사변은 사하린의용군이 러시아적군의 포위와 집중총격에 쓰러진 참변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노령파 대 상해파 간의 대립투쟁의 산물이었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동족파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가를 목격 하게 된다. 이 사변으로 방편상 공산당의 간판을 걸고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이동휘계는 몰락하게 되었다.
1921년 6월 28일 수라세프카에서 교전 끝에 무장해제를 당한 사하린의용대대는 전사자·도망자를 제외한 864명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 교전 당시의 병력은 1천 명 가령이었다(오광선). 1921년 9월 간도계와 무장단체와 민족혁명군부의 정치단체들은 자유시사변에 대한 성토문을 발표했는데 그 일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기원 4254년 6월 28일 노령 흑룡주 자유시에서 대한의용군이 러시아군과 싸운 결과 사망 272명, 익사자 31명, 행방불명 250여 명, 포로 917명의 대참변을 당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