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스친 생각
임병식 rbs1144@daum.net
고향마을을 들렀다가 이내 되돌아 나오면서 길갓집 녹슨 대문 집과 마주쳤다. 갈 때와는 달리 나올 때는 해안도로로 빠져나왔더니 어느 지점에 그게 눈에 들어왔다. ‘저게 친구 집이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뇌리에서는 느닷없이 어떤 가요 한 구절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사의 찬미 중의 마지막 가사인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라는 것이었다.
왜 별안간 그게 떠오른 것일까. 맥락 없어 보이는 그 가사가 조금은 황당하고 의아하기만 했다. 그것을 잠시 화두삼자니 한동안 머릿속에서는 오만가지 생각이 맴을 돌았다. 그러다 마지막 내려진 것은 ‘자살’이라는 한 단어였다. 여름철 어느 날 윤심덕은 애인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친구가 그의 전철을 밟았다는 생각이 들어 서인지 몰랐다.
하지만 두 사람의 죽음에는 차이가 있다. 전자가 유명 인사였다면 후자는 그렇지 않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인 것이다. 죽음의 원인도 동일하지 않다. 윤심덕은 유부남을 사랑한 가운데 이루지 못할 꿈을 생각하고 결행한 것이지만 친구의 죽음은 원인과 이유가 불투명하다. 어느 여인 때문일 수도 있고 잘 풀리지 않는 생업 때문일 수도 있다. 그것을 밝히지 않고 입다 물고 죽고 말았으니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유추는 해 볼 수는 있지 않는가 한다.
생업은 그의 뛰어난 손재주에 비하여 신통치가 않았다. 조그마한 고을의 농촌에 자리를 잡다보니 일감이 충분히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한 번씩 방문을 할 때 보아도 그는 공장에서 일을 하기 보다는 텃밭을 돌보는 때가 많았다. 그리고 여자문제와 관련해서는 내게 좀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절대로 발설하지 말 것을 부탁하면서 들려준 이야기였다.
그는 한 여자를 사귀게 되었는데, 정리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떼어 내려 해도 도꼬마리처럼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난ㅊ해 했다. 사귄지 몇 년이 됐는데 그때까지도 부인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으나 언제 들통이 날지 몰라 전전긍긍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생업문제 이외에도 결국 불륜이 아내에게 꼬리가 잡혀서 심한 부부싸움 끝에 그리됐을 수도 있다.
자살 생각을 하면 또 한사람이 생각난다. 그는 중학교 동창생인데 고등학교 1학년 때 목숨을 끊었다. 그는 샘이 많고 승부욕이 강한 친구였다. 그는 무슨 이유인지 죽어서 내가 다니는 학교길 야산에 묻혔다. 하필 눈을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이어서 볼 때마다 마음이 울적했다.
그런데 최근에 그 친구와 관련해서 어떤 비화를 듣게 되었다. 군에서 별을 달지 못하고 전역한 친구가 서울에서 중견 기업체의 비상기획관을 하다가 처가 몸이 아파 남녘으로 이사 와서 사는데 그와 연락이 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죽은 친구의 말이 나왔다. 이런 일이 있었다고 들려주는데 새삼스레 그의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일면이 들어났다.
“복이가 하루는 나에게 결투를 신청하드라고.”
“왜, 무슨 이유로?”
“그 얜 본래 자존심이 샌 얘 아닌가. 나를 강자로 본거지.”
결투를 받아들여 선배가 심판을 보는 가운데 겨뤘다는 것이다. 조건은 누구라도 먼저 코피가 나거나 다치면 즉시 중단하는 것이었단다. 현장에 그는 큼지막한 반지를 끼고 나왔더란다. 한눈에도 타격을 입히겠다는 모습으로 보였단다.
먼저 이 친구가 다리를 차여 무릎을 꿇었다. 그 다음에는 복이가 안면을 강타당해 코피를 쏟았다. 겨루기는 당초 약속대로 무승부로 끝났다. 실로 60년 만에 들어보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승부옥이 강한 친구가 알려지지 않는 이유로 음독하여 죽은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생활력이 강하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여 승부욕이 강한 두 사람이 모두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려움이 있으면 끝까지 해결책을 찾아보고 무슨 일에 실패를 했더라도 재도전을 해보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 그들이 죽음을 택할 때만 해도 자유로운 세상에서 무언가를 얼마든지 해 볼 수 있었던 시절이 아니었던가.
윤심덕이 죽을 때인 1926년만 해도 나라를 온통 일제에 빼앗겨 젊은이들이 희망을 잃어버린 암흑기였다. 그래서 허무주위와 패배주위에 휩싸였다. 그런데 그들 앞에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었다. 애인 김우진에게는 본처가 있었고, 둘이 맺어질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래서 그들이 작가한 것으로 알려진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건 허무’를 읊조리며 투신하여 죽어갔다. 더 살아보았자 암울한 세상에서 더 찾을 것이 없다고 자기 합리화를 해버린 것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무책임하게 죽어간 것도 그렇지만 두 친구의 자살은 더욱 동의하기 어렵다. 남겨진 가족, 부모형제들의 황망함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자연사나 사고사가 아니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조물주의 섭리에도 얼마나 벗어난 잘못된 것인가. 생명은 거저 태어나지 않는다. 수억 개의 유전자가 만나 착상이 되어 생명이 되는 확률은 수억 분의 일이라는 사실말도고 생명이 조물주의 관여 없이도 태어날 수 없는 것은 여러 증후들로 증명이 된다.
질병의 늪을 빠져나와 온전한 사람이 되기까지 과정은 얼마나 지난한 것인가. 그런데 스스로 자기 목숨을 함부로 끊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그들의 경솔한 결정을 나무라지 않을 수 없다.
농기계를 수리하는 업을 가졌던 친구는 기계라면 못 다룬 것이 없었다. 제작 솜씨가 뛰어나 무엇이든지 한번 보면 그대로 재현해 냈다. 나는 그 친구가 10대 때에 아이스케익 냉동장치를 만들어 영업한 것을 본적이 있다. 여름철 토요일 기차를 타고 내리면 역전에서 장사를 하던 그는 나를 불러 세워놓고 먹으라며 막대꽂이 아이스케익을 건네주곤 했다.
그리고 농기구를 수리할 때도 고장이 나 맡겨놓으면 부속품을 싸다 끼워서 새것처럼 고쳐놓곤 했다. 그렇게 솜씨가 탁월했다. 그런데 목숨을 끊었으니 얼마나 안됐는가. 그러기는 복이 친구도 그만한 오기와 지기 싫어하는 자존심이면 얼마든지 고민을 해결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욱’한 선정으로 인해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두고두고 안타깝다.
나는 돌아오는 차안에서 친구의 녹슨 대문을 보는 순간 ‘허무’를 떠올리다가 나중에는 살아온 족적을 더듬어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온전한 족적으로 자리매김이 되지 않았다. 중간에 끊겨버린 반 토막이 난 허드레 나뭇가지였다.
그것은 일을 시작 한 후 결실을 맺지 못하고 중도에서 포기를 하고만 타다 남은 장작 .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자살은 어떤 이유를 대던 간에 합리화 할 수 없는 잘못된 행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삶이 안타까워 서가 아니라 자진행위가 무책임하게 느껴져서이다. (2023)
첫댓글 그들에게도 명분과 분명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역시 자기 목숨이라하여 함부로 하는 행위에는 동의하기 어렵군요 적어도 자살이 한 인생의 목적이거나 종착역은 아닐 테지요 어쩌면 비겁한 행동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문득 도리없이 목숨을 끊는 '자진'이라는 말이 스쳐갑니다
자살한 사람은 나름대로 고민을 충분히 하다가 결행한 것이지만 , 그런 죽을 결심이면 살아남아서 못할 일도 없을 것 같은데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하는 소식을 들으면 안타깝습니다.
두 친구는 무엇을 해도 하고살 사람인데 한때의 잘못된 생각으로 일찍 세상을 뜬것이 두고 두고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