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흥동에 살다가 대기업직장을 그만두고 창업을 했지만 몆년간 집에 생활비를 한푼도 주지못해 아내는 옷장사를 시작했다. 손아래동서가 이랜드에 다니는 덕분에 이랜드계열 여성이나 아동복을 판매하는 일을 했다. 자금이 없어서 수수료매장이었다
안산시청근처에 있는 매장으로 아내가 옮기면서 그때 막 입주가 시작되는 벽산아파트에 들어가게 되었다. 근처에는 4개 대단지 아파트와 허름한 연립이 있었다
아파트도 재개발된것으로 적지 않은 세대가 빚을 앉고있었다 저는 조합원이 아니라 돈 좀 더주고 구입했으나 몇년을 견디지못하고 대우로 전세로 살다가 아주 허름한 연립에서 전세로 있다가 아내가 불편하다고해서 없어서 성당과 벽을 같이한 새로 도배를 했지만 허름한 연립에 살게 된다
성당이 있는쪽은 온통 연립뿐이었고 그것도 소규모였다 1980년대 지은집이라 겨울이 춥고 여름은 더웠다.
아침에 성당쪽 창문을 열어놓으면 주일새벽미사때 신부님의 목소리를 들을수가 있었고 성당마당에 빈첸시오에서 설치한 자판기의 음료수를 저녁에도 이용할수가 있었다
동네에 버스길가에 있는 복합연립건물에는 식당이 주택이 같이있고 그곳 노부부는 본당교우였다. 성당골목안쪽에는 텃마루가 있는 작은수퍼가 있어서 누구랄것없이 먼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지나가는 동네교우를 초대한다
출퇴근길에 마주치기 때문에 한달에 한번하는 남성구역모임이나 주일미사와 별도로 여러번 만난다 구역장이 같은 동에 살기에 외출하다가 돌아와서 들리곤 했다.
지긍 제가 살았던 연립단지와 오일장이 열리는 근처의 연립등 여러곳의 오래되고 낡은 연립에 사는 사람들중에 재개발로 고층아파트로 바뀐훈 적지않는 수는 타지로 이사가고 새로운분들이 들어왔다.
재개발이라는 것이 사는 아파트의 기치를 높이는것이기에 재정적으로 취약한이들은 그지역에서 퇴출된다는 것이고 부유한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기에
원곡동은 가난한동네라는 이름은 떨쳐질것이지만 과거처럼 자주 만나 친교를 맺을 기회는 점차 사라진다고한다.
전철교통망의 발달로 중간지대인 안산의 상권은 희망과 거리가 멀어져 보이는 것같다. 안산전철은 시흥으로해서 서울로 다른곳은 남인천을 통해 인천전철과 연결되고 4호선으로 금정을 거쳐 수원으로 가는 노선이 직접연결되고
도로망은 남안산을 통해 인천과 경기남부로 이어지는데 이 역시 안산상권에는 도움이 되지않는듯 안산내부의 전통재래시장은 사그라든다. 반월.시화공단이 중소기업체로 유지해서 인천 남동공단과 연결되는 듯 했지만 국내주요제조회사가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이전함에 따라 공단을 비롯 안산상권이 불안해인지 안산의 신.구도심지의 상가가 온통 비어있다는 것이다
아나윔정신으로 주위의 가난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성서형제회는 달라질것입니다
아마도 이런모습은 우리가 살고있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한다면 우리의 역할이 분명히 들어날것인데 이는 우리가 풍족한 재정이 있어야 가능하지는 않을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