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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 마쓰리3 - 고치성에 도착해 마쓰리 행열을 지나 성에 올라 구경하다!
2025년 8월 10일 고치역에 도착하니 오늘이 코치 요사코이 마쓰리 (よさこい祭り)'
첫날인데..... MY 유 버스 MY 遊 バス 1일권(1000엔) 을 구입해
마키노 식물원을 구경하고는 다시 고치 시내로 돌아와서 마쓰리 행열을 구경합니다.
고치(高知) 의 '요사코이 마츠리 (よさこい祭り)' 는 전국에서 행해지는 '요사코이 마츠리' 의 발상지로
음향기기를 실은 차를 선두로 나루코(鳴子, 작물을 노리는 새를 쫓기 위한 농기구) 를
손에 쥔 무희들이 '요사코이부시 (よさこい節, 고치현의 민요)' 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거리를 행진합니다.
여기 코치 요사코이 마쓰리 (よさこい祭り)' 에는 180여개의 팀, 1만 5000명을
넘는 춤꾼 무희들이 행진하면..... 무려 150만명의 사람들이 구경한다고 합니다.
마쓰리를 보면서 생각하니 축제 시기가 아닌 평소에 이 도시에 왔다면 전차로 겐초마에 (县厅前) 역 남쪽에
전통 온천 료칸 산수이엔 ( 旅館 三翠園) 에 묵는 것도 추억이 될 것인데, 료칸 현관에는 사카모토
료마의 동상이, 내부에는 호빵맨의 인형이 앉아있으니 모두 고치현 (高知県) 의 컨텐츠로 환영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천탕(露天風呂 노천풍여) 이 있으니 더욱 좋은데 료칸 바로 앞 가가미강(鏡川) 주변을
산책하면 조용히 빛나는 고치의 느린 일상을 즐길수 있는데, 버드나무 연두색 새잎과
동네 작은 공원 약수터, 자전거 타고 하루를 시작하러 가는 시민들의 아침 일상이 조용히 빛난답니다.
그리고 겐초마에 에키 (县厅前駅) 정류소에서 전차로 3정거장 카미마치잇초메 에키 (上町一丁目) 에
내려서 남쪽으로 조금 걸으면 성서관 (城西館) 을 지나 료마 탄생한 집 ( 龍馬 の生まれちまち
記念館) 에 가면 홋카이도의 하코다테에 있는 기념고나 이상으로 많은 자료들을 전시한다고 합니다.
막부 말기 정객 사카모토 료마가 태어난 거리에 세워졌으며 화가 무라카미 유타카가 그린
소년 료마가 맞이하며 가미마치 거리를 입체적으로 재현하고 가족과 고치성 주변
모습과 사건을 모형과 영상으로 구성했으며 풍부한 자료에 한국어 음성가이드도 있습니다.
혹은 카미마치잇초메 에키(上町一丁目 駅) 에서 5정거장 도사덴 오하시도리역 (大橋通 )
에 내리면 도보 2분 거리에 혼이케자와 (本池澤) 라는 식당이 유명하는데 1925년
시작해 3대째로 고치의 전통 사와치요리를 비롯 가쓰오 다타키, 생선회 및 초밥과
튀김을 즐길수 있으며 요시코이고젠은 3,900엔 한다. 도보 2분 거리에 히로메 시장이랍니다.
하지만 이런 관광지들은 일정에 여유가 없는 우리로서는 평상시라면 모를까 오늘처럼 마쓰리에
치중하니 엄두가 나지 않는데.... 그 보다는 너무 늦으면 고치성 입장 마감시간에
걸릴까 걱정이 되어 그만 빠져나와서는 전철 역에서 돈서선 전차를 타고 고치성 앞에서 내립니다.
고치성 입구에도 마쓰리가 진행되니 그럼 축제는 도시 여러 곳에서 열린다는 것인데....
마쓰리춤꾼 들의 춤사위를 잠깐 구경하고는 언덕을 올라가는데 성이 언덕 위에
자리하니 먼저 해자를 파서 물을 채우고 다음으로는 성문을 지나도 갈지자
형식으로 돌아서 올라가는지라 공격군은 여간해서는 성을 함락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399년 왜군에 포위된 신라 서라벌성은 함락 직전까지 갔지만 5만 고구려 원군이 도착할때까지 버텼고 수양제
침공때 고구려의 요동성이나 당태종 침입시 안시성은 수십만 대군의 공격에도 함락되지 않았으며.... 일본
에서도 히데요시의 공격에 돗토리성이나 하리마의 다카마쓰성과 또 미키성은 4개월 내지 6개월을 버텼으니
성이라 할것인데,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과 동래성에 상주성과 충주성은 두세시간만에 함락됐으니 놀랍습니다?
성으로 들어서니 3시 30분인데 안내도에 성은 4시까지만 개방하며 3시 30분에 입장 마감이라고
적혀있으니 10분만 늦었으면 입장을 못할뻔 했습니다. 고치성 내부는 여러층인지라
계단을 올라가는데.... 며칠전에 본 구루메 성은 게단이 엄청 가팔라 굴러 떨어질까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고치성은 구루메성은 물론 히메지성 보다도 계단 높이가 낮으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올라가 5층 전망대에 서니 시야가 사방으로 탁 트인게 시내가 다 내려다 보이니 전망 하나는
탁월한데 성주는 여기 앉아서 침략군의 동향을 손바닥 보듯 하니 지휘하기에도 용이해 보입니다.
고치성(城) Kochi Castle : 료칸 산수이엔에서 도보로 북쪽에 자리한 고치성(城) 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공원으로 센고쿠시대에 시코쿠의 패자 (覇者) 쵸소카베 모토치카 (長宗我部元親) 와 아들
모리치카 (盛親) 의 거점이었지만...... 모리치카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측에 참전하면서 패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모리치카를 가이에키후 새로운 번주로 야마우치 카즈토요를 앉히니도사에는 새로운
신분질서가 생겨났는데, 야마우치를 따라 도사에 들어온 무사들을 죠시(上士), 원래 쵸소카베
가문을 섬기던 무사들을 고시(郷士) 로 구분했으니, 죠시는 고시보다 높은 지위였으며 고시들을 업신여겼다.
때문에 예전에 조소카베씨 수하들의 후손인 사카모토 료마 같은 고시(郷士) 들은 도쿠가와 막부를
증오 하였고 막부 말에는 이들 가운데에서 료마외에도 나카오카 신타로, 타케치
한페이타와 같은 걸출한 유신지사들이 나타났으며, 일본 개국에 도움을 준 존 만지로도 이 곳 출신이다.
고치조 (高知城 고지성) 는 1601년에 시즈오카현의 가케가와 掛川(괘천) 성을 모델로 해
지어졌으니,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후 임명된 야마우치 가츠토요 가 오타카사
산에 새롭게 근세 성곽인 고치성을 고쳐 쌓았으니 3년 공사 끝에 1603년에 완성했습니다.
이후 1727년에 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자 1746년에 혼마루 재건에 착수해 3년만에 천수각
을 완성했으니 일본에 현존하는 12개 천수이며 또 가케가와성은 역으로
저 고치성을 모델로 해서 새로 지었으니 “일본 최초로 목조 복원 천수각" 이라고 합니다.
4층 6단의 천수각을 가진 고치조 (高知城 고지성) 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천수각과
내성(内城) 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라고 하는데..... 수백년동안의 전쟁・
화재・재해를 이겨내고 일본의 마지막 12성중 하나로 국가주요 문화재로 지정되었지요.
비가 많은지역이라 수로도 많으니 물은 자연석을 이용한 석통을 통해 배수되니 석축 사이에
돌출되어 있는걸 지금도 볼수 있으며 무사들이 대기하던 무샤가쿠시 武者隱し
도 둘러볼만 하고... 가파른 게단으로 천수각에 오르면 고치시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성 내부에는 성 전체를 복원한 미니어쳐들을 전시해놓아, 성곽의 전체 구성과 규모를 가늠케하며
태평양에서 고래사냥에 대한 기록도 리얼하게 전시해 놓았는데, 고래의 사이즈를 생각하면,
귀중한 식량자원이었으니........ 한마리의 고래를 잡기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협업이 필요했습니다.
천수각(天守閣) 에서 내려본 도심의 모습이 장관인데, 일본의 지방도시들은 어디를 가도 꽤 규모가
있고 발달되어 있어서, 수도권에 집중된 중앙집권인 한국과는 사뭇 다른 인상을 느끼게
되는데.... 각 지방 영주(大名) 들이 자치인 분권통치를 했는지라 지방마다 특색이 더 뚜렷합니다.
도사는 막말 4대 웅번(사츠마, 조슈, 도사, 히젠)에 포함되었다. 막말 4현후로 유명했던 도사
번주 야마우치 요도는 사카모토 료마와 고토 쇼지로의 의견을 받아들여 대정봉환을
도쿠가와 막부에 건의하였고 막부는 이를 받아들여 도쿠가와 막부의 일본 통치를 끝내게 된다.
전 성주 쵸소카베 모토치카 長宗我部元親 는 센고쿠 시대 토사번의 다이묘로 쵸소카베
가문 21대 당주이다. 아버지가 쌓아 올린 군사적 기반과 전쟁 실력이 뛰어난
동생인 키라 치카사다와 코소카베 치카야스의 보좌를 받아 토사(고치현) 를
정복하였으며 이후 아와, 사누키, 이요까지 침공하여 시코쿠 거의 대부분을 정복한 영주다.
시코쿠 전역을 통일한 탁월한 전쟁능력과 군인을 위무하는 일화를 가지고 그의 리더십을
찬양하는 평가가 주를 이루던 영주였다. 센고쿠 시대를 매체로 하는 미디어에서는
독특한 미남형 캐릭터로 설정하거나 미래를 내다본 혜안을 가진 초천재 능력자,
최종적으론 불운한 사건들에 의해 폐인이 되어버린 불쌍한 캐릭터로서 모토치카를 그려냈다.
일반적인 평가 요소와 합쳐져 폭발적인 인기로 이어졌지만 동시에 박쥐로 비유당한 일화를
근거로 시코쿠 라는 소규모 영지를 정복하는 것에 그친 다이묘로, 다른 대세력엔
미치지 못한 전쟁능력, 사사재흥과 금주령 일화를 근거로 한 극단적으로 보수적이었던
군인, 히사타케 치카나오라는 간신에게 총애를 쏟아 일족 멸망의 원흉이란 부정적 평가도 있다.
일본은 센고쿠 (戰國 전국) 시대 (1467년~1572년) 에 300명에 달하는 센고쿠다이묘 들이
자립하여 2,000개의 성 을 쌓았다는데.....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즈치~ 모모야마시대 (1573년~1600년) 에는 전란으로 허물어져 600개 가 되었습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에서 승리한 동군의 영수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 1603년 에도에
도쿠가와 막부 를 여니 막부는 지방의 반란을 막기 위해 다이묘(영주) 가
거처하는 주성(城) 1개만 남기고 다 허물라고 지시를 하니...... 270개만 남게 되었습니다.
*** 아이치현 나고야 북부 이누야마성 ***
*** 비와 호숫가에 이이 나오마사가 쌓은 히코네 성 ***
*** 나가노 마쓰모토시에 다케다 신겐이 쌓은 마쓰모토 성 ***
*** 한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성주로 있었던 백조 희메지 성 ***
*** 5번째 국보성으로 지정된 시마네현의 마쓰에 성과 뱃놀이 하는 해자 ***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도쿠가와 막부가 무느지니, 그 유산인 성을 허물기 시작한
데다가....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군 폭격 으로 불타 지금은 부속 건물만 있는
것은 25개 그리고 천수각을 갖춘 성은 불과 12개 만 남았다고 하는데......
오사카성이나 나고야성에 구마모토성은 크지만 새로 쌓았으니 문화재적 가치는 덜합니다.
천수각이 남은 고치성등 12개 성 중에 문화재적 가치와 아름다운 것으로 따지자면 5개의
성 을 꼽으니 나고야 북쪽 이누야마성, 비와호숫가 히코네성, 나가노의 마쓰모토성,
시마네현의 마쓰에성 그리고 고베 서쪽 히메지성 이 다섯개 성이 일본 국보 라고 합니다.
크기로 친다면 오사카성이나 나고야성에 구마모토성 이지만 대대적으로 보수한 때문에 문화재적
가치가 적어 일본 국보성에서 제외 된걸 생각하면, 우리 남대문(숭례문) 도 2008년 2월 10일
토지 보상에 불만을 품은 채종기가 불질러 석축을 제외하고는 불타버려 새로 건축했으니 어쩐다?
더욱 멸실된 전통안료 호분을 되살리는데 실패하자 시일에 쫃긴 시공에 나무등을 제대로
말리지도 못했으니 완공한지 6개월도 안되어 박락현상 으로 현판은 균열과
변색에 갈라져 버렸으니? 국보 1호를 바꾸어야 한다는 여론이비등하자 정부는 미봉책
으로 국보 번호를 없애는 선에서 수습하는데 문제는 이제는 국보로서의 가치가 없어졌으니....
오늘 고치시에서 마쓰리를 보았는데 조봉권 기자는 국데신문에 “ '韓 영화광‘ 전직 日 기자가
들려주는 두 나라얘기 ” 라는 글에서 이 도시출신인 나리카와 아야가 지은 지극히
사적인 일본이라는 책을 소개했습니다. - 아사히신문 10년 재직했던 저자 - 동국대
박사 거치며 양국서 활동 - 언론인·외국인 두 가지 시선으로- 韓과 닮은 듯 다른 日 문화 풀어
‘지극히 사적인 일본’은 생생하고 다정하며, 깊이와 균형감을 갖춘 책으로 다가왔다. 일본에 관해, 한국과
일본의 특징에 대해 여러 면에서 이토록 두루 미덥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힘은 어디서
왔을까? 저자 나리카와 아야의 삶·공부·태도·관점이 이 책에는 골고루 스미고 배었다. 거기서 힘이 나온다.
일본 시코쿠의 고치(高知)시 해변에 서 있는 사카모토 료마 동상. 고치에서 자란 저자가 찍은 사진이다.
틈새책방 제공 “한국 친구들은 내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잊고 대하는 경우도 있다. 어떨 때는
내 앞에서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아, 아야 일본 사람이었지’ 하고 미안해하는 친구도 있다.
나는 일본과 나를 동일시하지 않기 때문에 일본에 대해 부정적인 얘기를 들었다고 해서 상처받지 않는다.
하지만 ‘일본이 태풍을 막아 줘서 고맙다’ 는 말을 들었을 때는 화를 냈다. 일본에는
태풍으로 매년 심각한 피해를 입는 사람이 많다.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었다.”(프롤로그 중)
이 문장은 저자에 관해 잘 설명하는 듯해 좀 길게 인용했다. 한국인 친구들이 가끔 ‘일본말도 아주
잘하는 한국인’ 으로 착각할 만큼 한국과 친숙하고 한국을 사랑하는 일본인, 인류
보편 가치를 중시하고 균형감을 유지하면서 한국- 일본의 가교로 활동하는 여성 작가의 모습이다.
1982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나리카와 아야는 저명한 언론사인 ‘아사히신문’
에서 2008~2017년 기자로 활동한 뒤, 한국 영화를 공부하려고
2017년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석사 과정에 들어갔고 2023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한국의 ‘중앙선데이’, 일본의 ‘교도통신’에 칼럼을 쓰고 KBS 월드 라디오
일본어 프로그램 ‘컬처랩K’에서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한다. 한국어 저서는 2020년 낸 ‘어디에 있든 나답게’ 에 이어 두 번째다.
‘지극히 사적인 일본’은 바로 이런 저자의 활동과 체험 그리고 독특한 위치 덕분에 일본 문화에 관한 흔치
않은 책이 됐다. ‘한일 문화 비교 체험’을 통해 한국과 일본의 특징을 절묘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전직 신문기자가 쓴 책답게 숫자·데이터·팩트가 꽤 많이 나온다. 이런 요소는 책의 객관성·신뢰도를
높인다. 동시에 ‘지극히 사적인’ 만큼 저자 본인의 체험과 생각을 널리 활용하니 재미있고 흐름이 부드럽다.
저자의 관점으로 일본 문화 면면을 소개한 대목도 무척 흥미로운데, 우선은 ‘한일 비교 체험을 통해
느낀 한국과 일본의 특징’에 관해 살펴보자. “2016년 한국의 촛불 집회를 보고 일본
사람들은 놀랐다. 어마어마한 사람이 모였을 뿐만 아니라 정말 정권을 퇴진시켰기
때문이다.… 현대사를 되돌아봐도 그런 ‘성공 체험’이 거의 없는 일본에서 보면 정말 부러운 일이다.”
“게다가 일본에서 말하는 ‘친일’은 한국에서 말하는 ‘친일파’와 다르다. 일본에서는 단순히
‘일본에 우호적인’이라는 뜻으로 쓰고 있다. 한국에서 말하는 ‘친일파’처럼
일제강점기에 식민 지배에 협력한 배신자 같은 의미는 없다. 나는 앞으로
한일 관계를 생각할 때 ‘반일’과 ‘친일’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399쪽)
“나(저자)는 아이가 없지만 아이가 있는 (일본의) 친구들에게서 입시에 관한 이야기
를 종종 듣게 된다. 우리 때와 달리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보다 되도록
입시 때문에 아이들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다고 하는 친구가 많은 편
이다. 한편 대학에 들어가도 경쟁을 계속하는 한국 학생들을 보면 안타깝기도 하다.
일본은 취업에 학점이 높고 낮고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나는 대학 성적을 회사에 제출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323쪽) 책 속에는 일본과 한일에 관한 흥미로운 대목이 더 많이 이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