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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창 24:1-27
제목: 믿음의 복을 이어가라!
<서론>
오늘 말씀은 젊은이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들으려는 말씀일 수 있어요.
왜냐하면 오늘 말씀은 이삭이 리브가를 아내로 맞이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고, 실제 이 본문을 결혼 지침서로 사용하는 분들도 꽤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그리스도인의 결혼관에 대해 중요한 지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오늘 말씀은 초점은 결혼 자체에 있지 않아요.
그보다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받는 비결과 그 복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어떻게 받고, 그 복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본론>
1. 믿음의 그릇을 준비하라.
1절을 보시면, 아브라함 인생의 황혼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 모습은 범사에,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모습입니다.
따라서 이어지는 이삭의 배필을 구하는 일 역시 하나님이 복 주시는 사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복이 그냥 아무렇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에요.
이어지는 말씀에서 아브라함의 모습을 주의 깊게 보면 그 복을 담는 그릇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어요.
그게 뭔가, 바로 “믿음”이라는 그릇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복을 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정작 복 받을 그릇을 준비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사람은 그릇이 준비된 사람이에요.
“믿음”이라는 그릇이 준비된 사람입니다.
말씀을 보면서 확인해 보시죠.
3-4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종에게 이삭의 배필을 구하는 문제를 두고 맹세를 시키는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내를 구하는데 가나안 족속의 딸이 아니라, 아브라함 자신의 고향, 자신의 족속의 딸들 중에서 택해야 한다고 지시하고 있습니다.
종에게 이런 맹세를 시키는 데는 이유가 있어요.
창세기 9장으로 잠시 돌아가 보면, 가나안은 노아에게 저주를 받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요.
반면,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대표되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복을 기업으로 받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삭을 저주 받은 가나안 자손의 딸과 결혼시킨다는 것은 마땅하지 않아요.
그러니 아브라함은 종에게 자신의 고향으로 가서, 친족의 딸을 아내로 데려오라고 지시하는 겁니다.
그 문제는 해결이 됐고, 그러면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5절에서 종이 질문하는 내용인데, 만약 신부 될 사람이 종을 따라 가나안 땅으로 오려 하지 않을 경우!
그 경우, 이삭을 데리고 떠나온 고향으로 가야 하나요?
6절에서 아브라함의 대답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아니하도록 하라”
우리말 성경에는 없지만, 히브리 원문에는 “삼가, 절대로”라는 표현이 있어요.
이삭을 데려갈지 묻는 질문에 아브라함은 펄쩍 뛰면서 삼가, 절대로 내 아들을 데리고 돌아가지 않도록 하라고 반대하는 거죠.
아브라함은 왜 이렇게까지 이삭 데려가는 것을 반대합니까?
7절을 보십시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먼저는,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고 말씀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떠나라 하신 땅이기 때문에 돌아갈 수 없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거류하고 있는 이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선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 결과가 눈앞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후손들에게 분명히 주실 땅입니다.
그러면 그 약속을 믿는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증명할 건가요?
믿음에는 증명이 따라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하신 땅을 떠나지 않고 거기 머물러 사는 것으로 증명해야 하지 않겠어요?
따라서 아브라함은 어떤 일이 있어도, 아들을 아브라함이 나왔던 고향 땅으로 데려가지 말라는 겁니다.
게다가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주신다고 했으니까, 자손의 문제 역시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뜻이겠죠?
하지만 자손이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겠어요, 아니면 땅에서 솟구쳐 올라오겠어요?
아내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따라서 자손에 대한 약속에는 아내에 대한 보증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사자를 앞서 보내셔서, 아브라함의 종으로 하여금 이삭을 위한 아내를 택할 수 있도록 도우실 것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설령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타협은 없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은 거듭 강조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만일 여자가 너를 따라 오려고 하지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
만에 하나라도 이삭의 아내 될 여인이 종을 따라 오지 않으려 할 때는 어떻게 하라?
차라리 여자를 포기하라!
여자를 포기하면 포기했지, 절대로 이삭을 이전 떠나온 땅으로 데려가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어요.
결혼을 차라리 안 시키면 안 시켰지, 하나님 주신 약속을 버리면서 타협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결혼 문제를 추진하는 모습을 보면, 아브라함에게는 이 신뢰가 있어요.
하나님이 땅과 자손에 대해 약속을 주셨기 때문에 선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신다는 굳건한 신뢰가 있어요.
동시에 그와 같은 신뢰 안에 떠나온 땅으로, 다시 말해서 세상으로 결코 돌아가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단이 있어요.
행여 이삭의 결혼 문제가 원활하게 풀리지 않을 때는 차라리 배필을 포기하지, 절대 말씀에 대해 타협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할지라도 신실하신 주님은 실패하지 않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신뢰가 있는 거예요.
이처럼 하나님의 신실하시고 선하신 성품과 말씀을 굳게 신뢰하기에 결코 세상 욕심과 염려에 타협하지 않는 모습, 이게 우리가 본 받아야 할 믿음의 모습이죠.
그리고 이게 하나님의 복을 받는 그릇입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믿음의 그릇을 준비하지 않은 채, 자꾸 복 받기만을 구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세상에 대해 죽고 하나님과 그 말씀에 대해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 욕심과 정욕으로부터 돌아서서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을 굳게 붙잡고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당연히 손해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전에 즐기고 자랑하던 것이라도 주님이 죄라고 하시면 돌아서고, 끊으라고 하시면 끊어야 합니다.
그만큼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한다는 거죠.
하지만 주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믿음으로 손해 볼 생각은 하지 않고 복만 받기를 원하니까,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복 받을 그릇, 믿음의 그릇을 준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릇이 준비 되지 않은 채 복을 받으면, 그 복은 그 영혼에게 해가 됩니다.
그럴 바에는 복을 안 받는 것이 유익합니다.
그릇을 준비하지 않은 채 복을 받으려고 하면 그 복을 바꾸어 정욕을 위한 도구로 쓰고, 그것 때문에 도리어 영혼을 망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믿음의 그릇을 준비하십시오.
2. 준비된 그릇에 부어지는 축복
아브라함의 명령을 받고 길은 떠난 종은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나홀의 성에 이르렀습니다.
마침 저녁 무렵이었고 여인들이 물을 길러 나올 때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여인들이 물을 길러 오는 성 밖 우물 옆에 나귀들의 무릎을 꿇리고 여인들을 기다렸습니다.
물을 길러 나오는 여인들 중에 아브라함 동족의 딸이 나올 가능성이 높거든요.
여인들을 기다리면서 종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12-14절을 보십시오.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성 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으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곁에 서 있다가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 내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
종의 기도는 이 우물가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위해 예비하신 며느리 감을 만나게 해 달라는 건데, 좀 더 상세히 보면 이런 내용이죠.
이제 곧 소녀들이 물 길러 올 텐데, 그 중에 자기가 물을 달라 할 때 자신뿐만 아니라 낙타에게도 기꺼이 물을 주는 소녀를 이삭의 배필로 정하신 줄 알겠습니다.
참고로, 아브라함의 종이 낙타 열 마리를 이끌고 왔잖아요.
낙타 한 마리가 목마를 때 한 번에 마실 수 있는 물의 양이 최대 100리터라고 하니까 열 마리면 1000리터, 자그마치 1톤에 해당하는 양이에요.
반면 물을 긷는데 쓰는 항아리는 12리터 정도를 담을 수 있었거든요.
따라서 낙타 한 마리에게 물을 충분히 먹이려 해도 최소 8번, 열 마리면 80번은 물을 길어야 하는 겁니다.
쉽게 생각하면, 물 한 번 길 때마다 2리터짜리 음료수 병 6개를 들어 올리는 건데, 그걸 80번 이상이나 반복한다는 겁니다.
설상가상으로, 근동 지역 우물은 사람이 직접 내려가서 물을 긷도록 팝니다.
16절에서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요.
한 번에 2리터짜리 생수 6통 정도 무게 물을 들고 80번 이상을 오르락내리락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정도 체력이라면 여자 역도 선수쯤 되는 사람을 이삭의 배필로 찾게 해달라고 구한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결국, 아브라함의 종이 하나님께 구한 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주변까지 챙길 줄 아는 대단히 너그러운 성품을 소유한 처녀를 만나게 해 달라는 것,
그리고 한 번에 2리터짜리 음료수병 6개쯤은 가볍게 들어 올리면서 80번은 반복할 수 있는 아주 건강하고 인내심 강한 배필을 구했다고 볼 수 있는 거예요.
과연 종의 기도는 어떻게 될까요?
15-16절을 보십시오.
“말을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나오니 그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내 밀가의 아들 브두엘의 소생이라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더라...”
기도가 채 끝나기도 전에 한 소녀가 우물로 왔는데, 리브가라는 소녀이죠.
주목할 것은, 이 소녀가 아브라함 동생인 나홀의 손녀,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의 동족이라는 사실에요.
하지만 이것은 성경기자와 우리가 아는 사실이지 종이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거든요.
그러니 종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 기도한 대로 소녀를 시험하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종은 리브가에게 물 좀 달라고 요청을 하는데, 18-20절을 보시면 리브가가 어떻게 하나요?
급히 물동이를 내려 아브라함 종에게 물을 주고 있죠.
게다가 요청도 하지 않았는데 우물로 달려가서 낙타들을 위해 물을 긷고 있어요.
그것도 열 마리의 낙타가 충분히 물을 마시고 해갈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 물을 긷고 있어요.
참고로, 리브가를 심히 아름답고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않은 처녀라고 성경기자가 소개하잖아요.
이걸 보면, 이 당시 미(美)의 기준이 오늘날과는 완전히 달랐던 것 같아요.
당시에는 요즘처럼 날씬하고 몸매를 잘 가꾸고 얼굴이 연예인 같은 여성보다 너그럽고 일 잘하고 아이를 잘 낳을 수 있게 보이는 여성을 아름답게 본 것 같습니다.
잠언 31장에서 잠언 기자가 입이 칭찬하는 현숙한 여인의 모습도 그렇거든요.
너그럽고 부지런한 여인상인데, 소 같은 모습의 여인이에요!
예상컨대, 리브가는 팔뚝도 굵고 허리와 허벅지 굵기도 장난이 아니고 힘도 장사인 여성, 역도 선수 장미란 같은 사람 아닐까 싶어요.
어쨌든, 아브라함의 종이 기도한 그대로 상황이 이뤄지고 있어요.
그것도 우물가에서 만난 첫 번째 소녀가 그렇게 하고 있어요.
성경기자나 우리야 이 소녀의 정체를 알고 있지만 아브라함의 종은 아직 이 소녀가 누구인지를 모른다고 했어요.
따라서 21절에서 보는 것처럼 아브라함의 종은 이 소녀를 묵묵히 주목하면서 하나님께서 평탄한 길을 주신 것인지, 아브라함의 친족이 맞는지를 알고자 합니다.
22-23절에서 보는 대로 리브가에게 금 코걸이와 금 손목 고리를 주면서 “네가 누구의 딸이냐, 네 아버지 집에 우리가 유숙할 곳이 있느냐?”고 물어요.
그러자 리브가의 대답, 24-25절을 보십시오.
“그 여자가 그에게 이르되 나는 밀가가 나홀에게서 낳은 아들 브두엘의 딸이니이다 또 이르되 우리에게 짚과 사료가 족하며 유숙할 곳도 있나이다”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종이 찾고자 했던 바로 그 아브라함의 친족 브두엘의 딸이라고 소개하죠.
하나님은 우물가에서 드린 종의 기도를 정확하게 들으시고, 기도가 마치기도 전에 한 소녀를, 종이 찾던 바로 그 소녀를 보내셔서 응답을 주신 거예요.
리브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브라함의 종이 어떻게 하는지 보십시오.
26-27절입니다.
“이에 그 사람이 머리를 숙여 여호와께 경배하고 이르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사랑과 성실을 그치지 아니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하니라”
아브라함의 종은 머리를 숙여 경배하고 있습니다.
주목할 사실은,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만난 일에 대해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는 “나의 주인에게 주의 사랑과 성실을 그치지 않으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응답은 바로 주인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과 성실이라는 거예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아브라함이 믿음의 그릇을 잘 준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 그릇에 복을 아낌없이 부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믿음이라는 그릇이 준비된 것을 보시고, 아브라함 종의 발걸음을 정확하게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종의 기도가 마치기도 전에 준비하신 리브가를 보내셨습니다.
리브가는 종이 기도한 그대로 행함으로써, 과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대로 사자를 보내셔서 인도하시고 도우셨음을 종에게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믿음의 그릇이 준비되어 있다면, 하나님은 기꺼이, 지체하지 않고 복을 주십니다.
기도가 마치기도 전에 응답을 주신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할 때 마지못해 응답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기꺼이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참 좋으신 분이십니다.
원래 사람에게 복을 주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사람을 처음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심히 기뻐하시면서, 복을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문제는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의 복을 받을 그릇을 깨뜨려 버렸다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께로 돌이켜 죄를 회개하고 다시 믿음의 그릇을 준비하면, 하나님의 복은 그 그릇에 부어질 것을 믿으십시오.
구하기도 전에 주실 준비를 다 하고 계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준비된 그릇에 하나님은 기꺼이 복을 담아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거듭 강조하지만, 문제는 그릇입니다.
믿음으로 그릇만 준비한다면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을 결코 잃지 않습니다.
3. 믿음의 대는 이어져야 한다!
여기서 잠시 질문을 던져보도록 하시죠.
25장 20절을 참고해 보면, 이삭이 리브가를 아내로 맞을 때 나이가 마흔이거든요.
마흔이라면 결혼 문제도 충분히 알아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삭은 이 일에 전혀 나서지 않고 아브라함과 종 사이에서 이 문제를 다 처리하잖아요.
그것도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아브라함이 자식 문제라면 일일이 간섭하거나 아들을 못 미더워하는 아버지라서?
이미 본 것처럼 이삭의 아내를 얻는 과정에서 아브라함이나 종이 보여준 태도는 믿음 그 자체였죠.
따라서 아브라함이 성가실 정도로 아들에게 간섭하거나 아들을 못 믿어서 그렇게 하는 건 분명 아니에요.
그러면 이삭에게 문제가 있는 걸까요?
이삭이 이 나이가 되도록 아예 결혼할 생각이 없거나 혹은 제 앞가림도 못하고 소극적인 파파 보이라서?
그런 문제도 분명 아니에요.
그러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중요한 두 가지 축복이 있는데, 지금까지 우리가 본 것처럼 “자손과 땅”이라는 축복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개인에게만 해당하는 축복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의 발자취를 따르는 아브라함 후손 전체에게 이어져야 하는 축복입니다.
바로 여기에 그 이유가 있어요.
바로 앞 23장에서는 이 두 가지 축복 중에서 “땅”에 대해 아브라함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보았습니다.
땅 문제에 대해 상당히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죠.
사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는 발붙이고 살만큼의 땅도 기업으로 주시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겠다고 약속하신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그 자손들인데, 그 일은 실제로 약 400년 후에 일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당장 자신에게 땅이 주어지지 않고, 400년 후에 자손들이 얻는 문제라고 해서 이 일을 나 몰라라, 나와 상관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자신이 발붙이고 살 땅도 아니고 가족묘로 쓸 뿐인데, 그것도 공짜로 주겠다는 것을 거부하고 비싼 돈 주고 막벨라 굴을 사서 자기 소유로 확정했잖아요.
이 같은 행동은, 400년 후에 있을 일이지만 이 땅을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신다는 하나님 약속이 참이고 확실하다는 것을 믿음으로 선포하는 것이었어요.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 믿음은 미래 지향적인 믿음, 자신에게서 멈추지 않고 다음 세대를 생각할 줄 아는 믿음, 세대를 잇는 믿음이라는 거예요.
오늘 말씀은 이와 같은 세대를 잇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태도가 “자손” 문제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자손 문제에서도 조금도 소극적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아브라함이 이삭의 결혼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자손의 축복을 이어가고자 했어요.
거룩한 자손, 믿음의 복을 이어가는 자손을 세우고자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겁니다.
믿음의 복은 대를 이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뜻하신 바이고 오늘 아브라함의 믿음의 발자취를 좇는 우리 역시 마땅히 따라야 할 길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 이야기는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이삭의 결혼 이야기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위기 중 하나가 세대를 잇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한국 사회가 고령화 되면서 교회는 더 급속도로 고령화를 겪고 있고, 주일학교는 대단한 위기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주일학교의 문을 닫는 교회들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일학교에 대해, 자라나고 있는 우리 자녀 세대에게 믿음의 세대 계승을 이루기 위해 투자하는 것은 여전히 뒷전입니다.
아브라함의 모습과는 완전히 반대로, 거꾸로 가는 모습인 거죠.
다음 세대에게 믿음을 계승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힘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우리 부모 세대가 믿음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 부모 세대가 먼저 말씀과 기도로 믿음의 그릇을 잘 만들고 믿음의 복을 받는 본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녀들에게 적극적으로 말씀의 도리로 지도하고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가르치고 훈련시켜야 합니다.
신명기 6장 4절부터 7절에서도 이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를 세우기 위해 투자 또한 아까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 세대를 믿음으로 세우기 위해서 소위 거룩한 허비가 필요합니다.
홀씨 여행을 시작으로 다음 세대를 세우는 사역이 더욱 더 풍성하게 열리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복이 끊어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믿음의 대는 이어져야 합니다.
<결론>
이삭의 결혼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는 삶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1. 믿음의 그릇을 준비하십시오.
2. 준비된 그릇에 복을 담아 주십니다.
3. 믿음의 대는 이어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