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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두 가지 언약/갈 4:21-31
출 처| 박조준목사
본문 말씀은 두 가지 언약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삭과 이스마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과 은혜에 대한 구별을 아주 선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차이는 너무 큽니다. 위와 아래, 동과 서, 빛과 어두움, 불과 물처럼 다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대하여 분명한 자세를 갖지 못하고 혼동하고 있습니다.
전에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 신과 여호와 신의 대결에서 모여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여 외친 말씀은 아직도 우리 귀에 들립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세 가지 단계로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역사적인 사실의 인용입니다(22∼23절).
“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 말씀을 이해하는 데는 역사적인 배경을 잠깐 생각하고 지나가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이 내용은 구약 창세기 16장에 가보시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자식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저 하늘에 무엇이 보이느냐? 별이 보입니다. 그렇다. 저 뭇별을 네가 셀 수 있 느냐? 없습니다. 그래, 네 자손이 이와 같이 되리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이 말씀을 믿었습니다.그래서 그의 믿음이 그로 하여금 의롭다 함을 받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 아내 사라는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미 사라는 생산할 수 없는 연령에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착잡한 심정으로 아브라함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아마 나이가 들어서도 자식이 없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의 심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라가 먼저 아브라함에게 말을 꺼냈습니다.
‘여보. ’
아마 이 말을 꺼낼 때 사라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고 그 입술은 바르르 떨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땀이 나는 손을 꼭 쥐고 그 남편을 불렀습니다.
진한 아브라함은 아무 생각 없이 그 아내를 바라보며 대답했을 것입니다.
‘왜요?’
‘ 나, 당신에게 아주 중요한 말 하나 해야겠어요.’
평상시와 다른 표정에 아브라함은 마음속으로 이상한 느낌을 가지면서 아내를 대했습니다.
‘무슨 말인데요. 어서 말해봐요.’
사라는 한참 방바닥을 내려다보고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각오가 섰다는 듯이 머리를 들고 남편의 눈을 정시하면서 입을 열었습니다.
‘여보, 당신도 아시다시피 내 나이도 나이려니와 이미 단산기가 지났으니 하나님이 나에게는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는가 봅니다.’
이 말을 물끄러미 앉아서 듣고 있던 아브라함은 (물론 이 부분은 성경에는 없으나 우리가 인정상으로 또 아브라함의 성격상 으레 했을 법한 말입니다) 말합니다.
‘여보, 그게 무슨 말이 요? 우리에게 자식을 주시고 안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지 우리에게 무슨 책임이 있어요? 혹시 당신은 섭섭할지는 몰라도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여보, 나는 당신만 있으면 돼요. 내가 이제 무슨 자식을 낳아서 덕을 보겠어요? 내 나이도 벌써 86세요.
내가 다시 말하는데 당신 아예 나한테 미안한 생각은 말아요. 당신이 그러면 오히려 내가 섭섭해요.‘
어떻게라도 아내를 위로하고 싶어하는 어진 남편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가슴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습니다.
‘아니에요, 그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당신에게 자식을 주신다고 하셨으니까 분명히 주실 거예요. 저도 그것을 믿어요. 그래서 제가 깊이 생각한 끝에 얻은 결론이 있어요.’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궁금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긴장했습니다.
사라는 입을 열어 계속 말합니다.
‘여보, 제말을 조금도 어렵게 생각지 말아 주세요. 이 모두가 당신을 위한 일니까요.’
아브라함은 측은히 사라를 바라보며 입을 엽니다.
‘도대체 무슨 말인데 그렇게까지 조심스러워 하시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또 다짐합니다.
‘여보, 내게는 아직도 젊은 몸종 하갈이 있지 않소? 내 여종을 당신에게 드릴 터이니 그를 통해서 자식을 얻읍시다.’
처음 듣는 순간 아브라함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거기에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그의 여종 애굽 여자 하갈을 아브라함의 첩으로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계속 읽어보면 이 일로 인하여 이 가정에는 큰 불행이 다가왔습니다. 가정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을 그렇게 친구처럼 가까이 하시던 하나님이 이 일 후 13년 동안 일체 나타나시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아브라함의 가정에는 검은 구름만 떠돌았습니다. 13년 후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99세 때 다시 나타나서 약속을 했습니다. 그때 사라의 나이 90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의 이름까지 지어서 이삭이라고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 이 말을 듣는 순간 90살 난 사라는 웃었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아브라함의 후손을 사라를 통해서 주셨습니다. 기적을 통해서 주셨습니다. 이삭은 약속의 자손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자손을 통해서 축복하십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유대인들이 가장 자랑으로 내세우는 것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유대 민족의 창시자 아브라함의 피를 이어받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인간의 타락으로부터 수천년 간의 혼돈이 흐른 후 맨처음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을 계시한 것이 아브라함에게 계시 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 그리고 하늘의 별, 바닷가의 모래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거룩한 약속에 근거를 삼아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보면 세례 요한이 그 당시 유대 사람들을 향해서 “너희가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했습니다.
예수님도 유대인들을 향해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말씀했습니다. 이때 그들이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알 것이어늘 너희는 지금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않았느니라.”
유대인들이 말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니라.”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느니라. 너희는 마귀 자식이야” 하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례 요한이 암시했던, 그리고 예수님께서 공개적으로 가르치신 바 있는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참다운 후손은 육체의 후손이 아니라 영적인 후손입니다.
아브라함의 참된 자녀들은 유대 민족의 순수한 혈통을 따르는 자들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믿는 것같이 믿고, 그가 순종한 것같이 순종하는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갈라디아서 3장을 생각할 때에 말씀드렸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은 아브라함의 육적인 후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를 가릴 것 없이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했습니다(갈 3:29).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는 한 아브라함에게 속했다고 내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 아브라함의 두 후손이 있습니다.
진짜 후손과 가짜 후손이 있습니다.
가짜는 의문적이고 육체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는 상징적이고 영적인 존재입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이 그렇습니다. 둘 다 아브라함을 아버지로 태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두 사람이 각각 다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본문 22절에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하였습니다.
이스마엘의 어머니 하갈은 계집종으로서 아브라함의 하녀였습니다. 그러나 이삭의 어머니 사라는 자유하는 여자로서 아브라함의 아내였 습니다.
두 아이는 자연히 그 어머니의 신분을 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은 노예 신분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자유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둘은 각각 다른 방법으로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잉태와 출생의 생물학적 과정이 달랐다는 말이 아닙니다.
본문 23절에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낳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였습니다.
이삭은 자연을 좇아 난 것이 아니라 자연을 초월해 났습니다.
이삭은 아버지는 100세의 노인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원래 수태할 수 없는 여자요, 이미 90세를 넘어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1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약속하신 이란 말을 주의해 보세요.
이스마엘은 자연을 좇아 났으나 이삭은 그것을 거스려 초자연적으로 하나님의 특별하신 약속을 통해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 말미암아 자유하게 되기 전에는 모든 사람은 이스마엘입니다.
둘째로, 비유적인 논증입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의 출생의 사연이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또한 심오한 영적 진리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문 24절에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하였습니다.
이
두 계약의 이해가 없을 때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두 가지 계약으로 나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옛 계약인 구약과 새 계약인 신약으로, 계약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엄숙한 합의인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서 그의 백성을 삼으시고 또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옛 계약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 계약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피로써 이 계약에 인을 치셨습니다.
옛 계약은 율법을 근거로 하고, 새 계약은 약속을 근거로 삼습니다.
율법은 하나님 이 인간에게 책임을 지웁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하라. 너희는… 하지 말 라.”
그러나 약속은 하나님 스스로 책임을 지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리라. 내 가… 하리라.”
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25절에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하였습니다.
여기 예루살렘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땅을 위해 예비하신 도성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옛 계약 아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유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계약 아래서의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사람들,곧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의 비유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 하갈과 사라를 통해서 난 이스라엘과 이삭이 있었는데 그들은 두 언약 및 두 예루살렘에 해당합니다.
여종 하갈은 옛 언약을, 그 아들 이스마엘은 땅 위의 예루살렘교회를 가리킵니다. 자유하는 여인 사라는 새 언약을, 그 아들 이삭은 하늘 위의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비록 겉으로는 같아 보이지만 - 그들이 다같이 아브라함의 아들이기 때문에 - 그러나 두 아이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어머니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우리의 어 머니가 하갈이라면 우리는 이스마엘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어머니가 사라라고 하면 우리는 이삭과 같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어머니는 누구입니까?
셋째로, 우리 개인에게 향한 말씀입니다.
28절에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 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이스마엘과 같지않고 이삭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것은 육적이 아니라 영적입니다. 우리가 그의 자손이 된 것은 자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초자연에 의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13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만일 우리가 이삭과 같은 존재라면 우리는 이삭이 받았던 것과 같은 대우를 받아야만 합니다. 이삭이 자기 이복형 이스마엘에게 받던 대우는 이삭의 후손들이 이스마엘의 후손들에게 받을 대우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받던 대우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 29절에 “그러나 그때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오묘한 말씀입니까?
이삭이 젖을 뗄 때 그는 세 살, 이스마엘은 17살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어린 그의 이복동생 이삭을 놀려 주었습니다. 글쎄 어떻게 놀려주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성경에 보면, 조롱했다, 희롱했다고 하였습니다.
이삭은 이스마엘의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블레셋 장군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를 얼마나 괴롭히고 비웃고 멸시했습니까?
이삭은 언제나 이스마엘에게 희롱을 당하고 핍박을 받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무릇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핍박을 받습니다.
본문 30절에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습니다.
이삭이 이렇게 이복 형인 이스마엘의 멸시를 받았지만 이삭은 결국 그 아버지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되어 그의 유업을 이었습니다.
창세기 17장 18∼21절에 보면 사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서 이스마엘을 그의 상속자로 삼으려 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 를 원하나이다 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니다, 내가 이삭과 내 언약을 세우 리라 하셨습니다.이것 때문에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고 요구했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말한 대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 서는 이스마엘을 통해서도 한 나라를 이루시겠다고 하셨지만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씨라 칭할 것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의 진정한 상속자는 그의 육체적 후손으로서의 자녀들, 다시 말하면 유대인이 아니고 영적인 후손으로서의 자녀, 그러니까 유대인이나 헬라인을 막론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종과 그의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이요 명령입 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기 전에는 하루도 평안이 없었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는 죄를 제거해 버리기 전에는 참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감사와 만족이, 그리고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라는 뜻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말은 라이트훗이 말한 대로 사도 바울은 확신에 차서 유대교의 조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삭의 운명은 이와 같이 양면성을 갖습니다. 한편으로 보면 이삭이 핍박의 고통 을 당합니다. 다른 편으로 보면 이삭은 상속의 특권이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7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때로는 경멸과 거부를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 이라면 후사요, 하나님과 함께 한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 스도인의 역설적인 존재 양식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 8∼10절에서도 같은 의미의 표현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하였습니다. 이 얼마 나 놀라운 삶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켜서입니까?
아닙니다.
의식적인 것을 보 아서 후사가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주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시고 거짓말하시지 않는 것을 꼭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원받은 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로 그 언약을 힘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은총과 자비와 용서를 받으시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께 오시면 됩니다. 그리하면 우리 하나 하나가 자유하는 여인에게서 난 언약의 아들 이삭처럼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우리에게 모두 이 축복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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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