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란 단어에 끔뻑 죽던 때가 있었다. 지금이야 나그네란 말을 잘 쓰지 않지만 나는 이 구닥다리 단어에 여전히 애정을 갖고 있다.
참으로 토속적이면서 정겨운 단어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목월 선생의 시 나그네를 잠시 떠올려본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이 한 구절만으로 오래전의 익숙한 풍경이 그려지지 않는가.
꼭 이 시의 영향 때문은 아니겠으나 어릴 때부터 나는 어디로든 떠나는 것을 좋아했다.
동네 뒷산에 올라가서도 멀리 보이는 신작로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언젠가는 저 길을 따라 어디론가 떠날 수 있겠지.
저 산 너머에는 누가 살고 있고, 저 길 끝에는 뭐가 있을까.
이따금 읍내 장터에 오던 곡마단이나 유랑극단을 유난히 좋아했다. 이것 또한 내 몸에 잠복되어 있던 떠남의 유전자일지도 모른다.
성인이 되어서도 툭하면 배낭을 챙기는 나를 보고 누이는 저놈의 역마살 하면서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행에서 돌아온 후 나는 또 떠날 궁리를 했다.
오늘은 이제하의 소설 하나를 소개한다. 이제하 소설이 단편, 장편을 포함해 여럿 있지만 나는 이 양반 작품을 많이 읽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유독 인상 깊게 읽은 작품이 있으니 바로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다. 글 제목도 여기서 빌린 것이다.
제목이 길고 독특한데다 이제하의 대표작이면서 많이 알려진 작품이다. 영화로도 만들어졌지만 오늘 글은 소설 위주다.
제목처럼 이 소설 주인공은 나그네다. 아니 여기에 나오는 모든 사람이 나그네라고 해도 되겠다.
죽은 아내의 유골 봉지를 가방에 담고 동해안을 찾은 남자, 그것도 3년 전에 죽은 아내다.
그 남자가 가는 곳마다 만나게 되는 묘한 인연들이 펼쳐진다.
어느 여관에 드니 곧 죽어 가는 노인을 보살피고 있는 간호원이 있다.
그녀는 나그네한테 노인을 휴전선 가까운 곳으로 데려다 달라는 부탁을 하지만 거절한다.
지금은 간호원이란 호칭을 안 쓴다지만 소설에서 간호원으로 부르니 그대로 사용한다. 이 소설이 발표된 것은 1985년으로 41년 전이다.
소설 배경은 12월의 강원도다. 설악산 일대와 물치, 속초, 삼척, 강릉, 원통, 인제, 홍천 등이 나그네가 거친 곳이다.
나그네와 스친 인연 중 여자가 두 명이나 죽는다. 한 여자는 심장마비로 죽고, 한 여자는 차에 치여 죽는다. 사고를 낸 운전자는 여자가 제 발로 뛰어들었다고 항변한다. 이때부터 나그네는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잘 구분이 안 간다.
남자의 아내도 교통사고로 죽었고, 아내 또한 이랬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그네는 간호원의 부탁을 거절한 것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죽은 아내도 이북이 고향이라 했다. 남자는 왔던 길을 되돌아 간호원과 노인을 찾아 나선다.
글이 길어져서 중간은 생략한다. 나그네는 어찌어찌 간호원을 다시 만난다. 그녀는 서운해하기는커녕 남자에게 호의적이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술상을 마주한 간호원이 나그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예전에 어떤 점쟁이가 그러더란다.
<서른에 관(棺) 셋 짊어진 사람을 반드시 만난다. 그 사람이 전생의 네 남편이다>. 간호원은 그 점쟁이의 예언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까.
과연 이 두 사람은 부부로 맺어질 수 있을 것인가. 이 소설은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독자를 매혹시킨다. 오래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홍익대에서 미술을 전공한 이제하 선생은 팔방미인 예술가다. 소설가, 시인, 화가, 교수, 그리고 가수까지,,
조영남이 불러 많이 알려진 <모란동백>은 원래 이제하가 불렀던 노래다.
그가 낸 시집 중에 <빈 들판>이 있다. 그때 시집 부록으로 CD를 제공했는데 시집에 실린 시를 이제하가 작곡을 해서 직접 부른 노래집이다.
물론 거기에 모란동백도 있고 빈 들판도 있다.
이제 노래를 언급할 차례다. 대중에게 많이 알려졌고 나도 즐겨 부르는 노란동백을 올리려 했으나 빈 들판이 낫겠다 싶었다.
부르기보다 듣기에 더 좋은 노래이기에 오늘 글 제목과도 부합한다.
이 곡에는 소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의 배경처럼 빈 들판에 부는 찬바람 소리가 세차게 들린다.
아내 유골을 뿌리기 위해 동해로 온 남자의 마음 속이 꼭 이랬을지도 모른다. 노래를 듣다가 눈쌓인 벌판을 생각하면 더위도 잠시 잊을 수 있을 것이다. 가사는 이렇다.
빈 들판으로 바람이 가네 아아
빈 하늘로 별이 지네 아아
빈 가슴으로 우는 사람 거기 서서
소리 없이 나를 부르네
어쩌나 어쩌나 귀를 기울여도
마음속의 님 떠날 줄 모르네
빈 바다로 달이 뜨네 아아
빈 산 위로 밤이 내리네 아아
빈 가슴으로 우는 사람 거기 서서
소리 없이 나를 반기네
#
이 CD에 실린 다른 곡 하나를 더 올린다. <어느 나무 아래서>다. 이 노래는 가사가 시집에 실린 시와는 많이 다르다.
나는 시집에서 읽은 시가 훨씬 좋았는데 노래를 부른 이제하는 대중들을 위해 가사를 다듬고 순화했을 것이다.
이 노래 역시 위에서 언급한 소설 나그네를 연상시킨다. 하긴 이제하의 많은 시와 노래가 나그네 소설과 겹친 듯한 느낌을 주긴 했다.
이제하 선생이 1937년에 태어났으니 이제 구순에 접어들었다. 주옥 같은 작품과 이렇게 멋진 노래를 부른 선생은 보기 드문 종합 예술가다.
이제하 선생님의 건강을 빈다.
첫댓글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80년대 90년대엔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을 매년 사서 읽었기에 제목이 기억나는데 내용은 깡그리 잊었어요. ^^
오늘 현덕님 글을 읽으며 기억을 더듬어봅니다.
그런데 이제하 선생은 세상에나..
문학의 최고봉을 점령하신 분이 전공은 미술이요 이렇게 음악적 재능까지 뛰어나시다니요.
놀랍고 감탄 그 자체입니다.
올려주신 두 곡을 들어보니 빈 들판은 실험적인 시도가 새롭게 느껴지는 매력이 있고,
어느 나무 아래서는 조용한 기타 반주에 실려 잔잔한 멜로디와 서정적인 가사가 마음에 와 닿는군요.
우리 현덕님은 글 창고에 더하여 음악 창고도 풍성하시니 넘 멋지잖아요. ㅎㅎ
팝힐방에 현덕님 글 자주 올라오니 넘 좋잖아요. ㅎㅎ
아, 현덕님이 제 글벗이라서 자랑스럽습니다! ^^
ㅎ 글 올린 후 어색한 몇 군데 손질하고 오타 수정하고 왔더니 그새 달항아리님 댓글이 달렸네요.
달님 말씀처럼 이 작품이 이상문학상 수상작이 맞습니다. 예전에는 권위있는 문학상이었고, 작품집도 해마다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는 이듬해인가 이상문학상 수상기념으로 묶은 이제하 작품집을 사서 읽었습니다. 초식, 손(手), 강설 등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내용은 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나그네는 워낙 관심 있게 읽은 터라 어렴풋이 기억을 하고 있었지 싶네요.
제가 봐도 이제하 선생은 정말 대단한 작가입니다. 본인 시집에 실린 삽화나 초상화도 전부 당신이 그린 것이더군요.
소설도 좋은 작품이 많지만 저는 시를 더 집중해서 썼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데요.
저도 달님이 제 글벗이라서 자랑스럽고 기쁜 마음이랍니다. 편안한 주말 밤 되세요.ㅎ
필시.. 이 바람소리는
저잣거리에서 듣기 보다는
깊은 산사에서 듣는 듯,--
사나이 거문고 소리를
빈 들판에 담았구나, 하는 마음이
들도록,
울림좋은 기타소리는
전편에 흐르는
둥기당 탕탕, 리듬으로 되살아 나서
인연이 아니고는
이루어지지 않을 묘한 만남을
뒤돌아 보게 합니다.
주말을 맞아 종일 어디를 다녀오느라 답글이 늦었습니다. 수수님께서 이제하님 노래를 아주 시적으로 표현해 주셨네요.
수수님의 음악을 듣는 섬세함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인연이 아니고는 이루어지지 않을 묘한 만남,, 댓글 마지막 부분에서 잠시 눈길을 멈추게 합니다.
아내 유골 뿌릴 곳을 정하지 못해 3년 동안 가방에 넣고 살았던 남자,
북녘 출신인 80 노인이 고향 가까운 곳에서 죽고 싶은 소망을 이루기 위해 떠난 여행이기도 합니다.
빈 들판 노래에 흐르는 세찬 바람이 그런 나그네들의 마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수님 감사합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걷는 나그네...
저도 이 한 줄에 오랜 세월을 설레임으로 살았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이구요..^^♡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이제하님의 소설을 유현덕님 덕분에 맛보기 하며..
바순 악기인가요.
깊은 울림으로 시작하여 찡한 여운을 남기는 이제하님 목소리에 빠져서 들었습니다..
감사드려요...^^
샤론님의 댓글 중에서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걷는 나그네...
저도 이 한 줄에 오랜 세월을 설레임으로 살았답니다..>
맞아요.
시를 잘 몰라도,
이 시, 한 귀절을 떠올리기만 해도,
석양의 설레는 시간들에
많은 위로를 받았고,
그동안 주욱 ~~~~~~ 마음에 품고 지냈었습니다.
@수 수 우리 모두 그런 감성으로 살아왔을거예요..
다시금 추억하게 해주시는 현덕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ㅎ 샤론님이 목월 선생의 시 나그네를 가슴에 담고 있었나 봅니다. 제가 단숨에 외울 수 있는 시이기도 하답니다.
어릴 적에 밀밭보다 보리밭이 더 많았지만 비슷한 풍경을 보고 자랐던 제 정서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노래 빈 들판은 소설을 영화로 만들 때 이제하 선생이 영화 주제곡으로 작곡한 것이라고 합니다.
소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제목부터가 아주 역설적이지요. 여기 나오는 주인공들은 길에서도 쉬고 싶은 나그네입니다.
해서 제 글 제목인 <나그네는 길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는 바로 <나그네는 길에서도 노래를 한다>라는 역설적 표현입니다.
샤론님 즐거운 주말 되세요.
@샤론 .
이 카페에 머무는 동안 제가 샤론님한테 받은 영향이 굉장히 많답니다. 흔히 물든다고 하지요.
비슷한 예술 감각에 깜짝 놀라기도 하고
저한테 없는 걸 발견할 때는 닮고 싶기도 하고
샤론님 고급스런 정서가 부러울 때도 있고
암튼 그렇다는,,
제가 더 감사합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