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에 있는 월산대군 부부 묘. 뒤의 봉분이 부인 순천 박씨의 묘다. 사관들은 연산군이 백모인 박씨를 강간해 박씨의 동생 박원종이 반정을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억지일 가능성이 크다. 사진가 권태균 |
“이보다 앞서 왕이 미행(微行)하면서 환관 5, 6인에게 몽둥이를 쥐어주어 정업원(淨業院)으로 달려가 늙고 추한 비구니(尼僧)를 내쫓고 연소하고 자색 있는 7, 8인만 남게 해 간음하니 이것이 왕이 색욕을 마음대로 한 시초다.”
소문이 두려워 기생도 꺼리던 연산군이 정업원의 늙고 추한 비구니를 시끌벅적하게 때려 내쫓고 젊은 비구니를 취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중종실록』은 “처음 전전비(田田非)·장녹수(張綠水)를 들여놓으면서부터 날이 갈수록 거기에 빠져들었고, 미모가 빼어난 창기를 궁 안으로 뽑아 들인 것이 처음에는 백으로 셀 정도였으나, 마침내는 천으로 헤아리기에 이르렀다”라며 연산군이 1000명의 후궁을 거느린 것처럼 묘사했다. 그러니 양기(陽氣) 보양에 관한 이야기가 빠질 수 없었다.『연산군일기』9년(1503) 2월 8일자는 “백마(白馬) 가운데 늙고 병들지 않은 것(老無病)을 찾아 내수사로 보내라”는 전교를 기록하면서 “백마 고기가 양기를 돕기 때문이다”라는 논평을 덧붙였다. 양기 보양에 늙은 말을 쓸 리 없다는 상식도 무시했다.
흥청망청이란 말이 있다. 흥에 겨워 재물을 마구 쓰며 즐기는 것을 가리키는데 연산군이 만든 흥청(興淸)이 어원이다. 사관들은 연산군이 흥청들과 대궐이나 길가에서 집단 혼음(混淫)을 벌인 것처럼 자주 묘사했다. 그러나 흥청은 연산군의 혼음 대상이 아니라 국가 소속의 전문 음악인들이었다. 운평(運平)·광희(廣熙)도 마찬가지다. 연산군은 재위 10년(1504) 12월 “흥청이란 바르지 못하고 더러운 것을 씻으라는 뜻이고, 운평(運平)은 태평한 운수를 만났다는 뜻”이라고 설명하고, “모든 악공(樂工)과 악생(樂生)은 모두 광희라고 칭하라”고 명했다. 광희부터 설명하면『경국대전』예전(禮典)에는 악생(樂生)은 297명, 악공(樂工)은 518명이라고 규정돼 있다. 이들 국가 소속의 악생과 악공들을 높여서 부른 새 명칭이 광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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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뽑힌 선상기 중 뛰어난 음악인이 흥청이다.『연산군일기』는 재위 12년(1506) 3월 “흥청악 1만 명을 지공(支供)할 잡물과 그릇 등을 미리 마련하라”고 명했다고 써서 흥청악이 1만 명이나 되는 것처럼 묘사했다. 그러나 연산군이 11년 4월 “흥청은 어찌하여 수를 채우지 못하는가?”라고 묻자 장악원은 ‘정원 300명 중 93명을 채웠고 207인을 못 채웠다’고 답했다. 93명을 겨우 채운 흥청이 11개월 만에 1만 명으로 늘어났다는 것이니 이 역시 사관의 창작이다. 삼악(三樂) 모두가 여성인 것도 아니었다. 연산군 12년(1506) 광희악(廣熙樂) 김귀손(金龜孫)이 운평 관홍군(冠紅群)을 강간하려고 폭력을 행사했다가 처벌받은 사건이 이를 말해준다.
삼악에 대해 사대부들이 분노한 것은 자신들과 접촉을 차단시켰기 때문이다. 그간 여악(女樂)은 사대부들의 예비 첩이나 마찬가지였다. 연산군은 재위 11년 1월 부모의 장수를 비는 헌수연(獻壽宴)을 제외하고 여악들을 조사(朝士:벼슬아치)의 집에 가지 못하게 하고, 이듬해 2월에는 광희를 사천(私賤:사노비)으로 만들어 첩을 삼을 수 없게 했다. 연산군은 흥청을 최고의 예술가로 대접했다.
재위 11년 2월에는 흥청악 공연 때 “비록 제조(提調)일지라도 의자를 치우고 땅에 앉아야 한다”고 명했다. 이보다 앞선 재위 8년(1502) 3월 연산군은 “이제부터 궐문 밖으로 행행(行幸)할 때에 여악(女樂)을 쓰지 말라”고 명하고 신하들에게 내려주는 각종 잔치 때도 남악(男樂)만 내려주었다. 그러자 같은 해 10월 정1품 영사(領事) 성준(成俊)이 항의한다.
“지금 여악은 하사하지 않고 남악만 하사하십니다. 우리나라는 원래 여악을 사용했지 남악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지금은 비록 술을 내려도 쓸쓸할 뿐 즐거움이 없습니다. 마셔도 취하지 않으면 위로하는 뜻이 아닐 것이니 조종(朝宗)의 고사를 따르소서.(『연산군일기』 8년 10월 28일)”
잔치 때 여악을 내려달라는 주청에 대해 연산군은 “대개 조관(朝官:벼슬아치)들이 여기(女妓)를 담연(淡然:욕심이 없음)하게 보지 않으니 한자리에 섞이게 할 수 없었다”면서도 앞으로는 여악을 내려주겠다고 답했다. 그러자 성준은 “성상께서는 사용하지 않으시면서 신들에게만 사용하게 하시니 황공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흥청은 연산군보다 사대부들의 색탐(色貪)의 대상이었다.
사대부들이 요순(堯舜) 임금으로 묘사한 연산군의 부친 성종은 3명의 왕비와 9명의 후궁에게서 16남21녀를 낳았다. 1000명의 후궁이 있었던 것처럼 묘사된 연산군은 4남3녀에 불과했다. 왕비 소생의 2남1녀를 빼면 후궁 조씨 소생의 두 서자와 장녹수와 정금(鄭今) 소생의 두 서녀(庶女)가 있었을 뿐이다.
사관은 또 연산군이 백모(伯母)인 월산대군 부인 박씨를 강간했다고 주장했다. 연산군 12년(1506) 7월 박씨가 세상을 떠나자 사관은 “사람들이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이때 연산군은 서른한 살이었다. 당시 사대부들의 부인이 남편과 동갑이거나 한두 살 많은 풍습과 비교해 보면 세조 12년(1466) 열세 살의 나이로 월산대군과 혼인한 박씨가 사망할 때 나이는 53~55세 정도다. 당시 이 나이의 여성이 잉태할 수는 없었다.
연산군은 박씨가 사망하기 한 달 전에 시어머니 소혜왕후의 와병 때 정성을 다했고, 세자(이황)를 자기가 낳은 자식같이 돌보았다면서 절부(節婦)로 표창하고 승평부(昇平府) 대부인(大夫人)으로 승격시켰다. 절부 표창 기사 아래 사신은 “박씨에게 특별히 세자를 입시(入侍)하게 명하고 드디어 간통을 했다”라고 적고 있으니 아무리 원한이 뼈에 사무쳤다 해도 심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박씨의 부친 박중선은 공신이고 또 큰이모가 세종비 소헌왕후였다. 박원종도 이런 이유로 왕실 일가 대접을 받았다. 성종이 무과 출신인 박원종을 승지로 임명하자 대간은 “외인(外人)은 모두 박원종을 발탁한 것이 월산대군 부인 때문이라고 합니다”라고 비판했으나 『성종실록』의 사관은 성종이 형수를 간음했다고 쓰지는 않았다. 연산군도 많은 비판을 받으면서도 박원종에게는 마음대로 벼슬을 고르게 할 정도로 우대했다.
시에는 능하지만 역사서는 등한시했던 연산군은 반란은 최측근에서 일어나기 쉽다는 사실에 무지했기에 박원종이 반정을 주도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또한 자신이 역사상 가장 황음무도한 폭군으로 기록될 줄도 전혀 몰랐다. <계속>
※참고서적:『연산군을 위한 변명』(신동준, 지식산업사, 2003)『연산군 그 허상과 실상』(변원림, 일지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