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불교와 문화 >
영화, 나랏말싸미
새로운 문자 창조보다 더 어려운 |
글 | 스텔라 박
지난 2019년 7월에 개봉된 <나랏말싸미>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 세종 치하로 날아가 한글 창제의 과정을 지켜보는 것 같은 경험을 선사한 영화였다.
영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출연 배우일 터. 주인공인 세종대왕 역은 믿고 보는 배우 송강호가 맡았다. 그리고 스님이 됐더라면 참 좋았겠다 싶은, 진짜 스님인가 착각할 정도로 삭발이 잘 어울린 박해일이 신미대사로 출연해 수행자의 묵직한 포스까지 풍기며 열연을 했다. 그가 스님 역할을 위해 직접 절에 찾아가 스님들을 만나보며 캐릭터에 대해 연구했다고 하는 얘기를 전해들으며 좋은 연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세종의 아내 역을 맡았던 전미선은 지난 2019년 6월 29일, 돌연 스스로 목숨을 끊어 안타까움을 자아냈던 배우이다. 평소 외로움의 병, 우울증을 앓았다고 하는데 스크린에서 본 그녀는 불심 깊은 지혜롭고 현명한 왕비의 모습이었던지라, 눈에 보이는 것이 실제가 아닌 허상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했다.
열린 마음의 조철현 감독
연출자인 조철현 감독은 <나랏말싸미>가 감독 데뷔작이다. 연출은 처음이지만 그는 영화판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지난 30여 년간, 영화 배급사와 영화 제작사를 거쳐가며 외화 수입 업무와 영화 제작 일을 두루 경험해온 영화계 통이다. 그가 자막을 번역한 외화만 800편이 넘는다고 하니 말 다했다. 그가 기획하고 제작하고 각본에 참여했던 영화로는 <황산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평양성>, <사도>가 있다. 타이틀만 봐도 대충 짐작할 수 있듯 이 영화는 모두 사극이었다. 그는 어쩜 이 시대의 이야기보다 역사 속 인물들을 재해석하는 작업에 훨씬 더 큰 관심과 열정을 키워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조철현 감독은 1959년에 태어났으니 올해로 환갑을 맞았을 것이다. 물론 요즘은 환갑이라 할지라도 청년이라 부를 만큼 몸 건강하고 젊은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환갑을 맞은 이들이 모두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마음이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조철현 감독은 영화판에서 자신이 이제껏 해왔던 각본, 번역, 제작 일이 아닌 전혀 새로운 일, 즉 연출에 도전장을 내밀 만큼 젊은 패기를 지닌 인물이다.
조철현 감독이 15년 전부터 훈민정음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까막눈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한글을 깨우치지 못했던 것이 평생 한이었단다. 그래서 더욱 한글창제를 주제로 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아들… 대를 넘어 이어지는 어머니의 한과 그 한을 풀어주려는 아들의 노력이 한 편의 아름다운 영화로 꽃피어진 셈이다.
조철현 감독은 한민족 5천년 역사 가운데 팔만대장경과 훈민정음이 가장 위대한 성취라고 생각한다고 여러 매체를 통해 밝힌 바 있다. 불교신자인 그는 우리 나라 역사를 깊게 파고 들던 중, 팔만대장경과 훈민정음 사이에서 신미대사라는 연결 고리를 발견해낸다.
영화의 메인 캐릭터 1, 세종대왕
<나랏말싸미>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충무공 이순신과 더불어 가장 잘 알고 가장 친근하게 여기는 역사상 인물인 세종대왕이, 다소 생소한 신미대사와 투톱 메인 캐릭터인 영화이다. 세종대왕은 100원짜리 동전과 1만원짜리 지폐의 모델인데다가 광화문에도 동상이 서 있는, 한국 역사상 최고의 위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너도 나도 세종대왕에 대한 나름대로의 상(象)을 가지고 있다. 그 상들은 장님이 만진 코끼리의 일부처럼 세종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전체적으로 설명해주지 못한다.
세종대왕은 조선조 3대 임금인 태종의 세번째 아들이었다. 장남이 아니면서도 세자로 책봉된 이유는 장남 양녕대군이 너무 개차반인데다가 둘째인 효령대군마저 훗날 출가해 스님이 되었을 만큼 권력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은 어린 시절부터 책읽기를 좋아했으며 무척 총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픈 동생을 직접 옆에서 간호했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볼 때, 성품 또한 온화하고 인자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내인 소헌황후와 금술이 좋아 자식 농사도 주렁주렁 많이 지었고 후궁을 들인 것도 상당히 나이가 들어서였다고 한다. 어쨌든 세종은 대왕으로 불릴 만큼 업적이 많은 임금이니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정무에 매진하느라 시간도 별로 없었을 터인데 어느 세월에 자식 농사를 그리도 열심히 지으셨는지, 감탄할 뿐이다.
세종은 비만이었고 수랏상에 고기가 없으면 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온갖 성인병에 안질까지 안고 살다가 50초반에 세상을 떠났으니 건강 관리에는 빵점이었던 군주였다.
각설하고 세종대왕 최고의 업적은 누가 뭐래도 훈민정음 창제였다. <나랏말싸미> 영화의 관심도 다름 아닌 바로 이 부분이다.
영화의 첫 장면, 가뭄이 심해지자 기우제를 지내던 세종은 축문을 한자로 읽는 신하에게 버럭 역정을 낸다. “그렇게 말하면 이 땅의 신이 알아듣겠느냐? 우리 말로 하거라!”
영화가 역사를 100퍼센트 그대로 옮길 이유도 없고 꼭 그래야 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실제 세종이 우리 말을 쓸 수 있는 글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된 것이 기우제를 지내면서였는지, 아닌지, 알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은 영화에서 주인공이 영화 전체의 스토리를 이끌고 나갈 만한 의도(Intention)를 세우고 굳히는 장면이다.
말과 글이 다른 폐해가 어디 한둘이었을까. 기록할 수 있는 도구라고는 달랑 한자만 있었던 시대, 지식은 모두 사대부와 배운 자들, 즉 가진 자들이 독점할 수밖에 없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즉 한글을 창제하려고 한 의도는 가진 자들만이 독점하고 있는 지식과 정보와 기회를 백성들에게 돌려주려는 의도에서였다.
예나 지금이나 기득권층은 떡고물을 자신들만 먹기 원한다. 당시 사대부들이 훈민정음 창제를 얼마나 반대하고 나섰을까. 마치 21세기 대한민국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공수처 설치 반대하듯 결사적이었음은 역사서를 들춰보지 않더라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중국은 조선을 마치 자신의 속국처럼 여겼으니 명나라에서도 한글 창제를 탐탁치 않게 여겼음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 일.
눈도 침침하겠다, 몸은 천근만근, 아무리 언어와 문자에 관한 서적을 파고들어도 뭔가 뾰족한 발상의 전환이 일어나지 않자, 세종은 스스로 능력의 한계를 느낀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분노한다. 아무리 왕이라 할지라도 당시 책은 무척 귀한 것 아닌가. 그 귀한 책을 장대비 내리는 마당에 던져버리는 장면은 이제껏 한자를 써오던 이들로서는 도저히 뛰어넘기 힘든 고정관념의 벽에 대해 스스로 백기를 들고 만 세종의 마음을 역으로 표현한 것인지 모른다.
박해일이 연기한 신미대사
극중 세종대왕과 신미대사
소릿글자 산스크리트어 전문가, 신미대사의 등장
영화 <나랏말싸미>에서 신미대사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기억하는 한, 나무 판자에 경전을 조각하는 모습이다. (팔만대장경의 목판이다.)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조선에서 한때 세도 있던 집안의 자제인 신미는 개보다 못한 신분, 승려가 되기를 자처한다.
한글 창제와 정무 수행만으로도 파김치가 될 판인 세종에게 귀찮은 일이 생긴다. 일본의 승려들이 조선을 방문해 팔만대장경 원본을 달라고 생떼를 쓴 것이다.
왜 이런 얼토당토 않은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듯 하다. 신분고하를 뛰어넘어 하나된 고려인 125만명은 불교의 힘으로 몽골 침략을 막겠다는 일념으로 1236년부터 16년간에 걸쳐 팔만대장경을 완성시킨다. 팔만대장경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정확한 불교 대장경으로 인정받아 2007년 6월,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된 바 있다.
일본은 조선 건국 직후부터 팔만대장경판에 집착했었다. 조선의 포로를 돌려보내줬다는 답례로 대장경 인쇄본 2질을 주었더니, 포로 송환 때마다 대장경을 달라고 애걸하기 시작한 것이다. 숭유억불 정신으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후예인 태종은 한때 일본에게 대장경판을 건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기도 했었다. 하지만 대신들의 강한 반대로 결국 마음을 바꾼다. 조선 사대부들의 공로가 인정되는 몇 안 되는 역사적 사건이다. 사실 이것도 팔만대장경의 가치를 알아서는 아니었다. 이번에 넘겨주면 나중에 또 다른 요구를 해올텐데 어떻게 감당하겠느냐는 이유에서였다. 대신 찍어낸 대장경 판본을 죄다 일본에게 내주어 조선에는 대장경 책이 사라졌고 일본의 불교문화는 눈부시게 발전했다니 통탄할 일이다.
판본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일본은 코끼리를 가져다 바치며 대장경판을 요구하기도 했고 이게 통하지 않자 세종 때에는 사신단이 건너와 단식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류큐(오키나와) 왕국은 해인사로 무장 군대를 보내서 대장경을 약탈하고자 했었다.
이때 팔만대장경 원본을 가져가겠다며 생떼를 쓰는 일본 승려들을 제압하고자 소헌왕후는 산스크리트어 실력이 출중한 신미대사를 궁궐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그는 일본 승려들과 유창한 산스크리트어로 담판을 지으며 찍 소리 못하고 돌려보내는데 성공한다.
언어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었다면 신미대사가 산스크리트어를 했건, 일본어를 했건 그저 헤벌쭉 “이상한 말, 잘 하네…”하고 말았겠지만 그간 언어학에 대해 나름 칼을 갈아온 세종대왕은 자신이 넘을 수 없었던 고정관념의 벽을 뚫을 수 있는, 새로운 문자 창조의 가능성을 신미대사에게서 본다.
세종이 신미대사를 궁으로 불러 첫 대면하는 장면. 어전에서도 머리 조아려 절을 하지 않는 신미를 이상히 여긴 세종이 묻는다.
“너는 어찌 하여 절을 하지 않는게냐?”
이에 대한 신미대사의 답변이 예술이다.
“개가 절 하는 것, 보셨습니까?”
뼈 있는 말… 직접 말하지 않고도 핵심을 전하는 한 마디… 신미대사는 이 말 한 마디로 그간 조선의 불교 탄압 정책에 대해 KO승을 이끌만한 한 방을 먹인다.
세종은 자신의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심기일전하여 새롭게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 하며 한글 창제에 힘써보자며 신미대사에게 이런 제안을 한다.
“나는 공자를 내려놓고 갈 테니, 너는 부처를 내려놓고 와라.”
이에 대해 신미대사는 한 수 위의 발언을 한다.
“아니요. 나는 부처를 타고 가겠습니다. 주상은 공자를 타고 오십시오.”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할 것을 하고, 자신이 본 세계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대화를 나눌 때, 다양성이 확보된 새로운 창조물이 나올 수 있음을 신미대사는 일갈한 것이다.
신미대사의 초상화
한글 창제설의 주인공, 신미스님은 누구인가
신미스님(1403∼1479)은 사대부 유학자 김훈의 맏아들로 속명은 김수성이었다. 그는 성균관에서도 총망받던 인재였다. 그런 가운데 아버지 김훈이 조모의 빈소를 지키지 않고 떠났다는 이유로 집현전 학자들의 탄핵을 받아 유배를 떠나게 되자 집안은 풍지박산이 나고 김수성은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비본질적인 적에 천착하며 당쟁을 일삼는 수구세력은 어쩜 이렇게도 변함이 없는지… 혀를 차게 된다.)
출가 후 신미스님은 여러 사찰에서 수행을 거듭하면서 대장경을 정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장경 속 잘못 번역된 글자들을 바로 잡기 위해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 등 5개 국어를 공부한 결과, 상당한 경지에 오르고 학문에 통달하게 된다.
영산 김씨(永山 金氏) 족보에는 신미대사가 출가하기 전에 집현전 학사로 있었다는 기록 [“집현전 학사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集賢院學士 得寵於世宗)”는 기록]이 있다. 아마도 관직에 있었던 동생, 김수온 덕에 세종대왕과 접견할 기회를 가졌던 것 같다. 신미대사의 능력을 높게 평가한 세종대왕이 그를 집현전 학자로 받아들이고 다른 집현전의 학자들에게 산스크리트어의 모음 자음 등 언어체계를 설명하게 했었다는 것도 추측해볼 수 있다. 영산 김씨 족보는 신미대사가 세종대왕과 함께 한글 창제에 관여했다는 추측을 해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이다.
이후 신미대사는 세종과 문종의 여러 불사를 도왔을 뿐 아니라 세조가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불전을 번역, 간행했을 때 이를 주관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석보상절>의 편집을 실질적으로 이끌었고 방대한 양의 <원각경>을 비롯해 <선종영가집>, <수심결> 등을 한글로 번역하기도 했다. 이 저서들은 초기 한글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들이다.
조선의 왕들이 존경한 정신적 스승, 신미대사
조선이 아무리 유교를 국시로 출발한 나라라 하더라도 조상들의 불교적 세계관이 하루 아침에 바뀔 수는 없는 일. 1446년 왕비 소헌왕후 심씨가 세상을 떠났을 때, 세종은 아내를 위해 절을 짓고 신미대사로 하여금 천도제를 지내게 했다.
신미대사는 세조가 스승으로 모시던 스님이자, 소헌왕후 타계 이후 불교를 배척하던 세종이 불교에 귀의해 스승으로 받든 스님이기도 하다. 세종대왕의 아들인 문종은 세종의 유지를 받들어 신미에게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 나라를 위하고 세상을 이롭게 한, 지혜를 깨우쳐 반열에 오른 분)"라는 긴 법호를 내렸다.
훈민정음.. 아름다운 한글
일어날 수 있는 허구, 영화에 대해 열린 마음이 필요해…
한글의 기원을 산스크리트어에서 찾는 시도는 이미 있어왔다. 한글이 그처럼 빼어난 언어체계인 것은 당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던 언어들을 거의 다 망라하여 비교 분석한 후 만든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산스크리트어를 잘 몰라 그 체계가 얼마나 유사한지는 모르겠다만 신미대사와 그 제자들이 구강 구조를 탐구해가며 자음과 모음을 하나둘씩 만들어가는 모습은 쉽게 상상해볼 수 있는 장면이다.
영화는, 특히 사극은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하지만 역사 그대로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역사적 사건을 해석하는 것은 해석하는 자의 몫이다. 왜곡이 아니라면 말이다.
영화 <나랏말싸미>를 본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신미대사의 출연과 그가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다는 이야기가 무척 불편한 듯 하다. 본래 허구가 본질인 영화임에도 말이다. 영화를 본 이들은 인터넷에 ‘역사 왜곡’이라는 평을 남겼고 박스오피스 흥행 성적을 봐도 제작비를 건지지 못할 만큼 관객들이 냉대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왜일까. 그동안 수많은 드라마를 통해, 우리들에게는 한글을 창제하고자 뒷짐 짓고 천천히 걸으며 아이디어 내기에 몰입해 있는 세종이 마음 속에 있기 때문이다. 성삼문, 신숙주 등 집현전 학자들과 회의를 주재하며 문살에서 기억, 니은, 디귿, 리을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는 세종이 우리 마음 속에 너무 크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혹시 이런 가능성은 없을까, 하며 여러 사료들을 근거로 스토리를 엮은 <나랏말싸미>를 받아들일 만한 가슴이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이후, 집현전 학자들이 세종과 더불어 한글창제를 주도했다는 이론은 설득력을 점차 잃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집현전 학자들은 한글에 대해 이런 상소문을 올렸던 기록이 있다.
“굳이 언문을 만들어야 한다 하더라도 마땅히 재상에서 신하들까지 널리 상의한 후 후행해야 할 것인데, 갑자기 널리 펴려 하니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 상소문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 창제 프로젝트 자체를 아예 몰랐다는 것이다. 세종대왕이 한글 창제를 선언한 것은 1443년 12월. 그때까지 세종대왕은 이 일을 무척 신중하게, 비밀리에 추진했던 것 같다. 영화에서도 사대부들이 한글 창제 작업을 하는 스님들을 보고 트집잡을 것을 우려해 관복을 입히는 장면이 있다.
게다가 성삼문은 집현전에 들어온 시가가 한글이 창제될 무렵이었고 신숙주의 경우, 창제 2년 전에 들어오긴 했다만 이듬해에 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실제 한글 창제에 참여했을 리가 없다. 경상대학교 국문과의 여증동 명예교수는 이에 대해 “실록에도 전혀 그런 말이 없다. 모든 사람들이 잘못된 내용을 알고 있다. 세종께서 알면 통탄할 것이다.”라고까지 말했었다. 한번 사람들 인식에 자리잡은 상은 이처럼 허물기 어려운 것이다.
신미대사가 훈민정음 창제에 깊이 관여했던 결정적 사료는 없지만 정황은 여러 곳에 있다. 신미대사는 세종과 문종의 여러 불사를 도왔고, 간경도감 설치, 불전의 한글 번역과 간행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또한 2300여 쪽에 이르는 <원각경>, <선종영가집>, <수심경> 등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훈민정음으로 직접 번역했다. 즉 오늘날 전하는 상당수의 훈민정음 문헌은 바로 신미대사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또한 신미대사는 <조선왕조실록>에 67회 정도 언급되고 있는데 단 한번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왜일까. 그 이유를 알려면 조선이 처한 시대상황을 먼저 살펴야 할 것이다. 조선에서 승려는 타도해야 할 구 시대의 악습이자 세력이었음을 기억하자.
자, 다시 정리한다. <나랏말싸미>는 상당히 가능성 있는 역사적 사실을 영화로 엮어내며 문제를 제기한다. 이에 대해 열린 사회, 열린 가슴을 가진 이라면 흥미를 느끼고 더 연구해보면 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렇게 유연하지도 않고 우리들 가슴은 기존의 고정관념으로 견고하게 굳어있었다. 사료들을 하나둘 검증해가는 과정에서 이제껏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사실을 접할 때, 얼마나 유연한 태도로 새로운 사실에 적응할 수 있는가는 그 사회의 성숙도와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신미대사가 한글창제에 참여했다고 해서 세종대왕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 영광은 한글창제의 원을 세우고 사업을 벌였던 당대 왕의 몫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가능성에 대해서조차 이처럼 닫힌 마음을 내는가.
에필로그
세종대왕은 1443년,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나서 곧바로 백성들에게 반포하지 않았다. 그는 이 새로운 문자 체계가 과연 괜찮은 것인지 3년간 직접 시험을 해보고 자신감이 생긴 후인 1446년가 되어서야 비로소 백성들에게 반포했다. 그 3년간의 시험 기간 동안에 집필한 것이 <용비어천가>이다. 즉 <용비어천가>는 조상들의 신분 세탁을 목적으로 했다기 보다는 한글을 시범적으로 운용해보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던 셈이다.
이 영화는 여러 장면이 불교신자들의 가슴을 적신다. 세종대왕이 나이가 들어 안평대군에게 훈민정음 해례본을 받아 적게 하는 장면. “모두 몇 자이냐?”라고 묻고 109자라는 답을 들은 세종은 108번뇌, 108배 등, 불교신자들에게 남다른 숫자인 108자로 만들기 위해 한 글자를 빼어 완성하게 한다. 우리 민족의 DNA에 심겨져 있는 불교적 유전자… 그 한글로 씌여진 불경을 읽으며 세존의 가르침을 배우고 수행해 우리 모두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행복하기를 바래 본다.
스텔라 박은 1980년대 말, 연세대학교에서 문헌정보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재학시절에는 학교신문인 연세춘추의
기자로 활동했다. 미국으로 건너와 지난 20년간 한인 라
디오 방송의 진행자로 활동하는 한편, 10여 년 동안 미주
한인 신문에 먹거리, 문화, 여행에 관한 글을 기고해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