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심을 버리자!(골3:1-6)
2024.10.20,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윤동주 시인의 [별헤는 밤]이라는 시(詩)를 생각나게 하는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계절이 깊을수록 더 고개 숙이는 알곡들, 거친 바람에 여전히 쓰러져 있는 볏단들, 추수하는 콤바인, 활짝 핀 국화, 가는 바람에 마지막 몸찬양을 부르면서 싸여가는 낙엽들……. 이 모든 모습들이 허투로 보이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나”라는 존재가 무엇이고, 인생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할 지에 대해 상당부분을 이미 자연만물을 통해서도 보여주셨다. 이런 것을 일반계시라고 한다.
계절이 깊어가듯이, 어제 보다 더 풍요롭고 깊은 오늘이 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부요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한 “부요”는 ‘소유’가 아니라 ‘관계’를 의미한다. 그 관계는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올바르고 진실 된 관계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말씀하셨다. 이 두 가지 방향에서도 우선순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우리(나) 사이가 사랑으로 넘칠 때, 그 사랑의 샘물이 내 주변의 사람들에 까지 흘러가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부요하게 살아가는 방법이며, 참된 행복의 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께 대해 부요한 삶을 살아가려 할 때, 반드시 내려 놓아야할(또는 버려야할) 것이 있다. 그것은 탐심이다. 탐심을 버려야 하나님께는 물론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행복해질 수 있다. 국어사전에 보면, 탐심이란 단순히 “탐내는 마음”이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단어의 헬라어 원뜻을 보면, 그 의미가 좀 더 분명하다. 탐심(플레오넥시아)는 “더욱 많은”(흘레온)과 “가지다(에코)”의 합성어이다. 다시 말하면, 기존의 것 이상으로 더 많이 소유하려는 지나친 욕구를 말한다. 탐심의 중심에는 늘 자신이 있다.
탐심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 탐심은 오물과 같은 것이다. 탐심이라는 오물이 묻어 있는 마음은 마치 설거지되지 않은 그릇과도 같다. 쓰레기와 오물이 있으면, 파리나 쥐, 고양이 같은 것들이 모여든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에 탐심이라는 쓰레기 있으면, 그것을 보면서 마귀가 달려든다. 이것을 치워야 그런 것들이 힘을 쓰지 못한다. 탐심이 마음을 지배하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물도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음성인지 마귀의 음성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가족의 울음소리도, 이웃과 성도들의 신음소리도 듣지 못한다. 안 들려서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들려도 못 듣는 것이다.
일본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일본의 와카야마 현에 76살 남성 “노자키 고스케(野崎幸助)”라는 사람이 있었다(2023.3.6.MBC 에브리원 “장미의 전쟁”에서 소개). 노자키는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보냈다. 어린 시절 그의 꿈은 큰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생업전선에 뛰어들었고, 성인이 된 후에는 고액 납세자 명단에 오를 만큼 많은 부를 축척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자신이 돈을 벌고 싶었던 이유를 말했는데, 그 이유가 충격적이었다. 그것은 "마음에 드는 여성과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돈을 벌었다"고 밝힌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까지(약55년 동안) 4000명의 여성에게 300억 원을 썼다고 했다. 심지어 앞으로도 여자들에게 돈을 쓰기 위해 살겠다고 했다.
노자키는 많은 여성들을 만나는 과정에서도 2번의 결혼과 이혼을 했다. 그런데 그는 76세에 55세 연하인 21세 여성 스도 사키와 세 번째 결혼을 했는데, 결혼 3개월 만에 돌연사 했다. 경찰의 조사결과 노자키의 사인은 급성 각성제 중독이었으며, 범인은 그의 아내인 스도 사키로 밝혀졌다. 스도는 다시 바람을 피우기 시작한 노자키로 인해 마음이 조급해져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심지어 호스트 출신의 내연남까지 있어 충격을 안겼다. 노자키 코스케의 살아온 과정과 죽음은 충격적이다. 그는 돈으로 쾌락을 사고자 했고, 그 쾌락이 행복을 주는 것으로 착각했다. 탐심이 그의 마음을 마비시키고, 눈과 귀를 다 막아 버렸다. 마귀 사탄은 쾌락이나 편리함을 행복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노자키의 사례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사탄이 탐심을 이용해서 얼마든지 치고 들어올 개연성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 노자키 고스케 이야기 (2023.3.6.MBC 에브리원 “장미의 전쟁” - https://www.youtube.com/watch?v=GDiub6HEKBk
창세기 3장의 하와가 뱀에게 미혹을 당한 것도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했던 탐심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탐심은 교만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했다(골3:5-6).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 3:5-6)
이 말씀에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는 말은 곧 위엣 것을 찾는 성도들은 성도로서 덕스럽지 못한 행동을 유발시키는 옛 습성들을 과감하게 도려내라는 말씀이다. “이런 것들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말씀은 곧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분노를 유발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에 쌓이는 탐심의 오물을 버리고, 씻어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을 어디에 어떻게 버려야 하는가? 바로 십자가 밑에서 주님의 보혈로 씻어내야 한다. 그 방법이 자백과 회개의 기도이다. 십자가 밑에 탐심을 다 내려놓는다는 것이 바로 자기부인이고, 주님을 내 마음의 왕(王)으로 인정한다는 고백이다. 그리고 깨끗해진 마음에 말씀을 대신해서 채워야 한다. 매일 기도와 말씀묵상과 적용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권면했다.
“3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속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말씀)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3-4)
이처럼 하나님께 부요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 중에 백화점왕 존 워너메이커(John Wanamaker,1838~1922, 장로)가 있다. 그는 사업을 하면서도 탐심을 내려놓고 앞에서 말한 노자키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다. 워너메이커는 가난한 형편으로 인해 제대로 된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는 10살 때 성경 한 권을 구입하기 위해서 1년 반 동안 아버지의 벽돌공장에서 벽돌을 나르면서 일을 했고, 15살 때는 하루에 2시간씩 성경을 읽겠다고 결심하고 이후에 평생 동안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워너메이커는 고생 끝에 결국은 1875년에는 필라델피아 철도청의 화물보관창고를 구입해 최초의 백화점을 개업했다. 그때에도 백화점 한 쪽에 기도실을 마련하고 수시로 기도했다. 그는 65년 동안 YMCA 활동을 하며 많은 세계 도처에 선교활동을 후원했으며, 1908년 서울YMCA 빌딩건축에도 거액의 헌금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워너메이커의 생애서도 눈에 띠는 것은 그가 주일학교 교사직을 평생의 본업으로 삼고 살았던 것이다. 워너메이커는 1889~93년에 미국 대통령 벤저민 해리슨 정부에서 체신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가 장관직을 제의 받았을 때, “주일성수와 주일학교 교사를 못한다면 장관직을 수락할 없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은 유명하다. 그는 백화점왕이라는 말이나, 장관이라는 호칭보다도 주일학교 교사를 더 귀히 여겼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하나님 안에서 생각하고, 하나님 안에서 노력하고, 하나님 안에서 땀 흘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내 인생의 표어였으며, 내 인생의 전부였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일본인 노자키와 워너메이커의 대조적인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노자키는 “땅의 것”을 추구했고, 워너메이커는 성경말씀대로 “위의 것”을 추구했다(골3:1-2). 노자키는 행복 팔아서 돈을 벌었고, 그 돈을 쾌락을 위해 썼다. 그러나 워너메이커는 하나님께 부요한 삶을 살았다. 그는 천국에 미리 보내는 삶을 살았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내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탐심을 십자가 밑에 다 내려놓자. 이것이 자기부인이다. 그래야 그 빈자리에 주님이 주시는 이전에 없던 새 은혜가 채워진다. 그래서 이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의 기쁨과 주님의 능력과 기적으로 내 것으로 누리며 살아가자.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