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꽂을 굳은 땅
-전삼용신부-
저와 함께 공부하는 한국의 한 부제님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관계도 좋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부제입니다. 그러나 그것 이외에 어떤 다른 면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겨울을 지나며 그 부제님의 훨씬 성숙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유럽에서 공부하는 교구 사제와 신학생들은 대부분 겨울에 한 곳에 모여서 연말연시를 함께 보냅니다. 그 부제님 교구도 오스트리아의 한 도시에서 함께 모였고 저희 교구는 독일에서 모임을 했습니다.
독일에서 모임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교구 신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그 부제님이 다쳐서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디가 다쳤느냐고 했더니 자세한 내용은 말하지 않고 광대뼈가 함몰되었다고 했습니다.
저희는 걱정을 하며 로마로 돌아왔습니다. 역시 그 부제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일주일 넘게 로마에 오지 못했습니다. 일주일이 넘어서 수업시간에 모습을 나타냈는데 눈은 시퍼렇게 부어있었고 눈 밑과 볼에 수술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아직 실도 못 빼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안타까워서 어찌 된 것이냐고 물었는데 그 부제님은 웃으며 광대뼈를 고정시키기 위해 티타늄을 세 개 박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쪽 얼굴엔 감각이 없다고 했고 몇 달 감각이 돌아올지 지켜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무 일 아닌 것처럼 말했습니다. 만약 저의 얼굴이 그렇게 되었다면 크게 상심하였겠지만 그 부제님은 너무나 태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 교구 신부에게 물어보니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남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사실은 눈썰매를 타다가 앞 사람의 머리에 얼굴을 부딪쳐 얼굴이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다. 독일어 한 마디도 못하는데 우선 한 병원에 입원시켜놓고 교구 식구들은 잠이라도 제대로 자려나 하며 걱정을 했다고 합니다. 다음날 찾아가니 웃으며 “켄터키 프라이드 안 사오셨어요?”하며 농담을 했고 이어서는 “이번에 수술하는 김에 맘에 들게 얼굴도 좀 같이 고치면 안 될까요?”하며 선배 신부님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하였습니다.
자신의 얼굴이 그렇게 되었으면서도 그렇게 여유 있게 농담을 할 수 있는 여유는 누구나가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 부제님은 우리 모두에게 참신앙의 정신이 무엇인지 보여주었고 우리 모두는 우리의 작은 믿음을 뒤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나쁜 영에 시달리는 자신의 딸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께 기적을 청하는 한 이방인 여인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대시며 그 청을 물리치십니다. 이방인으로서 예수님께 기적을 청하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었는데 “나는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을 찾으러 왔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시며 사람들 앞에서 청을 드리는 이방인 여인에게 창피를 줍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굽히지 않습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녀의 믿음을 감탄하시며 그녀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일부러 청을 들어주시지 않았던 이유는 다른 이들에게 그녀의 믿음을 드러내 보이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방인까지 이렇게 믿는데 이스라엘인들은 믿지 못하는 것을 질책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의 모범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녀는 멸시에 가까운 고통을 참아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보이는 믿음이야말로 참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고통이 필연적으로 주어집니다. 아무 어려움도 없는데 어떻게 신앙의 힘을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아씨시 옆의 Montefalco 라는 동네엔 십자가의 글라라 성녀가 800년 전 모습 그대로 썩지 않고 있습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수도생활을 했고 젊은 나이에 기도 중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녀의 심장에선 예수님의 형상이 새겨진 십자가와 채찍 등 수난 도구 등이 근육이 응고되어 형성되었고 지금도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수녀님이 어느 날 기도하는 중 예수님께서 슬픈 얼굴로 십자가를 지고 지나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수녀님은 예수님께 왜 그리 슬픈 얼굴을 하고 계시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요즘 시대에 내 십자가를 꽂을 굳은 땅이 없다.”하셨습니다. 성녀는 그 의미를 깨닫고 “당신의 십자가를 제 심장에 꽂으십시오.”라고 청했고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를 그녀의 심장에 꽂았습니다. 그렇게 그 성녀의 심장에 수난도구들이 새겨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꽂을 굳은 땅이 없다고 하신 이유는 요즘 세상에 아무도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들여 믿음을 증거 할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고 성녀는 그 고통을 자신이 받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성녀는 그 고통을 받아들여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그 심장에서 나온 것들과 썩지 않는 성녀를 보며 믿음을 갖고 혹은 더 증가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위에 말한 부제님처럼, 오늘 복음의 이방인 여인처럼, 또 십자가의 글라라 성녀와 같은 이들을 통해 세상에 믿음의 모범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실 저조차도 고통을 청하기가 두렵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주시는 고통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을 청하기는 합니다. 일상에서 주어지는 우리의 십자가만이라도 잘 지고 나갈 수 있으면 주위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신앙을 증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무거운 십자가를 홀로 지고가시는 예수님께 작은 위로가 되어드리도록 합시다.
새벽을 열며
피정 중 주교님께서 미사 강론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떤 성당 옆에 큰 교회가 들어섰는데, 글쎄 그 교회를 단 한 명이 직접 지어서 봉헌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봉헌하신 분의 딸이 많이 아팠는데 그 교회의 목사와 신도들이 자주 찾아와서 기도를 해주었답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너무 고마워서 자신의 전 재산을 바쳐서 멋진 교회를 지었고 이렇게 봉헌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주교님께서는 우리 역시 특별히 아픈 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가져야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큰 교회를 봉헌받기 위해서 관심과 사랑을 보이라는 것은 아니지요. 그보다는 지금 위로가 필요하신 분들에게 예수님처럼 따뜻한 힘과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내 안에서는 이렇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조금 안 좋게 받아들이네요.
‘혹시 내 주위에는 저런 봉헌자가 없나?’
즉, 물질적인 것에만 관심을 보이는 내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물론 그 이유가 내 자신에 대한 물질적 이익 때문이 아니라 하루 빨리 본당 부지 마련을 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물질적인 것에만 관심을 보이고 있는 제 자신이 얼마나 부끄럽던 지요. 아무리 답답하다고 할지라도 주님께 더욱 더 의지하면서 굳은 믿음을 보여야 할 사제가 물질적인 것만을 바라보고 있음에 한심함을 느끼게 됩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기도의 중요성과 사랑과 믿음의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지금까지 저의 삶 안에서 많은 체험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번 물질적인 유혹에 그 중요한 것을 모두 잊어버리고 이렇게 쉽게 무너지고 마네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한 이교도 부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당시 유다인들이 이교도들을 경멸할 때 자주 ‘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강아지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이 이교도 부인의 딸을 가리킨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모멸감을 주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그보다는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보여주셨던 사랑의 모습을 통해서 이 여인에 대한 시험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얼마나 절박하게 당신께 의지하고 있는지를 보고 싶었던 것이지요.
이 여인은 예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믿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바로 그 믿음 때문에 이 여인의 딸은 마귀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됩니다.
교회의 지도자라고 말을 들으면서도 자주 주님께 강한 믿음을 보이지 못했던 제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오늘도 주님께 청합니다. “어떠한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한 믿음을 주십시오.”
물질적인 것에만 관심을 갖지 맙시다. 진정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이곳이 아닙니다.
빠다킹신부
어머니
-이정호신부-
오늘 복음은 자녀를 위한 어머니의 사랑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어느 어머니가 그러지 않겠습니까마는 특별히 자신이 위험에 처해 있는
순간에도 자식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그 사랑을
위대한 성인의 모범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보게 됩니다.
지안나 베레따 몰라는 이태리 밀라노에서 1922년 10월 4일에 열세 자녀 중
열 번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정 안에서 훌륭한 신앙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생명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선물로 체험했고 하느님의
섭리하심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의사로서 특별히 아이들과
어머니들, 노인들에게 인술을 베풀었으며 1955년 결혼하여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1961년 네 번째 아이를 임신하였으나 아이를 포기해야
한다는 의사의 권고에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하느님께서 주신 아이의 생명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이와 산모를 살리려는 의료진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딸을 이 세상에 낳은 후 극심한 고통 가운데 3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생명의 존엄과 신비를 널리 선포하기 위해 교회는
2004년 5월 이분을 시성하였습니다. 사랑의 고통과 희생을 통해
우리가 태어났음을 생각하면서 생명을 소중히 바라보아야겠습니다.
꾀
-윤인규 신부-
강남종귤 강북위지(江南種橘 江北爲枳)는 강남에 심은 귤을 강북에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춘추전국시대 고사다. 사람한테는 환경이 중요하다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사람은 누구와 사느냐,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명운이 바뀔 수 있다.
탱자가 되어 끝날 수도 있었던 이교도,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귤이 된다. 예수님을 감동시킨 것은 그녀의 믿음이었다. 그녀의 믿음은 ‘기다림’에서 숙성된 것이었다. 마치 성전의 시메온과 한나의 그것과 같다(루카 2,25-38).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이야기에서 기다림과 믿음의 관계를 발견한다. 인생의 대부분은 기다림이다. 좋은 때, 반가운 사람, 평화, 사랑, 해방 등 삶이 갈망하는 것들은 모두 기다림 끝에 오는 것이다. 믿음은 불행이나 고통이나 절망을 기다리지 않는다. 믿는 것이나 기다리는 것은 하나로 통한다. 물론 도둑은 밤을 기다리고 나막신 장수는 비를, 짚신 장수는 볕 나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그것은 때를 이용하는 것이지 기다림은 아니다.
기다림은 사람을 지혜롭고 겸손하게 만들어 삶이 익어가게 한다. 지혜와 겸손은 물과 불 같은 것이지만 둘을 하나로 만드는 것은 기다림이다. 예수님을 감동시킨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꾀 넘치는 말은 성전의 시메온과 한나처럼 오랜 세월 하느님을 기다림으로써 삶이 익은 이의 지혜와 겸손이 드러난 것이다.
연중 제5주간 목요일
- 박기흠 신부-
배부른 사람과 헛배가 불러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 음식을 권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불신과 시기로 배척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배부른 자녀들과 기쁜 소식의 부스러기라도 받아먹으려는 굶주린 강아지, 다시 말해 도움의 손길을 간절히 바라는 한 이방 여인의 모습이 대조되어 있다.
예수님은 공생활동안 당신 반대편의 사람들과 갈등이 점점 고조되어 간다. 마침내 당신의 신변에 심각한 위험을 느낄 지경에 이르게 되시자 스스로 숨어 보호하시려 한다. 하지만 결국 알려지게 되는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숨어 계실 수 없었던 이유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개’라고 멸시를 하던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한 여인의 방문, 그리고 그 여인의 주님에 대한 충실한 믿음과 구원의 은총을 바라는 간절한 희망 때문이다.
복음서의 예수님은 그 어떤 유형의 소외나 노예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언제나 해방시켜 준다. 그리고 ‘마귀 들린 상태’란 인간을 소외시키고 얽어매는 그 어떤 힘에 붙들린 상태이며, 예수님은 지금 마귀의 권세를 빼내는 일과 직접 관련된 사건에 봉착해 계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상스러운 행동으로 그 여인을 비참한 지경으로 몰아넣는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7, 27)라고 하시면서 평상시와 다르게 행동하신다. 그런데 ‘숨는다’는 행위는 박해를 받는 상황을 예상할 수 있는데, 다름 아니라 예수님은 식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처럼 조롱과 멸시를 받으시는 상황에서 숨어 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에게서 발견되는 놀라운 일은 강아지들이 땅에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를 먹고 힘을 얻는 것보다 유대인들에게 경멸과 박해를 당하시고 계신 예수님의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녀의 겸손한 신앙고백과 태도이다.
특히,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이 이방인 여인의 신앙고백에 유념해야 한다. 스승에게 대한 제자들의 동요, 사람들의 악한 표양, 정신병자로 취급하면서 보여준 가족과 친지들의 비겁함, 예수님의 활동을 마귀의 사주를 받아 행한다는 모함들을 비교해 볼 때, 비록 ‘개’라고 조롱과 멸시를 받지만 신앙고백만큼은 그 누구보다 진실했던 그 여인과 그런 신앙고백에 주님께서 어떤 구원의 결과를 주시는지 눈여겨보아야 한다. 마침내 그 여인의 고백 앞에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7,30)라고 표현되어지는 놀라운 결과를 보게 된다. 결국 자신을 강하게 맡긴 여인의 친밀하고 인격적인 신뢰가 구원의 은총과 당신 사랑을 일으키셨다.
우리 역시 살아가면서 예수님처럼 멸시와 박해를 받거나, 이 여인처럼 우리 자신 능력 밖의 일로 시련과 고통을 겪기도 하지만 이럴 때 일수록 결코 그 어떤 운명에 맡길 것이 아니라 믿음을 다시 회복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참 믿음은 결코 좌절하지 않는 믿음이다. 참 믿음은 주님께서 아무런 응답도 안 해주시는 것 같은 침묵 속에서도 십자가의 사랑을 읽는다. 그래서 하느님께 믿음을 두는 행위는 결코 냉소적이거나 체념이 아니다. 수동적 체념이 ‘운명론’이라고 한다면, 믿음은 수동적 체념이 아니라 우리를 인도하는 희망찬 의지이다. 그 어떤 죄의 힘보다, 그 어떤 고통의 무게보다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의 선하심이 반드시 승리한다는 믿음을 우리도 이 여인처럼 가지게 되길 바란다.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이회진신부-
오늘 복음에는 꽤 흥미로운 설명이 하나 붙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조용히 지내시려고
이스라엘을 벗어난 외딴 지방에 들어가 숨어계시려고 했는데
결국 숨어 계실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과 은총의 여정이 그분 자체의 삶으로 남아있지 않고
그분을 둘러싼 모든 사람과 함께 하고 있다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복음적 삶의 공명(共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명(共鳴)이란 같이 울리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복음적 삶의 공명이란 내 가슴에서 일어나는
복음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다른 이의 가슴에서도
같이 울릴 수 있도록 전달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당신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삶이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어떻게 함께 울리는 지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가슴이 뛰듯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그 자리는 복음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생동하겠죠.
그 살아있음의 생동감을 사람들은 자신의 몸과 마음과 영혼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당신을 감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우리 자신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예수님과 복음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우리 자신을 가슴 뛰게 만들고 있나요?
예수님이 심장 박동이 우리 안에서 울리게 하고
우리 자신의 심장 박동이 다른 사람들 안에서 울리게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이 하느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길을 함께 걷는 것이
우리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주며, 어떤 기쁨을 주고,
어떻게 고통을 즐겁게 이겨낼 수 있는 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이 삶의 의미가 살아나고
하느님을 향한 기쁨과 사는 동안 겪는 고통을
즐겁게 받아 겪는 것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길 바랄 수 있겠습니까?
먼저 신앙을 사는 우리 자신이 이 복음의 삶이 참된 것임을 알고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그 복음의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를 같이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울리지 않는 복음의 소리는 다른 이들에게도 울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고백하는 우리 자신 안에서 먼저
하느님의 복음과 사랑이 먼저 일어나게 해 할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그 사랑이 감출 수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당신 사랑으로, 그리고 당신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게 하소서. 아멘.”
사랑의 관계, 믿음의 탄력
-이수철신부-
공동체의 관계를 떠나 살 수 없는 인간입니다.
감히 ‘인간은 관계다’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고립 단절된 혼자가 지옥입니다.
삶의 탄력도 떨어져 우울증을 비롯한 온갖 심신의 질환이 뒤따릅니다.
직감적으로도 함께 할 때가 보기도 좋고 안정감도 있어 보입니다.
날아다니는 새들도 혼자가 아닙니다. 최소한 암수 한 쌍이 함께 다닙니다.
저희 수도원에도 정기적으로 도움을 청하러 오는 행려자 한 분이 있었는데
언젠가 부터는 여자 행려자 한 분과 함께 옵니다.
혼자 할 때 보다 함께하니 훨씬 단정하고 정리된 모습이 우선 보기도 좋습니다.
그저께 강론 제목이 “제자리에서 제 모습으로”였는데
이 또한 함께 할 때 가능합니다.
함께의 공동체 내에서 제자리, 제 모습, 제 색깔이지,
고립 단절된 혼자라면 제자리, 제 모습, 제 색깔도 알 수 없으려니와
논하는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함께하는 공동체의 형제들, 바로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계속되는 창세기의 독서,
창조하실 때 마다 매번 “보시니 좋았다.” 반응하시던
주 하느님의 다음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함께 안에 혼자는 축복일 수 있어도, 말 그대로 혼자는 재앙입니다.
반드시 사람의 협력자를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아담은 모든 집짐승과 하늘의 와 모든 들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사람인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했다 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자연이나 사랑스런 짐승도
결코 사람의 협력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남녀의 부부만이 아니라,
마음과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도 좋은 협력자들입니다.
이런 협력자들 순전히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아담에게 하와가 선물이자 협력자였듯이,
여기 공동체의 자매들 역시
서로가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선물들이자 협력자들입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아담의 탄성, 지극한 일치감의 표현입니다.
공동체의 일치가 깊어질수록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이라는 자각도 깊어질 것입니다.
관계는 힘입니다.
믿음의 힘, 사랑의 힘, 희망의 힘입니다.
함께 사랑을 주고받으며 관계가 깊어질 때 믿음의 탄력도 좋아집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이교도 부인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혼자였다면 그렇게 끈질기게 주님께 도움을 청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랑스런 딸의 어머니였기에
놀라운 믿음의 탄력을 발휘합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어머니의 탄력 좋은 믿음에 구마 이적으로 응답하신 주님이십니다.
사랑의 관계와 함께 가는 믿음의 탄력입니다.
오늘도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주님은
우리 공동체의 일치를 깊게 하시며
우리 모두에게 탄력 좋은 믿음을 선사하십니다.
아멘.
시로페니키아 여인
-강영구신부-
사랑하는 예수님, 딸을 살리려는 애틋한 모정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간청을 들어주신 당신을 찬미합니다. 당신은 시험이라도 하듯이 모욕적인 언사로 이방인인 그녀를 강아지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딸을 악령의 굴레에서 해방시킬 수만 있다면, 강아지가 아니라 돼지라도 될 각오였습니다. 딸을 향한 그녀의 사랑은 어떤 모욕도 감수하게 합니다.
복음사가 요한은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1요한5,18)라고 노래합니다. 사랑보다 강한 힘은 없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시로페니키아 여인 위에 당신의 모습이 겹쳐(오버랩 overlap)집니다.
당신은 부족하고 죄 많은 인류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이 당신으로 하여금 하늘을 버리고 땅을 선택하게 했습니다. 그 사랑이 당신으로 하여금 가난한 목수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 되게 했습니다. 그 사랑이 당신으로 하여금 정든 고향과 집과 가족을 버리고 출가出家하게 했습니다. 그 사랑이 당신으로 하여금 떠돌이 랍비가 되게 했고,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의 벗이 되게 했습니다. 그 사랑이 당신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산으로 오르게 했습니다. 당신은 십자가에 매달려서 온갖 모욕과 조롱을 다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십자가에 매달고 이렇게 조롱합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이면 다시 짓는다던 자야, 네 목숨이나 건져라.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마태27,40) 그러나 당신은 그 모든 조롱과 모욕을 고스란히 받아 안고 처참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습니다. 알량한 자존심이 사랑을 무너뜨릴 수는 없습니다.
당신의 그 한량없는 큰 사랑(大慈大悲)으로 저희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저희들도 당신을 닮아서 사랑하게 하소서.(一明)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양승국신부-
<나는 그저 그들 옆에 있고 싶었다>
현재 일본에서 ‘밤의 선생님’으로 유명한 미즈타니 오사무 선생님의 체험을 다룬 책 ‘애들아, 너희가 나쁜 게 아니야’를 감명 깊게 읽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던지시는 한 말씀 한 말씀?제게는 너무나 감명 깊고 소중해서, 마치 살아있는 돈보스코를 뵙는 듯합니다.
“교사 생활 21년 동안 꼭 한 가지 자랑스럽게 내세울 만한 것이 있다. 그건 바로 한 번도 학생을 야단치거나, 때린 일이 없다는 점이다. 나는 학생들을 절대 야단치지 않는다. 아이들은 모두 ‘꽃을 피우는 씨앗’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처 꽃피우지 못한 씨앗들을 만나기 위해 나는 오랫동안 밤거리에서 살았다. 그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그저 그들 옆에 있고 싶었다.”
고된 하루 일과를 끝내고 피곤한 몸을 겨우 가누며 또 다시 밤거리로 나서는 이유에 대해서 선생님은 이렇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내가 보기에 밤거리를 헤매는 아이들도 역시 사랑스런 아이들이다. 따스한 태양빛이 비추는 밝은 세계에 사는 어른들이 매정하게도 그 아이들을 더더욱 어두운 밤의 세계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상처를 입고 슬퍼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나 스스로 밤거리로 들어서고 그들과 만나고 싶다.”
수십 번도 더 ‘배신을 때린’ 아이, 그래서 엄청 속을 썩인 아이가 더 이상 어찌해볼 도리가 없이 망가진 다음 최후의 수단으로 선생님을 찾아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 얄밉기 짝이 없습니다.
“선생님, 이번에도 절 도와주실 거죠? 절 버리지 않으실 거죠?”
선생님의 답변은 언제나 한결 같습니다.
“그럼, 우리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보자.”
다음의 글을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눈앞이 흐려졌습니다.
조직폭력배들의 사무소에서 학교로 연락이 왔다. 지난번에 두 번 다시 자신들의 세력권 안에서 기웃거리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겨우 구해낸 한 소년이 다시 자신들의 세력권에 들어왔기 때문에 붙잡고 있다고.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지만 소년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지고 소년이 잡혀있는 조직 사무소를 방문했다. 소년은 소파에 앉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떨고 있었다. 그의 양 옆을 여러 명의 조직원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 건너편에서 험악한 얼굴로 앉아있던 우두머리가 몹시 불쾌한 듯 말했다.
“미즈타니씨, 우리도 체면이란 것이 있는데, 약속을 어겼으면, 뭔가 대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소?”
그들은 나의 손가락 하나를 요구했다.
그 후 소년은 고등학교로 돌아갔고, 일본의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도쿄의 중국음식점에서 언젠가 자기 가게를 갖게 되기를 꿈꾸며 성실하게 일을 배우고 있다.
손가락 하나를 잃은 아픔은 매우 컸다. 그러나 소년의 미래를 위해서 손가락 하나쯤은 희생할 수 있었다.
오늘 복음에서는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의 치유를 청하는 한 가련한 이방 여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딸이 너무나 불쌍했던 나머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간절히 예수님께 딸의 치유를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하는 수모를 겪습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향해 하루하루 다가가는 딸이 머릿속에 떠올랐던 여인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습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예수님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딸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수모라도 감수하겠다는 마음으로 집요하게 졸라대는 여인의 자세가 돋보입니다.
딸을 위해서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 여인을 바라보며 미즈타니 선생님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밤거리에서, 조직폭력배들의 세계에서 비틀비틀 휘청거리며 방황하는 한 아이의 마음을 잡아보고자 자신의 손가락까지 내어놓으신 선생님.
예수님의 침묵과 거부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겸손과 믿음, 신뢰와 끈기로 온 몸과 마음을 바쳐 청한 결과 여인은 기쁨으로 돌아설 수 있었습니다.
많은 부모님들, 자식 때문에 고생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문제아들과 씨름하고 계시는 선생님들 정말 수고들이 많으십니다. 때로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순간도 맞이할 것입니다. 지옥 같은 나날이 계속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때, 간절히 주님께 매달릴 때, 언젠가 반드시 환한 희망의 등불을 만나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유다인의 머릿속을 뒤집는 작업
-박상대신부-
지난 이틀간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예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말 그대로 지키고 따르며 소중히 여기던 조상들의 전통을 ’사람이 만든 계명’으로 단언하시고, 이를 과감히 폐기하심으로써 정결에 대한 새로운 계명을 세우신 것을 보았다. 이제 세상에서 사람과 또 사람과 하느님의 관계를 더럽히는 것은 모두가 사람의 마음에서 밖으로 나오는 악한 생각들이다. 예수께서 유다인들의 전통과 관습을 폐기하신 일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이런 일들이 누적되어 예수께 대한 유다인 지도계층을 적대감은 계속 커져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의중은 전통이나 관습 따위의 외적인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다인들 머릿속에 든 생각까지 바꾸는데 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들어 있는 것일까?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만이 하느님 야훼로부터 간택된 백성이며 자기들만이 구원 받으리라는 배타적인 선민사상(選民思想)과 구원관에 사로 잡혀있었다. 비참했던 바빌론 유배 생활을 몸소 체험한 것을 시작으로 주변 강대국의 끊임없는 침략과 지배, 그리고 문화적인 압박을 통하여 그들의 선민사상과 구원관은 메시아사상과 함께 더욱 고조되어갔다.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했을 때 그들의 메시아사상은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해방과 메시아의 직접적 통치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메시아는 비천한 마구간 출신의 나자렛 평민으로 등장한다. 그분은 백성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지상의 왕국이 아니라 천상의 왕국을 선포하시며, 로마제국의 세력을 내어 몰기는커녕 가난하고 구박받고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억압받는 이들에게 지상의 행복보다는 천상의 행복을 약속하신다. 이것이 곧 예수께서 의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배타적인 선민사상과 구원관을 보편화시키는 작업이다. 비록 이러한 메시아의 참된 정체를 유다인들이 외면하더라도 이 작업이 관철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작업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이방인 지역의 선교를 떠나신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께서 찾아가신 ’띠로’는 시리아의 페니키아(시로페니키아) 지방에 속한 도시로서 갈릴래아 호수에서 북서쪽으로 약 56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현재 레바논에 속하는 지중해 연안 항구도시이다. 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이곳에 도착하여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집에 계시려 했으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시로페니키아 출생의 한 여인 때문에 들키게 되었다고 한다. 이 대목에 머물러 잠시 생각해 보면, 몇 가지 지적해야 할 점이 생긴다. 첫째, 예수께서 혼자 띠로까지 먼길을 가셨을 리는 없다. 오늘 복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를 보도하는 마태오복음(15,21-28)을 보면 분명히 제자들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띠로와 시돈의 이방인지역 선교여행에 제자들이 함께 있었고, 군중도 대거 동행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둘째, 따라서 예수께서 ’조용히 계시려 했으나 들키게 된 일’은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는 메시아의 정체성이 점점 밝혀지고 있음을 예고하는 마르코복음사가 특유의 편집기법으로 풀이된다. 이 의도가 악령이 들린 딸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믿음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시로페니키아 출신의 여인은 선민(選民)도 아니고, 선민들로부터 비난받던 한 이방인이다. 그런데 이 여인이 확고한 믿음으로 예수를 찾아와 딸에 대한 치유의 간청과 함께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는 빵을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27절)는 예수님의 말씀과 이에 대한 "선생님, 그렇긴 합니다만 상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28절)라는 여인의 대답은 서로 대조를 이룬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이스라엘의 배타적인 선민사상과 구원관이 메아리치지만 여인의 대답으로 그 메아리가 즉시 멈춘다. 예수님의 단호한 말씀에 주위의 이스라엘 군중은 처음에 사뭇 기뻐하였을 것이나, 여인의 대답을 알아들은 사람은 즉시 안색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행동은 곧 이방인 여인에게도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제 이방인들도 구원의 범주에 포함된다. 이방인 여인의 탄복할 믿음을 바탕으로 예수께서는 유다인들의 머릿속 생각까지 엎어버리셨다. 이스라엘 백성이건 이방인이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참 메시아로 모시고 그 분께 믿음을 두는 자는 다 하느님의 백성이다. 이들이 곧 신약의 새로운 하느님백성이며 이를 우리는 교회라 부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