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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뽀빠이”라는 만화가 있었습니다. “블루터스”라는 악당이 뽀빠이를 사랑하는 “올리브”를 좋아해서 납치할 때, 올리브가 “뽀빠이 도와줘요”라고 소리치면 뽀빠이가 달려갑니다. 그러나, 덩치 큰 블루터스와 싸워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맞던 뽀빠이는 시금치를 먹고 힘을 내어, 블루터스와 싸워 이기는 내용입니다. 이 만화를 본 사람들은, 시금치를 먹으면 정말 뽀빠이처럼 힘이 세질 수 있나?라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뽀빠이 만화가 성행된 후 미국에서는 시금치 소비가 30%증가했고, 텍사스의 시금치 재배 마을에서는 뽀빠이 동상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뽀빠이 만화의 작가인 “엘지 크라이슬러 시거”는 책을 통해 건강에 좋은 식품을 찾는 가운데, 시금치에는 철분이 많이 포함되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읽은 책은, 시금치의 철분량을 기록하면서, 소수점을 잘못 찍음으로, 실제보다 10배나 더 많은 것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이러한 오기로 인해, 시거는 시금치를 먹으면 뽀빠이처럼 힘을 솟아나는 것으로 오해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뽀빠이의 시금치처럼, 우리에게 막강한 힘을 내게 하는 그 무엇이 있을까요?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미디안 광야에 있는 모세를 불러 애굽으로 보냅니다. 이 때, 이스라엘이 모세에게 “너를 보낸 자가 누구냐?”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해야할지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알려주셨습이다. 출 3: 14을 보시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스스로 있다”는 것은, 외부의 아무런 도움이 없이 스스로 존재를 한다는 겁니다. 사람을 비롯하여, 세상의 모든 동식물은 산소, 음식, 광합성을 통한 외부로부터 도움을 받아 존재를 합니다. 또, 우리가 타고 다니는 차도 기름을 넣어야 운행할 수 있습니다. 즉, 존재를 하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 에너지 공급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존하시기에, 외부의 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본문 31절입니다. 보시면,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입니다. 뽀빠이가 시금치를 통해, 강한 힘을 받은 것처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성도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늘 승리하는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5 - 26절을 보시면,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하시니라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보아야 합니다.
본문 25절의 시작을 보면,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을 다른 그 무엇과도 비교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다른 무엇 즉 본문에서는, 바벨론의 우상과 비교하는 것은, 바벨론의 우상을 하나님 위치에 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것과 동동하지 않으며,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권세와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어,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다른 무엇에 비교될 수 있는 존재나 동등한 존재가 결단코 아니라는 것을 재차 강조하는 것으로, 앞의 “거룩하신 이”란 칭호를 부연합니다. 그러기에, 본문 앞의 18 - 19에서 우상에 대해,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은 사슬을 만든 것이니라”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소경 제 닭 잡아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없기에, 분간 없이 일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이 자신을 실족시키는 것인 줄도 모르고 행하는 무지함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무지한 자가 어리석게 행한 것에 대해, 그에 대한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 1: 21 - 23에서, 유대인들을 가리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고 합니다. 또 이하 25절에서는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말을 이사야 당시의 지도자들이나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등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한 말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에 있어서 이 말은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는 모든 성도들을 향한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된 우리는 세상을 향한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된 우리의 언행심사 하나하나가 비 기독교이나 믿음이 약한 자에게는 커다란 영향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생활에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럼, 성도된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본문 26절을 보시면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곧,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와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에게서 해결책을 얻어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판단하고, 내가 결정해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행하라는 겁니다. 이것이, 성도로서의 삶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도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살지만, 하나님에 대한 열망을 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삶을 살았던 자들이, 노아였고, 아브라함이었고, 다윗이었고, 여러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지만,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 바른 지식에서 시작됨을 알고, 생활 속에서 성경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인정하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7 - 29절을 보시면,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본문 27절을 보시면,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라고 합니다. 우리는 가끔, 우리의 필요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하고는 그것이, 우리의 의지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 낙심하며,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라고 하기도 합니다. 만약, 이러한 생각이 옳다면, 그것은,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 아니라, 알라딘 마술램프 요정이 될 것입니다. 도깨비 방망이와도 같은 존재일 겁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고전 1: 25에서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함을 기억한다면, 결단코,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것입니다. 욥이 알 수 없는 고난을 겪는 가운데, 하나님께 자신이 왜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에 대해 간구했습니다. 친구들이 찾아와 여러 말로 욥이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 앞에서의 죄악 때문이라고 논리적으로 설득했지만, 극구 그것을 부정하며,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실 때를 기다렸습니다. 성도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삶을 살아간다는 겁니다. 시 137편을 보시면,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을 때, 바벨론의 강가에서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응답하지 않으셨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렀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행하셨습니다. 마 7: 7에서 예수님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러기에,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하여, 실망과 좌절 속에서 기도하기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때가 언제인지 우리는 모르지만, 그 때가 될 때까지 계속하여 기도하기를 멈춰서는 안 됩니다. 이어, 본문 28절을 보시면,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께서 묵언하시자,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고 함에 대한 응답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왜? 내가 너의 기도를 듣지 않는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죽은 우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지도 않으면서, 이름만 있는 우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의 신적 권능에 의지하여, 이 땅에서 담대하게 살아가는 별세의 성도들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나 우리가 처한 환경은 언제든지 또는,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낙심 가운데 빠지게 합니다. 우리가 눈을 가림으로, 가야할 길을 알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 그러한 환경보다 하나님은 더욱 크시고, 전능하시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고, 하나님의 권능의 오른 손이 붙잡고 계심을 믿습니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 안에서, 새로운 힘과 용기를 갖고 새로운 삶을 사시며, 담대하고 소망에 찬 삶을 사심으로, 독수리가 날개치며, 창공으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활기있게 비상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30 - 31절을 보시면,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성도는 오직, 하나님을 앙망하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입니다.
“앙망”이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으면, “우러러 바라봄”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이것을 성도된 우리의 삶에 적용하면, “하나님께 소망을 둔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기록한 이사야가 왜? 이 말을 이스라엘에게 했을까요? 그것은, 당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의 선민이었지만, 그들의 눈이 가려짐으로, 아무런 희망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만 성도의 모습이었지, 실제로는 이방인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성도들 가운데도 이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지만, 그의 중심은 이미, 하나님에게서 벗어남으로, 하나님과 등진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형식적으로만 성도일 뿐입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성도된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온 우주와 삼라만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지으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피조물된 우리가 어찌 헤아리겠습니까? 욥의 친구들이 욥이 당하는 고난에 열심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했지만, 그것이 맞는 말이었습니까? 그들이 진정, 욥에게 고난을 주신 하나님을 헤아리는 혜안을 가진 자들이었습니까? 그들은 우매한 자였고, 어리석은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같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욥과 같이, 우리의 형편이나 우리의 상황을 알 수 없어도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본문에서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실 때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간구하기를 멈추지 않는 자에 대해 하나님께서 본문에서 약속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가 좋아하여 애송하는 구절입니다. 무엇입니까? 본문 30 - 31절입니다. 보시면,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입니다. 그러기에, 시 84: 5 - 6에서 고라 자손은,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포기하지 않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힘으로 반드시 이겨내고, 승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된 우리는 믿음으로는 이미 천국에서 하나님과 살아가지만, 현실적으로 세상에서 살아가기에, 세상이 주는 고난과 고통 속에서 그릇된 삶을 살다가 실패할 때도 있고, 자신이 계획하고 이루고자 하는 뭔가가 있으나, 그것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피곤으로 무력해질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부정적이고, 자포자기의 상황에 빠져들면, 더 이상 나오지 못하고, 하나님에게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것이야 말로, 우매한 선택이요, 우매한 생각입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것들이 우리를 넘어뜨리는 걸림돌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키는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믿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겪는 문제 자체를 제거하진 않지만, 우리가 그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를 가로막은 잠긴 문을 파괴시키지는 않으시지만, 그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힘입어, 세상에서 성도로서의 사명을 다하심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가운데 거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