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36-46
축복하는 삶을 삽시다 / 김봉수 목사
야고보서를 읽으면서 우리에게 아주 충격적으로 도전하는 말씀 중에 하나는 우리의 혀에 대한 평가입니다.약3:9-10을 보면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고 권면을 합니다.
여러분의 혀는 어떻게 사용되고 있습니까? 늘 찬송하고 기도하는 혀요,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세워주며 복을 비는, 곧 축복하는 혀로 주로 사용하시고 계십니까? 아니면 주로 더러운 말과 저주와 원망스러운 말들을 주로 하는 혀로 사용하시고 있습니까? 우리 나라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저주의 말들을 너무나 쉽게 접하고 살아왔습니다. 그것도 너무나 가깝다고 하는 부모님들로부터 저주를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망할 놈의 자식, 염병할 놈, 꼴도 보기 싫은 놈> 심지어 어떤 부모는 자식에게 화가 났을 때 <나가 뒤져라>라고까지 저주를 합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아직도 그 부모의 좋지 못한 유산을 물려받아서 자녀들에게 저주하고 계시는 분이 없습니까? 부모님들에게 축복을 받고 자라야 할 자녀들이 조금만 속이 상해도 저주의 말을 내 품어대던 우리네 부모님들의 언어 습관은 이제 여러분의 혀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우리들에게 자주 언급하는 것 중에 하나는 우리의 혀를 잘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시므이라는 사람의 죽음을 목도하게 됩니다.이 시므이는 다윗 왕을 저주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으로 말미암아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을 때 다윗의 행렬을 향하여 돌을 던지면서 독한 말로 저주를 퍼부었던 사람입니다.그 시므이라는 사람은 사울의 집 사람, 곧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는데,사울이 죽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에 대해 피해의식을 가지고 다윗을 저주한 것입니다.하지만 사실 다윗은 사울의 집에 그렇게 저주를 받을 만큼 대하지 않았습니다.결국 저주를 하던 그 시므이는 그 저주의 결과로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솔로몬은 시므이에게 예루살렘에서만 살고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고 하는 주거제한 조치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시므이도 역시 그 솔로몬의 조치에 대해 38절에서 <이 말씀이 좋사오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므이가 예루살렘을 떠나서 가드에 갔다가 옵니다. 시므이의 두 종이 가드로 도망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44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일은 <여호와께서 그 시므이의 악을 그 머리로 돌려보내시는 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독한 말로 저주를 한 시므이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결과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독한 말로 다윗을 저주한 시므이로 하여금 주거제한 조치와 자기의 서약을 잊어버리도록 하고, 멸망을 당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을 보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설명이 한 가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살후1:6-7上을 봅니다.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에게 환난을 주는 자들은 환난으로 갚으십니다. 우리에게 까닭 없는 저주를 하는 자에게는 저주로 갚으십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이것에 대해 더 분명하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창12:3을 다같이 찾아서 한 번 봅시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에게 복을 비는 사람, 곧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시고, 그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에게 저주를 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리시겠다는 너무나 분명한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그 언약은 아브라함 뿐만 아니라, 그 믿음의 후손들 모두에게 적용되는 언약입니다.롬4:16을 보면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할 사실이 이것입니다.함부로 사람을 저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므이는 자기 피해의식 때문에 다윗을 저주했습니다.그리고 도리어 자기가 저주를 받았습니다. 까닭 없는 저주가 도리어 자기의 머리로 돌아간 예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난 후 한동안 목사님이 참 무서웠던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목사에게는 축복권과 저주권이 있는데 목사가 저주를 하면 그 집안이 망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물론 성경 이곳 저곳을 갖다가 끼워 맞추었습니다.아무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할지라도 목사님의 마음에 안 들어서 저주를 받았다가는 큰 일이 아닌가 하는 것이 어린 마음에 들었던 생각입니다. 세월이 흘러 제가 목사가 된 후에 저는 그 목사님의 설교를 가끔 떠올리면서 정말 쓰디쓴 웃음을 짓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목사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위에 있지 않습니다.
잠26:2에 보면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 같이 이르지 아니하느니라.>라고 기록합니다.
저주를 받을 일이 없는데 저주를 한다고 저주가 임한다는 것은 아이들 만화책에서나 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목사는 한 평생 사는 동안 성도들과 모든 백성들을 위하여 복을 빌면서 사는 것이 더 정상적입니다.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생애를 사는 동안 다른 사람을 위해 복을 비는 것이 성도로서 정상적입니다.
롬12:14을 다같이 찾아서 읽어봅시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심지어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에게 대해서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복을 비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19-21절도 봅시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내 마음에 안 든다고 저주하는 것은 악에게 지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남을 저주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간 그 바벨론 사람들을 향하여서도 저주보다는 평안을 비는 것이 주의 백성들이 가져야 할 태도라고 가르쳐줍니다.
렘29:7을 읽어봅시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십시오. 비록 자기들을 포로로 끌고 온 바벨론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을 저주하기보다는 그 성읍의 평안을 위해 힘쓰고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아주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10:12-13을 찾아봅시다.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로 돌아올 것이니라.>
오늘날 우리들이 어느 집을 방문할 때에 먼저 기도를 드리는 것은 주님의 이 말씀 때문이 아닙니까? 그 가정에 주님의 평안이 함께하시기를 축복하는 것 아닙니까? 결국 이런 말씀들은 우리 성도들이 늘 다른 사람의 평안과 복을 비는 생활, 축복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저주하기를 즐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마음에 조금만 안 들으면 <망할 것이라>는 저주를 서슴없이 합니다. 심지어 그 사람은 저주를 받아서 병들거나 죽을 것이고 그 자식들도 저주를 받아서 죽을 것이라는 저주를 하기도 합니다. 도무지 그리스도인으로서 할 수 없는 저주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저주받는 것을 즐기는 자가 누구입니까? 사탄입니다. 사탄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기를 바라고 아담과 하와를 꼬여서 선악과를 따먹도록 한 것입니다. 인류 역사 가운데 사탄은 계속해서 사람들이 저주를 받도록 인간들을 꼬여서 범죄하는 길로 유도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이 저주를 받기를 바라는 마음은 하나님의 주신 마음이 아닙니다.
딤전2:4을 보면 하나님의 마음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저주받은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땅에 공생애 기간에 계시는 동안 백성들을 보시면서 얼마나 불쌍히 여기셨는지 모릅니다.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우시기도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을 축복하시는 삶, 복을 비는 삶을 공생애 기간동안에 사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입술은 누구를 많이 닮았습니까?
조금만 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쉽게 저주를 해버리는 마귀를 더 많이 닮지 않았습니까? 오늘 본문의 시므이는 사울과 같은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 자기 지파에 손해가 온다고 생각하고 저주를 퍼부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의 삶에서도 시므이와 같이 나에게 조금만 손해가 와도 저주하는 것을 쉽게 해버리는 것이 비슷하지 않습니까? 다윗이라고 해서 어찌 시므이의 저주를 맞받아서 저주할 혀가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저주하지 않습니다. 맞받아서 저주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는 자세를 취합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억울하게 감옥으로 끌려가는 요셉의 모습을 보면서 성도의 삶을 봅니다. 그에게서 저주하는 모습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오히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형통함을 맛보고 지냅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로 끌려가면서 저주했다는 말을 읽어 보셨습니까?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면서 저주하시는 모습을 읽어 보셨습니까?오히려 우리는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못박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장면을 읽게 되지 않습니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 주님의 뒤를 따르던 스데반도 역시 돌에 맞아 죽으면서 비슷한 기도를 드립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것이 주님의 뒤를 따르는 성도의 삶의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을 저주하는 입술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입술입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는 말씀을 가슴에 새겨 두어야 합니다. 성도는 저주할 수 있는 권리는 없고, 오직 한 가지 권리, 곧 다른 이들을 위해 복을 빌 수 있는 권리, 축복의 권리만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불신자들을 향해서도 함부로 저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불쌍히 여기고 축복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자기 가족이 불신의 상태에 있다고 함부로 저주할 사람이 있습니까? 오히려 불쌍히 여기고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왜 아론의 집안, 곧 대제사장의 집안이 복이 있는 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복을 빌 수 있는 특별한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목사가 왜 복이 있는 사람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주의 백성들을 위해 축복할 수 있는 그 축도권이 있다는 것도 큰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모든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을 저주할 때,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복을 빌 때 복이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입술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주로 어떻게 사용하십니까? 여러분들은 자녀들에게 얼마나 많이 축복하십니까? 어느 권사님은 자녀들에게 속이 상해서 욕을 할 때에도 <야, 이 복을 받을 놈아>라고 욕을 한다지요?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자녀들을 위해서 그렇게 복을 비는 기도를 하지만 집에 돌아가서는 자녀들을 구박하고 저주하고, 원망하는 말들만 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여러분들은 성도들을 위해서 얼마나 복을 비십니까? 혹시 늘 손가락질하고 비난만 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이제 엡4:29을 같이 찾아봅시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 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은혜를 끼치는 말, 다른 이들을 늘 축복하는 말, 이것이 성도가 가져야 할 말입니다.오늘 우리는 시므이의 저주를 기억합시다.저주하던 사람 시므이가 죽음을 당하는 것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이제 늘 축복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제가 기도하기 전에 옆 사람들을 위해 복을 비는 말들을 서로 주고받는 시간을 가집시다.
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