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젖은 두만강 노래에 얽힌 사연
눈물 젖은 두만강 노래는 독립투사 문창학
(당시 임시정부 교통총장으로 활동 하였음 함경북도 온성군 미표면 출신으로
1921년 2월2일 대한 군정서 김학섭의 인솔하에 소총10정, 탄약 150발, 폭탄 2발을 가지고
신건원 주재소를 습격 일본순사를 사살하고 만주 훈춘에서 일본경찰 습격등
맹렬한 활동을 하다가 1921년 12월에 체포 되어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뜻을 죽이지 않고 조국을 구하려고 싸우다가
1923년 12월20일 사형 됨)씨의 부인 김증손녀씨가 나이 30세로 남편 문창학씨를 찾아
중국 독립군이 있다는 곳을 찾아 산을 넘고 강을 건너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수소문 하면서 10여년을 찾아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두만강가에 있는 용정에서 남편 문창학씨가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당시 머무르던
용정 여관방에서 원망과 슬픔에 겨워 목놓아 통곡을 하였는데
당시 유랑극단 생활을 하던 이시우 작곡가가 여인의 울음소리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그 사연을 물어 알고는 너무나 가슴 아픈 나머지 기막힌 사연을 오선지에 담았는데
작사자 김용호 선생이 노랫말을 붙여 김정구 가수가 부른것이
불멸의 명곡인 눈물 젖은 두만강 노래 사연인 것이다
1930년대 하반기에 이르러 대중가요는 연정비가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 시기 <오케>레코드사는 비탄조가 흐르는 연정비가를 가장 많이 취입한 회사의 하나였다.
이 회사에서 창작된 연정비가들로는 조영출 작사, 이봉룡 작곡인 <눈물의 신호등>을 비롯하여
<눈오는 네온가>, <물방아 사랑> 등 소개해야할 작품들이 너무 많으나
여기서는 <눈물젖은 두만강>만을 언급하려고 한다.
1930년대에는 가요계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고 그 정도가 날로 악랄해지자
검열의 관문을 통과하기 위하여 가사를 작사할 때 은유적인 수법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흔히 조국을 <님>으로,
조국 광복을 <님은 언제나 오려나>하는 식으로 은유화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시우 작곡인 <눈물 젖은 두만강>도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떠나간 <옛님>으로 비유한 노래이다.
두만강 푸른물에 노젖는 배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데로 갔소
그리운 내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1930년 대에 이르러 두만강 나루의 선착장은
살길을 찾아 중국으로 건너가는 실향민들로 붐볐다.
언제 돌아올지 기약할 수 없는 낯선 타국땅으로 떠나가는 겨례의 마음은 슬픔에 젖어들었고
사랑하는 남편과 이별하는 여인들의 오열이 그칠새 없었다.
가슴이 터져오는 이별의 슬픔을 두만강 물결 위에 뿌리며
정처없이 떠나간 옛님은 다름아닌 우리 겨례였으며 조국이었던 것이다.
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여 우는데
님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쉬니
추억에 목메이는 애달픈 하소
(후렴)
작곡가 이시우는 이 노래가 자신의 체험작이라고 하였다.
이 노래의 창작에 앞서 이시우는 <봄 잃은 낙동강>을 창작하였다.
이 노래에서도 역시 작곡가는 일제에게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의 설움과
수난을 외면할 수 없었으며 낙동강에 봄이 와도 그 봄마저도 잃었다고 은유화 하였다.
그러나
그의 여러 작품 중에서 <눈물 젖은 두만강>이 대표작이다.
님가신 이 언덕에 단풍이 물들고
눈물진 두만강에 밤새가 울면
떠나간 옛님이 보고 싶구려
(후렴)
다음 이야기는 1930년 대 중엽 극단<예원좌>의 배우였던 장월성이
1973년 5월 29일 구술한 것을 정리한 것이다.-
1930년 대 중엽에 극단<예원좌>의 일행이 중국 동북지방인 용정에서부터 시작하여
조선인민 부락들을 찾아다니며 순회공연을 하다가 두만강변의 조그만 도시인
도문의 한 여관에다 여장을 풀었다.
이 여관은 조선 사람이 경영하면서 겨우 명맥이나 이어가고 있었는데
뒷 마당에는 단풍나무가 두 그루 서있었다.
때는 마침 가을철이라 한 나무는 심홍색으로 빨갛게 물들고
다른 한 나무는 노랗게 심황색으로 물들어 집 떠난 나그네에게 향수심(鄕愁心)을 안겨 주었다.
그 단풍나무를 바라 보느라니
작곡가 이시우의 마음에도 저도 모르게 쓸쓸한 감정이 젖어 들었다.
작곡가 이시우를 비롯하여 몇몇 배우들이 한참동안 단풍나무를 바라보며
저마다 고향생각을 하고 있는데 여관집 주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저 단풍나무는 내가 두만강을 건너올 때 떠가지고 와서 심은 것이웨다.
말하자면 고국땅의 나무웨다.
내가 고향을 떠나오던 때가 기미년(1919) 추파월인데 영원히 그날을 잊지 말자고
어린 단풍나무를 몇 그루 떠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저렇게 두 그루만 살아 있습니다.
이 나무를 심은지가 어언 10여 년이 되는 데 이렇게 단풍이 들어 제법 가을 맛을 안겨 줍니다."
기미년으로 말하면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해이다.
나라의 독립을 성취하려는 우리민족의 한결같은 염원이 대중적인 인민봉기로 폭발하였으나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으로 봉기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해 봄날에 수많은 우국지사들이 일제경찰에 끌려가 순국하였거나 형장에서 최후를 마쳤다.
작곡가 이시우는 단풍나무를 바라보며 <추억>이라는 주제로 곡상을 잡아 보려고
사색에 잠겨 보았으나 신통한 상이 잡히지 않았다.
바로 그날 밤이었다.
그가 밤이 깊도록 잠자리에 누어 사색에 골몰하고 있을 때 옆방에서 난데 없이 들려오는
여인의 비통하고 처절한 울음소리에 놀랐다.
이시우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여관집 주인을 통하여 오열하는 여인에 대하여 사연을 알아 보았다.
그 여인은 독립투사 문창학의 부인인 김증손녀(당시30세)씨로
국내에서 항일투쟁을 하다 만주로 도피해온 남편을 찾아 중국에 건너 왔다.
그녀는 오매불망(寤寐不忘) 남편을 찾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독립군이 있다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간난신고(艱難辛苦)하면서 10여년을 찾아 다녔다.
그런 그녀가 한 가닥 희망의 끈 마져 끈긴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자신의 남편이 훈춘에서 독립운동을 벌리다 체포(1921년 12월)되어 압송된 후
이미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1923년 12월20일) 됐다는 정보를 접하게 된 것이다.
나라를 잃은 슬픔에다 남편이 이미 사형을 당했다는 소리를 들은
그 여인은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날이 바로 남편의 생일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빈방에서 조용히 술이나 한 잔 부어 놓고 생일제를 지내려 하였다.
그런데 여관집 주인이 이 사실을 알고 제물을 차려가지고 왔던 것이다.
여관 주인과 그녀의 남편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여관집 주인이 차려준 제상에 술을 붓고난 여인은 그만 솟구쳐 오르는 오열을 참지 못하여
한밤중에 울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자초지종 이야기를 들은 이시우의 가슴에는 커다란 충격이 안겨왔다.
이튿날 이시우는 그녀가 남편을 찾아 건너온 두만강을 바라보며
나라 잃은 우리 겨례의 슬픔을 통탄 하였다.
이시우가 이러한 감정을 누를길 없어 가사에다 즉흥적인 선률을 붙인 것이
<눈물젖은 두만강>이라고 한다.
이 노래의 후렴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희생된 남편에 대한
그리움에 목메이는 그녀의 애절한 호곡소리는 <그리운 내님이여>라는 시어로 승화되고
빼앗긴 조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은유되었던 것이다.
특히 2절에서 <추억에 목 메이는 애달픈 하소>라고 표현한 것과
3절에서 <님가신 이 언덕에 단풍이 물들고>라는 표현은
여관집 뒤마당에서 본 단풍나무에서 얻은 상을 시어에 담았다고 한다.
이렇게 되어 <눈물젖은 두만강>이 창작되자
극단 <예원좌>는 장월성이라는 소녀 배우로 하여금
막간에 나가서 이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이날 소녀 배우가 처음으로 이 노래를 부르자 장내에서는 떠나갈듯한 박수가 터져나와
장월성은 다시 이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장월성은
그 당시 레코드를 취입하는 여류가수들 급에는 비할바 못되는 화술배우였지만
신작된 노래가 두만강 연안에서 살고 있는 조선사람들의 생활감정에 맞았기 때문에
그토록 관객들의 심금을 울려주었던 것이다.
그 후 순회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이시우는 한 시인에게 부탁하여 가사를 다듬고
가수 김정구에게 이 노래를 (오케>레코드에서 취입하도록 하였다.
그 후부터 이 노래가 민간에 급격히 유행되었는데
사람들은 조국이 그리울 때도 이 노래를 불렀고,
떠나간 옛님이 그리울 때도 이 노래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