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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성취와 예술성의 확보를 위한 통로
- 해석 ‘낮설게 보기’에서 형상화 ‘지배적 정황’까지 -
권대근
문학밧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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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쓰기의 기본은 나와 나를 위요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해석에서 출발한다. 누가 수필을 ‘자아의 세계화’라 하는가. 아니다. ‘세계의 자아화’다. 수필도 서정문학인 것이다. 세계란 사물뿐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건까지 포함한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수필을 쓴다는 것은 세계라고 하는 텍스트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데에서 출발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해석은 해석으로 끝나지 않는다. 설혹 그런 경우가 있더라도 그 해석된 내용이 구체적 형체를 갖추는 단계, 즉 지배적 정황까지 올라가야 한 편의 글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형상화이다. 그런데 형상화란 추상적 개념을 구체화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구체적 사물이라도 그것을 감각적으로 강화시킬 경우에도 적용되는 개념이다.
II. 클릭
문학적 성취는 첫째 참신한 소재, 둘째 참신한 해석, 셋째 참신한 표현, 즉 형상화에 의해 성패가 갈린다. 이 글에서는 소재 선택을 제외한, 해석과 형상화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며 그것이 수필의 예술성 실현에 어떻게 기여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해석은 우선 참신하고 개성적이어야 한다. 예술적 감동은 바로 그 참신한 발상에서 생성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선배나 동료작가가 해석한 의미와 같은 것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모방이거나 표절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여기서 말하는 개성적인 시각이란 "낯설게 하기"라는 슈클로프스키적 시각을 의미한다고 해도 될 것 같다. 그런데 이 "낯설게 하기"라는 말은 '낯설게 보기'라고 해야 더 정확할 것 같다. 왜냐하면 "낯설게 하기"란 개념 속에는 대상에 대한 '비일상적 시각', '뒤집어 보기', '현미경적 시각'이란 항목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낯설게 보기"가 해석의 영역에 속한다면 "낯설게 하기"는 표현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낯설게 봐야' '낯설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대상의 형체를 보고 묘사한다거나 그 실용성 같은 것을 설명한다면 그것은 스케치나 설명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평범한 대상을 ‘차이성’에 근거하여, 자기만의 시각으로 차유적으로 해석하고 표현할 때 수필도 사실의 세계를 뛰어넘는, 한 차원 높은 예술의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나르시시즘에 돌을 던지는 사람만이 함께 가는 인생길의 진정한 동반자가 될 수 있을 터, 옆구리가 허전하다고 아무나 손을 잡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결혼한 것을 후회하면서 자신의 삶을 누르고 사는 것, 성급하게 한 결혼을 못 견뎌 인연의 끈을 끊는 것, 둘 다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잘 알면서도 쉽게 그 길로 들어서는 사람이 많은 것은 왜일까. 아집의 울타리를 걷어낼 수 없다면 자신만의 울타리 속에서 혼자 사는 게 더 나은 선택이지 싶다. 1+1=3, 비록 수학시험에서는 틀린 답이 되겠지만 결혼의 방정식, 사랑의 방정식에서는 그것이 정답이지 않을까.
- 송명화의 <사랑학개론>에서
작가는 나르시시즘에 돌을 던지는 사람만이 함께 가는 인생길에 진정한 동반자가 될 수 있다고 하면서, 옆구리가 허전하다고 아무나 손을 잡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아집의 울타리를 걷어낼 수 없다면 자신만의 울타리 속에서 혼자 사는 게 더 나은 선택임을 강조하고 있다. 결혼이 능사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이나 간격의 미학을 통해 사랑이 이해나 배려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자는, 차라리 혼자 사는 게 낫다’는 송명화의 관계 초월적, 영적 관계 정립 논리에 공감이 가는 것은 그녀가 세운 방정식이 주관적이면서도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보편성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나 선함도 그 무엇으로 규정되면, 플라톤의 이데아나 유일자라는 ‘1’이라는 숫자의 절대성으로 빠지거나 그 무엇과 그 무엇이 아님이라는 ‘2’라는 숫자의 대립적 관계로 빠지게 된다. 1이라는 절대성은 유아독존의 도그마에서 독선과 독단의 폐해를 보여주었고, 2라는 대립성은 세상을 이원적 구조로만 파악하게 해서 흑이 아니면 백이라는 흑백논리의 모순을 세상에 전파했던 것이다. 작가는 이런 절대적 가치와 대립적 구도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파헤쳐, 관계미학이 절실한 부부 관계에 대입시켜 관계 초월적이란 가치를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 1과 2라는 숫자의 절대성이나 동질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3’이라는 숫자에 대한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늘 글감이 없다고 푸념한다. 그러나 글감은 도처에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읽지 못하기 때문에 글감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대하는 사물도 어떻게 보느냐, 즉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이처럼 글감이 되기도 하고 못 되기도 한다. 직설적인 발화는 우리에게 별다른 감동을 전달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미지로 묘사한 경우, 직설적으로 이야기했을 때보다 더욱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다. 이와 같은 방식의 언술 양상은 이미지가 전달하는 미적 감각을 극대화할 수 있게 한다. 그리하여 이미지는 단순히 장면을 재현하는 차원을 넘어 지배적인 정황dominant impression을 제시하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즉 형상화에 의해 성패가 갈린다. 묘사와 설명은 미적 인식의 측면에서 다른 양상을 보인다. 미적 묘사, 즉 형상화가 지배적인 인상과 정황을 통해 우리의 미적 인식을 자극하는 반면, 설명은 대상의 인상적이지 않은 모습을 개괄함으로써 미적 인식을 형성하지 못한다. 따라서 행동과 모습을 개괄하여 설명하는 것과 대상의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은 미적 인식과 관련하여 확연한 차이를 지닐 수밖에 없다. 다음 글에서도 개성적 해석이 한 편의 글을 어떻게 완성시키는가를 볼 수 있다.
인간 세상은 잡고 잡히는 살벌한 곳이다. 나는 졸지에 떼송장이 되어 걸려있는 너희들의 천편일률적인 표정에서 나의 모습을 보았다. 아니 한결같이 황금을 좇는 개성이 말살된 인간들의 박제된 군상을 보았다. 너희들이 느닷없이 그물에 걸려 과메기가 되었듯이 인간도 어느 순간에 땅 속 과메기가 될지 모르는 어지러운 세상이다. 지금도 현실의 그물에 걸려 찬바람 부는 어느 지하도 구석진 곳에서 얄팍한 박스를 깔고 누워 꾸덕꾸덕한 과메기가 되어가고 있는 인간들이 수두룩한 세상이다. 너희들이 청해가 그립듯이 인간도 돌아가지 못할 어머니의 따뜻한 자궁을 꿈꾸고 있단다.
김인호 <과메기로구나> 중에서
먹고 먹히는 인간 세계 속에서 작가는 존재론적 우위를 내세우지 않는다. 인간도 너희들과 똑 같은 존재들이란 표현 속에서 작가는 우리 시대의 가난한 이웃들의 버려짐을, 또 바람 앞에 촛불 같은 인간 운명의 불확실성을 은밀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수필이 인문학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문학가는 인류를 이끄는 교사여야 함을 보여주는 글이다. 수필가로서의 인간애와 문학가로서의 사회의식이 대단히 빛나는 글이다. 작가의 눈에 비친 인간 세상의 어지러움이 과메기의 주검을 통해 반사되어 우리들 앞에 보여진다. 작가의 의도가 읽혀지는 부분이다. 인간애의 고양이라는 주제의식을 잘 드러낸 점도 좋았다. 한갓 미물의 죽음을 불교적 세계관으로 바라보며 ‘다시 태어나기를 빌어주는 마음의 따스함에서 우리는 비정한 세상 속에 살면서도 희망의 인간적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글을 읽는 보람이자 기쁨이다. 작가는 과메기를 보면서, 어지러운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그 거울에 자신의 못남을 비추며, 거듭남에 대한 희망을 피력하는 것도 감동적이다.
이 작품의 구성적 묘미는 작가가 <과메기로구나>에서 물을 떠나 공중에 매달려 있다가 자신의 위장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과정을 그리면서 생물 본연의 한계와 인간 세상의 이치와 변모 양상을 대비시키고 있다는 데 있다. 그 양상을 생과 사의 상징적 축소판으로 만들어 놓는다. 여기서 작가는 절대 절망을 놓지 않는다. 자기 위장 속에 집어넣었지만 그것들이 새로운 삶의 희망을 가지길 기원한다. 이런 인연으로 자신을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달라고 빌면서 축복된 인연으로 어지러운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고자 한다. 이 작품이 이렇게까지 발전할 줄 독자들은 잘 몰랐을 것이다. 우리는 죽은 것에 거는 새 삶의 기대와 희망 속에서 무한한 사랑의 에너지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쉽게 아무나 가지지 못할 신선하면서도 아름다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저 맛있다고 하며 먹는 일에만 신경 쓸 것인데도 이 작가는 위장 속으로 묻히는 과메기에도 생명의 씨를 뿌려주고 있는 것이다. 고운 마음이다. 정의 문학이라는 특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이제 형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해석이 구체적 사물이나 사건의 의미 읽기라면 형상화는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화시키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구체적 사물을 더 감각적으로 강화하는 것이라고 앞에서 말했다. 하나의 문학작품이 성공하느냐 그러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이 형상화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수필의 예술성을 강조하면서도 구체적 방법론에 부딪히면 뜬구름잡기 식이 되는 것은 바로 이 형상화 과정이 무엇인지, 또 어떤 효과를 가지고 오는지 깊이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해석만 있고 형상화가 없으면 관념적인 글이 되고 말지만 해석과 형상화가 함께 어우러지면 감동이 배가 된다. 잘된 작품은 모두 이 과정을 거치고 있다. 따라서 해석과 형상화는 문학 작품이 갖추어야 하는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이라 하겠다.
그런데 서정수필에서 이 형상화란 주로 비유라는 과정을 통해서 도달하게 된다. 시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비유는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 사물로 치환할 뿐만 아니라 같은 구체적 사물을 감각적으로 강화하기도 한다. 비유가 없다면 오늘날과 같은 문학적 성과는 많은 부분 성취되지 못했을 것이다. 시뿐 아니라 서정수필에서 그것은 절대적이다. 비유는 기적을 낳는다. 예술적 수필의 전범이라 할 수 있는 피천득의 수필에서 우리는 비유를 통해 형상화에 성공한 예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해석은 이와 같은 어떤 구체적 사물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체험적 사건도 그 해석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사물이나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글의 방향과 성패가 결정된다. 좋은 글의 창작 조건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이와 같이 세상을 읽는 독해력에 달려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 오월은 금방 찬물에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있는 비취가락지다 - <오월> 피천득 (2)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 피천득의 <오월>과 <수필> 중에서
위글 (1)에서는 오월이란 개념을 찬물에 세수한 스물한 살 여인의 얼굴과 흰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에 비유함으로써 오월의 청신한 계절감을 감각적으로 구체화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2)에서는 수필이란 추상적 개념을 주택가에 나 있는 길로 비유함으로써 생활 주변에서 소재를 구하는 수필 장르의 특징을 형상화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피천득의 수필은 개념적 지식에 해당하는 내용을 정서적이고, 함축적인 언어로 치환해서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창조적인 문학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감상하는 입장에서는 단순히 비유의 함축성을 해독하는 데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표현이 만들어 내는 수필로서의 미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첫 구절의 수필에 대한 정의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필자가 생각하는 수필이란 강렬하고 뚜렷한 무엇이 아니라 연륜과 여유 속에서 약간의 파격과 개성을 통해 우러나온 삶에 대한 조용한 반성이다. 여기서 수필이 문학으로서 수행하는 예술적 기능을 이해할 수 있다.
산다는 것은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려는 원심력과 그것과 대치되는 구심력의 절묘한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줄다리기의 위험한 연속행위와 갈등 속에서 오랜 시달림과 방황 끝에 마침내 구심력을 향해서 돌아오는 동작구조, 그 회귀행위의 근저에는 스스로 낮추고 한없이 겸허해진 자아가 자리 잡게 된다. 그 겸허한 모습은 자신의 모습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진수이며 삶의 영롱한 에센스가 될 것이다. 이 수필 <쉼표>는 무한한 원심적 탄력 속에서 가까이 존재하는 일상의 그것과는 다른 특별한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삶의 영역이며 우리의 지친 영혼이 안주할 수 있는 터전이 된다. 이 수필을 읽고 나면, 오랜 방황과 거친 열정의 파도를 넘어 우리의 영혼이 가장 낮은 자세로 임하게 되는 지점이 바로 느림의 미학, 김양희의 수필세계임을 알 수 있다.
밥과 잠은 생명의 연장 수단이지만 쉬어가는 뜻의 동의어이기도 하다. 밥솥에서 밥물이 푸르르 끓는다고 해서 금방 밥이 되는 것이 아니라 뜸 들이는 시간이 필요하듯, 잠이라는 징검다리를 건너야 하루가 지나간다. 한 그릇의 밥을 위해서도, 하루라는 시간의 잣대를 건너기에도 뜸은 필요하고 뜸은 바로 쉼의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쉬어가는 자리는 인생의 전체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 김양희의 <쉼표> 중에서
인용 예문에서 볼 수 있듯이, <쉼표>는 쉼표가 새겨지는 삶의 자리에서, 유한한 삶 자체에 대한 고민과 그것을 넘어서려는 몸부림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생활 속의 깨달음을 진리로 연결하는 그녀의 여유에 찬 삶이 주는 감동은 안식의 문학이라는 수필 고유의 특성을 전해준다. 지혜의 보고서라 할 만한 이 수필은 여기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던 생활수필을 한 단계 업그래이드시키고 있다. ‘쉼은 고난의 다른 이름이었다. 승승장구만 한다면 고개 숙이는 일을 모를까 봐 주기적으로 신의 망치가 이마를 툭툭 치고 달아났다. 맞을 때는 그것이 천애 낭떠러지인 줄 알았는데, 돌아서면 또 다른 길이 보이곤 했다.’는 진술은 구체어의 맛을 느끼게 해서 문학 언어가 주는 미적 감동을 안겨줄 뿐만 아니라 깨달음을 통한 양보의 가치를 전달해주기도 한다. 쉬어감의 필요성과 여유의 중요성을 관념적인 언어로 설명하지 않고 구체적 진술로 제시함으로써 수필언어가 도달해야 할 원형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었다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 독자와의 공감대 확보를 위해 작가는 대화의 중간, 문장과 문장 사이, 사랑, 식물에게도 쉼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이런 설득적 논리는 주제의식의 구체화를 돕기 위한 필수적 장치로서 기능한다고 하겠다.
III. 로그아웃
한 작가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형상화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성패가 결정되는 것을 몇 편의 수필을 통해 보았다. 그런데도 아직도 수필을 ‘서정’문학의 계열에 두지 않고 ‘교술’에 둠으로써 수필은 그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지금까지 방황하고 있다. 수필에 있어서 해석과 형상화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의미화 작업이란 남과 차이 나는 언어를 갖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기 위해 남다른 생각, 남다른 사고, 남다른 세계관을 갖게 해주는 게 바로 의미화 작업이라고 하겠다. 다시 말하자면 문학의 성취도는 참신한 소재와 그에 대한 참신한 해석 그리고 그 해석한 내용을 어떻게 참신하게 형상화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유리잔은 (1)차고, (2)딱딱하고, (3)투명하다. 마치 (4)얼음 같다.
이 경우 비록 소재가 참신하지 않더라도 여기에 지배적 정황 표현, 즉 (4)처럼 지배적 인상이 이루어졌다면, 문학적 성취는 보장된 셈이다. 이렇게 하나의 작품은 세계에 대한 개성적 해석과 형상화를 통해 예술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수필의 예술성은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도달 할 수 있는 목표다. 해석에서 형상화까지의 과정은 그 가운데 하나의 통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인상적인 장면은 우리의 미의식을 자극할 수 있는 미적 강렬함과 충격을 의미한다. 이러한 미적 강렬함과 충격을 통해 미의식을 자극하는 인상적인 장면이 바로 지배적인 정황이다. 지배적인 정황이 전제되지 않은 수필은 한낱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다. 아울러 지배적인 정황이 문학의 모든 장르에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필수 항목이라는 점 역시 잊어서는 안 된다. 지배적인 정황이 없거나 부족할 때, 해당 작품은 미적 감각과 감흥이 약화되거나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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