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풍수지리
한숨이 나오는 흥선대원군 묘소
버스가 다시 지루한 걸음을 한다. 마석 사거리에 못 미처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묘소를 가리키는 팻말이 나온다. U턴을 한 버스가 금새 창현리로 들어서서, 몸을 세운다. 묘역을 향해 팻말이 이어진다.
본래 대원군이란 말은, 임금의 아버지 가운데 왕위를 거치지 못한 분을 이르는 칭호이다. 우리 역사에 대원군은 세 분이 있다. 지금 우리가 찾는 흥선대원군 외에도,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과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이 따로 있다.
덕흥대원군은 선조의 아버지로, 선조가 즉위한 뒤에 사후 추존된 인물이다. 전계대원군은 철종의 아버지로, 그 또한 사후에 대원군에 추존된 인물이다. 전계대원군 묘소는 지난번 포천 답사 때 방문을 한 바 있어, 소개가 진작 이루어졌다.
이들에 비해, 살아 생전에 대원군이 되어 정치적 영향력을 강력하게 행사한 인물이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서, 흔히 `대원군`으로 불리는 분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서기 1820∼1898)은 영조의 고손자인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운 그는 1843(헌종 9)년 흥선군에 봉해졌다.
이하응은 왕족이었지만,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아래에서 불우하게 지냈다. 당시 똑똑한 왕족을 죽이기까지 하는 안동 김씨들의 권세로부터 살아남기 위하여, 이하응은 불량배들과 어울리며 거지처럼 구걸 행세까지 하면서 안동 김씨들의 눈길에서 벗어났다.
이하응은 당시 임금이었던 철종에게 아들이 없자, 대왕대비인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趙氏)와 만나 둘째 아들인 명복(命福)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1863년 철종이 죽고 신정왕후 조씨에 의해 명복이 왕위에 올라 고종이 되자, 이하응은 일약 대원군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흥선대원군은 천하의 명당이라는 곳에 남연군의 묘를 써서 당대 발복을 꾀하였다.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린 대원군은 먼저 안동 김씨 세력을 몰아내고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뽑았다. 부패한 관리들을 몰아내었고, 국가 제정을 낭비하고 당쟁의 원인이 되는 많은 서원(書院)을 없애버렸다. 이어 『육전조례(六典條例)』,『대전회통(大典會通)』등을 펴내 법률제도를 확립하여, 나라의 기강을 세웠다. 그리고 관리와 백성들의 사치와 낭비를 철저히 막는 한편, 양반과 상민의 구별 없이 세금을 거둬들였다.
대원군은 왕실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경복궁을 고쳐지었다. 그리고 서양 강대국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철저히 막았다. 쇄국정책을 폈던 것이다.
그리하여 1866년 대동강에서 미국 선박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웠고, 그 해 천주교 탄압을 항의하기 위해 강화도에 들어온 프랑스 함대를 물리쳤다. 병인양요(丙寅洋擾)이다. 1871년에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며 강화도에 침입한 미국 함대를 물리친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났다.
대원군은 1873년 고종을 대신해 대원군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부당하다는 최익현(崔益鉉)의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 이에 성장한 고종이 나라를 직접 돌보았다. 대원군은 이때부터 세력이 커진 며느리 명성황후(明成皇后)와 점차 사이가 나빠졌다. 대원군은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다시 정권을 잡았으나, 명성황후의 요청에 의해 청나라에 붙잡혀 갔다가 3년 뒤인 1885년 귀국하였다. 대원군은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명성황후가 죽자, 잠시 또 정권을 잡았다.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세도로 부패한 정권을 바로잡고 왕실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많은 개혁을 펼쳤다. 하지만 쇄국정책으로 철저히 외국과의 교류를 막아, 서양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흥선대원군은 문인화(文人畵) 중에서 난을 잘 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난은 흔히 `석파난(石坡蘭)`이라고 불리는데, 석파는 대원군의 아호(雅號)이다. 석파난은 가늘고도 여리게 끊어질 듯 이어지는 특징을 지닌다. 그런데도 오히려 다른 화가들이 그린 난들에 비해 난 잎이 더 길다. 아주 힘찬 필력에서 나온 솜씨인데, 그의 일생과 관련하여 결코 꺾이는 일 없는 끈질긴 생명력이 엿보인다. 서구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국운이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가운데, 쇄국으로나마 민족의 자아를 지켜내고자 발버둥쳤던 석파의 내면이 오늘날 검은 먹물 빛 난의 잎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난을 잘 쳤던 분의 묘소라서 일까? 오르는 산기슭에 붓꽃과 타래붓꽃이 지천이다. 붓꽃은 아직 꽃대도 오르지 않았지만, 타래붓꽃은 벌써 보라색 꽃잎이 지는 중이었다. 뒤늦게 피어난 꽃잎은 가느다란 꽃대 위에서 고결한 자태를 하고 이따금 눈에 띈다.
입구에는 `흥원(興園)`이라고 쓴 작은 비가 세워져 있다. 글씨를 쓴 후손의 이름은 지워졌다. 흥원은 덕흥대원군의 능원(陵園)이란 뜻이다. 의미(意美)란 분이 쓴 `국태공원소(國太公園所)`란 비도 있다. 이 또한 대원군의 능원이란 뜻이다.
흥선대원군의 묘는 1898년에 경기도 고양군 공덕리에 처음 조성되었다. 지금의 마포 공덕동 즈음으로, 풍수지리에 관심 많던 그가 손수 잡은 곳이었다고 한다. 어떤 자리였는지 매우 궁금한데, 지금은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조선이 패망한 뒤, 일제는 1906년 파주군 대덕리로 이장하였다가, 1966년 다시 현 위치로 이장하였다. 일제의 손길이니, 이 자리는 분명 길지가 아니라고 미루어진다. 우리는 그들의 흉악한 간계를 홍유능에서 진작 보지 않았던가? 원통하고 절통해서 대원군은 저리도 지천으로 한 맺힌 붓꽃을 솟아 올리고 피우나보다.
묘역 앞에 섰다. 남아있는 난 작품으로만 뵈던 대원군의 묘 앞에 섰다. 잠시 묵념을 올리자니, 감회가 깊다.
곡장 안 봉분의 좌우에는 석양(石羊)이 한 마리씩 섰다. 상석 앞 좌우로는 망주석, 문인석, 석마(石馬)가 주욱 늘어섰다. 마주보는 문인석 가운데에는 장명등이 우뚝하다. 묘역으로 오를 때 본 신도비처럼, 망주석에도 총탄 자국이 동족 상잔의 상흔으로 남았다.
묘역은 역시 자리가 아니다. 과룡처를 깎아 그럴듯하게 꾸민 자리이다. 절손(絶孫)의 흉계 속에 세워진 과룡처 위의 묘역이다. 그래서 물기로 눅눅하고 이끼가 새파랗다. 예상한 바이지만, 한숨이 나온다.
"에이, 흉악하고 더러운 놈들!"
우리를 대표해서 회원 한 분이 내뱉는 탄식이다.
이곳의 용맥은 대원군의 묘소 우전방으로 내려갔다. 바로 아래에는 묵은 묘가 하나 있다. 용맥으로 오솔길이 따라갔다. 힘이 없고 맥이 빠진 용이다. 암울한 표정으로 허탈하게 내려간 용이다. 그래도 자리 하나를 가까스로 만들었다.
영선군(永宣君) 이준은 아쉬운 대로 혈을 차지했다. 영선군은 대원군의 손자이다. 묘역은 대원군의 묘역과 흡사한 구조와 배치이다. 다만 석양 뒤로 석호(石虎)가 두 마리 더 있다. 묘소의 하단으로 내려오자, 아까 보았던 영선군의 신도비가 다시 나타난다.
슬금슬금 땅거미가 내려앉는다. 모두들 우울한 표정으로 버스에 오른다.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는 듯, 정 선생이 한 마디를 한다.
"오늘 길이 막히는 바람에 일정이 늦어졌습니다. 이제 차츰 날도 어두워지니, 오늘의 일정은 여기에서 접어야할 것 같습니다. 본래는 마지막 코스로 능원군의 묘소를 잡아두었는데, 숙제로 남겨야 하겠습니다. 아주 후련하게 생긴 자리라서, 여러분의 마음을 한번 시원하게 해주려고 일부러 마지막으로 잡았는데, 아쉽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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