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프롤로그
서러운 꿈
산호 가지 맹세
해경
육지 멀미
숨의 무게
혼백상자 등에 지고
갯닦기
물숨 찾아가는 길
청국장 냄새
감은장아기들
한 손에 빗창 들고
인간이라는 슬픈 이름
영춘의 졸업장
산호 가지 하나
해화
바다는 얼지 않는다
다시 바다
영등의 일기
『푸른 숨』 창작 노트
참고 자료
책 속으로
“우리, 이걸로 우정 맹세하게.”
연화는 아기 손바닥만 한 산호 가지를 셋으로 잘라 하나씩 나눠준 뒤 말했다.
“고연화, 김영등, 양춘자, 세 동무는 우정을 맹세합니다. 이 산호 가지가 하나인 거마냥 저희도 평생 함께할 거우다.”
씻어놓은 팥알 같은 얼굴들엔 장난기가 사라지고 제법 진지한 빛이 어리었다. 세 동무의 머리 위엔 똑같이 소라 똥 모양 머리 뭉치가 얹혀 있었다. 물에 들 때 거치적거리지 않게 머리를 위로 묶어 틀어 맨 것이었다. 소라똥머리는 얼른 자라 물질을 하고 싶어 하는 여자아이들의 소망이었다.
“니들 이거 죽을 때까지 간직해야 되멘.”
영등과 춘자는 연화 말에 사뭇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pp.23~24
“반갑다. 난 강오규라고 한다. 공부 배우고 싶지 않니? 저녁때 강습소에 나와서 공부하라.”
영등은 동생들 뒷바라지를 위해 공부에 대한 열망을 오래전 누름돌로 눌러버렸다. 그런데도 공부라는 말에 가슴이 뛰었다.
“세상이 바뀌어서 이젠 여자도 배워야 한다. 그래야 캄캄한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주.”
“당장 먹고 사는 게 캄캄하우다. 저녁엔 망건 짜야 해서 공부 배울 짬이 없수다.”
영등은 차갑게 쏘아붙였다. 공부가 싫어서가 아니라 여건이 안 돼서 못 하는 거란 걸 똑똑히 밝히고 싶었다. 남루한 옷에 땀범벅인 자신에 반해 뽀얀 얼굴에 말쑥한 차림새인 상대에 대한 반감도 없지 않았다. 일종의 자기방어 같은 것이었다. 얼마 전부터 춘자 어멍에게 망건 짜는 걸 배우느라 짬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밤에 말총을 엮어 망건을 짜는 건 해녀들의 부업이었다. 섬엔 말이 많아 말총 구하기가 쉬웠다.
“혼자 동생들 돌본단 얘기 연화한테 들었어. 당장 한 치 앞의 어둠을 몰아내는 것도 중하지만, 그보다 중한 건 먼 데 있는 어둠을 물리치는 거주.”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는 목소리였다. 야학 선생은 누이동생을 보듯 안타까움이 담긴 눈빛으로 영등을 바라보았다.
--- pp.33~35
영등은 순덕의 죽음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순덕이 금방이라도 덧니를 드러내고 수줍게 웃으며 배 위로 오를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해서라도 하루 더 쉬라고 잡았어야 했다. 영등은 순덕을 잡지 못한 자신의 손등을 찍고 싶었다. 오늘 하루만 더 누워 있었더라면, 순덕이 배를 기다리는 동안 물에 들지만 않았더라면, 북쪽 대진항으로 가는 걸 하루 당겨 오늘 떠났더라면, 차라리 육지 물질을 떠나오지 않았더라면……. 순덕이 죽지 않는 길은 무수히도 많았다. 그러나 순덕은 끝내 죽음을 비끼지 못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처량 맞은 노랫소리가 들렸다.
이여싸나 이여싸나
우리 부모 날 날 적에
해도 달도 없을 적에
나를 낳아 놓았는가
......
해녀 팔잔 무슨 팔자라
혼백 상자 등에 지고
푸른 물속을 왔다 갔다
옥순이 삼촌이 망연히 앉아 실성한 사람처럼 노래를 불렀다. 삼촌의 처연한 노래는 꾹꾹 눌러 참고 있던 사람들의 속울음을 기어이 밖으로 끌어냈다. 춘자는 순덕의 이름을 부르면서 엉엉 목놓아 울었다.
--- pp.66~67
“영등아, 이제 다른 누가 아니라 너 자신이 네 삶의 기둥이 돼야 한다. 이 세상 누구도 삶을 대신해줄 순 없어. 네 나이 열여섯이니 이제 홀로 설 때도 됐주. 알을 깨지 않으면 절대로 새가 되어 날 수 없어. 알을 깨는 일은 두려운 일이고, 고통이주. 두려움이 없으면 성장도 없는 법, 성장 없는 삶이란 죽음과도 같다. 지금 당장은 힘들겠지만, 넌 강하니까 반드시 이겨낼 수 있어.”
선생님 말은 영등에게 마치 주문처럼 들렸다. 그중에 죽음이란 말이 유독 가슴에 박혔다. 죽음, 그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면 당연히 동생들을 지켜낼 수도 없을 것이었다. 동생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영등은 어떻게든 알을 깨고 나와야 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알을 깨고 나갈 수 있을까? 맥이 빠져 허깨비 같던 몸에 퍼뜩 기운이 돌았다. 영등은 그제야 숨이 제대로 쉬어지는 느낌이었다.
--- p.107
해녀들은 그렇다고 자신들의 신세가 처량해 울지는 않았다. 불턱에서 가끔 신세타령할 때도 있지만, 구질구질 길게 끄는 법이 없었다. 눈물방울이 턱 밑으로 채 떨어지기도 전에 불턱은 다시 웃음바다가 되곤 했다.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삼촌들의 관록 덕분이었다. 바다에서 청승은 자칫 독이 될 수 있었다. 지나친 자기연민으로 냉철함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간혹 어린 해녀들이 오래 질질 짰다가는 삼촌들의 호통이 떨어졌다. 삼촌들은 바로 비죽거리는 어린 해녀들의 입에 구운 미역귀나 소라를 넣어주었고, 들썩이는 어깨 위로 두툼한 손을 얹어주었다.
정작 서러운 건 찬 바다가 아니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는 때로 해녀들을 위협했지만 배신하거나 농락한 적은 없었다. 바다는 끊임없이 생명을 품었다가 아낌없이 내어주었다. 그들을 서럽게 하는 건, 해녀들의 방패막이가 돼주어야 하는데도 오히려 수탈을 일삼는 해녀조합이었다.
--- p.139
영등은 선생님과 함께 유학길에 오르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둘이서 나란히 배의 갑판 위에 서서 멀어지는 섬을 보고, 어깨를 맞대고 기차에 앉아 있고, 함께 밥을 먹고……. 영등은 황망히 고개를 돌렸다. 마음속 영상이 얼굴에 그려져 있을 것만 같아서였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마음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당장 답하기 어려울 테니 천천히 생각해보라. 사흘 뒤에 다시 올 때까지.”
영등은 어릴 때부터 자신의 욕망을 누른 채 살아왔다. 그게 체화되어버린 걸까. 일본 유학, 그건 애당초 자신이 누릴 수 있는 호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지켜야 할 동생들도 떠나고 없지 않은가. 선생님 말대로 이제 영등 자신의 삶을 살아도 되었다.
영등은 바다를 떠난 삶, 테왁과 망사리를 버린 삶을 그려보았다. 답이 명확해졌다.
“저도 이제 제 삶을 살 거우다.”
선생님의 얼굴이 밝아지면서 눈이 빛났다.
“저는 바다를 떠나 살 수 없어마씀. 바다에서 물질하는 게 제 기쁨이고 보람이우다. 바다 없인 살 수 없어마씀.”
영등은 정말이지 바다를 떠난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영등의 허파는 물고기의 그것과 같은 걸까. 이제 뭍에서보다 바다에 들어 숨을 쉬는 게 더 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 p.199
출판사 리뷰
삶이라는 바다에서 숨을 참아야 했던
일제강점기 한 어린 해녀의 숨비소리!
“나를 지키는 힘과 용기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천 번의 물질은 천 번의 두려움이었다.
다만 그것을 견뎌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을 뿐이었다.”
상군 해녀였던 할머니가 물숨을 먹고 돌아가시면서 어린 나이에 동생들을 책임져야 했던 ‘영등’은 살기 위해 바다에서 숨을 참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고된 삶에도 영등의 옆에는 춘자와 연화, 옥순이 삼촌, 순덕이, 빌레 삼촌...... 서로의 아픔을 아는 친구, 삼촌들이 있었다. 해녀조합이 해녀들의 ‘숨값’을 빼앗으며 수탈하는 데 함께 목소리를 높이고, 물숨을 먹을 뻔한 바다에 들어가 두려움을 이기고 숨을 찾아오며 영등은 삶과 맞서 나아간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힘과 용기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오롯이 지켜내고 싶은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누구에게는 그것이 신념일 수도, 가족일 수도, 나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궁극으로 파고들면 결국 하나로 귀결되지 않을까? 나 자신의 존엄. -창작 노트에서
숨을 참으며 물질하는 해녀들은 모두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그것이 가족이든, 삶이든, 자기 자신이든 지켜야 하는 것이 있기에 파도를 맞닥뜨려도 피하지 않았다. 신세타령을 할지라도 ‘눈물방울이 턱 밑으로 채 떨어지기도 전에 불턱은 다시 웃음바다’가 되었다. 살면서 우리는 여러 번의 파도를 마주치게 된다. 『푸른 숨』은 그런 순간에 마주한 청소년 독자들이 문제를 회피하고 도망치는 대신, 주변의 친구들과 연대하고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마음속 불씨를 심어줄 소설이다.
창작 노트
(...) 소설을 쓰는 내내 질문 하나가 내 안에 있었다. 그것은 바로 톨스토이의 소설 제목이기도 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이다. 영등의 삶을 그리면서 그 질문이 수시로 고개를 들었다. 이 소설을 쓰는 작업은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꿋꿋이 이겨내는 힘, 쓰러졌다가도 다시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힘과 용기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오롯이 지켜내고 싶은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누구에게는 그것이 신념일 수도, 가족일 수도, 나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궁극으로 파고들면 결국 하나로 귀결되지 않을까? 나 자신의 존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