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의 대화]
지난 일요일에, 딸과 사위가 저의 생일밥 챙겨준다고 왔을 때, 점심으로 같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주된 이야기는, "별로 오래살고 싶지 않다", "사는 재미가 없다"는 저의 푸념 섞인 이야기~
아직 창창한데 왜 일찍 죽을 생각을 하냐며 딸이 투덜대길래,
"내가 죽는 거에 넌 별로 관심도 없잖아?" 라며, 다소 시크하면서 시큰둥하게 한 마디 던지듯 했더니,
딸이 하는 말이,
"그래도 아빠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다르잖아~" 라며 반박을 하더라는~^^;;
뒤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과연 명언이더라는~ㅋ
kjm / 2024.9.13
[죽음이란 형식이다] ㅡ kjm / 2022.9.13
요즘 깨달은 겁니다.
생로병사 희로애락으로 이루어지는 삶은 구체적 현실의 내용이고, 오직 죽음만이 형식이라는~
시간과 공간은 모두, 생각(직관)의 형식이지만,
상대적으로 시간은, 구체적 삶으로 연결된다.
우리의 삶은 연속이나, 생각은 불연속이다.
즉, '시간의 연속'과 '삶의 연속'이 함께 한다.
공간의 형식은, 불연속의 범주적 형태로 발전한다.
ㆍ공간은 감성(sensibility 느낌)의 영역
ㆍ범주는 오성(understanding 이해)의 영역
가령, '시대구분'을 보면, 우리는 고대 중세 근대 현대라는 불연속의 구분을 하지만, 실제로는 고대 중세 근대 현대가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편의상 각각 특징들과 의미를 부여해서 머리로 구분할 뿐이다. 즉, 우리는 현대란 범주 안에서 다른 고대란 범주를 이해한다는 거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아프고, 거기서 느끼는 희로애락애오(구)욕이 모두 삶을 채우는 것들이고, 그것을 깔끔하게 담아 정리해주고, 또 비워주는 게 죽음이다.
죽음은 '원래의 무'로 돌아가는 것.
고되고 지난했던 혹은 지루했던 삶을 정리하고 마무리해주는 형식이다.
아프다는 건 살아있다는 것이다.
죽음 안에서는 고통도 기쁨도 없다.
죽음이란 관념의 형식인 것. 삶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관념의 도구일 뿐이다.
산다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일 때, 죽음을 떠올린다는 것이다. 고통이 없어질 거란 막연하고 막막한 생각이겠다.
신도 죽음과 마찬가지로, 삶을 조율하고 정리해주는 형식적 관념이며, 때론 죄업을 씻기워주는 정신적 도구가 된다.
물을 마시는 것이지, 그릇은 마실 수 없지 않은가.
신에게 실체로서 내용을 부여하면 오류가 발생한다.
그 실체를 붙잡으려 하면 결코 잡히지 않는,
죽음, 그리고 따로이는 신.
울퉁불퉁한 삶을, 단순하면서 깨끗하게 정리하도록,
정갈나게 맛나도록, 모양있고 맵시있게 담아내는, 그릇이라는 것이다. 마치 예쁜 접시에 잡채를 담아서 내놓는 듯이.
길가던 황혼의 노인들께 물어보자. 전에 어찌어찌 살았었는 지를~
과연 초라하고 찌질하게 살았었노라 말할 이 있을까?
울퉁불퉁 삐뚤삐뚤 엉겁결에 살아온 길을
늦게라도 평평하게 펴주고 싶은 심정일테니~
만일 죽음이란 게 없다면? 만일 신이 없다면?
신은, 생명의 시와 종에 대한 설명으로,
죽음은, 삶의 소멸을 자연적 설명으로,
가히, "있어" 족하지 않겠는가~
삶은, 시종내내 모호함 투성이다.
죽음은, 모든 모호함들의 소멸을 가리키며,
신은, 모호함의 인과를 풀어 설명해준다.
삶 속에서 영원함을 꿈꾼다면, 모호의 늪에 빠진다.
죽음은 선택이 아니다.
선택과 결정은 살아있을 때 하는 것이다.
죽음은, 구체성을 띈 실체가 아닌, 초월적 관념의 형식으로,
형식(죽음)으로서 내용(삶)을 대신할 수는 없다.
죽이지도 말고, 스스로 죽지도 말라~
살아서는 그럴 자격이 아무에게도 없다.
그대를 알아봐주는 건, 오직 그대의 삶이다.
죽음을 보여주는 건, 세상이란 그릇이다.
세상이란 그릇을, 억지로 조작해서 만들려 하지도 말고, 깨려고도 말라~
뒷날 그릇에 담지도 못할 만큼, 굳이 아귀다툼하면서 아둥바둥하며 살 필요가 있을까?
K